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히 1988년, 떨리는 마음으로 소설가 김동리의 수업을 들었다. 소설작법이라는 세미나 수업이었다. 지극히 수동적인 수업만 듣고 자란터라 세미나라는 수업 자체도 낯설었고 더더군더나 소설작법이라는 강의도 난생 처음이었다. 게다가 우리를 가르칠 교수는 우리나라의 대작가 김동리선생이었다. 여러모로 가슴 떨리는 수업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그당시 이미 칠순을 넘긴 김동리선생을 바라보는 우리의 설레임은 이내 실망감으로 바뀌었다. 선생은 고령으로 인해 귀가 어두워 학생들과 소통하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큰소리로 외치다시피 해야 겨우 소통이 되니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선생의 말씀도 요령부득이어서 요점이 잘 파악되지 않았다.

 

선생은 우리에게 실습삼아 과제를 내주었다. 아무거나 소재를 정해 한 문장으로 묘사해보라고 했다. 솔직히 나는 지금도 이게 뭔지 모른다. (이러니 글을 못쓰지...) 뭐가 뭔지 모르는 막연한 심정으로 한 문장을 써서 제출했더니 선생 왈, "뭔지 모르겠다." 하신다. 이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선생의 지도를 받은 내력이라면 내력이다. 학생중에는 이미 등단한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가 쓴 한 문장을 보신 선생은 "참 잘 썼다."라고 하시는데 역시 나는 감도 못잡았다. 뭐가 잘 쓴 글인지 못 쓴 글인지를.

 

기억이 정확한 지는 약간 자신이 없지만, 이 수업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김동리선생의 수업을 학생들이 거부했기 때문이다. 선생의 발언이 문제가 되었다. 무슨 내용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시대착오'적인 말씀을 하신 거다. 때는 1988년, 이미 민주화의 열기가 고조되어 글을 써도 5.18과 시대상황을 반영하는 글을 쓰지 않으면 매섭게 외면 당하는 시절이었다. 대학생 모두가 운동권 학생이라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축제 때도 검은 복장으로 관을 들고 행진에 참여했다. 특히 글을 쓴다는 문창과 친구들은 매우 철저한 의식화를 요구 당했다. 그런 상황에서 반민주적고 반시대적인 발언을 하는 교수들은 학생들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말씀을 잘 못한 죄로 두 분의 교수가 학생들의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그 두 분중의 한 분이 바로 김동리선생이었다. 이후로 이 두 분을 뵐 수 없었고, 나도 한 학기 수강으로 대학에서의 글쓰기 수강을 끝내고 말았다. 글은 누구에게 배워서 습득하는 게 아니고 혼자서 스스로 터득하는 것이라는 교훈을 되새기면서. 전혀 시도해보지 않은 것보다 시도해보고 후회하는 쪽이 인생을 풍요롭게 한다고 자위하면서.

 

 

요즘 세상을 어지럽게 하는 인물, 김평우가 김동리선생 아들이라고 한다. 1945년생이니 70세가 넘었다. 아버지인 김동리선생은 나이 70대에 시대착오적인 발언으로 강단에서 물러났다. 나이 들었다고 함부로 말하면 안되십니다. 귀가 어둡다고 자기 할 만한 하면 안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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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7-03-12 1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러니까 김동리 선생이 부친, 손소희 소설가가 모친이군요.
김동리의 등신불을 읽고 그야말로 소름끼칠 만큼 충격과 감동을 받기도 했었는데 말입니다.
나이 들어도, 귀가 어두워도, 정신만은 깨어있을 수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책 많이 읽는다고 되는 것도 아닌 것 같고, 공부를 많이 한다고 되는것도 아닌 것 같네요 휴...

nama 2017-03-12 21:19   좋아요 0 | URL
모친이 손소희 소설가인지는 모르겠어요. 김동리 선생은 세 번 결혼했으니까요. 물론 세 번째인 서영은 소설가는 아니겠지요. 88년 당시엔 서영은과의 관계가 입에 오르내렸어요.

나이들수록 마음 공부를 해야 하는데 쉽지 않지요. 나이 먹는 게 두려워져요.
 

 

 

 

부끄러움도 염치도 없는 그녀지만 그래도 양심상 스스로 물러나주기를 고대하고 고대했다.

기대와 기다림에 진저리나서 내가 대신 나가주고 싶었다, 가능하다면.

하마터면 내가 직장을 그만둘 뻔했다, 화가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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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7-03-10 1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그러기를 기대했었지요. 처음이자 마지막 기대였는데, 역시나 더군요.

이제 판결은 내렸고, 당연한 결과이지만 너무나 다행입니다.

nama 2017-03-10 13:19   좋아요 0 | URL
판결과정을 지켜보는 내내 가슴을 졸였답니다. 심장이 터지는 줄 알았어요.
일말의 인간다운 모습을 남겼더라면...서로 공감이 되는 인간다움이요.
 

 

제일 맛있는 밥은? 어렸을 땐 엄마가 해주는 밥이었고, 결혼 후엔 누군가 해주는 밥이었다. 그 누군가가 해주는 점심밥을 먹는 재미에 사반세기 넘게 직장생활을 그럭저럭 유지해왔다. 밥 먹으러 학교에 온다는 아이들처럼 나 역시 밥 먹으러 직장에 다녔다고나 할까.

 

그 맛있는 점심밥 대신에 이제는 혼밥을 먹고 있다. 오래 건강하게 살겠다고 몸부림치고 있는 것이다. 함께 먹는 동료도 없고, 따끈한 국물도 없고, 오늘은 뭘 먹을까, 하는 기대도 없다. 책꽂이와 컴퓨터, 각종 공문과 유인물로 가득한 책상 위에 도시락으로 싸온 음식같지 않은 음식을 올려놓으면, 말 그대로 먹고 사는 게 무엇인지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맛있는 음식으로 넘쳐나는 세상에서 결코 맛으로 먹는 음식이 아닌 점심을 먹는 건, 적잖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고 마음을 비우는 일이다. 몸을 비우자고 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런데 달갑지도 않게 생각이 많아진다. 토마토를 한 입 베어물 때도 마음이 묵직해지고 견과류를 하나씩 집어 입 안으로 넣을 때도 손의 무게가 느껴진다. 좋게 생각하면 순간순간이 깨어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렇게 먹는 행위에 생각이 얹혀지다보면 밥 먹는 시간이 길어진다. 오늘은 40분이나 걸렸다. 흠,나쁘지 않다. 누군가 해주는 점심밥은 하루의 일과중 처리해야 할 업무 같은 것이기도 했는데, 혼자서 느긋하게 먹는 혼밥은 그대로 깨어있는 시간이 되기도 한다. 낯설지만 새로운 삶의 단면을 느낄 수 있다. 외롭고 쓸쓸하지만은 않다고 말하고 싶은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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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눈부신 친구 나폴리 4부작 1
엘레나 페란테 지음, 김지우 옮김 / 한길사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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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적 친구들을 떠올리게 하는, 평범하면서도 섬세한 이야기. 누가 ‘눈부신 친구‘인지 계속 궁금해져서 2권을 읽고 싶네. 친구들과 함께 읽으면 모두 소설 속에 빠져들어 자신들의 이야기를 쓰고 싶다고 할지도...평범한 개인사를 다룬 값진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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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7-02-26 16: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따뜻한 주말이예요.
nama님 편안하고 좋은 일요일 보내세요.^^

nama 2017-02-26 20:02   좋아요 1 | URL
모처럼 따사로운 햇볕을 쬐였답니다.
서니데이님도 즐거운 주말 되시길 바랍니다.^^
 

 

통영은 어딘가와 닮았다.

 

(미륵도 정상에서 바라본 통영시내)

 

미륵도 정상에 오르는 방법은 케이블카를 타고 9분 능선까지 간 후 계단을 따라 20여 분 올라가면 된다. 통영시내가 내려다보이는 이 풍광, 어딘가와 매우 닮았는데....빅토리아 피크에서 바라본 홍콩 구룡반도와 홍콩섬이 떠올랐다. 가운데 바다를 경계로 위쪽은 구룡반도, 아래쪽은 홍콩섬의 자태가 바로 이런 모양이었다. 지금까지 미륵도 정상에 오른 건 이번이 처음이지만 빅토리아 피크는 그간 서너 번쯤 올랐었다. 순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멀쩡한 우리집 두고 멋져 보이는 남의 집 침 흘리며 바라본 기분이 이럴까.

 

 

(장사도에서 바라본 남해안의 작은 섬들)

 

장사도, 통영에서 유람선을 타고 40여 분이면 도착하는 곳이다. 통영에 오기 전까지 장사도라는 섬이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인터넷 검색조차 해보지 않고 통영에 갔으니... 어떻게 되겠거니...한겨울에 유람선이 뜰까 싶었는데 생각보다 여행객이 많아서 놀랐다. 흠, 어떻게들 알고 왔지? 유람선 21,000원+ 장사도 입장료 10,000원. 남편과 둘이 갔으니 순식간에 62,000원 거금이 들어갔다. 배에서 내리니 <별에서 온 그대> 촬영장소였노라는 입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별 관심 없음. 시큰둥했지만 마음 속은 이미 설레고 있었다. 캬, 예쁘다.

 

 

 

섬 전체가 동백꽃 천지다.

 

 

꽃송이째 떨어지는 동백꽃은 언제 보아도 경외감이 든다. 마지막 가는 길이 추하지 않고 비겁하지 않고 치사하지 않다. 명예와 자존심을 지키는 꽃이구나.

 

 

 

떨어진 동백꽃은 애잔하지만 나무의 새순은 싱그럽다.

 

 

 

분재원의 모과나무와 썩어가는 모과. 예전에는 예쁜 열매가 눈에 띄었는데 요즘은 이런 열매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내 모습 같아서겠지.

 

 

 

장사도를 둘러싼 작은 섬들에는 각기 이름이 있다. 아름다움에 넋을 잃고 하염없이 바라본다. 어디였더라, 닮은 곳이? 예전에 다녀왔던 오키나와가 떠올랐다. 아, 또 이 버릇. 왜 멋진 곳을 보면 다른 나라와 비교하게 되는지... 같잖은 허영심이 가소롭다. 세상의 맛있는 음식을 먹겠다고 여기저기 다녀보지만 마지막에 그리운 건 엄마가 만들어주시던 소박한 두부찌게였음을 뒤늦게 깨닫게 되는 심정이 이렇겠지.

 

 

 

 

통영 강구안에는 중앙시장이 있고 시장 옆에는 이탈리아의 유명한 지명을 빌어온 모텔이 있다. 모텔 창문에서 바라본 강구안 밤 풍경, 자세히 보면 사진을 찍고 있는 내 모습이 유령처럼 어른거린다. 이곳은 또 어디를 닮았더라. 흠, 이곳은 말레이시아 말라카 항구를 닮았다. 어수선한 소래포구와 달리 이곳은 깨끗하고 단정하다. 밤새 질리도록 창밖을 바라보았는데 절대로 질리지 않았다.

 

 

 

통영 유일의 국보(국보 305호) 세병관. '세병(洗兵)'이란 '은하수를 끌어와 병기를 씻는다'는 뜻이라 한다. '평소에는 은하수를 끌어와 병기를 씻으며 운치를 즐기는 세병관이지만 전시에는 洗의 물수를 떼어내 버리고 먼저 나아가 싸우겠다는 의지를 담은 先兵館이 된다'고 했다 한다. 이름도 멋지지만 건물 또한 매우 인상적이다. '1604년 제1대 수군통제사로 임명된 이순신 장군이 한산도에 설치했던 본부가 통제영'이었는데 이 통제영 안에 세병관이 위치해 있다. 400여 년 된 건물이다.

 

한무리의 여행객들에게 설명을 해주던 해설사에 따르면, 통영 사람들은 다리가 굵은 아가씨들을 보면 '세병관 기둥 같은 다리'라고 한단다. 내 다리와도 비슷하군.

 

 

또 버릇이 나온다. 그렇다면 이곳은 어디와 닮았노? 아무리 머리를 궁글려보아도 딱히 떠오르는 곳이 없다. 그냥 세병관이다. 통영을 고향으로 둔 사람들이 자꾸만 부러워진다. 다른 것 다 제치고 세병관 하나만 있어도 통영 사람들은 행복하겠다 싶다. 이 너른 마루에 올라 저 튼튼한 기둥에 기대어도 웬만한 시름은 씻은듯이 사라지지 않을까. 가히 은하수를 끌어와 마음을 씻을 수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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