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파트의 주목 신간을 본 페이퍼에 먼 댓글로 달아주세요.

 

1. 한 분야에서 20년 이상 몸 담은 사람의 이야기라면 일단은 귀담아 들을 일이다. 더군다나 치열한 삶을 살아온 사람의 이야기라면. 20년 넘게 한 분야에 종사하고도 할 이야기가 별로 신통치 않은 나 같은 사람에게는 자극이 되리라고 본다.

 

 

 

 

 

 

 

 

2. 알래스카 하면 호시노 미치오, 호시노 미치오 하면 알래스카다. 이미 익숙한 그의 사진과 글이 되겠지만 진짜 야생의 삶을 살았던 분이라 그의 글은 늘 가슴으로 다가온다.

 

 

 

 

 

 

 

 

 

3. 그루지아, 아르메니아...에 시선이 멈춘다. 이 두 나라 이름만 보고도 이 책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4. 분쟁 지역 사람들-특히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의 이야기다. 그쪽 지역 관련 뉴스를 들어보면 늘 몇 명이 죽었고 몇 명이 부상을 입었다는 내용 뿐이다. 이 책은 그런 뉴스 이면의 현실을 좀 더 생생하게 보여주리라고 본다. 다행이다. 제목이 '사람이, 죽는다'가 아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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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2-03-04 2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후후... 변종모의 책은 참 좋아요. 한 알라디너님의 글을 보고 엄청나게 끌렸던 책인데 운좋게도 선물받아서! 사진도 이쁘고 종이 재질도 좋아서 책 읽는 맛이 난달까요. 작가님이 책 제목을 < 아 그 거 >라고 부르면서 킥킥대셨다고 하는군요.
 
나스타샤
조지수 지음 / 지혜정원 / 2011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TV 드라마에 빠지듯 읽었다. 누군가는 그랬다. 죽기 전에 소설 한 편은 꼭 쓰고 싶다고. 이 책을 읽으며 내내 떠오른 생각이었다.

 

자전적 요소가 얼마나 들어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읽는 내내 픽션이라기 보다는 어쩌면 실화에 가깝지 않을까 하는 추측이 들었다. 그런 추측이 더해지다보니 책 읽기의 즐거움이 배가되었다. 3월에 접어들 때마다 어찔어찔하고 경미한 우울증에 시달리는데 이 책 덕분에 그런 우중충한 감정들을 가볍게 잊어버리거나 날려버릴 수 있었다.

 

이 소설은 드라마 같은 내용도 재밌지만 언뜻언뜻 던져넣는 작가의 다양한 생각들이 가끔씩 호흡을 멈추게 한다. 가령 다음과 같은 글에서는 한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719쪽으로 끝나는 책에서 441쪽에 나오는 글인데 이미 결론을 암시하고 있었고 이 책 말미에 어울리는 부분이란 생각이 들었다.

 

나는 행복한 삶을 살았다. 다시 산다고 해도 똑같은 인생을 살기 바란다. 무지에서 오는 혼란과 무의미에서 오는 불안이 젊은 나를 이리저리 휘둘렀고, 나이 든 지금 내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내게 남은 유형의 것은 없다. 모두가 사라졌다. 이루고자 하는 꿈도 남아 있지 않다. 이루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품기 위한 것이었지 이루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꿈을 위한 꿈이란 젊은이의 것이다. 더 이상 나를 위한 것은 아니다. 많은 부질없는 꿈들이 나를 물들였었다. 이제 나는 꿈 없이 살 수 있게 되었다. 아마 기쁨 없이도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추억은 남아 있다. 나란 무엇인가?....

 

'기쁨 없이도 살 수 있을 것이다.'  작가는 이 한마디를 말하기 위해서 이 소설을 쓰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여운이 남는 문장이었다.

 

작가의 다양한 이야기들- 낚시, 우정, 캐나다 생활, 조기유학, 음악과 미술에 대한 것들-을 읽는 재미가 매우 쏠쏠하다 . 그 중 아이를 키우는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듯한 다음의 글이 눈에 들어왔다. 법륜 스님의 <엄마수업>에 나옴직한 글이다.

 

아이들의 권리는 보호받고 자라는 데보다 모범을 보고 자라나는 데 있다. 엄마들은 아이에게 무엇인가를 해주는 것보다 스스로가 지혜롭고 자애롭고 의연한 사람이 되는 것에 의해 아이들을 훨씬 잘 키울 수 있다. 아이의 문제는 결국 엄마 스스로에게 수렴된다. 아이에게 잘해주는 것보다 스스로에게 잘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스스로의 수양은 남을 수양시키는 것보다 어렵다. 엄마들은 어려운 길보다 안일한 길을 택한다. 마땅히 자기 자신에게 쏟아야 할 노력을 아이에게 퍼붓는다. 그 노력은 진정으로 아이의 삶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성취 욕구와 허영의 충족을 위한 것이다. 베시는 지금 그런 엄마의 길을 밟고 있다. 베시는 착하고 지혜로운 여자였다.(542쪽)

 

이 책은 소설이지만 소설 그 이상으로 읽힌다. 인생을 저만큼 멀리 살아본 사람의 추억담 혹은 회한을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앞에서 인용한 누군가의 말처럼 일생을 통해 단 한 편의 소설을 쓴다면 이런 소설이지 않을까 싶다. 이 작가에 대해서 아는 바는 없지만 글쎄 이런 소설이 또 나올 수 있을까? 그런데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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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에 마카오 기행문에 썼던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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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 셋-길을 찾는 사나이, 프란시스 자비에르>
프란시스 자비에르. 16세기 초 스페인 태생의 Jesuit 파 수행자. 아시아 지역 포교활동을 위해 1542년 인도의 고아에 도착. 10여 년 간 중국과 일본 등지에서 포교활동을 하다 1552년 중국의 Sancian에서 사망. 그의 유골이 고아로 옮겨질 것에 대비하여 살을 빨리 썩게 하기위해 석회를 4포대나 뿌렸는데도 살이 썩지 않았다는 것. 2개월 후에 말라카에서도 그대로였고 1554년 고아로 이전되기 위해 무덤에서 나왔을 때도 전혀 썩지 않았다는 것. 1614년 선교의 목적으로 오른팔을 잘라 일본과 로마로 분배되었고 1636년에는 내장의 기관이 동남아시아의 여러 나라에 나누어졌단다. 이런 연유로 생전 보다 생후에 더 주목 받게 된 자비에르. 지금은 유리관에 시신을 보관하여 고아의 한 성당에 안치되어있다. 나는 바로 그 유리관에 안치된 시신을 보았었다. 2005년 1월이었다.


마카오의 남단에 있는 콜로안 섬의 콜로안 마을에서 한가로이 동네를 둘러보다 마주친 예쁜 예배당이 있었다. 이 성당은 너무나 예뻐서 눈을 뗄 수 없을 정도였고 그곳을 벗어나기도 못내 아쉬웠다. 이 마을은 드라마 <궁>의 촬영지로 알려진 곳이지만 정작 나는 이 드라마를 본 적이 거의 없다. 그래서 이 예쁜 성당이 그 드라마에 나온 지도 몰랐고 알았다 해도 별 관심이 없었을 것이다. 여행 3일째라 긴장이 풀렸던지 그동안 분신처럼 들고 다니던 자료들을 호텔에 두고나와 지도 한 장만 달랑 들고 나오는 바람에 그 이름을 보고도 그런가보다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이 성당이 바로 <프란시스 자비에르 예배당>이라는 것이다.


나의 아둔함이란. 처음엔 동명이인쯤으로 여겼다. 고아의 자비에르가 이곳에서도 이렇게 되살아나고 있음을 한참 추리 끝에 파악하였다. 1928년에 자비에르의 유골을 모시기 위해 지어진 이 예배당은 특히 일본의 순례자들에게 인기가 높다고 하는데 자비에르가 일본에 처음으로 카톨릭을 전파해서일까.

 

보물찾기 같았던 프란시스 자비에르. 400여 년 전 태어나서 새 길을 개척하고자했던 사나이. 썩지 않는 시체 덕에 지금도 기억되고 추앙 받고 있는 사나이. 포르투갈의 마카오 지배와 세월을 함께 달린 자비에르는 지금도 길을 개척하고 있는지, 죽어서도 잠들지 못한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이런 엽기적이기까지 한 일들에 열광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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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금해서 못배기거나 알고싶어서 안달이 났던건 아니지만 내내 프란시스 자비에르라는 신부님을 잊을 수가 없었다. 특히 위의 글에 나오는 말라카라는 지역이 몹시 궁금했다. 먹어보지 못한 음식에는 관심이 없으나 가보지 못한 곳은 가보아야만 직성이 풀리니 어떻게보면 나에게도 끈질긴 구석이 하나 있긴 하다.

 

말라카. 말라카가 그렇게 유명한 곳인 줄은 몰랐다. 혼합된 분위기의 도시는 흡사 우리나라의 경주와 인천의 소래포구를 합쳐놓은 것 같다. 수백 년 동안 아시아 일대의 무역 중심지 역할을 해왔던 만큼 유물이나 유적이 지천에 널려있으며, 이 역사 도시를 보러온 사랄들이 마치 주말의 소래포구처럼 인산인해를 이루기 때문이다. 우리가 머물렀던 3박 4일 동안은 특히나 춘절과 겹쳐 나날이 축제의 연속이었다.

 

박물관은 왜 그리 많은지, 구시가 일대는 한 집 건너 박물관으로 둥근 원을 이루며 언덕을 감싸고 있었다. 그리 학구적이지 않은 우리 가족은 겨우 두세 곳 관람하는 것으로 만족했지만, 그리고 볼 것 먹을 것이 많아 굳이 박물관에 갈 필요를 못 느꼈으나, 박물관 관람 좋아하는 사람은 필히 이 곳에 꼭 가보기를 권한다. 내가 가 본 곳 중에서 기억나는, 미술관과 박물관이 많은 스위스의 바젤 만큼이나 박물관이 많은 도시가 말라카이다. 역사의 한 시기를 주름 잡는다는 게 무엇인지 확실하게 보여주는 곳이기도 하다.

 

말라카의 유명한 유적지 중에 역시 프란시스 자비에르 성당이 있었다. 가이드북에는 이렇게 쓰여있다. '이곳은 동방의 사도 자비에르에게 경의를 표하는 의미에서 1849년에 지은 고딕 양식의 가톨릭 성당이다.'라고. 경내에는 소박하고 겸손해 보이는 자비에르 동상이 서있고 그 옆에는 일본에서 그를 모셨던 일본 신부의 동상이 나란히 있었다. 마카오의 자비에르 성당에는 일본 순례자들이 많다고 하더니 이곳도 아마 그럴 것이라 짐작할 따름이다.

 

2005년 인도 고아에서 충격으로 다가왔던 프란시스 자비에르의 시신 관람후, 마카오의 유적지를 거쳐 말라카의 유적지까지, 나는 뜻하지 않게 프란시스 자비에르 순례를 하게된 셈이다. 마카오기행문에서 '엽기적'이라고 썼던 표현을 수정해야겠다. 나의 순례행위를 엽기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잖은가.

 

뭐 좀 더 공부해보겠다고 얼마전 돈(48,170원)과 시간(열하루)을 들여 구입한 (1918)라는 책을 바라보고 있자니 가슴이 답답해져온다. 활자본이 아닌, 책을 복사해서 편집한 오래된 책을 얕은 지식과 어학 실력으로 감당하기에는 벅차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 책을 구입한 자체가 엽기적인 만용이 아닐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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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레이시아를 가면서 항공권을 케세이퍼시픽항공으로 정한 건 홍콩 때문이었다. 홍콩에 다시 가고 싶은 이유가 있었다.

 

여행이란 게 그런 면이 있다. 여행을 끝내고 귀국행 비행기에 오르면 마음이 착잡해지고 울적해지면서 묘한 감상에 젖는다. 그 증상을 조금이라도 완화시키는 방법은 중간 경유지에서 잠시 머무는 것이다. 중간 경유지로는(아시아에서) 보통 싱가포르, 대만, 홍콩, 일본, 방콕 정도이다.

 

2010년 여름, 인도의 라다크일대를 여행한 후 돌아오는 길에 홍콩에 며칠 머물렀었다. 우리 가족이 홍콩을 찾은 건 그때가 두 번째였다. 특별히 가고 싶은 곳이 있거나 새로운 볼거리를 기대한 건 아니었다. 여행을 간단히, 갑작스럽게 끝내고 싶지 않은 미련 때문이었다. 왜 여행 끝에는 미련이 남는지, 왜 우울해지는지, 는 나중에 궁리하기로 하고.

 

여행 다니면서 고급 식당이나 가이드북에 나와 있는 유명 식당 탐방은 우리와는 거리가 먼 곳들이다. 우리 가족은 그때그때 현지 식당에서 아무거나 먹는다. 물론 유명한 곳을 아주 외면하는 건 아니다. 이를테면 인도의 콜카타에서 여행자거리에 있는 유명 샌드위치가게나 라씨코너 같은 데는 일부러 찾아다니기도 한다.

 

소박하기 이를데 없는 우리 가족이지만 그래도 식당 하나쯤은 기억에 담아두기도 하는데, 바로 홍콩 침사추이에 있는 자그마한 태국식당이 그랬다. 홍콩을 소개하는 이런저런 가이드북에는 절대로 실리지 않을 작은 식당이지만 우리에게는 인상에 남는 곳이었다. 특히 음식이 먹을 만했다. 쇼핑몰 푸드코트 같은 데서 먹다가 어쩌다 이곳에서 먹어본 음식은 '이게 요리구나' 싶었다.

 

두 번째 홍콩 여행의 기쁨을 그 태국식당에서 맛보기로 했다. 음식에 대한 기대를 품고 테이블에 앉으니 태국출신의 주인아주머니가 반갑게 아는 체를 한다. 우리가 일 년 전에 왔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글쎄 우리를 기억하고 있었다니! 놀랍고 반가웠다. 물론 기뻤다. 고맙기도 했다. 홍콩이 마음 속의 고향으로 자리잡는 순간이었다.

 

바람처럼 여행하는 게 실은 쓸쓸한 일이기도 하다. 그건 가족끼리 다녀도 마찬가지다. 우리도 '오래된 여행자'가 되어가고 있나보다. 이런 '군중 속의 고독'에 절어있던 우리에게 태국 식당 아주머니의 아는 체는 가히 상상을 초월하는 전율과 같은 살아있는 기쁨을 주었다. 여행이 주는 보너스 같았다.

 

그렇게해서 우리가 홍콩에 가는 이유가 생긴 것이다.

 

이번에도 재회의 기쁨을 상상하며 귀국길에 홍콩을 들렀다. 숙소를 잡자마자 멀지않은 그 태국식당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저녁을 먹기에는 좀 이른 시간이었지만 일단 태국인 아주머니에게 인사부터 하기로 했다. 출입문을 빼꼼히 열고 아주머니를 찾는데, 이상하다. 분명 얼굴은 비슷한데 입성이 낯선 모습이다. 그전에 보았던 단정한 차림의 태국 전통의상이 아니라 유니폼으로 입는 빨간 티셔츠 차림이었다. 게다가 헤어스타일도 야성적으로 달라져있었다. 긴가민가해서 남편에게도 확인을하니 그 분이 맞는 것 같단다.

 

먼저 인사를 한다. "Hello! How have you been?" 순간 아주머니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못알아듣자 옆 테이블에서 음식을 먹고 있던 서양남자가 내 말을 또박또박 다시 반복해준다. "How have you been?" 다시 당황해하는 아주머니를 보고서야 얼른 말을 고친다. "How are you?" 내 딴에는 인사랍시고 한 건데 너무나 교과서적인 표현이지 싶었다.

 

우리를 알아보던 총명함이 사라진 아주머니를 미처 예상하지 못한 우리는 약간 서운하고 허탈해졌다. 그렇다고 그냥 갈 수는 없었다. 우리를 기억하느냐를 추궁하듯 묻고는 두어 시간 후에 다시 오겠다고 하고 나왔다. 아, 괜히 홍콩에 왔다보다. 입 밖으로 말은 못했지만 그런 기분이 들었다.

 

약속한대로 그날 저녁밥을 태국식당에서 해결했다. 약간 서운함이 남았지만 음식은 여전히 맛이 좋았다. 그러면 되었지, 뭐.

 

다음 날 저녁. 밥을 먹으로 일단 숙소 밖으로 나왔지만 이젠 갈 곳이 마땅치 않았다. 주변에 깔린 게 식당이고 게다가 한국식당도 여럿 있었다. 혹 태국식당에 그 아주머니가 있으면 들어갈까 해서 열심히 유리창 너머를 훔쳐보았지만 없/었/다. 동네를 서너 바퀴 돌았지만 역시 돌고나면 '그집앞'이었다.

 

눈 딱 감는 게 이런 것일 게다. 그냥 들어가기로 마음 먹으니 마음이 가라앉았다. 자리에 앉으니 좀 전까지도 안보이던 아주머니가 주문을 받으러왔다. 배불리 음식을 먹고 맥주까지 마시고 나니 그제야 기분이 좀 풀린다. 그 기분에 아주머니한테 이런저런 말을 한다. 어제 왔을 때 우리를 못알아봐서 매우 서운했었다고. 언제 한국으로 돌아가냔다. 오늘이 홍콩 마지막 날이라고 말한다. 계산을 마치고 일어서서 나오려고 하는데 어느새 그 아주머니와 내가 포옹을 하고 있었다. 눈물까지 흘리기에는 술기운이 좀 약했지만.

 

 

홍콩에 다시 가야 할 이유가 또 있다.

 

이번엔 우리가 묵었던 한인 민박에 대한 얘기다. 지난번에 올렸던 글을 다시 옮겨본다.

 

어쩌다 홍콩에 여러 번 가게 되었다. 딸아이의 말이, 부산보다 홍콩을 더 자주 가게 되는 것 같단다. 일부러 홍콩에 간 것은 단 한번. 인도 여행 끝이나 말레이시아 여행 끝에 잠깐 들르다보니 홍콩에 자주 가게 되었을 뿐이다. 그리고 홍콩은 무엇보다도 공항에서 시내까지의 접근이 무척 단순하고 옥토퍼스라는 교통카드의 사용이 편리할 뿐더러 넓지 않은 지역에 재미있는 여행 요소가 많아서 여행하기 좋은 곳이다.

 

홍콩에 가게 되면 편리함 때문에 그냥 별 생각없이 한국인이 운영하는 민박을 이용하게 된다. 빌딩의 한 부분을 임대해서 여러 개의 방으로 개조하여 여행자의 숙소로 만든 곳이다. 내가 그간 묵었던 곳은 세 곳이었는데 공통점은 아침밥이 제공된다는 것, 방이 비좁다는 것, 실내에서 빨래를 건조한다는 것, 외국인 여성을 가정부로 두고 있다는 것 등이다.

 

이번에 묵었던 민박은 유달리 정갈한 곳이었다. 다른 두 곳은 청소도 대충이었고 음식도 그저 그랬는데 이번 민박은 청소, 음식이 모두 만족스러웠다. 이틀째되는 날은 솔직히 청소는 기대도 하지 않았었다. 다른 곳처럼 대강하거나 내버려두겠지 싶어서 입던 옷도 그냥 침대에 걸쳐놓고 양말도 침대 머리맡에 널어놓고 가방도 구겨진대로 방치해 놓고 외출했다. 그런데 돌아와보니 너무나 말끔히 정돈되어 있어서 놀랍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했다. 이럴줄 알았으면 정리해놓고 나가는 거였는데, 싶었다.

 

다음 날 아침, 아침밥을 먹고나서였다. 어젯밤부터 눈물을 글썽거리던 필리핀 출신의 가정부 아주머니가 나를 보더니 울먹거리는데 눈에는 눈물이 그득 고였다. 왜 우느냐고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간밤에 한국인 주인이 와서 혼을 내고 갔다고 한단다. 누군가 홈페이지에 그녀가 손님에게 소리를 질렀다는 불평을 했다고 한다. 그녀의 서러운 호소를 들어주었다.

 

그녀가 보여준 그녀의 작은 방에는 침대가 없었다. 침대 자체가 들어갈 방이 아니었다. 아주 작은 공간에 단지 얇은 매트 한장 깔고 자는 방이었고, 그 방마저 누군가에게 주고나면 그녀의 잠자리는 빨래를 널어 말리는 구석진 곳 바닥이라고 한다. 천정에는 빨래 건조대가 걸려있고 바닥에는 냄새 제거를 위해 선풍기 따위가 널려 있는 아주 협소한 공간이다. '그게 네 방이다'라는 소리를 듣는다며 6년간 일한 곳에서 그런 대접을 받고 있다며 그녀는 다시 울먹거린다. 

 

잠깐만 보아도 민박 분위기를 알 수 있었다. 열 개 가까운 방을 운영하고 있는데 관리하는 사람은 그 필리핀 여성 혼자였다. 아침 밥 준비부터 청소, 손님 체크인, 체크아웃 등 모든 일을 혼자서 감당하고 있었다. 그리고 혼자 운영하는 곳치고는 정말 완벽하게 깨끗한 곳이었다. 왠만한 호텔 수준이상이라고 할 수 있다. 빨아널은 양말은 건조대에 걸려 있었고 화장실 바닥은 물기가 닦여져 있었고 소지품 등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민박에서 이런 대접을 받기는 처음이었다. 그래서 당황스러웠고 미안했다.

 

아직 싱글인 이 필리핀 여성은, 하루 중 자기 시간이라고는 잠잘 때 뿐이라며 하루 종일 일, 일, 일, 일 뿐이며 휴일도 없다고 한다. 마치 노예의 하루 같았다. 한국인 주인이 꼬박 챙기는 것은 손님의 숙박 요금이라며 아마도 철저하게 챙기는 것 같았다. 그리고 손님 대부분이 한국인인데도 한국말을 가르쳐주지는 않고 그냥 영어만 사용하란다며 그 부분에도 불만이 쌓여 있었다. 6년간의 분노와 슬픔과 피곤으로 얼굴의 표정이 몹시 상해있었고 아마도 우울증에 걸려 있는 것 같았다. 아마 내가 그 입장이라도 그랬으리라. 더하면 더했을 터.

 

내가 보기에도 그랬다. 작은 민박이었지만 일거리는 상당했다. 살림하는 사람이라면 그 일거리의 정도가 금방 파악이 된다. 하루종일 종종거리며 일을 하지 않으면 그렇게 깨끗하게 유지될 수가 없다. 그래서 미안하고 창피한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누군가 하루종일 종종거리며 일을 한 덕분에 누군가는 하루종일 밖에서 맛있는 것 먹고 룰루랄라 놀다 들어와서는 깨끗하고 깔끔하게 치워놓은 방을 보고 콧노래를 불렀다는 사실을, 그걸 당연한 대우라고 여겼다는 사실을 곰곰히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만한 돈을 냈으니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저렇게 뒤에서 눈물을 흘리는 사람을 보고는 그게 당연하다고 여겨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맛있게 먹는 아침 밥과 만족스러운 방 청소 뒤에는 보이지 않는 한숨과 눈물이 숨어 있는데 그걸 몇 푼의 돈으로 맞바꾸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여행이 징그러워지기 시작했다. 저렇게 고통스러워하는 사람이 있고, 그 고통을 무시하며 자기 이익만을 노리는 한국인 주인과 내가 같은 나라 사람이라는 게 부끄러웠다.

 

여행을 끝내고 집에 돌아와서 하루종일 빨래를 했다. 빨래를 건조대에 널면 몇시간 동안은 세제냄새가 온집안에 가라앉아있어 냄새를 견뎌야한다. 냄새가 싫어 헹굼을 여러번해도 냄새를 완전히 제거할 수는 없다. 빨래 냄새를 맡으니 다시 그 필리핀 여성의 눈물 범벅 얼굴이 떠올랐다. 금방이라도 무너져내릴 것 같은 그 가녀린 몸매와 큰 눈망울이 내내 떠올랐다

 

 

이 글을 내 블로그에다 올렸다가 성에 차지 않아서 엇그제 그 문제의 숙소 홈페이지에 그대로 올려보았다. 주인에게 말하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알리고 싶었다. 그래야 좀 달라지지 않을까해서다. 이런 나를 보고 남편은 '오지랖도 넓다. 집요하다.'라고 했지만 '약자를 도와주고 싶을 뿐'이라고 했다. 나는 보통 남의 일에 나서는 사람이 절대 아니고 오지랖은 커녕 내 앞자락도 버거워 늘 헉헉거리는 소심한 사람이다.

 

홈페이지에 올린 다음 날, 홍콩의 그 숙소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너무나 공손하게 해명하고 내 의도를 너무나 쉽게 이해해주는 듯한 친절하고도 간절한 목소리였다. 요지는 내 글을 삭제해도 되겠느냐는 거였다. 뭐라 하겠는가. 근로여건이 개선되길 바랄 뿐이라고만 했다.

 

그런데 궁금하다. 어떻게 처우가 달라졌는지, 내 글 때문에 그 필리핀 가정부가 더 곤욕을 치르는 건 아닌지 모를 일이었다. 어떻게 알아본담? 홍콩에 가면 다시 그 숙소에 묵으리라 다짐하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홍콩에 가야 할 이유가 또 하나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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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인의 반란자들 - 노벨문학상 작가들과의 대화
사비 아옌 지음, 정창 옮김, 킴 만레사 사진 / 스테이지팩토리(테이스트팩토리) / 2011년 12월
평점 :
품절


나 같은 사람은 노벨문학상에 대해 얘기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며 이 글을 쓴다. 왜? 그간의 노벨문학상 수상작들을 읽어본 적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 많은 수상작들을 그렇게 간단하게 무시하고 무사하게(?) 살아왔으니 좀 한심한 생각도 든다.

 

언제부턴가 번역본을 읽는 것에 흥미를 잃기 시작했는데 아마도 그때쯤이지 않을까 싶다. 지적능력 부족으로 작품을 이해하는데 문제가 있었는 지도 모르겠다. 하여튼 노벨문학상 수상작들을 멀리해왔다는 것만은 부끄럽지만 사실이다.

 

그래서 이 책을 읽게 되었을 때, 까마득하게 높아만 보여 감히 가까이하지 못했던 노벨문학상 수상작가들의 모습과 육성을 접할 수 있다는 기쁨에 들뜨기도 했다.

 

허나 이 책을 읽어나가면서 내 독서의 바닥이 금방 드러나버리고 말았다. 도대체 이 위대한 작가들의 작품을 읽지도 않은 상태에서 이 책을 읽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책은 단숨에 잘 읽었지만 착잡한 마음은 영 가시지가 않아서 이 리뷰 쓰는 일을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

 

분명 이 책을 통해 심오한 감흥 같은 것도 있었다. 대부분의 작가들의 연륜에서 우러나는 삶의 깊이와 범접할 수 없는 어떤 경외감도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었다. 이분들에게서 공통적으로 감지되는 삶에 대한 나름의 주제의식 내지는 고집 같은 게 우선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인생의 하루, 혹은 한시간도 허투루 살았을 것 같지 않은 삶의 농밀함이 진하게 가슴으로 전해지기도 했다.

 

특히 작가들의 손을 찍은 사진들이 많은 것을 이야기하는 듯했다. 클로즈업된 손사진이 특히 더 그랬다. 쭈글쭈글한 손사진을 감상하는 맛이 참 각별했다고나 할까. 글이라는 건 머리가 아니라 손으로 쓰는 것이라고 말하는 듯도 했다.

 

그러나 무척 아쉽기도 했다. 16명의 작가들 얘기를 쓰다보니 글이 짧고 단편적이라는 점이다. 그들과의 인터뷰가 짧게는 6시간, 길게는 8일이 걸렸다고 하는데 꼭 필요한 부분만 편집하다보니 그럴 수 밖에 없었겠지만 읽다만듯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렇지만 이들 작가들의 삶을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는 되었다. 하나같이 삶과 정면으로 맞선 분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장애인 아들을 훌륭한 음악가로 키운 오에 겐자부로, 나치 전력으로 세간을 놀라게 했던 귄터 글라스,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삶에 충실했던 나기부 마푸즈, 아파르트헤이트와의 투쟁에 앞장선 나딘 고디머, 아프리카의 꿈을 말하는 월레 소잉카...내 비록 그들의 작품을 읽지 않았지만 여기에 실린 글과 사진만으로도 그분들의 글쓰기 행위와 인생의 깊이를 느낄 수 있었다.

 

특히 "광활하고 폭넓은 사회는 개인이건 집단이건 변화의 가능성이 많아요. 반면에 비좁고 한정된 사회는 어떤 것을 변화시킨다는 게 무척이나 어려워요. 정체성이란 넓으면 넓을수록 좋아요."라는 V.S 네이폴의 말과, '나는 절대 다른 존재의 아버지가 되지 않을 것이다'라는 임레 케르테스의 말이 오랫동안 여운으로 남았다.

 

그래서 다짐해본다. 그들의 작품을 꼭 읽어야겠다고. 이름만 알고 있는 건 무의미하고 부끄러운 일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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