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더위가 한풀 꺾일 무렵, 예전에는 이 무렵이 되면 친구들과 포도밭에 가곤 했었다. 아쉬운 방학을 마무리하는 행사였다고나 할까. 80년대 얘기다.
한때 포도밭이 있었던 그 동네에는 아직도 내 친구의 부모님이 살고 계신다. 평생 농사를 지으시며 다섯 명의 자식들을 모두 대학에 보내셨다. 철없던 중학생 시절, 나는 그 친구네 집에 툭하면 놀러가곤 했는데 친구 엄마는 한번도 귀찮은 내색을 하지 않으셨다. 점심 무렵에 놀러가면 밭에서 일을 하시다가도 다시 집에 오셔서 새 밥을 해주시곤 했다. 그게 쉽지 않은 대접이었다는 것을 어른이 되어서야 깨달았다.
그 친구네 집으로 가는 길은 이랬다. 집-교회- 우체국-버스정류장-기찻길 건널목-밭길-산길-군부대 초소-밭길-논길-친구네. 걸어서 30~40분 걸렸다. 어느 해 겨울방학엔 스케이트가방을 어께에 메고 매일 그 친구네 집으로 갔다. 어느 해 여름에는 그 친구방에서 밤새 수다를 떨며 날을 새우기도 했다.10대와 20대에 걸친 10여 년 동안 그 친구와 그 친구네집은 내 외로움을 달래주는 공간이었다.
내가 살던 고향에서 유일하게 좋아했던 공간이 되어주던 그 친구네집이 아직도 그대로 있다. 그리고 한 때 수박밭이었던 곳이 이제는 포도밭이 되었다. 포도밭이 생기니 친구들이 다시 모이기 시작했다. 오늘 그 친구네서 옛친구들을 만나 포도를 먹고, 깻잎을 따고, 고추를 땄다.
나는 아무래도 내 친구보다 내 친구의 집과 친구네 가는 길을 더 좋아하고 있는 것 같다. 내 친정 같은 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