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는 친구들과 하늘공원에 가려고 했으나 기형도추모행사가 있다기에 갑자기 장소를 바꾸었다. 하늘공원이야 마음만 먹으면 갈 수 있지만 추모행사는 일 년에 한번 뿐이므로 마음 먹는다고 쉽게 갈 수 있는 게 아니다.

 

정말 그랬다. 광명역 근처에 있는 기형도문학관은 쉽게 갈 수 있는 곳이 절대 아니다. 인천과 경기도 경계에 있는 우리집에서 승용차로 간다면 20~30분이면 후딱 갈 수 있는 가까운 곳이지만 대중교통을 이용하자면 지그재그로 무한정 가야 한다. 교통이 고도로 발달한 대명천지에 이 무슨 70년대식 유목 이동을 해야 하는지...

 

3시간 넘게 이어진 행사에 몇 명의 시인의 얼굴을 직접 볼 수 있었다. 나희덕, 황인숙, 박 준, 유희경 그리고 평론가 유성호. 유희경이 사회를 본 평론가 유성호와 나희덕 시인의 대담이 있었고, 이어 시낭독이 있었으나 한 편씩 하는 시낭송은 좀 감질만 났다고나 할까.

 

대담이 끝날 무렵 어떤 청중이 시를 잘 쓰는 방법을 물었다. "시를 읽고 감동하면 독자가 되는 거고, 시를 읽고 질투를 하면 시인이 된다."는 평론가 유성호의 대답에 순간 청중들 입에서 '아' 하는 공감인지 감동인지 모를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기형도가 교과서에 실리지 않아서 자퇴하겠다."는 어느 고등학생 얘기도 재미있었다. 지금은 교과서에 실렸다나.

 

1989년 7월10일 3쇄 발행. 이 때 나온 시집을 읽었던 나는 그 시절이 오히려 낯설다. 그러니까 벌서 29년 전 일이 되어버렸다. 그래도 애써 한편 읽어본다.

 

                    

 

 

내 얼굴이 한 폭 낯선 풍경화로 보이기

시작한 이후, 나는 主語을 잃고 헤매이는

가지 잘린 늙은 나무가 되었다.

 

가끔씩 숨이 턱턱 막히는 어둠에 체해

반 토막 영혼을 뒤틀어 눈을 뜨면

잔인하게 죽어간 붉은 세월이 곱게 접혀 있는

단단한 몸통 위에,

사람아, 사람아 단풍든다.

아아, 노랗게 단풍든다. 

 

29세에 죽은 기형도는 이미 그 나이에 노인이 되어 있었다. 무슨 총량의 법칙대로라면 그는 이미 그 나이에 살만큼 다 산 것이라고 하겠다.

 

         노인들

 

감당하기 벅찬 나날들은 이미 다 지나갔다

그 긴 겨울을 견뎌낸 나뭇가지들은

봄빛이 닿는 곳마다 기다렸다는 듯 목을 분지르며 떨어진다

 

그럴 때마다 내 나이와는 거리가 먼 슬픔들을 나는 느낀다

그리고 그 슬픔들은 내 몫이 아니어서 고통스럽다

 

그러나 부러지지 않고 죽어 있는 날렵한 가지들은 추악하다

 

'내 나이와는 거리가 먼 슬픔'을 느꼈다고 하지만 이미 그는 그 나이에 이르렀던 건 아닐까. 그만 부러져버리고 죽었으니까. 부러진 날렵한 가지였던 그는 절대로 추악하지 않았고 그래서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가 보다.

 

나는 부러질까봐 전전긍긍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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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8-03-12 1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9세에 죽은 시인이 이미 <노인들>이라는 시를 남겼군요.
시를 읽고 질투하기 보다 저는 시를 읽고 감동하는 편이 더 행복하네요 ^^

nama 2018-03-12 18:35   좋아요 0 | URL
감동하는 편이 더 행복하지만 종종 질투가 나기도 하지요. 어쩌려고...

비로그인 2018-03-13 0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형도의 29주기가 이즈음이었나요. 마침 오늘 저는 뜬금없이 기형도의 ‘질투는 나의 힘’을 떠올렸지요. 기형도의 시 중 제가 가장 좋아하는 시입니다.
유성호 평론가의 말, 매우 수긍하게 되네요- 저는 독자입니다ㅎㅎ

nama 2018-03-13 07:22   좋아요 0 | URL
29살에 죽고 죽은 지 29년 되었어요. 나희덕 시인은 요절하지 못한 불운을 아쉬워하는데 그래도 독자가 더 행복한 듯 싶지요.
 

 

하늘과 햇빛.

간절히 보고 싶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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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숨어 있는 보석을 찾아서 타산지석 10
전원경 지음 / 리수 / 2008년 6월
평점 :
품절


런던에 관한 책을 찾아보고 여러 책을 내리 읽고 있는데 이 책은 정보면에서나 이야기면에서나 꽤 읽을 만하다. 나는 요즘 이상한 버릇이 들어서 책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여러 변명을 둘러대며 책을 완독하지 못하고 던져버리곤 하는데 이 책은 끝까지 읽었다. 그것도 재미있게.

 

런던의 숨은 보석같은 곳으로 저자가 뽑은 장소: 햄스테드 히스, 켄싱턴 궁, 월러스 컬렉션, 셰익스피어 글로브극장, 디자인 미술관, 세인트 마틴 인 더 필즈 교회...

 

부록에 실린 각주도 친절하고 유익한데 예를 들면,

 

POSH: Port Out, Starboard Home의 약자로 '출항할 때는 좌현 선실, 돌아올 때는 우현 선실'이라는 뜻이다. '인도가 영국 식민지였던 빅토리아 시대에 인도를 오가던 배는 출발할 때 좌현 쪽 선실이, 돌아올 때는 우현 쪽 선실이 그늘져서 더 비쌌다. posh는 이 비싼 선실을 사용하던 승객, 즉 당시의 신흥부르주아들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현재는 영국 특유의 복고적이고 고급스러운 취향이나 브랜드를 지칭한다.

 

그리고 새삼 알게 된 사실도 있다.

 

그런데 왜 미국식 영어에 익숙한 사람이 런던에서 말이 안 통해 고생했다는 식의 이야기가 나오는 것일까? 이것은 미국 영어와 영국 영어의 차이가 아니라 중간 계급의 영어와 노동자 계급의 영어 발음이 다르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다.

(중략)

영국에 꽤 여러 차례 드나들고 나서야 나는 왜 내가 어떤 영국인의 말은 잘 알아듣고, 또 다른 영국인의 말은 도저히 못 알아듣는지 그 진정한 이유를 알아차렸다. 지방 사투리?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놀랍게도 영국인들의 영어는 그가 속한 계급에 따라 다르다. 영국에는 지방 사투리 못지않은 '계급 사투리'가 존재하는 것이다.

 

<영국인 관찰하기>라는 책에서 인용한 글도 인상적이다.

 

영국인은 상류층일수록 모음을 생략하고 자음을 정확하게 발음하며, 반대로 계급이 낮아질수록 t 나 h 같은 자음을 생략하고 모음을 강하게 발음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또 노동자 계급은 'th' 발음을 'f' 에 가깝게 발음하거나 'i' 를 'a' 로 발음하기도 한다.

 

뭐 굳이 영국의 상류층이 어떻게 발음하는지 알아야 하나 싶지만 그래도 재밌으니 계속 베끼면

 

이 칼럼을 보면, 영국 상류층은 미국인들이 상대의 말을 못 알아들었을 때 흔히 하는 말인 'pardon?'을 절대 사용하지 않으며 식후 '디저트'를 '푸딩'이라고 표현한단다.

 

저자가 보태는 얘기도 읽을 만한데

 

나는 BBC나 아리랑TV 등 영어 방송의 대담프로그램에 영국인이 출현하면 그들의 입 모양을 유심히 지켜보는 버릇이 있다. 영국인들 중에는 말을 할 때 입술, 특히 윗입술을 거의 움직이지 않는 사람들이 있는데 대체로 이런 사람들은 귀족이나 상류 계급 사람들이다.(중략) '윗입술을 떨지 마라Stiff upper lip'는 영국 상류층이 아이를 키울 때 입이 닳도록 하는 말 중의 하나다.

 

앞으로 bbc 방송을 보면 사람들 입술을 관찰해야겠다.

 

상류층은 누군가를 처음 만났을 때 "How do you do?" 라고 인사하는 반면, 중류층의 인사말은 "Nice to meet you" 한다.

 

예전 우리나라 중학교 1학년 영어책에는 "How do you do?" 라는 표현이 실렸는데 요즘은 이런 인사말이 초등교과서에 나오는지 어떤지 모르겠다.

 

런던사람들의 특징도 재미있게 잡아냈는데,

 

내가 아는 런더너들, 그리고 런던의 거리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을 되새겨보면 맨 처음 떠오르는 이미지는 '수줍음을 가장하기 위한 쌀쌀맞음, 또는 예의바름'이다. 이것은 앞으로 아무리 많은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을 런더너의 특성일 것이다. 왜냐하면 영국인은 예나 지금이나 '타인과 함께 있는 것이 서툰'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영국인은 본질적으로 비사교적이며, 다른 사람과 함께 있기보다는 혼자 있기를 더 즐긴다.

 

마지막으로 하나 더

 

옛날 옛적 '엘리자베스 여왕이 젊었던 시절'의 더블 데커(이층버스)에는 운전사와 차장이 타고 있었다. 런던 사투리를 쓰는 차장들이 손님의 표를 받아서 목에 걸고 있는 통에 넣어 찌르륵~하고 구멍을 뚫어주곤 했다.

 

그러니까 90년대에 런던을 다녀왔던 나는 말 그대로 '옛날 옛적'에 여행을 한 셈이다. 그러니 런던을 다시 가게 된다면 이런 책을 부지런히 읽어야 되는데, 엉? 이 책이 나온지 10년이 되어가네. 뭘 읽어야지?

 

 

*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는 런던 내셔널 갤러리의 소장 작품을 중심으로 쓰여졌다고 한다. 그가 영국으로 망명해 런던 대학교 교수를 지내면서 썼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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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여행에 관한 책. 읽는대로, 접하는대로 추가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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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전에 읽고 가면 좋을 책. 다녀와서 복습삼아 읽는 것도 좋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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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임브리지와 중국과 관련된 이야기가 주를 이룸. 3/28(도서관 대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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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이라는 본능에서 잡초와 곡식은 다를 게 없다. 서로 최선을 다해 종의 번식에 나설 뿐이다. 어쩌면 잡초는 생태학적으로 곡식보다 한 단계 진화된 생명의 연속인지도 모른다. 동물과 인간의 구미를 자극하는 맛깔난 과육을 소모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들판을 채워나가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 잡초가 선책한 기생은 진화론의 최종회에 해당된다. 힘들이지 않고, 그만큼 에너지를 소비하지 않고 숙주가 되는 생명을 갉아먹으며 대리로 성장하는 시스템은  생존을 화두로 삼고 있는 이 사회의 마지막 지향점이 될 것만 같아 불안하다. 잡초를 거두는 손길이 뗠리는 이유는 이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누구에게도 배우지 못했다. 아무도 나에게 소설을 가르쳐주지 않았다. 그래서 쓰고 또 쓰는 것 외에는 소설가가 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마쓰모토 세이초

 

 

문장이 간결하지 않아서 마음에 안 드는 건 내 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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