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스타샤
조지수 지음 / 지혜정원 / 2011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TV 드라마에 빠지듯 읽었다. 누군가는 그랬다. 죽기 전에 소설 한 편은 꼭 쓰고 싶다고. 이 책을 읽으며 내내 떠오른 생각이었다.

 

자전적 요소가 얼마나 들어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읽는 내내 픽션이라기 보다는 어쩌면 실화에 가깝지 않을까 하는 추측이 들었다. 그런 추측이 더해지다보니 책 읽기의 즐거움이 배가되었다. 3월에 접어들 때마다 어찔어찔하고 경미한 우울증에 시달리는데 이 책 덕분에 그런 우중충한 감정들을 가볍게 잊어버리거나 날려버릴 수 있었다.

 

이 소설은 드라마 같은 내용도 재밌지만 언뜻언뜻 던져넣는 작가의 다양한 생각들이 가끔씩 호흡을 멈추게 한다. 가령 다음과 같은 글에서는 한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719쪽으로 끝나는 책에서 441쪽에 나오는 글인데 이미 결론을 암시하고 있었고 이 책 말미에 어울리는 부분이란 생각이 들었다.

 

나는 행복한 삶을 살았다. 다시 산다고 해도 똑같은 인생을 살기 바란다. 무지에서 오는 혼란과 무의미에서 오는 불안이 젊은 나를 이리저리 휘둘렀고, 나이 든 지금 내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내게 남은 유형의 것은 없다. 모두가 사라졌다. 이루고자 하는 꿈도 남아 있지 않다. 이루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품기 위한 것이었지 이루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꿈을 위한 꿈이란 젊은이의 것이다. 더 이상 나를 위한 것은 아니다. 많은 부질없는 꿈들이 나를 물들였었다. 이제 나는 꿈 없이 살 수 있게 되었다. 아마 기쁨 없이도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추억은 남아 있다. 나란 무엇인가?....

 

'기쁨 없이도 살 수 있을 것이다.'  작가는 이 한마디를 말하기 위해서 이 소설을 쓰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여운이 남는 문장이었다.

 

작가의 다양한 이야기들- 낚시, 우정, 캐나다 생활, 조기유학, 음악과 미술에 대한 것들-을 읽는 재미가 매우 쏠쏠하다 . 그 중 아이를 키우는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듯한 다음의 글이 눈에 들어왔다. 법륜 스님의 <엄마수업>에 나옴직한 글이다.

 

아이들의 권리는 보호받고 자라는 데보다 모범을 보고 자라나는 데 있다. 엄마들은 아이에게 무엇인가를 해주는 것보다 스스로가 지혜롭고 자애롭고 의연한 사람이 되는 것에 의해 아이들을 훨씬 잘 키울 수 있다. 아이의 문제는 결국 엄마 스스로에게 수렴된다. 아이에게 잘해주는 것보다 스스로에게 잘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스스로의 수양은 남을 수양시키는 것보다 어렵다. 엄마들은 어려운 길보다 안일한 길을 택한다. 마땅히 자기 자신에게 쏟아야 할 노력을 아이에게 퍼붓는다. 그 노력은 진정으로 아이의 삶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성취 욕구와 허영의 충족을 위한 것이다. 베시는 지금 그런 엄마의 길을 밟고 있다. 베시는 착하고 지혜로운 여자였다.(542쪽)

 

이 책은 소설이지만 소설 그 이상으로 읽힌다. 인생을 저만큼 멀리 살아본 사람의 추억담 혹은 회한을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앞에서 인용한 누군가의 말처럼 일생을 통해 단 한 편의 소설을 쓴다면 이런 소설이지 않을까 싶다. 이 작가에 대해서 아는 바는 없지만 글쎄 이런 소설이 또 나올 수 있을까? 그런데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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