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100쪽 가량 읽었을 때,
- 카잔차키스의 책을 모조리 읽고 싶다. 이 작가의 책을 모두 읽기 위해서라면 당장 퇴직해도 여한이 없겠다. 아, 빨리 퇴직하고 싶어.
200쪽 가량 읽었을 때,
- 역시 대작가야. 어, 내 생각이랑 닮았네, 우와...
300쪽 쯤에선
- 흐흠, 이 챕터는 건너뛰자.
그러다 셰익스피어 부분에선,
- 번역이 문제인가, 내 독해력이 문젠가. 졸립다. 좀 자고보자.
번역본을 읽는 게 점점 더 어렵게 느껴진다. 그렇다고 원본을 술술 읽을 정도의 실력은 못 되고... 거장의 책은 좀 다르긴 하다. 한 권을 마치 몇 권의 책처럼 읽게 된다.
이 책에 쓰인 어떤 부분을 남편에게 얘기해주다가 중간에 말이 막혀 끝을 흘려버린 적이 있다. 제대로 기억하기 위해 옮겨본다. 영국에서 왜 그렇게 언덕마다 양들이 풀을 뜯게 되었는 지를 설명해주는 내용이다.
환경이 어찌나 불결했던지 전염병이 돌 때마다 사람들이 쓰러져 나갔다. 14세기에는 끔찍하기 짝이 없는 <흑사병>이 돌았다. 먼저 아시아에서 시작된 병은 1347년에 키프로스를 덮쳐 쑥대밭으로 만든 다음 그리스, 이탈리아, 북아프리카로 퍼졌고 1348년 1월에는 프랑스까지 올라가 8월에 영국 해협을 건넜다. 모든 나라들이 결딴났다. 죽은 사람들을 묻어 줄 사람조차 살아남지 못한 지역들도 많았다. 영국의 4백만 인구 중에 살아남은 사람은 250만에 불과했다.
때로 <운명>의 작용이 아주 미묘하듯이, 이 끔찍한 참사가 대영 제국을 형성하는 주요 요인의 하나로 작용했다. 유린된 마을에서 살아남은 이들은 모두 거액의 재산을 챙겼다. 버려진 지역의 공동 삼림과 들, 목초지를 자기들끼리 나누어 가졌다. 영지를 경작해 줄 일꾼을 찾을 수 없게 된 영주들은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땅을 임대하거나 처분하여 빵 값을 만들었다. 이처럼 뜻밖의 토지를 손에 넣게 된 농민들은 그 땅을 모두 경작할 능력이 없었으므로 양 사육에 뛰어들었다. 그 바람에 양 떼가 엄청나게 불어났다. 영국은 순식간에 다량의 양모를 생산하는 나라가 되었고 그것을 팔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해외 시장으로 눈을 돌렸다. 이제 예전처럼 고립된 섬나라로 머물 수 없게 된 것이다. 당장 경제적으로 다른 나라들의 시장이 필요해진 영국은 양모를 운반할 상선들과, 상선을 보호하고 바다를 장악할 군함들을 함께 제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그들의 운명은 바다를 장악하느냐 못하느냐에 달려 있었다.
이것이 바로, 흑사병에서 목양의 필요가 생겨나고, 목양이 풍부한 양모를 낳고, 이 풍부한 재화가 상선과 군함들이 탄생하게 된 내력이다. 그리고 이 함대들이 대영 제국을 낳은 것이다!
이어서 이어지는 표현도 멋지다.
운명은 단기간 내에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1시간 단위가 아니라 백 년 단위로 움직인다. 바로 이것이 <운명>이 작용하는 미묘한 방식이다. 따라서 아무리 큰 참사라도 재난이라 부를 수 없고 아무리 큰 행복이라도 행복이라 부를 수 없다. 먼 훗날 그것들이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전혀 예측할 수 없으므로.
처음에는 꼼꼼하게 읽다가 뒤로 갈수록 대강 읽고 말았지만, 그렇다고 다시 읽게 될 것 같지는 않고. 위에 옮긴 부분이라도 정확하게 기억하고자 한다. 영국의 언덕마다 하얗게 구더기처럼 깔려있는 양떼를 비로소 이해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