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의 시대
장윈 지음, 허유영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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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랭보의 시를 블로그에 필사를 하면서 돌연 국내 시에 눈길을 돌리다 시인 박인환과 김수영의 작품들을 몇 차례나 반복하여 읽었던 적이 있었다. 아니 좀 더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2004년도에 EBS에서 방영했던 '명동백작'이라는 문화사 프로그램을 몇 차례 다시보기로 접하면서 부터였다. 난해하고 허무할거라 생각했던 시에 대한 선입견은 김수영의 「풀」이라는 시로 하여금 왈칵, 눈물을 쏟아내게 하기에 충분했다. 시는 그저 운율과 심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닌 형용할 수 없는 어떠한 울림과도 같은 고요한 외침이었다. 닥치는대로 읽는것이 아닌 마음에 고이 담아 쌓을 수 있는 문학은 단연코 시 뿐이다. 불안한 시대를 시로 노래하던 박인환의 구슬픈 선율이 가슴 깊이 먹먹함으로 그득해지는 찰나의 감정은 그 어떤것으로도 비할 수 없는 깊은 슬픔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소설 「길 위의 시대」를 마주하기 전, 훑어보기 조차 하지 않은 탓에 박범신의 「비즈니스」와 같이 시대 고발적인 소설인 줄만 알았지, 낭만과 순수가 공존하는 소설인 줄은 가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국외작품은 달가워하지 않는지라 별뜻없이 펼친 소설은 단박에 무심히 잊고 지냈던 박인환과 김수영의 시어들이 눈 앞에 잘게 토막되어 펼쳐지게 했음은 물론, 소설 속에서나마 시인을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한량없이 페이지를 넘기는 손길이 가벼웠다.

 

 소설 「길 위의 시대」 속엔 낭만의 시대가 펼쳐진다. 시를 쓰는 사람이라면, 문단의 거장이든 무명이든 환대받던 시절의 낭만이 춤을 추며 그들 주위를 배회하던 때, 대학 졸업반이었던 천샹이 시인 망허라는 사람과의 하룻밤의 정을 통하게 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작가가 말했 듯, 인간의 본성과 금기의 충돌은 구태여 80년대로 거슬러 오르지 않아도 어느 시절이든 존재하기 마련이다. 망허의 떠남 역시, 시인이라면 으레 그럴수도 있는 환멸로 인정 될 수 있듯이 말이다. 하룻밤으로 인한 천샹의 임신과 천샹의 모든 상황을 품어주는 이와의 결혼은 마냥 낭만적일 수 만은 없다. 시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천샹이 가슴안에 세월만큼이나 쌓았을 망허가 아닌 시인에 대한 그리움은 결국 거짓말로 인한 파국을 맞게 되기 때문이다. 아이를 낳고도 젖이 돌지 않은 천샹의 극진했던 노력은 모성애가 빚어낸 사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믿고 그리워했던 시인 망허의 아들이 아님을 알고는 단박에 수치감과 자괴감, 천샹 자신의 생 전체를 부인하게 만들었다. 아이를 죽이려하고 스스로 생을 마감하려했던 천샹의 파괴는 자신이 낭만이라 믿었던 시대에 대한 배신으로 몰락하게 된다.

 

 천샹이 믿었던 시인 망허의 삶은 천샹과는 다르게 순수의 시대를 걷고자 한다. 우울하고 융합되어지지 않았던 현실을 도피하여 떠난 망허의 방랑은 산베이의 작은 도시에서 자신의 강의를 들은 적이 있다는 예러우와의 만남에서부터 시작한다. 예러우 역시 천샹과 같이 망허가 시인이라는 것에 매료되어 하룻밤을 보내지만 시인에게는 바랄 수 없는 것들에 대한 결여로 망허를 떠난다. 순수는 결코 희고 맑음이 아니다. 찬란한고 빛이 머무는 순수, 마음이 말하고 온 몸으로 느낄 수 있는 순백의 눈 같은 찬란함이다. 예러우의 떠남이 완전함을 보여주지 않은 것 또한 망허의 그리움이 순수하고자했던 것임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재회, 그리고 다시 여행. 북부 변방으로 펼쳐진 평범한 지역들으 돌며 예러우와 망허는 숱한 사람들과 이야기들을 만나게 된다. 작가는 이들의 여행으로 인해 많은 곳을 한국 독자들에게 알려주고 시대의 슬픔을 이야기 한다. 방랑하는 길 위의 순수와 중국의 버려진 순수가 예러우와 망허의 귀를 통해 고즈넉히 흐르 듯 펼쳐진다. 자궁 외 임신으로 죽음을 맞이하는 예러우와 그녀를 기리는 시를 작품으로 펴내는 망허의 그리움들로 인해 천샹의 낭만과 예러우의 순수의 시대는 장렬하게 파괴되어 진다.

 

 읽는 내내, 주인공들로 하여금 수 없이 흔들리고 위태로이 휘청였다. 그들이 말하는 낭만과 순수가 무엇인지, 시대가 앓는 시의 유약함이 과연 갑갑하기만 한 이 시대의 위로 날아오를수는 있는건지. 사실, 책을 덮는 순간까지도 천샹과 예러우의 구구절절한 사연들을 가슴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좀 더 솔직히 얘기하자면 '시'의 불가항력적인 감정의 소모들을 곧이 곧대로 받아들일수는 없었다. 대학 시절, 자신의 본질과 나아갈 길을 묻는 질문에 쉬이 대답 할 수 없었던 것 처럼, 소설이냐 시냐, 하는 무의미한 갈림길 앞에서도 선뜻 선택의 기로에 올곧게 설 수 없었다. 가면 가는대로 흐르면 흐르는대로 주어진 길만이 전부라 여겼고 그저 평행선을 걷듯 나만의 안전한 길만을 걷기를 원했었다. 천샹이 자신의 아들 샤오촨에게 남기던 편지의 한 구절,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왜 평생토록 그런 수수한 길만 걷고 싶어 하는지 이해 할 수 있을거야.'라고 했던 것 처럼 유유히 뭉개지는 구름처럼 흐르고만 싶었다. '소설'이 아닌 '시'를 먼저 만났더라면 나았을까. 그러면 지금의 내가 사는 이 시대에 대해 끄적이는 위로라도 받을 수 있었을까.

 

 낭만과 순수의 시대위에 시인이 있다. 잃어버리거나 혹은 버려진 시대를 토굴해야만 하는 시인이 기리는 시대가 소설 속에 존재한다. 천샹과 망허와 예러우의 사랑만이 아닌 그들이 지나치고 걸어 온 길 위에 그 모든 낭만과 순수는 부딪혀 흩어진다.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가 아닌, 존재하기에 운율에 따라 노래하는 시인처럼 끊임없음을 야기시켜야 한다. 작가는 천샹과 예러우와 망허를 다정하게 품어주기를 바란다. 금기와 충돌하고 시대에 불변하는 그 이상의 것의 날개를 달고 활개하기 바란다. 시대가 품는 낭만과 순수의 본질적인 의미를 완연한게 그리고 좀 더 나르시시적인 유약함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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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란
공선옥 지음 / 뿔(웅진)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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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갓 중학교에 입학했던 때인가. 겨우 여섯 살 밖에 되지 않은 조카가 뺑소니로 목숨을 잃었다. 막연하게나마 슬픔의 깊이를 감지하기는 했지만 죽음이라는 단어가 주는 생경함에 차마 울지도 못했다. 어떡해, 하며 그저 두 무릎을 끌어모아 앉아있는데 한 살 터울의 언니가 그런말을 한다. 어린 아이가 죽는다는 것은 천사가 되기 위해서라고, 하느님이 우리 조카가 필요해 어쩔 수 없이 일찍 데려가는 거라고. 장례식이 끝나고 한 달여 쯤 지나서야 이모를 볼 수 있었는데, 그 모습이 참 가관이었다. 헝클어져 산발이 된 머리에 여기저기 얼룩이 진 옷 차림, 가뭇없이 이어지던 실소와 울음 섞인 목소리. 가만히, 이모 곁에 앉아 말했다. '이모! 머리 좀 감아, 이게 뭐야.' 가만히, 듣고 있던 이모가 갑자기 깔깔 웃으며 '어머, 은주가 나 보고 머리 감으라네? 하하.' 했다. 그러다가도 방울방울 눈물을 떨구던 이모를 바라보며 철 없이 그런 생각을 했다. 그냥 민호가 여행을 아주 긴 여행을 간 거라고 생각하면 안되겠냐고. 그러면 좀 더 낫지 않겠느냐구. 그 울던 모습이 지워지지않아 이제와 생각해보면 함께 울어주지 못해 왈칵, 하니 미안한 울음이 가슴에 차오른다.  

 

 「영란」을 읽을 당시에는 까마득히 잊고 있다, 책을 덮고나서야 아들을 잃은 이모의 처연했던 모습이 떠올랐다. 「영란」은 아들과 남편을 잃고 황망한 세상과 맞서다 목포로 떠나 아픔을 딛고 일어서는 한 여자의 삶에 대한 이야기다. 장미가 엉글어진 사직동의 집이 여자의 삶처럼 수거되지 못한 쓰레기들로 널부러졌을 때, 남편에게 인센을 받지 못한 정섭이라는 한 남자를 만나 덩그러니 목포로 떨구어진 여자, 영란. 낡고 지친 영란의 삶이 조금씩, 목포라는 항구도시가 주는 시니컬한 인정과 무심히 받아들여지는 인심속에서 활기를 찾는다. 여자의 이름은, 여자가 목포에서 첫 도약을 시작하는 '영란여관'이라는 곳에서 따온 것이다. 자신 본연의 이름을 잃는 다는 것, 그리고 새 이름으로 살아간다는 건 여자 자신이 갖는 모멸감과 과거에 대한 스스로의 망각과도 같다. 사랑하는 이는 가슴에 묻는다고 했던가. 그런 영란의 가슴에 돌연 완규라는 목포 남자가 들어선다. 말 그대로 정말 돌연, 이다. 무슨 이런 전개가, 있을까 싶을만큼의 돌연, 사랑이 찾아든다. 부러, 완규의 조카까지도 영란의 품 속으로 뛰어든다.

 

 사람에게 받은 상처는 사람에게 치유를 받아야 한다 했던가. 영란은 굳이 목포가 아니어도 되었지만, 굳이 목포에 눌러앉게 된 것이 참 다행스러운 건 공선옥이 그린 저마다의 상처와 아픔을 품고 사는 목포 사람들의 담백한 인간미였다. 구태여 물어봄으로 상처를 헤집는 것이 아닌 유달산에서 울려퍼지는 노래가락이라던가, 숨은 길을 올라 맘껏 울 수 있는 장소가 있다던가, 묵묵히 타인의 삶을 받아들여 자연스레 치유되기를 어루만지는 듯 한 사람과 사람의 포옹,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위로가 됨이 사실이다. 자신 보다 더한 슬픔을 가진 자를 보며 위로를 받는 것 또한 인간의 간사함이 아니었던가. 그럼에도 영란은, 자신이 좋다는 완규를 쉬이 받아들일 수 없다. 영란의 가슴속에 스며들어 쓰러지고 싶을 때마다 말을 걸어오는 제 남편과 아들의 울림때문이었을 것이다. 아직은, 제 가슴속에 새로운 누군가를 품을 준비가 되지 않는다는 것. 그로인해, 마음을 열 수 없어 되려 상처를 입힐까 무서워 한 걸음, 두 걸음 멀찍이 물러선다. 그리고 다시, 제 가슴에 집을 짓는다. 치매에 걸린 할머니가 살고, 사람을 그리워했던 조인자의 슈퍼마켓 안 쪽. 그곳에서, 시멘트를 바르고 정원을 꾸며 새 집, 을 짓는다. 오로지 완규의 조카가 자신이 가꾼 집에서 공부를 하는 모습을 그리면서, 초로히.

 

 그 곳 목포에서는 누군가는 떠나고 누군가는 돌아온다. 잊자고 떠나고 그리워 돌아온다. 영란을 목포에 떨군 정섭이 완벽하게 아내와 딸에게 이별선고를 받아들이고 다시 목포에 발을 딛어 영란과 조인자가 이루어 낸 가게에 발을 들이는 것 처럼, 이별과 재회가 아무렇지않게 그곳 목포에서는 이루어진다. 저마다의 슬픔과 저마다의 삶이 각박한 서울 바닥에 내쳐져 상처로 머무는 것이 아닌, 항구 도시 목포에서는 서로의 슬픔에 안부를 묻는다. 괜찮다고, 그러니 슬픔 너도 안녕하라고.

 

 내게도, 매번 돌아봐야하고 지켜줘야 할 슬픔들이 있다. 방치해둔 채 내버려두면 한꺼번에 터져 그대로 무너져내리고야 마는 그런 슬픔들 말이다. 부끄러워 숨기는 슬픔이 있는가하면 술 한잔에도 휘청이는 슬픔이 있다. 잊어버리자 해도 돌아서면 눈물이 되어 품어줄 수 밖에 없는 슬픔들이 있다. 영란에게도 그러했듯 종종 그런 슬픔들이 말을 걸어오기도 하고 제 가슴 치며 속절없이 눈물바람으로 밤을 지새우게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떨쳐버릴 수 없는 슬픔에 대한 이유가 있다면, 양귀자의 소설 작품의 제목처럼 슬픔도 어느 순간은 힘이 되기 때문이 아닐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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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한 작은 거짓말
에쿠니 가오리 지음, 신유희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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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말해서, 사랑이 필요한지 어떤지도 잘 모르겠어.

단지, 없다는 걸 알고 있을 뿐이야. 어쩌면, 불필요해서 없는지도 모르지.

당신이랑 있으면 가끔 너무 외롭단 생각이 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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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해.

 

 

 

 

 

 분명, 연애와 결혼은 다르다. 연애가 그저 입고 있던 옷을 양파 껍질 벗기 듯 하나하나 벗겨내는 것이라면 결혼은, 발가벗은 몸 그대로를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연애가 길어질수록 상대방에 대한 호감도는 떨어지기 마련이고 같은 공간, 같은 공기, 같은 현실에 놓여지게 되면 서로에 대한 종말을 보게 된다. 또 다른 인생의 시작이 아닌, 좀 더 치열하고 각박한 인생이 시작되는 것을 사람들은 참으로 의연하게 모른체하며 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여자 혹은 남자들이 결혼을 꿈꾸는 이유는 스스로가 품은 결혼에 대한 환상, 스스로가 만든 보이지도 않는 미래를 그려놓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도대체 무엇을 위해, 바래 결혼이라는 것을 하는 걸까. 결단코 결혼은 사랑 하나로 일축될 수 없음은 명백한데도 그것을 왜 꿈이라 치부하는 것일까. 에쿠니 가오리의 두 번째, 결혼에 대한 장편소설 「달콤한 작은 거짓말」. 난처하다 못해 우습기까지 하다. 이런 것도 소설이라고, 일본을 대표하는 작가라고 감히 얘기나 할 수 있겠나 싶다, 정말. 그래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난,

 

 에쿠니 가오리가, 어지간히 좋은가 보다. 딱히 이번 작품에 큰 기대를 건 것도 아니고 「반짝반짝 빛나는」이나 「낙하하는 저녁」에서 보여 준 그녀만의 유약하고도 강한 문체를 보고자함도 아니었다. 다만 「빨간 장화」보다는 나은 작품이기를 소박하게나마 바랬던 것 뿐인데, 내가 에쿠니 가오리를 생각하는 것 만큼이나 에쿠니 가오리도 안되나 보다, 싶다. 연애 결혼을 한 루리코와 사토시가 주인공이다. 사토시의 적극적인 애정공세로 결혼 생활을 시작하지만, 연애 시절 만큼의 열정과 사랑이 녹아들지 않는 결혼 생활에 루리코는 물론 사토시마저 사랑이라고는 전혀 결여되지 않은 사막과도 같은 메마른 길을 걷게 된다. 집에서 테디 베어를 만드는 루리코와 평범한 비즈니스인인 사토시. 여자의 역할을 충실히 해내는 루리코와, 저녁 식사를 마치면 제 방에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그고 TV와 컴퓨터게임에 열중하는 사토시. 남자가, 연애 시절 칠십프로의 애정을 공세했다 한 들 결혼하여 나머지 삼십프로를 모두 채워주는 것은 아니다. 칠십프로는 커녕, 수치가 낮아지지 않으면 그나마 다행이다. 불멸과도 같은 진리겠지만, 어떤게 먼저랄것없이 사랑과 사람이 변하는 시간과 속도는 같다.

 

    그나마 소설의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것이 있다면, 루리코와 사토시의 욕구불만성 대리만족이다. 루리코는 자신의 테디 베어를 양도했던 하루오와, 그리고 사토시는 대학 시절 자신을 좋아해주었던 시호와 바람 혹은 외도 혹은 불륜 혹은 비밀 아니 어쩌면, 이 책의 제목인 달콤한 거짓말을 저지른다. 애정 표현이라고는 고작 '잘 잤어요?', '어서 와요.' 따위의 인사 나부랭이들이다. 몸의 교류조차 없으니 무엇이 통하겠는가. 이쯤되면 루리코와 사토시의 결혼 생활은 함께 살아가는 것이 아닌 함께 지키고자 하는, 돌아 올 곳을 지키고자 하는식이 되어버리고 만다. 결혼 한 사람들의 외도, 어느 정도선에서는 참작할 수 있다. 물론, 적당한 선을 지켜만준다면 한 낱 스치우는 바람으로도 치부 할 수 있다. 살아 온 날 보다 더 많은 날을 어찌, 한 사람만을 품고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을지 솔직히 나는 그닥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루리코와 사토시처럼 맞바람이라면 더욱이나 마음 편히 다른 사랑을 품어 볼 수도 있지 않나, 싶은거다. 루리코의 말 처럼, 중요한 건 하루하루를 함께 살아가는데 있고 함께 자고 함께 일어나고, 어딜 나가더라도 다시 같은 장소로 돌아온다는 것이 결혼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조금은 쿨하게 얘기한 것 같은데 사실, 내 눈 앞에 막상 닥치는 일이라면 또 모를일일지도 모른다. 나의 비밀은 꼭꼭 숨겨둔 채 그이의 비밀만을 파헤치고 분해시키고 벼랑 끝으로 밀어버리는 일은 무서우리만치 간단하다. 루리코가 염두에 두는 감자 싹의 솔라닌이라는 극약만큼이나, 시누이가 알려준 바꽃의 독을 품은 나물 비빔밥이나, 별반 다를 거 없다. 루리코와 사토시가 지키고자하는 것은, 서로를 중요하고 소중하게 마음에 담아두는 것을 더불어 서로가 속해있는 집이라는 한 공간속에서 함께 살아간다는 것이다. 늘 곁에 머무를 수 없다면, 그리고 그것을 해소시킬 수 있는 것은 동반자살이라고 얘기하는 루리코의 마음은 결국 그 또한 사랑의 극단적인 종말이자 증거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늘 그랬듯, 에쿠니의 작품은 어느 시점부터는 치미는 지루함과 가벼움을 참지 못해 중간 지점에서 항상 덮어버리고 싶은 충동을 일으키지만 앞으로의 작품들 또한 무한한 애정으로 지켜 볼 생각이다. 별 볼 일 없는 작가라고 생각하지만, 이것 또한 에쿠니의 작품 세계에서 발을 딛은 이상 빠져나 올 수 없을만큼의 문학의 가벼움의 매력을 쉽사리 떨쳐 낼 수는 없는 까닭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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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자 전혜린 - 그리고 다시 찾아온 광기와 열정의 이름, 개정판
정도상 지음 / 두리미디어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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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막연하리만치 혼란스러웠다.

 전혜린, 그녀와 나 사이에는 7년이라는 암흑과도 같은 굶주린 세월이 죽어있었다. 매번 삶의 극단까지 내몰릴때마다 그녀의 이름을 수 십, 수 백번도 더 되뇌이며 약에 취해 술에 취해 그녀의 책을 펼쳐, 눈에 들어오는 문장들를 소리내어 읊조렸었다. 오로지 그것만이 내가 딛고 있는 이 지반을 버티게 해주는 기둥이 되었으며 청춘 그 자체의 근본, 내 삶의 근원이었음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녀말고는 내 아픔의 통념들을 이해시키고 위로할 수 있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지나치게 나를 비약시키는 것에 일조했음이다. 불투명했던 청춘을 단연코, 전혜린화 시켜 존재의 상실감과 생의 파국만을 향해 내달렸음은 물론, 수 없이 많은 밤을 불면증으로 지새우며 쉼없이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에 서 있는가.', '삶이란 무엇인가', '산다는 것, 살아간다는 것, 과연 그것이 이대로도 괜찮은가.' 그리고 '나는 왜 사는가.'. 끊이없는 이어지는 정답없는 질문들, 그것은 아프게 낙화하는 낙엽만큼이나 스산했다.

 

 무슨 생각이었을까. 문득, 리뷰를 끄적이다 다시 술에 취해 전혜린의 에세이인 「그리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와 「이 모든 괴로움을 또 다시」를 꺼내들고는 아무곳이나 펼쳐 들었다. 지독히도 싫어했던 책에 대한 아낌에도 불구하고 그때에는 무던히도 급했는지 눈이 시린 형광색이 난무하다 못해 손목을 긋는데에 일조했던 샤프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세상에, 너무도 우스워 집었던 책을 던져버렸다. 얼마나 많은 청춘의 흔적들인가, 싶었던거다. 또한 얼마나 숱한 아픔들이 서려있는지 시퍼런 멍자욱들이 가득했다. 내가 다시 이 책을 읽을 수 있을까, 내가 과연 지금 손에 쥔 정도상의 「그 여자 전혜린」을 곧은 마음으로 읽을 수 있을까, 아니었다. 두 번은 전혜린을 끌어안아서도 살아있는 문장으로도 만나서도 안되었다. 단연, 기억함. 그에 그쳤어야했다. 적어도 나에겐 요절한 그 여자 전혜린은 1세기에 단 한번 태어날까 말까한 천재, 완벽한 소설 하나 남기고자 했던 집념의 여자, 그렇게 남아있음이 옳은것이었다. 전혜린, 이름 자체만으로도 심장이 울리는데 어떻게 그녀의 삶에 다시금 발을 들여놓을 수 있을지, 한 페이지 한 페이지 넘기는데도 힘겨워 금새 온 몸에 전율이 일었지만 문득 잊고 있던 것 .. . 이건 그저 허구일뿐이라는, 진정 그녀의 삶이 아니라는 생각이 결국 정성스레 읽던 책을 도중에 덮어버리게 만들었다.

 

 읽는 내내 작가의 말을 먼저 읽어버릴까, 생각하다가 소설의 허구성을 전제로했다는 작가의 말을 읽어버리면 그냥 거기서 책을 끝까지 읽지 않게 되버릴까하는 초조함에 내키지않는 마음으로 기어코 그녀의 죽음을 마주하고는 염려 가득한 작가의 말을 보는데 왈칵 눈물이 치밀었다. 그래, 작가가 소설로 끌어낸 전혜린은 전혜린이 아니었음이 확실하다. 그녀는 결코 쉼 없이 좌절하지도 않았으며 실패한 사랑에 전부를 내던지지도 않았으며 구원 받지 못한 생에 미련을 두지도 아니했다. 보다 더 치열했으며 보다 더 훌륭했고 이성이 아닌 정신적인 멘토임이 분명했다. 비록, 요절로 인해 시대의 초상으로 잊혀지지않을 청춘의 전설로 남겨지겠지만 시대가 흐르고 무심히 지나가도, 이 여자 전혜린은 결코 잊어서도 안되는 모든 청춘의 '첫' 걸음이 되어주기를 그리하여 생에 대한 열렬한 열정으로 뿌리 내려지기를 바라고 또 바란다.

 

 소설에 대한 이야기를 단 한 줄도 내비치지 않는 이유가 있다면, 이건 전혜린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불쾌하기 때문이다. 제목에 걸린 전혜린이라는 이 이름만 아니었다면 난 결코 이 책을 읽지 않았을것이다. 오로지 그녀의 이름, 그 이름을 따라 책을 들었을 뿐 허구 가득한 소설을 읽고자함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전혜린을 기억하는 뭇 사람들의 평은 어떠할지는 모르겠지만 별점 역시 전혜린이라는 이름에 주는 것이지 이 책에 주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두 번은, 전혜린의 이름으로 마케팅한 책은 읽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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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화 가족
천명관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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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무 너무 너무, 정말이지 무지막지하게 좋아하는 작가의 작품을 간극없이 읽다보니 생뚱맞게도 김경욱과 천명관의 작품을 단박에 구분해내지 못하고 한참을 헤맨다. 김경욱이 천명관같고 천명관이 김경욱 같다. 아니, 그 둘에게 쏟아붓는 내 애정의 농도가 같음에, 어느 누구 한 명에게만 '진짜 진짜 좋아요!' 라는 감격의 찬사를 주고 싶음 마음에 읽는 내내 안절부절 노심초사했음에 분명하다. 김진명 작가 이후로는 이런 폭발 할 듯 한 애정의 감정은 또 오랜만이라 이번 천명관의 작품 「고량화 가족」은 '당신, 정말 최고야.' 라는 확고부동한 자리매김을 하는데에 한 몫 했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이 책의 리뷰마다 그의 또 다른 장편 소설 「고래」를 거들먹거리며 이번 작품을 두고 실망이네, 발로 썼네, 막장이네 하는데 글쎄, 난 아니올시다, 다. 내가 그를 너무 너무 좋아해서도 아니고 그의 작품이라면 무조건 별 다섯개부터 찍고 보는 다소 마니아적인 애정 때문도 아니다. 그저 난, 문체만으로도 넘실거리는 그의 에너지와 독특하지만 매력있는 건방진 유쾌함 그리고 선천적인 천재성을 믿기 때문이다. 뭐, 굳이 표현하자면, 막장도 그가 쓰면 작품이 된다는 거다.

 

 뜨거웠던 팔월 내내 서평 도서에만 질질 끌려다니다 오랜만에 내 돈 주고 내가 구매 한 책을 읽자니 눈물이 앞을 가릴 정도의 감정이 복 받쳐 올라 우습게도 책을 한참이나 끌어안고 있었다. 그것도 천명관의 작품이라니, 더더욱이나! 갖은 악평들을 품고 있는 책이라 그에 대한 기대치를 제로로 만들기는 쉽지 않았으나 가까스로 다독인 마음으로 책을 펼쳤을때는 공교롭게도 첫 페이지부터 억누른 감정들이 다시금 이백프로의 기대를 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아, 역시 그다. 싶은거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그때의 감정이 되살아나 폭풍 눈물이 날 듯 하다. 낄낄.

 

 이 책의 주인공은 머리가 벗겨진 마흔 여덟의 중년 남자 오인모다. 우리 아빠보다 네 살 적은 나이이지만 내가 아빠라 불러도 괜찮을 것 같은 나이의 남자다. 직업은 영화 감독이지만 무명이라 불러도 모자랄만큼 백수에 가깝다. 영화가 망하는 것 동시에 가진 모든 것들을 잃고 허망하던 때에 칠순이 넘은 엄마의 집에 발을 들이면서 그의 가족들이 한 명 한 명 머리를 들이민다. 어린 시절 가방에 벽돌을 넣고 다닐 만큼 폭력적이었던 쉰 두 살의 그의 형 오한모와 두 번의 이혼에도 불구하고 남자가 끊이지않고 알고보면 속 깊은 여동생 미연. 그리고 이 셋의 부모인 이름없는 엄마와, 미연의 딸 민경이 그들이다. 각자의 기구한 사연도 사연이지만 인생의 늘그막에 엄마의 집에 얹혀사는 -절대 모여산다고 할 수 없다- 이들을 보자니, '지난 과거는 아무렴 어때, 인생의 굴곡은 어느 누구에게나 공평한데.' 라고 웃어 넘기며 그들의 평화와 눈물 펑펑 나는 가족 상봉을 기대하지만, 이들 가족의 인생의 굴곡은 평균나이 49세라는 절체절명과도 같은 위험 수위에서부터 시작한다.

 

 민경이 담배를 두고 삼촌 오인모가 벌이는 돈 거래나, 민경의 팬티를 두고 저지르를 저질스런 오한모의 추태, 미용사 미스 한이라는 여자를 두고 신경전을 벌이는 오인모와 오한모. - 미용사가 등장하자마다 퍼뜩 천명관의 소설집 「유쾌한 하녀 마리사」에서의 '자동차 없는 인생'이 오버랩되었다. 내용은 같으며 결론은 이번 작품에서 볼 수 있다. - 민경의 가출로 인해 도박업의 바지사장이 되어 교도소로 입소되기 전 치밀한 작전으로 인한 오한모의 도주. 그로인해 깡패들에게 납치되어 죽다 살아 난 오인모. 그리고 영화계에 몸을 담았을때 만났었던 여자와의 재회. 오인모가 혼자 중얼거렸듯이 막장 드라마의 최고봉인 배 다르고 씨 다른 출생의 비밀까지. 마지막으로 엄마의 불륜 상대였던 전파사와의 재회. 이렇게 열거해놓고 보니 기가막히고 코가 막힐듯한 일이다. 아, 빠트린것이 있다면 막장이 아닌 문학임을 잊지 않기 위해 잊을만하면 발췌되고 오한모에게 깨달음이 되었던 허밍웨이의 전집까지.

 

 이 작품의 오한모, 오인모, 오미연. 이 셋은 서로 다른 핏줄을 타고났지만 '가족'이라는 혈연아닌 의리로 한데 일그러진 결정체와도 같았다. 비단 이들 셋에게 밥을 차려주던 엄마의 죽음이 시초가 된 것은 아니었지만 어찌보면 그럴법도하게 각자의 제자리, 안정, 평온 그리고 안녕을 되찾는다. 무언가 진득하게 묻어나는 여운을 바란 작품이 아니 듯 하니 그저 유쾌하게 웃고 만다. 아쉽게도, 읽을 당시에는 소설집 「유쾌한 하녀 마리사」의 한 단편을 더 끌어온 듯한 느낌이었는데 기억을 못하겠다. 한 편의 드라마와도 같았고, 거짓부렁이 그득한 이야기 같기도 한 이번 작품은 천명관의 내면적인 '무엇'이 속속들이 발효되는 듯한 기운을 감지한 듯 해 더할 나위없이 기쁘지만 천명관다운, 천명관만이, 쓸 수 있는 소설이라는 사실엔 너무도 확고한 분명함을 새겨 준 듯해 짜릿하다. 「고래」 때에 비하면 부족할지 모르겠지만, 인생의 늘그막을 두고 이런 우스꽝스러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그가 더 좋은 건 어쩔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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