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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숨어 있는 보석을 찾아서 ㅣ 타산지석 10
전원경 지음 / 리수 / 2008년 6월
평점 :
품절
런던에 관한 책을 찾아보고 여러 책을 내리 읽고 있는데 이 책은 정보면에서나 이야기면에서나 꽤 읽을 만하다. 나는 요즘 이상한 버릇이 들어서 책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여러 변명을 둘러대며 책을 완독하지 못하고 던져버리곤 하는데 이 책은 끝까지 읽었다. 그것도 재미있게.
런던의 숨은 보석같은 곳으로 저자가 뽑은 장소: 햄스테드 히스, 켄싱턴 궁, 월러스 컬렉션, 셰익스피어 글로브극장, 디자인 미술관, 세인트 마틴 인 더 필즈 교회...
부록에 실린 각주도 친절하고 유익한데 예를 들면,
POSH: Port Out, Starboard Home의 약자로 '출항할 때는 좌현 선실, 돌아올 때는 우현 선실'이라는 뜻이다. '인도가 영국 식민지였던 빅토리아 시대에 인도를 오가던 배는 출발할 때 좌현 쪽 선실이, 돌아올 때는 우현 쪽 선실이 그늘져서 더 비쌌다. posh는 이 비싼 선실을 사용하던 승객, 즉 당시의 신흥부르주아들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현재는 영국 특유의 복고적이고 고급스러운 취향이나 브랜드를 지칭한다.
그리고 새삼 알게 된 사실도 있다.
그런데 왜 미국식 영어에 익숙한 사람이 런던에서 말이 안 통해 고생했다는 식의 이야기가 나오는 것일까? 이것은 미국 영어와 영국 영어의 차이가 아니라 중간 계급의 영어와 노동자 계급의 영어 발음이 다르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다.
(중략)
영국에 꽤 여러 차례 드나들고 나서야 나는 왜 내가 어떤 영국인의 말은 잘 알아듣고, 또 다른 영국인의 말은 도저히 못 알아듣는지 그 진정한 이유를 알아차렸다. 지방 사투리?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놀랍게도 영국인들의 영어는 그가 속한 계급에 따라 다르다. 영국에는 지방 사투리 못지않은 '계급 사투리'가 존재하는 것이다.
<영국인 관찰하기>라는 책에서 인용한 글도 인상적이다.
영국인은 상류층일수록 모음을 생략하고 자음을 정확하게 발음하며, 반대로 계급이 낮아질수록 t 나 h 같은 자음을 생략하고 모음을 강하게 발음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또 노동자 계급은 'th' 발음을 'f' 에 가깝게 발음하거나 'i' 를 'a' 로 발음하기도 한다.
뭐 굳이 영국의 상류층이 어떻게 발음하는지 알아야 하나 싶지만 그래도 재밌으니 계속 베끼면
이 칼럼을 보면, 영국 상류층은 미국인들이 상대의 말을 못 알아들었을 때 흔히 하는 말인 'pardon?'을 절대 사용하지 않으며 식후 '디저트'를 '푸딩'이라고 표현한단다.
저자가 보태는 얘기도 읽을 만한데
나는 BBC나 아리랑TV 등 영어 방송의 대담프로그램에 영국인이 출현하면 그들의 입 모양을 유심히 지켜보는 버릇이 있다. 영국인들 중에는 말을 할 때 입술, 특히 윗입술을 거의 움직이지 않는 사람들이 있는데 대체로 이런 사람들은 귀족이나 상류 계급 사람들이다.(중략) '윗입술을 떨지 마라Stiff upper lip'는 영국 상류층이 아이를 키울 때 입이 닳도록 하는 말 중의 하나다.
앞으로 bbc 방송을 보면 사람들 입술을 관찰해야겠다.
상류층은 누군가를 처음 만났을 때 "How do you do?" 라고 인사하는 반면, 중류층의 인사말은 "Nice to meet you" 한다.
예전 우리나라 중학교 1학년 영어책에는 "How do you do?" 라는 표현이 실렸는데 요즘은 이런 인사말이 초등교과서에 나오는지 어떤지 모르겠다.
런던사람들의 특징도 재미있게 잡아냈는데,
내가 아는 런더너들, 그리고 런던의 거리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을 되새겨보면 맨 처음 떠오르는 이미지는 '수줍음을 가장하기 위한 쌀쌀맞음, 또는 예의바름'이다. 이것은 앞으로 아무리 많은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을 런더너의 특성일 것이다. 왜냐하면 영국인은 예나 지금이나 '타인과 함께 있는 것이 서툰'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영국인은 본질적으로 비사교적이며, 다른 사람과 함께 있기보다는 혼자 있기를 더 즐긴다.
마지막으로 하나 더
옛날 옛적 '엘리자베스 여왕이 젊었던 시절'의 더블 데커(이층버스)에는 운전사와 차장이 타고 있었다. 런던 사투리를 쓰는 차장들이 손님의 표를 받아서 목에 걸고 있는 통에 넣어 찌르륵~하고 구멍을 뚫어주곤 했다.
그러니까 90년대에 런던을 다녀왔던 나는 말 그대로 '옛날 옛적'에 여행을 한 셈이다. 그러니 런던을 다시 가게 된다면 이런 책을 부지런히 읽어야 되는데, 엉? 이 책이 나온지 10년이 되어가네. 뭘 읽어야지?
*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는 런던 내셔널 갤러리의 소장 작품을 중심으로 쓰여졌다고 한다. 그가 영국으로 망명해 런던 대학교 교수를 지내면서 썼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