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자의 미술관 - 길 위에서 만난 여행 같은 그림들
박준 지음 / 어바웃어북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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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에 미치지 않고서는, 그림에 미치지 않고서는 이런 책을 쓸 수 없다. 이 책은 단 며칠 동안 어떤 곳을 다녀와서 쓴 여행기와도 다르고, 그림만을 위해서 쓴 어떤 미술에세이와도 다른다. 다르게 보면 이 책은 여행기도 아니고 미술에세이가 아닐 수도 있다. 그런데 내게는 여행기면서 미술에세이로 읽힌다. 여행과 미술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다니...감탄하며 읽어나갔다.

 

 

... 4월의 이른 아침, 따사한 아침 햇살이 가로수의 그림자를 어설프고 흉한 그라피티에 드리우자 그조차 예뻐 보인다. 베를린이 다 감싸 안기에 예뻐 보인다. 자유의 공기, 날 것의 냄새가 풀풀 풍기는 자유, 그게 그라피티다.                  -295쪽

 

그라피티에서 자유의 냄새를 맡는다? 4월을 일터가 아닌 여행지에서 보낼 수 있는, 웬만큼 자유로움을 확보하지 않고서는 누릴 수 없는 냄새이다. 어쩌다 떠난 여행으로는 건질 수 없는 자유의 공기이다. 여행자가 아닌 여행가의 내공 같은 게 묻어나는 이런 글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인간은 시간을 만진다. 여행의 기억도 그렇다. 나는 적극적으로 추억을 만들기도 한다. 거짓 추억이 아니다. 어느 장소를 추억으로 간직하기 위해선 때로 무척 애를 써야 한다.

 

여행이 끝나 무사히 집으로 돌아오면 행복할까? 여행을 떠나기 전보다는 더 많은 것을 느끼고 알게 되었지만 그래서 행복해졌을까? 여행지의 행복을 연장한 게 추억이라면 그 추억을 위해선 '무척 애를 써야 한다'는 말로 읽힌다. 늘 여행을 떠나도 늘 여행을 그리워하는 여행자의 슬픔 같은 게 묻어 있다. 물론 내 생각이다.

 

화가들의 흥미로운 사생활도 재미있다. 오토 딕스라는 화가는 뒤셀도르프를 여행하다 한스 코흐 부부를 만나 한스 코흐의 아내 마르타의 초상화를 그린다.

 

딕스가 이 그림을 그린 건 1921년이다. 딕스와 한스 코흐 부부, 세 사람의 인연은 기묘한 운명처럼 흘러갔다. 1922년 딕스는 서른 살에 결혼하는데 신부는 다름 아닌 마르타였다. 한스 코흐와의 사이에 이미 두 아이를 가진 마르타는 그해 딕스의 딸을 낳았다.

  "딕스를 처음 만났을 때 한눈에 반했어요."

마르타는 이렇게 말했다. 아내의 선택만큼이나 마르타와 이혼한 한스 코흐의 선택도 파격적이다. 그 역시 곧 재혼했는데 상대는 바로 마르타의 친동생이다. 파격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한스 코흐는 이혼 후에도 마르타와 우정을 유지했으며, 아내를 빼앗아간 남자, 딕스를 변함없이 후원했다. 마르타는 그 후 딕스가 세상을 떠날 때가지 곁을 지켰다. 딕스를 먼저 보내고 마르타는 22년을 혼자 살았다.    

 

낯선 화가를 알게 된 기쁨도 있다.

 

<세 소녀>를 그린 암리따 쉐르길(Amrita Sher-Gil)은 20세기 인도에서 가장 뛰어난 화가이자 그림값이 가장 비싼 화가다. 그녀는 인도의 '프리다 칼로'라고도 불린다. 부유한 귀족 출신의 아버지와 헝가리 출신 유대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12억 인구를 가진 인도에서 예술가로서 최고의 경지에 올랐지만, 인생은 오묘하다. 1913년에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난 그녀는 1935년에 <세 소녀>를 그리고, 1941년 스물여덟 나이에 파키스탄 라호르에서 첫 번째 개인전을 하루 앞두고 갑자기 쓰러져 허망하게 세상을 떠났다.

 

한 권의 책으로 여행을 떠난 기분도 느끼고, 더불어 그림 감상까지 하게 되니 책값이 전혀 아깝지 않을 터. 내 비록 이 책을 도서관에서 빌리긴 했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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