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바지 세상을 점령하다]의 서평을 써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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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바지 세상을 점령하다 - TBWA KOREA가 청바지를 분석하다
TBWA KOREA 지음 / 알마 / 2008년 12월
평점 :
품절
내게도 청바지가 있었다. 3여 년간 입던 단벌 청바지의 밑자락이 서서히 해지더니 끝내 "부지직" 소리를 내며 한순간 걸레처럼 너덜너덜해져서 더 이상 입을 수 없는 몰골이 된 지도 두어 달. 단벌이라서 야멸차게 버리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입지도 못하면서 엉거주춤 걸어놓고 보면서 새로 한 벌 구입하면 정리해야지 하고 있었다. 입지도 못할 옷을 버리지 못하는 심정을 아실런지...한국인으로 태어나서 그것도 평균과는 거리가 한참이나 먼 기럭지를 가지고 있는 내가, 내게 맞는 청바지를 만나기를 희망한다는 것은 말 그대로 언감생심이다.
그렇다고, 옷이 내게 맞지 않는다고, 남들 다 입는 청바지 하나 쉽게 살 수 없다고, 스키니 바지나 미니 스커트 한 번 평생 입어보지 못했다고해서 절대로 기 죽거나 의기소침해지지는 않는다. 단지 세상의 표준이라는 게 나와 맞지 않을 뿐, 나는 나대로의 표준을 갖고 있다고 나 자신을 다독이며 살아왔다. 어쩌겠는가. 청바지 하나 제대로 마음대로 입을 수 없다고 세상과 등질 수는 없지 않은가.
입지도 못하고 버리지도 못하는 너덜거리는 청바지 한 벌 앞에 놓고 이렇게 나를 다독이던 차에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처음엔 '이것도 책이야?', '어디 청바지 회사에서 비매품으로 돌리는 홍보책자인가?'했다. 언젠가 무슨 통신사에서 나온 책자가 이 책과 비슷한 외양을 하고 있었다. 그러고보니 이 책을 만든 사람들이 광고회사 직원들이란다. 그제서야 좀 이해가 간다. 어쩐지...
그래서인지 이 책은 고리타분하지 않다. 같은 음식도 담는 그릇과 모양에 따라 맛이 다르게 보이고, 같은 옷도 입는 사람의 개성에 따라 다르게 보이듯 이 책은 한마디로 접시 사용법을 알고 있고 맵시 내는 방법을 알고 있다. 물론 처음에는 중학생들 숙제 마냥 알록달록 모양내고 글자 오려 붙인 듯해서 별 기대없이 읽어나갔는데 읽다보니 손에서 책을 뗄 수 없게 되었다. 아, 그렇구나. 청바지로 세상을 이해할 수도 있구나! 하는 놀라움 내지는 발견.
나 자신에 대한 또 하나의 발견도 있었다. 미군기지가 있는 지역에서 성장하고, 대학에선 영문학을 공부하고, 세상을 조금씩 이해함에 따라 미국이라는 나라를 내 마음 저편에서 하나씩 하나씩 지워나가는 내적 투쟁 내지는 해독 과정을 거쳐 이제는 왠만큼 정화 단계에 접어들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멀었다는 것을 이 책은 콕 찍어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 리바이스 청바지와 나이키 운동화를 신고, 할리우드 영화를 보고 스타벅스에서 커피마시는 것을 좋아하는 청년이 반미 촛불 시위에 참석하는 것이 과연 말이 되는 것일까?"(이 부분은 쪽수를 매긴 숫자가 없다)
"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미국의 정치적 이념인 자유와 평등이 얼마나 이중적인지를, 미국이 외치는 자본주의는 미국내 소수 1퍼센트만을 위한 것임을, 미국의 기업들이 얻는 이익이 빈곤국의 어린이 노동력 착취를 기반으로 한다는 것을, 미국이 한 해 내뿜는 이산화탄소 양이 얼마나 어마어마한지를, 그러나 우리는 청바지 앞에서 이 모든 것을 망각한다. 이것이 청바지가 살아남을 수 있는 힘이며, 청바지가 완벽한 팍스아메리카나의 산물인 이유다. 청바지에는 더 이상 미국의 이념이 담겨 있지 않다. 오로지 내 이념이 담겨 있을 뿐이다. 그렇게 청바지는 미국의 이념을 넘어섰다."(P.117)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바지는 "미국 정신의 결정체"이다. 또한 청바지는 권력이다.
"특정 청바지를 입을 수 있는 스펙이 바로 권력이다."(p.223)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청바지는 과연 얼마나 될까. 청바지를 보고 있는 여성들이 청바지를 고르는 것일까. 청바지가 이 여성들을 고르는 것일까?..나는, 나의 청바지에 의해 선택되었다"(p.233)
이 책을 단숨에 다 읽고 드디어 오늘 청바지를 사러 나갔다. 눈에는 온통 청바지만 보였다. 겨우 겨우 한 벌 찾아낸 청바지는 대대적인 밑단 수선을 거쳐 드디어 내 손에 들어왔다. 그리고 내가 선택한 청바지는 여지없이 나를 드러내고 설명해주고 있었다. 나란 존재가 세상의 표준에는 절대 못미치지만 그래도 세상 한 구석에서 아직 살아있음을, 청바지에 두 다리를 끼워 넣는 나는 아직도 내가 나 자신의 표준임을 쓸쓸히 확인할 뿐이다. 미국의 이념을 넘어선 내 이념이 담긴 청바지라고나할까. 청바지의 이 도도한 물결을 절대로 벗어날 수 없다니....청바지 세상을 점령하다...멋진 제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