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눈팔기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62
나쓰메 소세키 지음, 조영석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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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겐조. 끝끝내 우리는 돈의 힘으로 지배할 수 없는 것은 찾을 수 없었던거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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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속도 모르면서 - 젊은 작가 8인의 아주 특별한 섹스 판타지
김종광.김도언 외 지음 / 문학사상사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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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니까 ,이 이야기는 처녀막의 혹은 몽정의 폭발 - 그 후의 이야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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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븐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28
가와카미 미에코 지음, 김춘미 옮김 / 비채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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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수 있는 일은 할 수 있잖아 ?

하고 싶으면 한면 돼.

아무도 너를 제지할, 그야말로 권리 같은 것은 안 갖고 있어.




 

 

 소설은, 일본의 '청소년 문화'라고도 일컫는 집단 따돌림을 다룬 성장 소설이다. 따돌림, 전혀 낯설지않고 생소하지도 않은 단어이다. 집단 따돌림이 하나의 폭력적인 '문화'로 상징성을 띄게 된 것은, 소설의 배경이 되는 '학교'라는 의무 기관이 아니어도 따돌림이라는 비인격적 행위는 하나의 집단을 이룬곳이라면 공공연히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청소년 소설이라면 빠지지않고 다루어지는 집단 따돌림의 문제성은 사회적 폭력과 심각성으로 드러나는 한 편, 철저히 숨겨지거나 은폐되어진다. 그러니까 나는, 이러한 은폐적인 폭력에 휘둘렸던 학창 시절을 고립되어진 기억으로 각인되어있다. 적어도 그때의 나는, 소설의 주인공인 '나'처럼 남들과 다른 눈을 가진 사시도 아니었으며 고지마처럼 어떠한 증표를 간직하기위해 몸을 씻지않거나 지저분한 아이가 아니었다. 단지, 혼자가 편했을뿐이고 다른 아이들과의 접촉 자체가 불가능한 상태였다. 좀 더 솔직히 이야기하자면 타인이라는 자체가 불편했으며 집단 생활을 함에 있어 필요한 '친구'라는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강박들이 나를 더 괴롭게했음이 분명했다. 사치, 감정의 지나친 사치라고 하면 맞을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단체에 맞지 않는 생각이었다. '개인'이 아닌 2인이상의 단체에 대한 소속감은 처절할 정도로 나를 궁지로 밀어넣었음이다. 그로인해 내 학창 시절은 짝을 이루어 하는 행위 자체에 대한 공포에 가까운 두려움을 품고 있었고 점점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마저도 소멸되어갔다. 철저히, 나는 혼자였다.

 

 소설은, 주인공인 '나'에게 책상 밑으로 전해져오는 누군가의 쪽지로부터 시작된다. '나'는 학급 내의 집단 따돌림의 대상자였고, 쪽지를 건낸 아이 역시 집단 따돌림의 대상자이다. 머리를 얻어 맞고 발로 채이는 괴롭힘이 자신의 한 일부분으로 받아들일만큼 익숙해진 '나'와, 메모를 건낸 고지마는 학급 내에 유일한 '같은 상황'에 처한 친구가  된다. 그러나 이들은 학급 내에서 '말'을 하지 않는다. 학교 내 비상 계단 혹은 방과 후 그리고 방학의 일상들만이 존재 할 뿐이다. 이것은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어 받는 위로, 혹은 남들과 다른 눈을 가진 '나'의 눈과 기억의 증여물을 온 몸으로 드러낸 고지마의 상징적인 특성으로 인해 폭력에 노출 된 이들의 동질성이다. 내가 철처히 혼자였던 시절에는 물건을 던진다거나 머리를 후려치는 괴롭힘들은 존재하지 않았다. 내가 '말'을 하지 않으면 그저 타인은 나를 모른체 할 뿐이었고 다가오지 않았다. 점심도 혼자 먹었으며 소풍이라도 가는 날에는 그저, 남은 자리나 선생님 옆에 앉았을 뿐이었다. 그렇게 혼자가 편하다는 생각으로 한 학년을 졸업했을때에는 내게 미비하게나마 감지되었던 자존감이 소멸된 후 였다. 정확히 얘기하자면 '나'라는 자아를 상실했다는 것이다. 자아의 상실, 그것은 극심한 혼돈과 끝없는 어떠한 충동으로 나를 밀어넣기에 충분했다. 소설의 주인공인 '나'가 느꼈던 수치심이라던가 모멸감이 축적되어 바닥으로 내몰리는 최후, 그것은 자살이라는 강력한-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보내는 충동적인 사고였다.

 

 주인공인 '나'는 고지마와의 편지를 주고 받으며 마음을 키우고 대화를 나눈다. 반복되는 반 아이들의 괴롭힘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으면서도 주인공의 '눈'과 고지마의 '증표'는 자신에게 주어진 몸의 일부분 중에서도 가장 소중하다고 이야기 한다. 서로가 아이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른척 눈을 감는 것이다. 괴롭힘을 당한 고지마가 '나'의 책상 옆으로 고꾸라질때에도 말이다. '나'와 고지마는 방학을 맞이해 헤븐이라는 그림을 찾아 길을 나서기도하고 방과 후 비상 계단에서 만나 지극히 평범한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그러나 이들에게도 균열은 생기기 마련이다. '우리는 같은 편이야' 라는 쪽지로 시작해 서로의 기댈 어깨로 의존했왔던 '나'와 고지마의 사이가 소원해진 것은, 주인공인 '나'가 니노미야 패거리들에 의해 머리통이 공처럼 차여 바닥에 쓰러져 피를 흘리는 모습을 고지마에게 들킨 후였다. 그로인해 다니던 병원에서 듣게 된 '나'의 눈을 교정할 수 있다는 의사의 말은 고지마와의 관계를 무너트린다. 어떠한 결정도 하지 않았던 '나'였지만 이야기를 듣는 고지마는 울음을 터트린다. 그러니까, 그것은 '나'와 고지마를 이어주던 연결선이 끊어져버린 것이다. 고지마의 패닉, '나'의 무시당하는 편지들 사이에서 이 둘은 맞서서는 안되고 들켜서도 안되는 비밀의 관계가 위태로와진다.

 

 문화가 문화를 낳는다고 했던가. 일본에서 일어나던 이지매 현상은 은폐져왔던 한국의 왕따 문화 역시도 두드러지게 만들었다. 이 폭력적인 문화는 발달되어지는 속도에 맞추어 더욱 심각해지고 잔인해진다. 자라나는 아이들이 그 아이들에게 폭력을 가하고 성장해가는 질풍노도의 시기에 위협을 가하는 것이다.  '나'와 고지마는 니노미야 패거리들이 자신들에게 행하는 비인격적 행위들에 관해서는, 언젠간 제대로 알게 되고 바로잡을 수 있는 날이 올거라 믿는다. 이 둘에겐 그저 스스로에게 불어넣는 불확실성 희망만이 존재했지만, 니노미야 패거리들에게 휘둘렸던 '나'와 고지마가 그들에게 일말의 반항도 하지 않고 맞서지 않았다고해서 결코 그들보다 약자는 아니었다. 함께라는 안도감과 그 속에서 싹트던 사랑의 감정들이 그러했듯이 이들은 서로에게 버팀목이자 처해있는 상황을 비극으로 치닫지않게 견뎌냈기 때문이다. 주인공인 '나'와 고지마를 통해, 그래도 나는 얻어 맞지는 않았다는 내 어린 날의 기억에 대해 위로를 받는다. 나 또한 간사한 인간인지라 나 보다 더 최악의 상황에 놓인 사람들을 보며 위로를 받는 셈이다. 하지만, 스스로 고립되어지길 원했던 나와 타인으로 인해 고립되어 상처받았던 '나'와 고지마의 상처는 별반 다를게 없다. 내가 나를 못 살게 구는 것과 타인이 나를 못 살게 구는 것 따위의 상대성은 비례하기 때문이다. 아픈 이야기, 그리고 사라지지 않을 이야기. 불편했던 마음들이 끝끝내는 아무런 여운도 스며들지 않게 만든다. 소설, 이지만 이것은 현실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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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07 16: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5-08 07: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암보스 문도스 - 양쪽의 세계
권리 지음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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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컨대 내가 영감을 찾아가는 여정이

'나의 고향은 어디인가?'란 물음에 대한 답으로서

완성된다면 더 바랄 것이 없으리라.



 

 

 그래, 난 여행 에세이를 좋아하지 않는다. 이렇다할 분명한 이유는 없지만 여행 에세이뿐만 아니라 자전적 소설이나, 자기계발서 역시 좋아하지 않는다. 여행에 취미가 없을뿐더러, 남의 인생사를 구태여 글로 읽고 싶지도 않으며 내 인생을 누군가에게 지도 받고 싶지도 않다. 동기가 어떠하든 확실히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확실히 좋아 할 수도 없다. 그것이 설령, 내가 미치게 좋아하는 천명관이나 김경욱이나 신경숙이 썼다해도 다를 바 없다. 자전적 소설이라면야, 동경의 대상이니 기꺼이 읽을 수는 있겠지만 이들이 갑자기 여행을 떠난다거나 내게 어떤 인생의 길을 알려주려한다면 예외없이, 그 책만은 읽지 않을 것이다. 지난 십여년의 독서 기간동안 내가 읽은 여행 에세이는 오로지 이병률의 「끌림」과 한비야의 「바람의 딸 걸어서 지구 세바퀴 반」 , 이 두 분의 에세이뿐이다. 모르겠다. 이병률의 책은 제목 그대로 끌려서 구매했는데 그의 필력에 짓눌려 읽었던 것 같고 -이병률은 좋다. 여행 말고, 그냥 이병률의 생각, 시선, 사람이- 한비야의 책은 기억나지도 않는 어떤 시절에 읽었던 책이다. 그 후로는 어떠한 여행 에세이도 읽지 않았다. 그들의 뒤를 졸졸 쫓아다니며 기웃거리기 싫었던 거다. 내가 직접 갔으면 갔지, 그들의 뒤꽁무니에 착 달라붙어 그들의 시선에 휘둘리며 대리만족 따윈 하고 싶지 않았을뿐이다. '이것은 여행기가 아니다' 라고, 하는 권리의 양쪽의 세계 「암보스 문도스」. 그래, 정말 이거 여행기 아니지요, 권리씨 ?  

 

 이해하기 어려운 책이나, 읽기 싫은 책을 피치 못 할 사정으로 읽어야 할 때면 난 정독에 가까운 책 읽기를 시도한다. 이 책의 시작도 정독으로 시작했다. 집중, 또 집중. 쉼표, 마침표 모두 또박또박 읽어내려갔다. 여자의 행선지가 어디가 될지, 어떠한 에피소드로 나를 웃고 울게 할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정독을 하게 되면 책은 더 이상 여행 에세이를 벗어난 하나의 허구적 소설이 되어버리기 마련이다. 타율적인 삶보다 자신만의 삶을 살고 싶어했던 이 책의 저자 권리씨가 어떠한 이유로 여행을 하게 되었는지, 여행으로 인해 여자의 삶이 얼마만큼의 위로를 받게 되었는지는 내 사정이 아니다. 다만, 나를 당혹스럽게 한 것은 이 책의 저자이자 여행자인 바로 '권리'. 이 작가가 궁금해서 돌아버릴 지경으로 밀어넣어버리는 독특하고 강렬한 매력발산을 하는 이 여자, 권리씨였다. 몇 페이지 넘기지 않았을 뿐이었고, 의외로 재미있는 책이구나 싶었는데 나도 모르게 읽는 도중 갑작스레 책을 끌어안아 버렸다. 정확히 페이지 68. 두 번, 세 번, 기어코 필사까지 해버렸다. 이런적이 있었던가, 싶었다. 책에 대한 열망이 아닌 한 작가에 대한 무조건적인 신뢰. -아, 김경욱 역시 같은 케이스의 작가다.- 그렇다고 여행 에세이라면 진저리를 치는 내가, 그녀가 보고 듣고 겪는 일에 관심을 가지며 권리씨의 뒤꽁무니를 쫓아 다닌 건 아니다. 그렇다. 난, 틈틈히 나오는 권리씨의 어떠한 시절의 이야기들에'만' 열광했다. 페이지를 넘기면 넘길수록, 그녀에 대한 이야기가 점점 사그라들고 냉동 보관하고 싶다던 G.마르케스에 대한 넘치는 애정에 대해 읽다가 책에 대한 열정이 순식간에 잦아들었다. 가슴속에서 무수히 찍어대던 책에 대한 별점들이 하나, 둘 깎이더니 주섬주섬 그녀의 전작들을 담아들기에 이르렀다.

 

 내 마음과는 다르게 책의 여행자는 유럽에서부터 라틴아메리카의 나라들에 발자국을 찍어대기에 바빴다. 세 장의 '소요' 속에 그녀의 행적들이 책이 출간되기 4년전에 마무리가 되었다. 메모지에나 끄적였을 엉뚱하면서도 유쾌한 이야기들이 한바탕 나를 자지러지게도 했으며 옆구리까지 흘러내리던 머리를 단박에 잘라버린, 무모하면서도 경이로운 삭발. 나는 무의식중에 여자의 발자국을 쫓는게 아닌 여자의 과거를 파헤치고 있었다. 여자와 내가 같은 나이였을 때 던졌던 수천 개의 질문과 나의 분신과도 같았던 음습의 사고관들이 너무도 쉽게 충돌해버렸기 때문이다. 여자가 남편으로 삼고 싶어했던 알베르 카뮈, 다자이 오사무, 도스토옙스키에 집중했으며 여행이 아닌 좀 더, 더, 권리라는 한 여자 혹은 작가에 대해 알고싶었다. 이 책에 대한 예의가 아닐지언정, 어차피 작가는 애초에 여행 에세이가 아니라고했으니 굳이 여자의 여행에 관심을 두지 아니해도 될 것이다. 시작은 예술의 영감에서 시작되었을 뿐이고 내게는 권리라는 여자에 대해 알 수 없는 매력에 대해 쫓을때마다 여자가 칠레 여행때 얻은 '나는 벼룩이 득실거리는 개보다 행복하다'고 한 것 처럼 그랬기때문이다. '명란한 크로스 오버 예술'을 꿈꾸는 이 작가가, 솔직히 난 앞에서도 주구장창 말했 듯 「암보스 문도스」라는 책 보다 더 좋을 뿐이다. 그리고 이러한 점을 작가가 더 좋아할지도 모른다. 어디까지나 내 생각이겠지만 그렇게 믿는게 편하고, 여자가 힘겹게 여행한 여행에 그닥 미안해하지 않아도 될 듯 싶다.

 

 도서관에 살았을법한 지식광인 여자에 대한 이야기만 실컷하고보니 무언가 허무해진다. 아마도 이게, 이 책에 대한 여행지를 다시 한 번 복습하 듯 쓰지 않은 이 리뷰 때문에 그럴지도 모른다. 여행 에세이를 좋아할법한 독자라면 매력적인 권리씨의 뒤를 쫓아도 괜찮을만한 책이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야 -헐, 이제와서- 너무 많은 나라들을 다녀 온 탓인지 한 곳에 오래 머무르지않아 너무 많은 지명들이 스치워 혼란스러웠다. 영감의 계보라는 동기로 여러 작가들의 작품들과 배치시킨 여행도 색달랐지만, 무엇보다 여행자의 자유로움이 한껏 발산되어진 작품인것에는 하자가 없음이 분명하다. 앞으로 북한을 여행하는 것이 목표라는데, 목숨걸고 따라가보는 것도 좋겠지만 솔직히는, 정말이지 솔직히는 여행 에세이말고 소설, 써주었으면 좋겠다. 더불어, 미출간으로 그친 「나도 말도 안 되는 상상이란 걸 알아」라는 책의 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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꺼져라, 비둘기
김도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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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둘기떼가 나타나 우리 마을을 점령하고 부터 사람들의 인심은 몰라보게 흉흉해졌다.

어디서건 부리를 부딪히며 먹이 다툼을 하는 비둘기를 닮아 간 것이다.

 

 


 이 소설, 참 친절하다- 라고 생각한 건, 갑작스레 이야기를 끊고 소설의 인물들을 하나 둘 밖으로 불러내어 이야기를 주고받는 페이지를 맞닥뜨린 후였다. 아니, 더 정확히 얘기하자면 생각치도 못했던 등장인물의 섬세한 소개글을 훑어 본 후였다. 대체 얼마나 많은 인물들이 튀어나오길래 등장인물 소개까지 하나 싶었는데 소설의 끝과 마주해보니 그게 아니다. 등장인물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애정 어린 시선을 보내는 작가의 마음도 눈치챘지만 읽는 독자에게 정확하게 이 소설을 쓰는 이유와 읽는 방법을, 전봇대 뒤에 서서 고개만 빼꼼 내밀고 새침데기인 척 하며 일러준다. 그래 이 소설, 끝까지 친절하다. 그리고 이러한 친절 역시 작가의 의도란다. 작가의 말에 버젓이 친절한 소설이 쓰고 싶었다는 말에 진작에 그런 생각을 품고 있었던 내 자신이 대견했을만큼 놀라웠으며 기뻣고 탄성까지 내질렀음이다. 비록 작가가 의도한대로 흘러간 내 생각들이 당연한 것이겠지만 내 생각과 작가의 의도가 일치했던 적은 그리 많지 않기 때문에 유유자적 날아다니고 싶을만큼 기쁘다. 에정대로였다면, 2월에 출간이 되었을 책인데 좀 늦은감이 있다. 그러니까 나는 김도언 작가의 이 책을 2월 부터 내내 기다려왔다. 그렇다고 내가 김도언이라는 작가를 잘 아는것도 아니다. 좀 솔직해지자면 난 겨우 김도언 작가의 소설집에 실린 단편 하나만을 읽었을뿐이다. 그런데도 왜 기다렸느냐, 묻는다면 딱히 할 말이 없다. 그냥이다, 정말. 기다리고 싶었을뿐이고, 그래야만 할 것 같았고 그러고 싶었다. 그랬기때문에 누구보다 더 먼저 읽고 싶었고 출간 소식을 듣자마자 매일같이 인터넷 서점을 들쑤시며 나와라, 나와라 주문을 걸었으며 결국엔 가장 빠르게 배송이 되는 곳에서 배송비까지 들이며 -인터공원은 신간도 배송비를 받더군- 주문을 했다. 두근 두근, 책을 받아들고는 마냥 웃음만 나왔더랬다.

 

 소설 「꺼져라, 비둘기」는 제목 그대로 비둘기에게 점령당한 특색 없는 소읍인 토담리에 사는, 비둘기를 구워 먹고 싶을 정도로 싫어하는 열여덟 살의 서번트 증후군을 앓는 이산이라는 이름의 순박한 소년의 시선에서부터 시작한다. 평화의 상징과도 같은 이 비둘기가 토담리에서는 불행의 상징이자, 이 마을에 '악'을 불러 온 근원이었다. 마을 변두리에 타이어 공장이 들어서면서, 몰려드는 비둘기는 토담리를 병들게 했으며 마을에 사는 사람들의 인심과 평화를 쪼아먹는 흉물과도 같은것이었다. 이산의 어머니 역시 이 비둘기로 하여금 목숨을 잃었고, 자신만의 속도로 살아가던 사람들의 발길을 재촉했으며 결국, 이 작은 소읍은 비둘기들이 싸지르는 똥으로 범벅이 되어 마을 사람들의 마음까지도 더럽혔다. 유해 동물로 발표 된 비둘기, 그것은 토담리의 중심이었으며 마을의 '선'과 '악'을 나누는 기준점이 된다. 밖으로 나가기 무섭게 똥을 싸지르는 비둘기들로 인해 더럽혀진 옷과 몸을 깨끗이 하기 위해 마을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려야하는 세탁소 주인 박씨 아저씨와 목욕탕을 운영하는 주씨 아저씨가 작가가 배치해놓은 소설의 대표적인 '악'이다. 작당하고 비둘기에게 닭 사료를 뿌려대니 살이 찐 비둘기들은 하늘이 아닌 땅을 딛고 사는 동물이라 치부해도 모자라지 않다. 또한, 이산이 불의의 사고로 씨름을 그만두고 아버지와 새엄마가 운영하는 '비둘기네 해장국' 식당에서 일을 거들면서 이상한 알약을 매일같이 건네는 새 엄마 옥미희와 그의 아들 조만세 그리고 한 사람을 자살로 몰고 가기도 한 오토바이 상회의 계씨네 형제가 '악'의 표본이다. 이렇게 소설의 악역을 맡은 인물들을 적고 보니 꼭 소설에서 그랬던것처럼 갑작스레 튀어나와 부당하다고 소리를 지를 것 만 같다.

 

 어떠한 사회든, 단체든 그것이 크든 작든 선과 악은 공존한다. 단지 이 사회는 '악'을 발설해도 되는 것과 발설되어서는 안되는 것으로 나뉠뿐이고 '선'은 적당히 걸러내어진 불편함일 뿐이다. 진실이 불편하다고 생각되기 시작한 건, 위선과 오만과 패악으로 뒤틀려버린 사회의 '발각'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러니까 '선'이란 누군가가 '선'의 지반 자체를 흔들거나 알려하지 않는 이상 발각되어지지 않는다.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연소멸을 해버리는 것이다. 소설은, 이런것들을 구태여 발설하지 않거나 숨기지 않는데서 집중 할 필요가 있다. 때려 죽일만큼 나쁘거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싶을 만큼 착하게 구성되어진 소설이라는 것, 그것은 시인을 꿈 꾸는 두 번째 화자인 '선'의 역할을 맡은 영민의 시선이 소설에 닿으며 확실해진다. 소설에서의 '선'은 전직 씨름 선수였지만 이산의 어머니인 아내를 잃고 삶의 의지를 잃은 이산의 아버지와 이산의 어머니가 살아계실 적 몸을 의탁해 온 실래씨 그리고 첫 번째 화자였던 이산이 '악'과 대조되는 대표적인 '선'이다. 또한, 비둘기가 들어서고 마을 사람들의 인심이 사나워지면서 손님 없는 한의원을 운영하며 <비둘기 추방을 위한 주민들의 모임>을 이끄는 영만의 부모가 그들이다. 대체로 영만은 자신의 운명적인 사랑인 실래씨에게 시선을 맞춘다. '사랑' 그것은 위대했다, 라고 말해도 무방할만큼 영만은 실래에게, 실래는 또 영만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사랑뿐이라는 것을 증명키라도 하듯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다.

 

 '선'은 '악'에게 위협당하고 상처를 입는다. 그러나 '선' 또한 '악'을 평정하고 몰아세우기도 한다. 주민들의 반대에도 무릅쓰고 귀신에 홀린 듯, 극악스럽고 앙칼진 이산의 새엄마, 옥미희를 받아들였던 이산 아버지의 넋 나간 외로움과 공허가 불러 온 '선'의 포효, 그래 그것은 묵묵히 숨을 고르던 '선'의 발각이었다. 소설은, 영만의 어머니가 비둘기를 잡기 위해 만든 그물을 던지며 화자들의 시선을 거두어들인다. 「꺼져라, 비둘기」라는 이 소설이, 아주 소설일 수 밖에 없는 까닭은 '악'은 떠나고 '선'은 남는다는 것이다. '필요 악'으로라도 자리매김을 하고 있는 우리 사회의 '악'은 다양한 형태로 '선'을 기만하는 사람들이 잘 지키고 있음이 사실이다. '선'과 '악'의 공존, 그것은 불변이자 진리이며 명백한 사실임에 분명하기 때문이다. 사회를 드러내놓고 비판하거나 소설과 엮어 대립이라도 시켜보면 좋으련만 지식이 빈약해 더 깊이 들어서지는 못하지만, 소설은 소설다웠다고 이야기 할 수 있다. 바라고 희망하는 소박하고 단아한 유토피아- 그래, 나는 그저 이 소설만큼이면 충분 할 것 같다. 영롱하게 빛나던 영만의 사랑처럼, 애틋함에 타오르는 사랑을 하며 그저 흘러가는 시간에 기대어 나에게 주어진 적절한 삶의 속도로 걸어가고 싶다. 다만, 그것이 한 낮의 꿈일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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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1-05-12 1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준님 조근조근 말하는 게 좋아서, 내친김에
리뷰 당선된 거 보고 읽었네요.
사실 남의 리뷰 잘 안 읽는 사람 중 한 사람이거든요, 저.
이 책은 여러모로 준님께 좋은 의미로 남는 책 같아요.
전에 어느 페이퍼 보니까 우수 리뷰로 당선 됐다고 한 것 같은데
여기는 아니고 다른덴가 봐요.
근데, 김도언 작가가 이 책을 낸다는 건 어떻게 아시고
그리 애간장을 녹인 걸까요? 수상해요. 알려줘요!ㅎ

June* 2011-05-12 17:38   좋아요 0 | URL
 
 
 있잖아요, 실은.
 별 다섯개는 무리가 있기도 했어요.
 리뷰를 쓰면서 제 리뷰가 이 책의 첫 리뷰가 될 것을 알고 있었고
 첫 리뷰가 되면 작가님 눈에 띄게 될 거라는것도 알고 있었거든요.
 일방적인 객기 부린 노출이기도 했어요.
 
 작가님은 트위터에서 알게 되었어요.
 트위터에서 2월에 소설 출간소식을 접하고, 기다리는 중에
 작가님 블로그까지 알게 되었거든요. 종종 새 글이 올라오면 다녀간
 발자국을 찍었어요. 그러다 블로그에서 곧 책이 출간이 된다는
 글을 발견하고는 일등으로 책을 구매하겠다고 덧글을 달았거든요.
 
 저는 약속대로 책을 구매했고 ( 아마도 온라인 서점에선 1등! ) 
 리뷰를 쓰고 (이건 정말 1등!) 기다렸어요. 작가님이 보러 와 주길.
 이틀만에 작가님이 방명록에 글을 남기셨더군요. 만세를 불렀어요.
 얼굴이 달아오를정도의 기쁨이 온 몸을 감싸안더랬어요, 헤에.
 
 홍대에 다녀갈 일이 있다면, 커피 한 잔 타줄테니
 연락하라며 네이트온 주소까지 알려주시더랬어요.
 마음은 이미 작가님 앞에 앉아 두 손으로 모으고 있었지만
 부끄럽고 낯섬에 여즉, 친구추가도 못했어요.
 
 우연히 김도언이라는 작가의 트위터와 블로그를 알게 된 것이
 행운이었어요. 그것이, 기다릴 수 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했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