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응답하라1988'. 그나마 주말에는 이 드라마가 낙이었는데 어제 결방되는 바람에 맥이 풀렸다. 드라마 방영은 없고, 딱히 할 일도 없고, '1988년'하면 떠오르는 게 뭐가 있나 생각해보다가 골방에 처박아둔 전축이 떠올랐다.

 

정확히 1988년에 80만 원 주고 구입한 Inkel 제품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철 없던 시절이었다. 대학 졸업한 지 5년 째. 간간이 기간제로 근무하거나 과외 따위로 일을 하긴 했으나 미래가 막연하고 불안한 시절이었는데 대담하게도 학사편입으로 대학을 다시 들어간 해였다. 그것도 밥벌이와는 전혀 관계없는 문창과였다. 게다가 위의 전축은, 순전히 부모님을 졸라서 구입한 것이다. 그러니까 백수 주제에 대학을 다시 들어가고 값 비싼 오디오를 소유하는 호사를 누렸다는 얘기다. 부끄럽지만 그 대책없는 낭만성으로 똘똘 뭉쳐있던 시기가 바로 1988년이다.

 

물론 그 후 정신이 돌아오긴 했다. 1989년 가을에 아버지가 뇌졸중으로 쓰러지시고, 이제는 안 되겠다 싶어 머리 싸매고 공부해서 어엿한 직장인이 되긴 했다.

 

돌이켜보면 1988년이 내게는 황금기였다. 무엇보다 부모님이 모두 건강하셨다. 부모님 슬하에서 편안히 살았던 마지막 해였다. 이후 아버지의 발병과 별세의 과정을 겪고, 집을 떠나 독립체로 살아가기 시작했다. 이제는 어머니마저 돌아가시니 '회한'이란 단어의 의미가 절절히 다가오는 시절이 되었다.

 

나는 물건에 애착을 갖거나 집착을 하지 않는 편인데 유독 저 전축만은 어쩌지 못하고 가지고 있다. 턴테이블의 바늘이 고장나서 저렇게 음반을 올려놓고 음악감상을 즐기지도 못한다. 두 개의 스피커도 크기가 만만치 않아서 공간을 많이 차지하고 있으니 차라리 애물단지라고 해야겠다. 그런데도 이 물건은 차마 버릴 수가 없다. 부모님이 이 세상에 계시지 않은 쓸쓸함을 이 전축이 어루만져 주는 것 같아서다. 저 전축을 볼 때마다 나의 형편없는 어리석음이 떠오르지만 기꺼이 막내딸의 소원을 들어주셨던 아버지와 어머니의 넉넉한 자애로움이 떠오른다. 다시는 오지 않을 1988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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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1-03 21: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1-03 19: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1-03 21: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서니데이 2016-01-03 17: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의 인켈 오디오 세트 가격도 고가이고 상당히 컸던 기억이 나요. 바늘이라도 고쳐서 음악 들으시면 좋을텐데, 요즘은 그것도 어렵더라구요.
nama님, 오늘은 새해 처음 맞는 일요일이에요. 편안한 저녁 되세요.

nama 2016-01-03 20:00   좋아요 1 | URL
턴테이블을 망칠 각오로 바늘에 손을 대볼까 하다가 그만두었어요. 언젠가 기회가 오겠지요.~~

라로 2016-01-03 18: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응팔이 결방했어요? 몇 회로요?? ㅠㅠ

nama 2016-01-03 20:21   좋아요 0 | URL
17.18회 결방이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