한 그릇의 밥으로 허기를 달래듯 좋은 글 한 두 문장이 하루를 배부르게 할 수도 있다. 더 이상 책을 읽지 않아도, 더 이상 일을 하지 않아도, 하루를 꽉 차게 하는 글이 있다.

 

화살에 맞으면 아픔을 느끼되 그 아픔을 과장하지 말라고 붓다는 충고했다. 병이 난 제자를 찾아가서도 아파하되 그 아픔에 깨어 있으라고 가르쳤다. 상처에 너무 상처 받지 말 것, 실망에 너무 실망하지 말 것, 아픔에 너무 아파하지 말 것-이것이 두 번째 화살을 피하는 방법이다. 잠시 아플 뿐이고, 잠시 화가 날 뿐이고, 잠시 슬플 뿐이면 되는 것이다. 그 순간이 지나면 우리는 다시 맑고 투명해진다.     -137쪽

* 첫 번째 화살을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고, 두 번째 화살은 그 사건에 대한 감정적 반응이다.(134~135쪽)

 

그대가 무엇을 행하든 사랑의 마음으로 하라. 미움의 마음으로 하면 아무리 좋은 의도를 갖고 있다 해도 부정적인 결과만 얻을 뿐이다.  - 188쪽

 

나무에 앉은 새는 가지가 부러질까 두려워하지 않는다. 새는 나무가 아니라 자신의 날개를 믿기 때문이다.    -204쪽

 

 

다음 글. <장소는 쉽게 속살을 보여 주지 않는다>(104쪽~) 류시화가 왜 류시화인가, 를 알게 해주는 글, 내게는 그랬다.

 

월든 호수에 처음 갔을 때 그곳의 평범함과 일상성에 실망했다.(중략) 무엇보다 내 기대를 무너뜨린 곳은 인도였다. (중략) 초기의 나의 여행은 이런 실망감의 연속이었다. 현실은 내가 상상했던 것과 너무나 거리가 멀었다. (중략) 그때는 몰랐던 것이다. 장소는 자신의 속살을 쉽게 보여 주지 않는다는 것을. (중략) 우리가 장소에 대해 실망하는 것은 아직 그 장소가 가진 혼에 다가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가슴을 그곳에 갖다 대지 않은 것이다. (중략)

 

그 후 나는 월든 호수를 열 번 가까이 갔다. (중략)

라다크는 여섯 번을 갔다. (중략)

갠지스 강이 흐르는 바라나시는 25년째 해마다 가고 있다. 내 눈이 깊지 않아선지 이제야 조금씩 보인다. 장소들과 그곳에 사는 아름다운 사람들이 평범한 일상에 가려진 웃음과 슬픔의 물감 축제들이. 이제는 바라나시만을 무대로 여행기 한 권을 쓸 수도 있게 되었다.(중략)

 

세상에는 시간을 쏟아 사랑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들이 많다. 가고, 또 가고, 또다시 가라. 그러면 장소가 비로소 속살을 보여 줄 것이다. 짐은 최소한으로 줄이고, 일정은 계획한 것보다 더 오래 잡으라.(중략) 사랑하면 비로소 다가오는 것들이 있다.

 

 

쉽게 읽히는 글일수록 쉽게 쓰여진 것은 아닐 것이다. 류시화를 가볍게 보아서는 안 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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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7-06-11 15: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류시화 저도 가볍게 안본답니다 ^^
고3때 학력고사 점수 발표하고 방에서 나오지도 않고 있을때 선물받은 책 한권이 류시화의 책이었고 다른 책은 월탄 박종화의 삼국지였어요. 6권이었는지 더 됐는지 지금은 기억도 안나는데, 류시화의 책은 몇번을 반복해서 읽었는데 삼국지는 끝내 다 못읽었어요 ㅠㅠ

nama 2017-06-11 17:50   좋아요 0 | URL
방에서 나오지도 않고....그런 시절이 있지요, 누구나.
바라나시를 해마다 가는 분을 존경하지 않을 수가 없어요. 존경 그 자체! 그러면서 이제야 조금씩 보인다니...겸손이 대단한 분이지요.
 

 

 

 

 

 

 

 

 

 

 

 

 

 

 

그간 수많은 여행기를 읽어봤지만 이런 생고생담은 흔하지 않다. 고행 중의 고행이다. 벼르고 벼른 여행이어선지 준비 과정도 만만치 않았음을 책 곳곳에서 느낄 수 있었다. 아이슬란드에 관한 책, 영화 등 아이슬란드에 대한 열망을 오랫동안 품어왔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그런 간절함으로 떠난 아이슬란드 여행은 저자의 인생이 오롯이 담긴 눈물겨운 여행이기도 했다. 말 그대로 구구절절, 책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팔랑팔랑 쉽게 읽을 수가 없었다. 한 글자도 설렁설렁 읽지 않고 꼼꼼하게 읽다보니 읽는데도 시간이 꽤 걸렸다. 쉽게, 가볍게 읽어서는 안될 것 같았다. 경외감을 갖고 읽었다고나 할까. 부디 다음 여행기도 읽을 수 있게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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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7-06-07 07: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분 팟캐스트를 가끔 들어요.
지리산 이분 사시는 곳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불쑥 들곤 하지요.


nama 2017-06-07 08:01   좋아요 0 | URL
아, 그렇군요. 책 내용으로봐서는 이쁜 꽃밭을 가꾸며 소박하게 사시는 듯해요. 궁금하지요?
 

 

 

 

 

 

 

 

 

 

 

 

 

 

 

참회록 같은 부분이 심금을 울린다.

 

일이라는 게 뭘까? 늘 내가 일에 미쳐 사는 바람에 모든 이들이 떠났다. 유일하게 곁에 남아 있는 사람은 어머니 한 분이다. 나는 평생 사랑한다는 말을 할 줄 몰랐지만 요즘 어머니에게는 자주 한다. 덕분에 어머니는 자신감을 회복했다. 이제 동생이다.

나는 왜 그동안 외로움을 자처했던 것일까? 일이란 뭘까? 살아남아야 한다는 강박감? 평생 동안 책을 끼고 살았지만 책이 가르쳐 주는 교훈을 실천하지 못했다. 결국 내 삶이 허망했다. 지금도 늦지 않았는지 모른다. 내가 하는 일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모두 저마다의 삶이 가장 소중하다. 그 소중한 삶에 나는 전화 한 통 걸어 주는 아량이 없었다. 그러니 내가 외로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런 깨달음이 조금만 빨랐다면 어땠을까? 

 

주기적으로 병원에 드나드는, 마음에 병이 있는 동생 이야기도 가슴이 찡하지만....손가락이 아파 못 옮기니 그 부분은 직접 읽어보시라.

 

인생의 마무리는 정말 중요하다. 앞으로 내가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은 무엇인가를 열심히 이뤄 내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세상과 잘 이별하기 위한 준비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정말 그렇게 살고 싶다. 어느 순간 내가 사라지면 세상 사람 모두가 행복해지도록 만들어 놓고 조용히 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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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22 21: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5-23 08: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여행자의 미술관 - 길 위에서 만난 여행 같은 그림들
박준 지음 / 어바웃어북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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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에 미치지 않고서는, 그림에 미치지 않고서는 이런 책을 쓸 수 없다. 이 책은 단 며칠 동안 어떤 곳을 다녀와서 쓴 여행기와도 다르고, 그림만을 위해서 쓴 어떤 미술에세이와도 다른다. 다르게 보면 이 책은 여행기도 아니고 미술에세이가 아닐 수도 있다. 그런데 내게는 여행기면서 미술에세이로 읽힌다. 여행과 미술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다니...감탄하며 읽어나갔다.

 

 

... 4월의 이른 아침, 따사한 아침 햇살이 가로수의 그림자를 어설프고 흉한 그라피티에 드리우자 그조차 예뻐 보인다. 베를린이 다 감싸 안기에 예뻐 보인다. 자유의 공기, 날 것의 냄새가 풀풀 풍기는 자유, 그게 그라피티다.                  -295쪽

 

그라피티에서 자유의 냄새를 맡는다? 4월을 일터가 아닌 여행지에서 보낼 수 있는, 웬만큼 자유로움을 확보하지 않고서는 누릴 수 없는 냄새이다. 어쩌다 떠난 여행으로는 건질 수 없는 자유의 공기이다. 여행자가 아닌 여행가의 내공 같은 게 묻어나는 이런 글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인간은 시간을 만진다. 여행의 기억도 그렇다. 나는 적극적으로 추억을 만들기도 한다. 거짓 추억이 아니다. 어느 장소를 추억으로 간직하기 위해선 때로 무척 애를 써야 한다.

 

여행이 끝나 무사히 집으로 돌아오면 행복할까? 여행을 떠나기 전보다는 더 많은 것을 느끼고 알게 되었지만 그래서 행복해졌을까? 여행지의 행복을 연장한 게 추억이라면 그 추억을 위해선 '무척 애를 써야 한다'는 말로 읽힌다. 늘 여행을 떠나도 늘 여행을 그리워하는 여행자의 슬픔 같은 게 묻어 있다. 물론 내 생각이다.

 

화가들의 흥미로운 사생활도 재미있다. 오토 딕스라는 화가는 뒤셀도르프를 여행하다 한스 코흐 부부를 만나 한스 코흐의 아내 마르타의 초상화를 그린다.

 

딕스가 이 그림을 그린 건 1921년이다. 딕스와 한스 코흐 부부, 세 사람의 인연은 기묘한 운명처럼 흘러갔다. 1922년 딕스는 서른 살에 결혼하는데 신부는 다름 아닌 마르타였다. 한스 코흐와의 사이에 이미 두 아이를 가진 마르타는 그해 딕스의 딸을 낳았다.

  "딕스를 처음 만났을 때 한눈에 반했어요."

마르타는 이렇게 말했다. 아내의 선택만큼이나 마르타와 이혼한 한스 코흐의 선택도 파격적이다. 그 역시 곧 재혼했는데 상대는 바로 마르타의 친동생이다. 파격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한스 코흐는 이혼 후에도 마르타와 우정을 유지했으며, 아내를 빼앗아간 남자, 딕스를 변함없이 후원했다. 마르타는 그 후 딕스가 세상을 떠날 때가지 곁을 지켰다. 딕스를 먼저 보내고 마르타는 22년을 혼자 살았다.    

 

낯선 화가를 알게 된 기쁨도 있다.

 

<세 소녀>를 그린 암리따 쉐르길(Amrita Sher-Gil)은 20세기 인도에서 가장 뛰어난 화가이자 그림값이 가장 비싼 화가다. 그녀는 인도의 '프리다 칼로'라고도 불린다. 부유한 귀족 출신의 아버지와 헝가리 출신 유대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12억 인구를 가진 인도에서 예술가로서 최고의 경지에 올랐지만, 인생은 오묘하다. 1913년에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난 그녀는 1935년에 <세 소녀>를 그리고, 1941년 스물여덟 나이에 파키스탄 라호르에서 첫 번째 개인전을 하루 앞두고 갑자기 쓰러져 허망하게 세상을 떠났다.

 

한 권의 책으로 여행을 떠난 기분도 느끼고, 더불어 그림 감상까지 하게 되니 책값이 전혀 아깝지 않을 터. 내 비록 이 책을 도서관에서 빌리긴 했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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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길. 동네 중학생들이 하나 둘 캐리어를 끌고 학교로 향하는 아침. 알록달록 사복 차림에 달그락달그락 캐리어 바퀴 소리, 수학여행을 떠나는구나. 15층쯤 되는 창문을 열고 젊은 엄마가 큰 목소리로 외친다.

 

"**야, 사랑해."

 

아침 풍경에 가슴이 울컥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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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viana 2017-05-18 14: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날 이후 가끔 방에서 자고 있던 아이에게 가서 얼굴 한번 만져보고 나오곤 했어요.
저도 울컥하네요. ㅠㅠ

nama 2017-05-18 16:24   좋아요 1 | URL
사람들 가슴마다 절대로 뽑힐 수 없는 못 하나씩 박혀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