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하면 살고 차가워지면 죽는다
김종수 지음 / 정신세계원 / 2009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산이 좋아 산에 사네>를 읽다가 발견한 책이다. 애초에 의학과는 멀어보이는 사람이 산에서 살며 스스로 터득한 건강법이라고나 할까. 때론 거칠고 황당한 부분도 있으나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은 단순하고 분명하다. 책 제목 그대로 "따뜻하면 살고 차가워지면 죽는다"이다.  

'생명온도'가 살아있어야 건강을 유지할 수 있으며 그 생명온도를 지키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몸을 따뜻하게 해야한다는 주장을 동어반복적으로 수없이 되풀이 설명하고 있다. 옳은 얘기, 라는 생각으로 내내 읽어 내려갔다. 특히 뜨거운 물을 마시는 것 하나만으로도 건강을 챙길 수 있다는 말에 깊은 공감을 했다. 그 단순 명쾌한 처방에 감동의 물결 같은 것도 밀려왔다. 

뜨거운 물을 마셔가며 단식을 할 경우 배고픔을 느끼지 않고 할 수 있다는 말에 내친김에 한 번 해보았다. 두 끼 정도 가지고는 실험이 안되는 지, 의지가 확고하지 못한 탓인지. 방법이 서투른지 하여튼 배고픔은 가시지 않았다. 다시 날 잡아서 해봐야 겠다. 한번 몸에 밴 습관을 바꾸기란 여간 힘든 게 아니다,라는 것만 확인했다. 

건강을 생각하며 건강 서적을 읽는 일 따위, 내게는 없을 줄 알았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한권 두권 읽기 시작했다. '마이리스트'를 만들어봐도 좋을 성싶은데 왠지 징그럽다. 흠, 나이를 먹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다 이거겠지. 멀쩡하던 이빨마저도 하나 둘 외피를 두르게되다보니 사실, 약간 우울해지기도 한다. 건강이 무너지는 것, 이제 시작에 불과한데...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물을 마시는 습관을 고등학교 때부터 해왔다. 물 마시기는, 그 답답하던 학창시절 내내 툭하면 위염으로 고생하면서 나름 선택한 건강법이었다. 효과는 있었다고 본다. 그 후 한동안 위장약을 먹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역시 학교라는 울타리에 갇히게되자 - 이번에는 학생의 신분에서 벗어났지만 - 위장병은 말 그대로 지병이 되어버렸다. 평생 학교라니...하는 자조섞인 한탄과 함깨 말이다.(그러나 나는 늘 학교가 두렵다.) 

어느 책에선가 '음양탕'이 효과가 있다하여 한동안 음양탕을 마시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었다. 뜨거운 물에 찬물을 섞어 마시며, 손쉽게 만들 수 있는 정수기라는 문명의 이기에 얼마나 고마워했는지 모른다. 그러다가 이 책을 읽고 방법을 바꾸었다. 무조건 뜨거운 물로 시작하는 것으로 말이다. 사실 찬물도 약간 섞지만 대체로 전에 마시던 음양탕 보다는 온도를 높였다. 더 두고봐야겠지만 약간의 변화가 있긴 있다. 배변 보기가 확실히 달라진 것이다. 원활하다, 라는 표현이 딱 어울린다고나할까. 

어쨌든, 몸으로 체득한 사람의 건강법에 한번쯤 귀 기울일 만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산이 좋아 산에 사네 - 산골에서 제멋대로 사는 선수들 이야기
박원식 / 창해 / 2009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 속에 나오는 사람들을 일일이 인터뷰했을 저자의 노고가 먼저 떠오른다. 나름 재미있는 작업이었을 듯싶다. 더군다나 산 속에서 은둔자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을 들여다보는 재미까지 있었겠다 싶다. 

한마디씩 툭툭 던지는 질문은 단선적이고 투박하나, 그 질문에 답하는 사람들의 진지함과 솔직함이 그대로 묻어 나온다. 호기심 어린 질문에선 나도 품었을 듯한 경박함이 느껴져 재미있었다. 질문은 시원하고 대답하는 사람들에게서는 산 그림자 같은 게 느껴졌다. 

그러나, 책의 초반부부터 중반부까지는 저자의 감상이나 설명이 지나치게 수사적이고 문학적이어서 사실을 전달하는 데는 과히 매끄럽지 못한것 같다. 좀, 포장이 요란스럽다고나 할까. 뒤로 갈수록 그런 경향이 줄어들어 끝부분에서는 오히려 아쉬움이 남았다. 벌써 다 읽었나,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으니까. 

아쉽다면, 산에 사는 사람들의 글을 직접 읽을 수 없었다는 점이다. (시도해볼 만하지 않을까?) 몇 쪽이나마 그들의 육필을 직접 접했더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나마 산에서 사는 듯한 기분을 낼 수 있어서 좋았다. 그거면 되지 않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선생하면서 쪽팔리는 일 중의 하나가 이럴 때이다. 

툭하면 무단 결석하는 한 여학생이 있다. 일주일만에 등교하고서도 한마디 변명조차 하지 않는다. 너무나 당당한 태도에 감히 더 이상 말을 붙여보지 못한다. 눈치를 보는 입장에 서는 것은 선생인 나다. 

이러저러한 이유로 그 학생의 어머니에게 전화를 건다. 전화, 절대로 받지 않는다. 그러면 문자를 보내본다. 절대로 답신 한 번 하지 않는다. 딱 한 번 통화한 적은 있다. 아마도 실수로 얼떨결에 받았음에 틀림없었을 것이다.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 이후로는 절대로 전화에 응하지 않는다. "전화주십시오"라고 눈치를 보며 살살 문자를 보내보는 것은 선생인 나다. 

나의 이런 무능에 보다못한 학년 부장이 한 번 거들고 나왔다. 이판사판 귀싸대기에 온갖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 한판 맞붙었다. 결국 녀석이 두 손 들었다. 그 후 얼마동안은 고분고분해졌다. 이런 기싸움, 나는 절대로 하지 못한다. 나는 말싸움조차 싫어해서 절대로 싸워야하는 상황에 빠져들지 않는다. 기싸움으로 학생들을 다스려야하는 경우, 나는 정말 선생하기 싫어진다. 

어제. 이 녀석이 무단 조퇴를 해버렸다. 중학교 2학년짜리가 너무나 당차고 맹랑하다. 오늘 아침, 심호흡을 하고 녀석에게 묻는다. "한마디쯤 해야하지 않겠니?" 돌아오는 답변에 그냥 모든 걸 접기로 했다."어떤거요?"  

몇마디 말로도 충분히 지도가 가능한 대부분의 나머지 아이들을 위해 솟구치는 부아를 꾹꾹 눌러 담는다.

악다구니로 학생과 싸워야하는 일, 나는 정말 자신이 없다. 고상하게 대화로 아이들을 지도한다는 것도 낯 간지럽고 우스워서 그것도 못하지만 이런 소모적인 전투(?)에도 절대로 적응하지 못해 매번 쩔쩔맨다.  

아, 당신이라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나는 예비고사 세대다. 커트라인이라는 게 있어서 지역별 합격, 불합격 점수가 분명했었다. 보통 340점 만점에 200점은 넘어야 서울에 있는 대학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는데 이를 가르는 기준이 바로 커트라인이라 부르는 점수였다. 당연 지방의 커트라인은 200점이 채 되지 않았다. 그리고 진학하고자 하는 대학에서 실시하는 본고사를 치르고서야 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다. 

내가 예비고사를 치르고나서 2년 후, 학력고사라고 불리우는 시험이 예비고사를 대체했다. 그리고 한참 후에 수능이 생겨났다. 대학입시와는 관계없는 시절을 보낼 때라서 정확하게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른다. 굳이 궁금하지도 않다. 

그리고 교직에 들어온 이후 몇 번인가 대학입학관련 시험에 감독으로 차출되었다. 2010년 수능감독으로, 그러니까 어제도 그 몇 번째의 시험감독으로 차출되었는데 모처럼이어서 그런지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고 머리가 무거워졌다. (감히)수험생 못지않은 긴장감을 풀 수 없는 사람이 바로 시험 감독관이라고 말할 수있다. 감독을 해보면 이 말에 수긍이 갈 것이다. 감독 잘 못하면 일년치 재수 비용까지 물 수도 있다는 사전 교육까지 받고나면 이건 스릴만점의 초특급 영화 한 편 보는 것 이상이라고나 할까. 흠,온몸으로 보는 영화가 있다면 모를까....과장이 좀 심했다. 

하여튼 초긴장 무료함(이 말 뜻을 아실런지)의 감독을 모두 마치고나니 이미 날은 어두워지기 시작하고 있었고, 학교 교문밖 도로엔 학부모의 차량들로  빈 틈이 없었고, 학부모들이 초조하게 서성이며 자녀들이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수능시험은 하나의 거대한 시스템이며 세계다. 그것도 교묘하게 진화하는 세계다. 예비고사에서 학력고사로, 다시 수능으로 진화하면서 확실하게 권력을 틀어쥐고 있는 세계다. 인간이 만든 제도에 옴짝달싹 못하고 매어있는 꼴이다. 생각해보면 굉장히 한심한 세계임에 틀림없는데 감히 이 세계를 이탈할 꿈을 꾸지 못한다.  

영어를 예로 들어보자. 예비고사 시절의 영어 문제와 지금의 영어 문제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다. 원시성에 가까운 예비고사를 치렀던 세대에겐 지금의 문제 수준이 가늠이 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시험을  치르기 위해서는 어려서부터 체계적인 학습과 훈련이 되어있어야 한다. 고도로 진화되고 발달된 학습 덕택에 시험 수준이 상당히 높은 단계에 진입했다. 이게 과연 바람직한 일인가? 

몇 년에 한번씩 수능 감독을 하게 되면 그때마다 깜짝깜짝 놀라며 수준이 한없이 높아진 문제에 잠시 넋이 빠져버린다. 이래도 되는가?하고. 시험이라는 이 비본질적이고 물질적이고 몰인간적인 거대한 권력 앞에 그저 눈치나 보며 하나라도 더 정답을 맞추기위해 온갖 굴레와 비굴함을 언제까지나 참고 견뎌내야하는 것인지, 생각해보면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이다. 그것도 자자손손 대대로. 언제까지나. 

참으로 재미없는 세상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남자한테 차여서 시코쿠라니 - 서른 살 오핸로 혼자 걷는 1,400km
김지영 지음 / 책세상 / 2009년 9월
평점 :
절판


가볍지 않은데 가볍고, 무겁지 않은데 무겁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