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상적으로 알고 있었던 용산참사를 제대로 이해하게 되었다.

책 뒷표지에 있는 소설가 김연수의 글을 옮겨본다.

 

'시공업체와 용역들과 경찰청장과 서울시장과 대통령과 총리와 검사와 판사 들은 죽은 철거민들을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았다....철거민들도 사람이었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이렇게 한 권의 책까지 만들었다....사람이 사람이라는 걸 증명해야만 하는 나라에 우리는 살고 있다. 아니, 증명해도 믿지 않는 나라에 살고 있다. 하지만 믿든 믿지 않든, 사람은 사람이다...'

 

'사람이라는 걸 증명해야만 하는 나라'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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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설이다가, 혼자서 '세월호 참사 희생자 추모 및 참교육 사수 전국교사대회'에 다녀왔다.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슬픔을 넘어 분노로

분노를 넘어 행동으로.

 

독립문 옆 독립광장에서 시청앞까지 행진에도 참여했으나 청계광장까지는 가지 못했다.

입술이 부르트려고 한다.

 

시청앞 잔디광장

노란 종이배들

멀미 난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992552&PAGE_CD=ET000&BLCK_NO=1&CMPT_CD=T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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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책동네>코너에서 이 책에 대한 서평을 읽고 구입했다. 미국 문화에 관심을 기울일 만큼 미국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래서 더 읽고자 했다. 미국을 통해 우리 모습을 제대로 볼 수도 있으니까.

 

리뷰를 쓰기엔 역부족이어서 그냥 마음에 드는 부분을 옮겨 본다.

 

 

 

p.173....미디어의 영향력이 강화되기 시작한 지난 30년 동안 미국의 민주주의는 오히려 쇠퇴의 길을 걸어왔다. 민주주의를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조건은 사회 공적인 문제에 대한 시민들의 인식과 참여다. 그러나 대중매체는 휴식이나 오락에 치중함으로써 시민들을 사회적 이슈로부터 고립시켜 왔다는 것이다. 여기서 '오락'이란 흥미위주의 드라마나 쇼 프로그램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사회문제를 다루는 보도 프로그램조차 '쇼'의 한 형태로 오락화하고 있으며...무거운 사회적 이슈보다는 가벼운 오락을 다루기 좋아하는 것은...돈 때문이다.

 

p. 184...정치권력보다 상업권력이 현대 민주주의를 더 크게 위협한다.

 

이 당연한 사실을 종종 잊어버리고 tv에 정신줄을 놓을 때가 얼마나 많은가. tv를 보면서 그 숨은 의도를 끊임없이 찾느니 차라리 tv를 꺼버리는 게 낫겠지만 그럴 수도 없고...

 

p. 222..."소수의 인재가 나머지를 먹여 살린다"는 구호..우리에게는 너무나 익숙하지만 사실 이 주장을 서구 사회에서는 감히 입 밖에 내놓을 수 없는 '무엄한 말'이다. 이 말은 사실과도 거리가 멀다. 다수의 평범한 시민들로 구성된 사회는 '인재'들이 먹여 살려야 하는 '밥벌레 집단'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삶을 가능케 해주는 터전이다. 평범한 시민들은 그 '인재'들이 속한 교육기관에 물적, 인적 토대를 제공하고, 그들이 일하는 기업에서 생산되는 물건을 사주고 투자하며, 끊임없이 아이디어와 노동력을 공급해 주고 있다. 오히려 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이 소수의 '엘리트'를 먹여 살리는 셈이다. '누가 누구를 먹여 살리는가'의 문제는 단순한 수사학이 차원이 아니다. 이는 한 사회에서 기업과 학교가 져야 할 책임을 규정하는 대단히 중요한 논의이기 때문이다. 기업과 대학이 사회 없이 존속할 수 없다면 그들의 얻은 이익의 '사회 환원'은 '자선 행위'가 아니라 마땅히 되돌려주어야 할 빚을 갚는 일이다. 그러나 현실은 어떠한가? 시민들이 한 달만 물건을 사주지 않아도 도산할 기업들이 도리어 '국민들을 먹여 살린다'고 주장하거나 지역사회의 도움 없이는 존속할 수 없는 교육기관들이 지역 주민들을 이방인 취급해오지 않았던가. 감사의 주제와 대상을 구분하지 못하는 이들로부터 사회적 책임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여전히 "소수의 인재가 나머지를 먹여 살린다"는 구호가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 이미 상식이 되다시피 한 말이다. 아이들 입에서도 나오는 너무나 귀에 익은 구호다. '소수의 인재'가 되어야 한다고 끊임없이 아이들에게 주문을 건다. 비판 능력을 기르기 전부터 우리는 "소수의 인재'에게 고마움을 먼저 배운다. 그들을 동경하며 우상화한다.

 

p. 227...'엘리트주의'란, 수평적 차이를 수직적 위계로 착각하는 오류이자 감사해야 할 사람이 오히려 감사를 요구하는 무례함에 지나지 않는다.

 

p.229.. 미국의 학교와 기업들이 자신이 속한 사회를 위해 적극적으로 베풀고 헌신하는 것은 마음이 관대해서가 아니다. 그들 자신이야말로 사회의 가장 큰 수헤자임을 잘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고귀한 '희생정신'이 아니라 자신이 빚지고 있다는 사실을 올바로 아는 데서 시작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삼성을 비롯한 재벌과 이른바 '엘리트'들은 평범한 사람들에게 진 빚을 갚아야 한다. 언제나 이런 세상이 올까마는.

 

 

또 하나. 유대계 미국인들의 정치성향에 대한 그릇된 편견이 있는데, 미국 내 유대인들은 정치적으로 진보적 성향이 강하다고 한다. 히틀러가 유대인을 혐오한 이유도 그들의 종교와 개혁성향이었다고 한다.

 

p. 170...히틀러의 주요 정책기조는 '반유대주의' '반공' 그리고 '우익'이었다. 이런 나치 지도자의 눈에 유대인들은 이념적으로 용서받을 수 없는 '빨갱이'로 보였다. 미국에서도 파시스트적 반공주의가 기승을 부릴 때마다 유대인들의 진보성은 반유대주의적 차별의 빌미가 되었다.

 

그리고 기독교에 관한 내용.

 

p.191...미국의 기독교인들은 평균적인 미국인들보다 전쟁에 더 큰 지지를 보내고, 미국의 군사력 확대를 더 선호하며, 환경보호정책에 소극적인 반응을 보이는 등 비종교적 부분까지도 우익 정치인들과 성향을 같이 하는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

 

이러한 미국의 기독교계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우리 나라의 경우는 인용하는 것조차 부끄럽고 피곤한 일이다.

 

p. 196...한국 교회 대다수의 관심사는 자신의 영향력을 유지하고 확대하는 데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어떻게 하면 초대형 건물을 짓고 교인 수를 늘리는가다. (마이클 메커티어, '아시아에서 가장 기독교가 번성한 나라')

 

이런저런 내용을 옮기다보니 우리 나라의 소위 '지도층'이라는 사람들이 참으로 뻔뻔하고 몰염치한 사람들이라는 '뻔한' 생각이 들었다. 며칠 전 한겨레신문에서 읽은 글이 떠오른다.

 

'때때로 절망적인 기분 속에서 나는 내가 좋아하는 젊은이들에게 이민을 권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예를 들어, 대통령 관저 대신에 작은 농가에서 기거하며 손수 요리와 청소를 하고, 가난한 국민 다수와 같은 수준의 생활을 고집하는 철저한 공화주의자 호세 무히카 대통령이 있는 우루과이 같은 나라로 말이다.'( 김종철 <정치의 실패, 아이들의 죽음>에서, 2014, 5.7 한겨레신문)

 

 

 

(이라크 전쟁에서 사망한 군인들의 사진으로 만든 부시의 몽타주)

 

 

(호세 무히카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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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bina 2014-05-24 14: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많이 공감되는 내용입니다.
오래된 자본주의가 허물벗은 공산주의의 모습과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을 합니다
결국 나을 것이 없다는...
엘리트든 재벌이든 평범한 사람들에게 감사하는 것은 차치하고라도, 그들과 끈을 맺고 살아가야만하는 하청,또는 납품업자들과 공생하려는 자세라도 가져줬음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자신이 빚지고 있다는 사실을 올바로 알기는 커녕, 최소 비용, 최대 이익을 아래로 부터 얻으려는 그들의 생리가 싫습니다
동네슈퍼, 동네빵집까지 포식하려는 것이 소위 사회를 이끌어 가는 소수들의 현주소가 됐네요.
과연 자본제일주의의 끝은 어디일까요?

nama 2014-05-24 21:47   좋아요 0 | URL
선진자본주의 사회는 세습자본주의로 서서히 후퇴하고 있고 이에 대한 해결방법으로 누진적 글로벌 부유세을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이 요즙 설득력을 얻고 있다는데요. 글쎄 있는 자들이 기득권을 얼마나 양보할 지 두고볼 일입니다. 공생으로 갈지, 공멸로 향할지...
 

연휴 끝날. 며칠 만에 보는 신문이 반가워 찬찬히 읽는다. 평일에는 출근 준비하느라 조간신문을 석간으로 읽게 되는데, 그것도 큰 제목만  대충 읽고 마는데, 역시 연휴가 좋긴 하다. 오늘 6면 전체를 차지한 박명림 교수의 '국가의 정명과 정도를 찾자'를 밑줄 그어가며 읽다가 두고두고 다짐하는 의미에서 발췌해본다.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635716.html

 

19세기 초 프랑스 철학자 메스트로는, "모든 나라는 그 주준에 맞는 정부를 갖는다. (특히)민주주의에서 국민들은 그들 수준에 맞는 지도자를 갖는다."...정부와 지도자의 수준은 다시 우리의 삶(의 질)을 결정한다.

 

근본적 개혁을 해야만 한국적 삶과  사회는 건강하게 살아날 수 있다. 우선, 대통령은 하야를 각오할 정도의 책임윤리를 보일 필요가 있다. 국가 호통자에서 국정 당사자로 속히 내려와야 한다....그러나 진정한 국가혁신은 뿌리를 혁파해야 가능하다.

첫째, 이념주의와의 분명한 결별이다. 한국에서 반공이념은 종교에 가깝다. 국가의 최고 생존요소인 안보는 결코 약화되어선 안 된다. 그러나 반공주의는 안보 영역에 한정해야 한다.

둘째, 성장만능주의, 기업제일주의의 종식이다...한국에서 개별 삶의 안정성과 안전성이 최악 수준인 이유는 개인요인이 결코 아니라 사회구조 때문이다.

셋째, 법인과 개인의 관계를 인간 중심으로 변혁해야 한다...국가가 법치를 통해 '법인규제-개인보호'를 강화하는 새로운 사회계약을 설정해야 한다.

넷째, 무너진 법치의 회복이다...'법 앞의 평등'은 답이 아니다. 그것은 '법 안의 평등'이어야 한다. 법 앞의 평등은 '법 이전의' 부자유와 불평등을 유지하고, '법 안의'부자유와 불평등를 강화하며, '법 이후의' 부자유와 불평등을 영구화한다.

 

국민으로서 세금 낸 만큼 요구,감시,비판했으면 국민을 이렇게 헌신짝 취급하지는 못했다. 국민이 국가에 회초리를 들지 않으면 국가가 국민에게 회초리를 든다. 아니 국가는 종종 회초리를 넘어 몽둥이를 들며, 때로는 금번처럼 아예 죽음을 선사한다.

 

국민이 사적문제에 빠져 있다면 삶은 점점 더 남의 지배를 받는다. 공적 시민이 돼 똑바로 보고 말하며 병든 제도와 관행 전부를 뜯어고쳐야 한다. 사려하는 공적 시민이 되어 똑바로 보고 똑바로 말하자. 똑바로 참여하고 똑바로 연대하자. 그렇지 않다면 똑바른 삶도 똑바른 나라도 가질 수 없다.

 

 

 

김용옥교수의 글에서도 힘을 얻는다. "국민들이여, 거리로 뛰쳐나와라!"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635544.html?_fr=mt1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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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14-05-07 1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읽고 화나더라고요

nama 2014-05-07 18:03   좋아요 0 | URL
화를 제대로 내는 방법이 무엇일까요?.
 

오전 6시 40분쯤 집에서 출발, 7시 조금 넘어 안산화랑유원지에 마련된 합동분향소에 도착했다. 20km정도 밖에 되지 않는 멀지 않은 거리인데 이제서야 와보게 되었다. 벌써 사람들이 줄을 잇고 있었다.

 

입구에 들어서면 먼저 방명록에 이름을 적은 후 뭔가 한마디 써야 하는데 도무지 적절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미안함, 황당함, 분노, 무력감, 슬픔, 괴로움, 우울함, 원통함을 뭉뚱그려 그냥 '미안합니다.'라고만 썼다. 이제와서 이런 말들이 무슨 소용있나.

 

영정 사진과 위패가 진열된 분향대에 이르기 전에 영정배치도를 잠시 지나가도록 되어 있는데 마치 극장의 좌석표를 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일목요연하게 배열된 이름 밑에는 1반부터 10반까지 학급을 알리는 아라비아 숫자가 적혀 있었다. 숫자에도 슬픔이 묻어 있었다.

 

왼쪽부터 일반인, 교직원과 승무원, 그리고 단원고 학생들 순이었는데 가도 가도 분향하는 길이 끝나지 않았다. 어지러웠다. 꽃같은 아이들 사진이 너무나도 길게 이어지고 있었다. 끝이 안날 것처럼. 마치 학교에서 일상적으로 들여다보게되는 출석부의 사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A4 보다 약간 길쭉한 종이 한 면에 20여 명씩 사진을 붙이고 사진 밑에 번호와 이름을 쓰게 되어 있는데 마치 그런 출석부를 벽면에 쭉 붙여놓고 들여다 보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비현실적인 기분이었다. 이렇게나 많은 아이들이 한꺼번에 비명횡사하다니 그건 현실일 수 없었다.

 

함께 간 남편과 딸아이 모두 할 말을 잃고 조용히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어지러웠다. 그리고 화가 났다. 이 분노를 잊지 않을 게, 얘들아. 너희들을 기억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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