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의 시대
장윈 지음, 허유영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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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랭보의 시를 블로그에 필사를 하면서 돌연 국내 시에 눈길을 돌리다 시인 박인환과 김수영의 작품들을 몇 차례나 반복하여 읽었던 적이 있었다. 아니 좀 더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2004년도에 EBS에서 방영했던 '명동백작'이라는 문화사 프로그램을 몇 차례 다시보기로 접하면서 부터였다. 난해하고 허무할거라 생각했던 시에 대한 선입견은 김수영의 「풀」이라는 시로 하여금 왈칵, 눈물을 쏟아내게 하기에 충분했다. 시는 그저 운율과 심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닌 형용할 수 없는 어떠한 울림과도 같은 고요한 외침이었다. 닥치는대로 읽는것이 아닌 마음에 고이 담아 쌓을 수 있는 문학은 단연코 시 뿐이다. 불안한 시대를 시로 노래하던 박인환의 구슬픈 선율이 가슴 깊이 먹먹함으로 그득해지는 찰나의 감정은 그 어떤것으로도 비할 수 없는 깊은 슬픔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소설 「길 위의 시대」를 마주하기 전, 훑어보기 조차 하지 않은 탓에 박범신의 「비즈니스」와 같이 시대 고발적인 소설인 줄만 알았지, 낭만과 순수가 공존하는 소설인 줄은 가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국외작품은 달가워하지 않는지라 별뜻없이 펼친 소설은 단박에 무심히 잊고 지냈던 박인환과 김수영의 시어들이 눈 앞에 잘게 토막되어 펼쳐지게 했음은 물론, 소설 속에서나마 시인을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한량없이 페이지를 넘기는 손길이 가벼웠다.

 

 소설 「길 위의 시대」 속엔 낭만의 시대가 펼쳐진다. 시를 쓰는 사람이라면, 문단의 거장이든 무명이든 환대받던 시절의 낭만이 춤을 추며 그들 주위를 배회하던 때, 대학 졸업반이었던 천샹이 시인 망허라는 사람과의 하룻밤의 정을 통하게 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작가가 말했 듯, 인간의 본성과 금기의 충돌은 구태여 80년대로 거슬러 오르지 않아도 어느 시절이든 존재하기 마련이다. 망허의 떠남 역시, 시인이라면 으레 그럴수도 있는 환멸로 인정 될 수 있듯이 말이다. 하룻밤으로 인한 천샹의 임신과 천샹의 모든 상황을 품어주는 이와의 결혼은 마냥 낭만적일 수 만은 없다. 시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천샹이 가슴안에 세월만큼이나 쌓았을 망허가 아닌 시인에 대한 그리움은 결국 거짓말로 인한 파국을 맞게 되기 때문이다. 아이를 낳고도 젖이 돌지 않은 천샹의 극진했던 노력은 모성애가 빚어낸 사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믿고 그리워했던 시인 망허의 아들이 아님을 알고는 단박에 수치감과 자괴감, 천샹 자신의 생 전체를 부인하게 만들었다. 아이를 죽이려하고 스스로 생을 마감하려했던 천샹의 파괴는 자신이 낭만이라 믿었던 시대에 대한 배신으로 몰락하게 된다.

 

 천샹이 믿었던 시인 망허의 삶은 천샹과는 다르게 순수의 시대를 걷고자 한다. 우울하고 융합되어지지 않았던 현실을 도피하여 떠난 망허의 방랑은 산베이의 작은 도시에서 자신의 강의를 들은 적이 있다는 예러우와의 만남에서부터 시작한다. 예러우 역시 천샹과 같이 망허가 시인이라는 것에 매료되어 하룻밤을 보내지만 시인에게는 바랄 수 없는 것들에 대한 결여로 망허를 떠난다. 순수는 결코 희고 맑음이 아니다. 찬란한고 빛이 머무는 순수, 마음이 말하고 온 몸으로 느낄 수 있는 순백의 눈 같은 찬란함이다. 예러우의 떠남이 완전함을 보여주지 않은 것 또한 망허의 그리움이 순수하고자했던 것임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재회, 그리고 다시 여행. 북부 변방으로 펼쳐진 평범한 지역들으 돌며 예러우와 망허는 숱한 사람들과 이야기들을 만나게 된다. 작가는 이들의 여행으로 인해 많은 곳을 한국 독자들에게 알려주고 시대의 슬픔을 이야기 한다. 방랑하는 길 위의 순수와 중국의 버려진 순수가 예러우와 망허의 귀를 통해 고즈넉히 흐르 듯 펼쳐진다. 자궁 외 임신으로 죽음을 맞이하는 예러우와 그녀를 기리는 시를 작품으로 펴내는 망허의 그리움들로 인해 천샹의 낭만과 예러우의 순수의 시대는 장렬하게 파괴되어 진다.

 

 읽는 내내, 주인공들로 하여금 수 없이 흔들리고 위태로이 휘청였다. 그들이 말하는 낭만과 순수가 무엇인지, 시대가 앓는 시의 유약함이 과연 갑갑하기만 한 이 시대의 위로 날아오를수는 있는건지. 사실, 책을 덮는 순간까지도 천샹과 예러우의 구구절절한 사연들을 가슴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좀 더 솔직히 얘기하자면 '시'의 불가항력적인 감정의 소모들을 곧이 곧대로 받아들일수는 없었다. 대학 시절, 자신의 본질과 나아갈 길을 묻는 질문에 쉬이 대답 할 수 없었던 것 처럼, 소설이냐 시냐, 하는 무의미한 갈림길 앞에서도 선뜻 선택의 기로에 올곧게 설 수 없었다. 가면 가는대로 흐르면 흐르는대로 주어진 길만이 전부라 여겼고 그저 평행선을 걷듯 나만의 안전한 길만을 걷기를 원했었다. 천샹이 자신의 아들 샤오촨에게 남기던 편지의 한 구절,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왜 평생토록 그런 수수한 길만 걷고 싶어 하는지 이해 할 수 있을거야.'라고 했던 것 처럼 유유히 뭉개지는 구름처럼 흐르고만 싶었다. '소설'이 아닌 '시'를 먼저 만났더라면 나았을까. 그러면 지금의 내가 사는 이 시대에 대해 끄적이는 위로라도 받을 수 있었을까.

 

 낭만과 순수의 시대위에 시인이 있다. 잃어버리거나 혹은 버려진 시대를 토굴해야만 하는 시인이 기리는 시대가 소설 속에 존재한다. 천샹과 망허와 예러우의 사랑만이 아닌 그들이 지나치고 걸어 온 길 위에 그 모든 낭만과 순수는 부딪혀 흩어진다.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가 아닌, 존재하기에 운율에 따라 노래하는 시인처럼 끊임없음을 야기시켜야 한다. 작가는 천샹과 예러우와 망허를 다정하게 품어주기를 바란다. 금기와 충돌하고 시대에 불변하는 그 이상의 것의 날개를 달고 활개하기 바란다. 시대가 품는 낭만과 순수의 본질적인 의미를 완연한게 그리고 좀 더 나르시시적인 유약함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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