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이야 (양장)
전아리 지음, 안태영 그림 / 노블마인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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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리도 밝고 활달한 표지를 보는 것이 얼마만인지, 책을 받아들고는 예쁘다, 예쁘다를 연발했더란다. 우악스러울 듯 촌스러운 여자의 모습이 이 책의 주인공 스물 아홉의 김정운이다. 이 책의 리뷰는 몇 번 본 적은 있지만 정작 책을 받아들고보니 처음 마주하는 생경함에, 거북스러운 느낌마저 들이닥쳐 한참이나 겉표지를 매만지다 고른 숨을 뱉고는 책을 펼쳐들었다. 뭐, 처음 있는 일도 아니다. 듣도 보도 못한 작가와의 첫 만남이 으레 그러했고 제목에서 우러나오는 책의 내용이란 그저, 누구나 한 번쯤은 학창 시절에 겪었을 법 한 연예인에 대한 갈망과도 같은 유치한 이야기가 머릿속에 그려졌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내 스케치는 밑그림에 불과했고 주인공 정운과 발을 맞추어 걷자니 불현듯 강렬한 연애 감정이 달아올라 몹시도 그리워졌다, 지난 사랑 전부가, 말이다.

 

 회사의 계약직으로 근무하는 정운은 갓 들어 온 새내기 사원보다 더 못한 위치에 머무르며 사내의 갖가지 자질구레한 심부름을 도맡아 하는 스물 아홉의 위험 수위의 여자다. 지독하게 외모가 못났다거나 몸의 장애가 있음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싫은 소리하나 되받아치는 경우가 없고 되도록이면 복작스레 결속되어지는 것을 제 스스로 손사래를 치는 성격이다. 마음을 나눈지 이개월이 지나서야, 만나던 연인이 유부남이었음을 알게되어도 함빡 울고나면 툭툭 털고 일어나 대책없이 아이돌의 뒤꽁무니를 쫓아다니는 그런 여자다. 그런 여자가 스물 아홉이란다. 세상에, 이 무슨 해괴망측한 일인가. 아니, 정말 이런 여자가 있기는 있는걸까. 삼촌팬은 들어봤어도 이모팬은 들어 본 적 없는데 너무도 당당하고 적극적인 모습에 마냥 웃을 수 밖에 없었던게 사실이다. 나 또한, 학교를 땡땡이를 쳐도 좋을 그런 연예인에 대한 갈망이 있었다. 교복 입고 방송국앞에 주저앉아 좋아하던 연예인의 머리카락이라도 볼까 몇 시간이고 줄기차게 기다려본 적이 있는데 지금, 스물 아홉의 여자가 그걸 하겠다고? 쿡쿡. 그런데 이 여자 진짜 한다. 나 보다 심하면 심했지 덜하지 않을 정도의 적극성으로 팬클럽의 선두로까지 행진한다. 그 뿐인가? 현재까지의 삶에 대해 보상이라도 받듯 자신을 좋아해주는 사랑, 그리고 자신이 좋아하는 사랑을 만나기까지 한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택 할것인가,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을 택할것인가. 이렇게 놓고 보면 정운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택한다. 두 사람 모두 정운이 아이돌을 쫓아다니던 시기에 함께 만났던 사람이었고, 사랑이라는 것이 늘 그러하듯 이루어지는 과정은 차마 지켜보기 힘들 정도로 애달프고 가슴이 콩닥거리기에, 쉽사리 책을 중간에 놓을 수도 그렇다고 그녀의 속앓이를 함께 앓을수도 없는 안타까움에 그냥 둘 다 버려버리라고 소리치고 싶었던게 사실이다. 아마, 단박에 나의 어느 시절과 오버랩이 되어버려 어쩔 수 없이 내려진 결과에 승복하고 무너져내리는 것 밖에 할 수 없었던 까닭이었을테다. 또한, 내가 걸음을 맞추어 걷고 있는 정운은, 모난 곳 없이 예쁘기 그지 없어 사랑받아 마땅한 여자로 비춰진다는것에 더 의미를 두고 싶다. 곳곳에 심어져있는 그녀의 모습을 다소 괴팍하게 그려 놓았어도 그것과는 상반되어지는 그녀의 말투라던가 행동들이 마냥 귀엽기만 했음이 사실이다.

 

   주인공에게 애착을 가질 수 있는 작품은 손에 꼽을만 하다고 나는 자신 할 수 있다. 그것은 작가가 자신의 작품속에 탄생시킨 주인공에 대한 애착이 어느 정도냐에 따라 애착 감정도의 높낮이가 구분되어진다는 것 또한 난 자신 할 수 있다. 애정 가득 쉴새없이 페이지를 넘기다 문득 다른 책들에 비해 문체가 참으로 신선하고 통통 튄다 싶었는데 보지 못하고 넘어 온 작가 소개를 보아하니 팔육년생이란다. 과연 내가 이 소개를 먼저 보았다면 이 책을 고운 시선으로 볼 수 있었을지가 의문스러우면서도, 참 대단하다 싶었다. 그래도 하며, 솔직한 심정으로 아쉬움을 토로해보자면- 부족하지않게 정운의 발을 맞추면서도 단 한번도 흐트러지지않을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는 것이다. 스물 다섯이 결코 스물 아홉이 될 수는 없다는 것. 그녀로서는 충분하다 할 수 있겠지만 빈틈이 고스란히 들어나는 건 찰나다. 아직 전아리, 그녀로서도 넘을 수 없지만 허무를 수 있는 벽이 있다는 건 지당한 현실이겠지만 내가 굳이 뭐라 할 입장은 아니다. 내가 스물 아홉이 아니니 전아리, 그녀가 그려주는 스물 아홉의 익살스러운 인생과 사랑이, 그것, 이라고 느꼈으니 말이다. 이만하면 충분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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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잉 아이 - Dying Eye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난주 옮김 / 재인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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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일단 무서운게 싫다. 영화는 물론 책 또한 질색한다. 내 친구들을 보면 무서운 영화가 나왔다하면 개봉날짜에 맞추어 발빠르게 움직이지만 나는 항상 열외 대상이다. 학창시절, 멋 모르고 엑소시스트라는 영화를 보러 갔다가 실신 지경까지 이르는 바람에 그 후로는 공포 영화는 내게 열외의 대상이 되는 장르였다. 책이라고 다를 거 없다. 아직도 기억이 생생한 「퇴마록」이 그것이다. 재미와 스릴과 공포가 맞물린 작품이라 책을 덮기도 싫고, 그렇다고 끝까지 읽을 엄두가 도저히 나지 않아 밤에는 읽지 않았던 기억이 있다. 안타깝지만, 낮에도 읽다가 무서워 그만 책을 포기했던 걸로 기억한다. 그런 내가, 이 미스터리 호러물을 제법 담담히 받아 들인 건 1년도 채 되지 않은 근래의 이야기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인 카페에 가입을 하면서 모르던 작가와 작품을 알아가는 재미가 꽤나 쏠쏠했던거다. 그리고 그곳에서 히가시노 게이고라는 작가를 알게 된다. 미스테리 호러물이라, 읽기에는 겁나고 읽지 않으려니 카페 모든 회원들이 알고 있을 법한 작가의 책을 한 권도 읽지 않은 것에 대한 미적거리는 감정에 개정판으로 나온 「레몬」을 다짜고짜 주문해버렸다. 그때 나는 그 책을 완벽히 읽고 난 후, 딱 한 마디만 내 뱉은 기억이 있다. ' 아, 이 사람 혹시 천재? ' 라고. 더불어, 이제는 「퇴마록」도 읽을 수 있겠구나, 싶었던거다.

 

 이번 작품 「다잉아이」는 히가시노 게이고와 대면하는 3번째 작품이다. 그의 많은 작품들중에 고작 2작품을 앞서 읽었지만 그가 풀어내는 이야기의 구성을 감히 말하자면, 뻔한 이야기도 뻔하게 진행시키지 않는다에 있었다. 그를 떠나서 다른 미스테리 호러물의 작가들의 작품을 읽어 보기는 했지만, 아직까지는 이야기를 풀어가는 구성에 있어서는 히가시노 게이고, 그가 단연 최고가 아닐까 싶다. 미스테리 호러물에 관해서는 책장에 꽂힌 작품만 보아도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이 가장 많다. 읽은 책 보다 읽지 않은 책이 더 많은 까닭은 언제든지 책에 대한 흥미가 사그라들때 읽으려는, 어떠한 대책과도 같은 방편이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을 내리 읽을수도 있겠지만 그러다보면 분명 미스테리물에만 관심을 가져, 읽던 소설도 내팽켜 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한 때, 판타지와 무협지소설에 빠졌을때도 그러했기 때문이다. 내겐, 판타지나 무협지 미스테리는 오로지 흥미로움으로 남겨두는 것, 그것이 내 일상을 깨트리지않는 길이라는 것도 안다. 워낙에 자기중심적이라 한 가지에 빠지면 다른 것에 눈에 들어오지 않기 때문에, 일도, 잠도, 먹는것 또한 규칙적이지 못하게 만드는 것은 순식간이기 때문이다.

 

 히가시노 게이고, 그의 최신 작품이다 보니 다른때와는 다르게 기대치가 하늘을 박차고 올랐다. 주말을 기해 붙들었던 책이었다면 분명 밤을 꼬박 새고도 남았음이다. 이것이 바로 미스테리라는 장르가 갖는 불가항력적인 힘과 같다고 할 수 있다. 한 여자가 교통 사고로 끔찍하게 죽는 것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가해자는 주인공, 신스케. 그러나 그는 사고가 일어났던 시각의 일들을 일시적으로 상실하게 된다. 시간이란 것이 참으로 부지런하여 유유히 기억들도 그에 맞추어 흘러간다지만 그 날 그때의 부분적인 기억 상실은 신스케에게 또다른 충격을 주게 된다. 바텐더로 일하는 그의 가게에 술을 마시러 들른 사람에게 가격당하여 쓰러져 가까스로 목숨은 부지하지만 그 사건으로 인해 신스케는 차라리 모르고 지냈음이 더 나았을 뻔한 사실들과 정면 돌파하게 된다. 점차 되살아나는 기억들과 맞물려 교통사고의 가해자는 신스케 혼자가 아니였다는 사실과, 만나던 여자의 정체 그리고 그 날의 운전 역시 자신이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된다. 

 

 교통사고, 그리고 뒤이어 일종의 거래가 존재하던 그 날의 사건. 어느 드라마에서 몇 번 본 적이 있다. 교통사고를 낸 당사자가 도망을 가거나 옆 조수석에 앉았던 사람이 대신 사고의 가해자가 되는 경우를 말이다. 그런일이 가능하기는한지 의아함에도 믿을 수 밖에 없는 것은 '돈'이라는 권력이다. 잘못된 일에 눈을 감아주고 그 일에 관해 대신하여 처벌을 받는다는 댓가의 조건은 오로지 돈으로 국한된다. 이런일들이 그저 드라마나 소설의 허구에 묻힌 소재에 그친다고 할 수 있을까. 소설에서 등장하는 모든 주인공들이 댓가라는 실타래에 꼬여 위험을 자처하거나 죽음에 처하기도 한다. 반전이라면 반전이겠지만, 강단있게 사건을 헤쳐나가는 신스케의 마지막 거래라는 것에 눈살이 찌푸려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도 결국 그런 이 었구나 싶었던 거다. 돈으로 일단락되었던 사건이 다시금 부풀어 오르며 또 다시 돈으로 묻혀지려는 그 모종의 거래가 이 소설안에 있다. 살고자했던 죽어 가던 여자의 눈이 야기시킨 사건의 잔해들이 다시금 모여 진실성을 갖게 된다.

 

 사실, 앞서 읽은 「레몬」과 「변신」에 비하면 그닥 자극적이지는 않았다는 점이 마음에 들면서도 손톱만큼의 애정으로 본다면 그 점이 아쉽기도 하다. 그의 무시치 못 할 흡입력 강한 필력에 비해,  익히 알고있는 김난주씨의 번역에도 불구하고 문체 자체는 결론적으로 허공에서 헤엄치 는 공기 빠진 풍선과도 같았다 할 수 있다. 어떨지모르겠지만 김난주하면 에쿠니 가오리가 떠오르는 것은 자동 반사적인것과 같아서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과는 그닥 어울리지않는 조합이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물론, 내가 읽은 김난주씨가 번역한 「다잉아이」가 그렇다는 이야기는 맞다. 읽는데 어려움은 없었으나 다소 글자들이 날리는 듯한 느낌은 책을 읽은 후에도 여전했으니 말이다. 9월 끄트머리에서 그의 작품을 한 권 더 읽어야겠다. 그의 작품은 늘, 다음을 기약하는 여운과도 같은 것임은 한 층 더 고조됨은 명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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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 코리아
김진명 지음 / 자음과모음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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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헤아릴 수 없지만 어림잡아 오년이라는 세월은 그리 넘치지도 부족치도 않을 것이다. 짐작컨대, 한 인터넷 서점의 친절이 아니었다면 이런 극적인 해후는 가능하지 않았음은 물론, 제 스스로 김진명 작가의 작품을 찾아 손에 쥘 일은 없었을것이다. 열여덟 혹은 열아홉의 나이에 처음 김진명 작가의 「코리아닷컴」을 만나고는 큰 충격에 사로잡혀 혼란스러움을 어쩌지 못 했던 것이 아직도 생생하다. 연애 소설에 푹 빠져있던 내게는 전혀 다른 세계의 문이 열린 것이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오로지 김진명의 작품만이 소설의, 책의 전부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는 세계에 발을 딛게 된 것이다. 작가 김진명에 대한 열망, 바로 그것과도 같은. 그의 출간 된 모든 작품을 읽어내고는 신간만이 출간되기를 오매불망 기다리며 가까스로 가슴에 안겨 온 책은 명성황후의 이야기를 담은 「황태자비 납치사건」. 그러나, 그 세계가 무너지는 것은 찰나와 같은 것이었다. 그의 작품만을 내리 읽어서인지 그의 문체라던가 이야기를 야기시키는 흐름에 익숙해진채로 만난 신간은 그야말로 '이게 뭐야!' 였다. 그의 작품임을 믿을 수 없었으며, 기대와 기다림은 결국 적잖은 실망을 안겨 주었다. 물론, 그의 슬럼프인가 싶었지만 그 후의 출간작 「도박사」도 그러했으며 그 다음 출간은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렇게 김진명을 놓는 동시에 독서라는 취미도 버렸다.

 

 그러다 만난 「천년의 금서」. 무엇을 기대했던 것일까. 그만의 미스테리 풀이는 여전했지만 무언가 첨벙하고 떨어졌지만 다시 떠오른 그것에서는 무언가가 빠진 느낌이었다. 이대로 영영 안녕이겠구나, 싶었는데 앞서 말했던 극적인 해후상봉이 이번에 마주한 「바이 코리아」에서 실현, 상기 된 것이다. 김진명만의 색깔, 호흡, 체온이 고스란히 묻어 나오는 까무러쳐도 좋을 오로지 그만이 지닐 수 있는 묵직한 고유성. 처음에 마주했을때에는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의 개정판인 줄 알고 신나게 읽어내렸는데 어이쿠야, 다 읽고 나서야 아니란 걸 알았다. 이상하기도 했지, 분명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에서는 '핵' 싸움이었다면 이번 「바이 코리아」는 반도체 싸움이었으니.

 

 딱히, 확연하게 들어나는 주인공이라 말 할 수 있는 인물이 없을 정도로 많은 이들이 핵심적인 역활을 해낸다. 우선, 이야기의 발판이 되는 기자 정의림. 안타깝게도 면도 얘기가 나오기 전까지는 여자인 줄 알았더란다. 페이지는 무려 백페이지를 훨씬 넘었는데 말이다. 의림의 절친한 친구의 죽음이 예사롭지 않다는 점을 캐치하며 추적하며 이야기는 본격적인 도입으로 들어선다. 친구의 죽음의 흔적을 따라잡던 의림이 미지의 북학인이라는 인물과 온라인으로 마주하면서 박정희의 비자금과 한국의 인재를 사고 파는 바이스로이 재단을 쫓으며 세계 반도체의 일인자라는 삼성전자의 기업과 부딪힌다. 그리고 서서히 물 위로 차오르는 천재 과학자 나영준과 이동우, 강대국 미국의 비밀기지 그리고 반도체 전쟁.

 

 한 때, 어느 만화책에서 이런 글귀를 읽은 적이 있다. '신이 인간을 창조하며 실수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과학이다.'. 그때는 그것이 무슨 말인지 모른 채 흘렸는데 가히, 과학 기술이란 한 국가의 운명을 좌지우지 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과학자, 즉 국민이 국가의 재산이라는 것. 국가의 힘이란 결코 권력과 돈이 전부가 아니라는 거다. 「바이 코리아」는 2010년 현재와 짙은 개연성을 품고 있다. 스스로의 힘을 갖지 못한다면 어떤식으로든 강국에 속할 수 밖에 없는 처절한 현실과 인간의 생명과 나란히 두어도 모자라질않을 금전과 되새김질을 반복해야만 하는 과거에 대한 회의와 가장 중요한 본질을 잊은 채 인문계로만 치중하는 학습열이 그것이다. 「바이 코리아」에서는 삼성전자는 국민이 만든 기업이라 말한다. 비록 허구에 불과할테지만, 이건희 회장을 넘어 이병철 회장의 이야기는 잠재되어 있던 애국심을 끌어올리는데 최고의 소재가 되었음은 물론이다. 한국인으로서의, 한국인이어서, 차오르는 근본적인 문제점이 완화되는 절정까지 치달았으니 말이다.

 

 처음, 작가 김진명의 작품과 마주했을때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거짓인지를 몰라 책의 내용이 진실인 양 고스란히 받아들이기만 했었다. 이것이 역사구나, 싶었던 거다. 찾지 못해 꽁꽁 숨겨진 역사가 아닌, 작가 김진명이 바라고 우리 대한민국이 바라고 내가 바라는 그런 역사와 진실의 진정성이 김진명의 작품에는 담겨 있는 것이다. 호소력이 그득한 문체, 동안 내가 김진명의 작품을 읽지 않던것은 바로 그 짙은 호소력이 빠져있었던 것은 아닐까. 뭇 사람들에겐 고리타분할지도 모르지만 내게는 김진명 다운, 작품이 아니었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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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칼랭
로맹 가리 지음, 이주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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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비뇨기를 통해 조산된

출산 전 상태의 인간이라고 말이다.

p.126

 

 

 

 퍼뜩 생각나진않지만, 분명 어떠한 계기로 인해 에밀 아자르의 「자기앞의 」과 마주한 것 같은데 도저히 그 계기가 무엇이었는지 경로와 동기를 추적할 수 없다. 작품 보다는 작가에게 품는 신뢰에 따라 책을 선택하는데, 에밀 아자르라는 작가는 그때 당시의 내겐 듣도 보도 못한 생소함이었고 표지 또한 스스로 선택을 하기엔 우스울 정도로 빈약하기 짝이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책을 받아 들고 작가 소개란을 찬찬히 읽어 내리면서는 한껏 부푼 기대와 전율에 반응이라도 하듯 책장에 반듯이 꽂아 둔 로맹 가리의 작품을 꺼내어 훑어 보기를 몇 차례 반복했다. 로맹 가리의 필명이 에밀 아자르라니! 아직, 로맹 가리의 작품은 접해보지도 못했는데 필명으로 쓴 「자기앞의 」을 먼저 접해볼 수 있다는 그때의 그 심정은 다소 지배적이고 독보적인 로맹 가리의 세계에 한 걸음 내딛는 찬란함, 그것과 같다고 말 할 수 있다. 그리하여 만나게 된, 「그로칼랭」. 이미 서점을 들러 로맹가리의 작품들을 닥치는대로 구입을 해 둔 상태였고 여전히 반듯이 꽂아 둔 채로 자리하고 있지만, 8월의 독서 기록을 토대로 9월의 첫 단추는 로맹 가리로 택했다.  앞서 읽은 「자기앞의 」과 비슷한 구성의 책이라 생각했는데, 비실비실 튀어나오던 멋쩍은 웃음과 함께 백페이지를 넘어서며 얕은 후회가 가차없이 가슴을 때리기 시작했다. 책에 대한 어떠한 정보도 없이 즐거이 책에 쥐었으니 이 얕은 후회는 단말마의 비명과도 같지만, 읽는 내내 끝없는 메아리로 여즉 울려퍼지고 있다.      

 

 열렬한 포옹이라는 뜻의 이 책은, 서른 일곱의 독신 남자가 파리에서 비단뱀을 키우며 살아가는 삶의 한 단면을 그리고 있다. 비단뱀의 이름은 책의 제목 「그로칼랭」과 같다. 여행길에서 만나 데려 온 비단뱀을 자신의 집으로 들이면서 그의 삶은 자기 자신이 아닌 오로지 비단뱀 그로칼랭에게 맞추어지고 그로인해 겪게 되는 파리 시민들의 시선과 관심이나 그가 다니는 회사에서의 일상과 자못 싱그럽기까지한 그의 사랑이 모두 엇박자로 교차되어진다. 비단뱀 그로칼랭이 사라졌을 때의 겪는 고통과 -사라진 이유가, 변기통에 머리를 밀어 넣어 아래층 변기로 나왔단다. 어떻게 이런 발상을 할 수 있는지 너무도 기발해 한 참을 웃었다.- 같은 사환인 흑인 여자를 짝사랑하는 마음을 보기 흉할 정도의 이기적인 방식으로 품는다는 것 만 보아도 (p.195 하지만 저는 어떤 아가씨와 엘리베이터에서 부부생활을 하고 있으니…) 그의 용감하기까지한 외로움은 단박에 알아챌 수 있다. 그의 지독한 고독에서 오는 불투명한 자기 연민이 전부 비단뱀 그로칼랭과 결여되어지면서 그가 비단뱀 그로칼랭인지 비단뱀 그로칼랭이 그 자신인지 조차 확연해질 수 없을정도로 치달았을때는 이미 그는 비단뱀 그로칼랭도 아니고 그가 그이지도 못했다.    

 

 사실, 이 책의 중점은 삭제되어진 채 출간되지 못했던 '생태학적 결말' 부분에 있는데 읽을 당시에는 딱히 구분을 짓지 않고 읽은 까닭에 나는 별다른 비중을 두지 않았다. 이미 그의 사상과 치열한 고군분투가 자기 중심적이면서도 비열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주인공인 그가 출산 전 상태의 인간이라 생각한다는 것, 그것이 바로 미완성의 인간을 의미하는데 여기서 저자 로맹 가리는 미완성의 형태를, 앞서 말한 다소 지배적이면서도 독보적인 한 인간으로 탄생시킨 것이다. 또한, 같은 인간과의 교류를 거듭할수록 이해의 폭은 좁아지고 위선과 기만만이 옥죄어오는 구렁텅이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는 것이다. 비단뱀 그로칼랭과의 교감 역시 -교감이라고 부를 수도 없겠지만- 비틀어진 허상에 불과했음이 사실적이다.  존재는하지만 존재의 여부는 확실치 않은, 그러니까 그림자 없는 자신만의 비극의 드라마를 연출것과 같은것이다. 숫자 '0'과 '1', '2'를 거론하며 인간의 성향을 주시하는 부분은 주인공, 그의 삶이 그 어디에도 안주하지 못함에 분열되리라는 것을 암시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고백컨대, 나는 「그로칼랭」을 정독하여 읽지 못했다. 집중력이 얕은 까닭에, 정독이 아니고서는 책의 내용을 바로 받아들일 수 없음에 거의 모든 책을 주의 깊게 또박또박 읽는데 「그로칼랭」은 그러질 못했다. 부러, 책의 내용 또한 바로 보지 못한 것이 분명 있을 것이다. 이 책이 말하는 낙태와 출산에 관한것 -구태여, 리뷰와 연결을 짓지 않음으로써- 은 리뷰에 언급조차 못했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보여지기 원하는 리뷰가 아닌 이상, 내 멋대로식이라도 괜찮을테지만 정독의 아쉬움이 남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필히, 다시 한 번 읽게 될 것이고 그렇게 할 것이다. 그리고 이 책에 몇 개의 별을 쥐어주느냐에 끝없는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지만 끝내는 별 다섯개로 마무리한다. 어찌됐든, 로맹 가리는 내가 아는 프랑스 문단에서는 단연 최고일 수 밖에 없으니. 덧 붙여 보자면 개인적으로 자살로 생을 마감한 작가들이 매력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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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처럼
김경욱 지음 / 민음사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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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주문하고 손에 받아들기까지 김경욱, 김경욱하며 노래를 불렀더랬다. 그의 「동화처럼」이 출간되기전의 작품들을 모조리 소장하거나 읽은 책이 하나 없음에도 불구하고 너무 자연스러운 기다림이었다. 또한, 그의 작품의 출간 식을 알고나서는 그 어떤 책도 손에 쥘 수 없었으니, 이 또한 나 조차도 놀랄 수 밖에 없는 집착과도 같은 김경욱에 대한 일종의 뜻모를 애정과도 같은 친애함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김경욱과 첫 대면을 한 것은 매일 출석도장을 찍어오던 온라인 서점도 아니요, 하릴없이 남던 시간을 할애하려 들어 선 서점도 아니요, 책 하나로 뭉친 동호회에서 주워 들은 귀 동냥도 아니었다. 단지, 그득하게 취기가 오른 채 친분을 나누던 지인의 홈페이지를 둘러보다 우연히 발견한 그의 발췌 된 글귀들과 마주하면서 흐트러진 정신이 바로잡히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래, 바로 그때부터였다. 알 수 없는 감정들이 폭발하 듯 단숨에 그를 신뢰하여 이번 작품을 기다리면서도 층층이 쌓여가는 애정을 어쩌지 못했 던 것 처럼, 말이다.

 

 그의 이번 작품 「동화처럼」은 연애소설이다. 조금의 거짓과 과장없이 가늠해보자면, 연애소설을 마지막으로 읽은 것이 언제인지는 까마득하다. 사랑에 관해서는 해탈과 가까우리만치 터득하고 경험한 탓에 더 이상은 배울 것이 없다 생각했던 오만과 자만으로 연애소설에서 손을 뗀지는 꽤 오래되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호기심으로 가득했던 사랑이라는 감정으로 위태로왔던 학창시절에는 오로지 연애소설만을 고집했던 탓도 있으리라. 허나, 김경욱이라는 작가 앞에서 어떠한 장르의 책인 들, 빛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렇다. 이 소설, 참으로 별 다섯개가 아깝지않다. 김경욱이라서가 아니라, 그의 작품이라서가 아니라, 그는 그대로 작품은 작품대로, 각각의 빛이 난다. 그리고 그 빛 아래 그가 만들어낸 동화가 있다. 눈물의 공주 백장미와 침묵의 왕자 김명제가 사는, 동화처럼 이어지는 지극히 현실적인. 

 

  대학시절, 노래를 부르는 동호회에서 서로 다른 이를 첫사랑을 가슴으로 묻은 채 6년이라는 세월이 흘러 그들의 연애가 시작된다. 지켜보는 것 만으로도 달달한 바이러스가 뿜어져 나오는 연애를 거쳐 결혼이라는 새로운 세상과 국면하며 보이지 않던 부분들이 새살 돋 듯 돋아나면서부터 부딪히다 결국 깨어지고 만다. 그 첫 번째 헤어짐을 이야기하자면, 연애를 오래해보지 못 한 연인들에게서나 볼 수 있는 초조함과 자존심 그리고 이기적인 이해와 배려들이 공존한다. 그런 이별이 늘 그러하듯 다시 붙기도 참 쉽다. 서로에게 각인되어진 습관이라던가 함께했던 추억들이 못다한 후회로 밀려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마주하여 다시금 사랑을 피우는 것 처럼 말이다. 두 번째 결혼, 그리고 또 다시 파국. 두 번째는 첫 번째와 확연히 다르다. 서로의 '자아'와 '정체성'과 마주했음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나'와 '너'가 아닌 '우리'라는 결속이 완전해질 수 없으니 그 관계가 결여되고 마는 것은 명약관화 즉, 불 보듯 뻔한 지당함이 분명하니 말이다.

 

 그들의 연애와 결혼, 사랑을 축약해보니 읽는 내내 웃음만발했던 치킨집에서의 통과의례라던가, 그들의 결혼 후에도 끈질기게 따라붙던 서로의 첫사랑이라던가, 장미의 그악스러웠던 어머니와 명제의 개구리를 삶아 먹던 아버지, 서로 공유하지 못했던 축구나 야구를 자세히 꺼내어 옮기지는 못했지만 이야기의 구성이 좀 더 탄탄해지기에는 충분한 소재들이 넘쳐났다. 무엇보다 안타까웠던 건 장미의 상상임신으로 인한 여자의 시들어가던 존재성이 못내 가슴을 방망이질 쳤다. 제목 「동화처럼」과 같이 아주 어린 시절에 즐겨보던 동화들이 자연스레 튀어나오기도 했고 현재의 내 결혼 생활과 오버랩이 되어버리는 상황과 맞붙어 괜스레 멋쩍어지기도 몇 번이었다.

 

 김경욱, 책을 덮으며 다시금 그의 이름을 되뇌이자 참, 야무진 작가- 라는 말이 덧붙여 소리되어 나온다. 이토록이나 적은 페이지를 불과하고 희로애락의 진정성을 담을 수 있는 작가가 과연 몇이나 될까 싶어, 손가락을 접어따져보아도 마땅히 떠오르지 않는 건 내가 너무 그의 작품에 몰입했거나 독서의 폭이 좁은 내 미숙함이려니 생각해보지만 난 전자에 손을 들어주고 싶다. 그리고 이제와 얘기하는 것이지만, 연애소설답게 장미와 명제는 다시 만나게 된다. 자아정체성에 부딪힌 그들이 과연 어떠한 계기로 다시금 만나게 되었는지는, 책이 말해줄터이니 조심스런 추천과 사랑에 고달픈 이들에게 권해본다. 결국, 사랑이 시작되는 시점과 끝은 자기 자신에게 비롯되어 마침표를 찍는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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