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란한 보통날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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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만에 하나

네 마음이 다른 사람에게로 옮겨 갔다면,

그때는 거리낄 것 없이 그 사람 품으로 가거라.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며 '아, 다행입니다. 에쿠니씨' 했다. 도저히 소설, 그 자체만으로밖에 받아들일 수 없었던 전작 「빨간 장화」나 「달콤한 작은 거짓말」과 같은 처참한 여운에 휩싸일까봐 지레 겁부터 먹은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오래 그리고 지속적으로 작품을 출간해내는 그녀를 보면서 슬슬 이제 '끝'이 보이는구나, 싶었던거다. 간결한, 흩어지는 문체를 써도 너그러이 받아 줄 수 있고 인내하며 읽어 줄 수 있는 작가는 에쿠니씨가 유일하기 때문이다. 가슴 벅차게 기다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정도로 이번 작품「소란한 보통날」은 특별했다. 전작들과 비교를 하자면 연애 소설 부근에서 끈덕지게 달라붙다가 허무맹랑하게 시집으로 결혼의 단면을 보여주는가 싶더니 본격적으로 결혼 생활을 주제로 두개의 작품을 출간하기에 이르러 이번 소설은 나아가 '가족' 이라는 코드를 어루만지는 소설이었기 때문이다. 에쿠니만이 가진 독특한 짧은 호흡 그리고 흩날리는 감성의 파편들이 삶의 본질과 맹목적인 사랑의 이야기들을 펼쳐내는 것, 그것은 이번 소설의 제목과도 같은 그저 '보통' 혹은 '평범' 함이겠지만 에쿠니의 손끝에 머무는 것들은 늘 그랬듯 '보통'의 것에서 오는 '특별함', 바로 그것이었다.

 

 소설이 탄생시킨 미야자카가의 가족은 무심한 듯 하지만 누구보다 가족에 충실한 아버지와 작은 움직임에도 세심함이 엿 보이는 어머니를 주체로 이루어진 단란한 가족이다. 결혼을 했지만 이혼을 품고 있는 큰 언니인 소요와 자유분방하고 자신의 주관이 뚜렷한 둘째 시마코, 그리고 이 소설의 화자인 셋째 고토코와 조용한 듯 하지만 사랑스럽고 어른스러운 막내 아들, 리쓰가 미야자카가의 가족 구성원이다. 소설에서 에쿠니씨가 가장 중요시했다고 생각 할 수 있는 것은 '가족'이라는 단체에 소속되어진 구성원들이 보호를 받는 방식이다. 맹목적인 사랑과 무조건적인 '내 편'이라는 무한한 신뢰와 믿음, 그것은 소설의 화자인 고토코와 후카마치 나오토와의 연애에서 불거지는 사랑 따위와는 다른 '가족愛' 이다. 그것은 자신이 원하는 반려자와 결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반죽음 당한 상태로 이혼을 감행하는 소요의 짧은 결혼 생활을 받아들이는 미야자카가의 모습이 그러했으며, 매번 누구도 예상할 수 없는 '소중한 사람'을 가족에게 소개 시키는 둘째 시마코의 사랑을 보듬어주는 모습에서도 볼 수 있었다. 또한 학교에서 정학을 받을만큼 타인에게는 눈살을 찌푸리게하는 리쓰의 취미 생활도 하나의 '문화'로 인정해주는 가족의 모습도 마찬가지이다. -사실, 리쓰의 취미를 단순히 취미 생활로 받아들이지 않는 학교측이 너무했다!- 미야자카가의 가족에게는 어떠한 질서가 존재하는데 그것은 수칙과도 같다. 가족의 생일때에는 생일 당사자가 좋아하는 음식을 만들어서 먹거나, 고등학교 졸업때까지는 아침 메뉴가 시리얼이나 채소로 정해져있는 것 따위의 것이다. 적어도 나는, 에쿠니씨의 소설을 읽을때에는 어느 한 주인공에게 에쿠니씨의 모습을 투영시키는데 이번에는 화자쪽인 고토코와 세심한 엄마 쪽이었다. 화자쪽에 시선을 맞춘 이유는 늘 그랬듯 에쿠니씨가 그려내는 사랑은 잔잔하면서도 부드러웠고 따스했다. 이것은 고토코와 후카마치 나오토가 그리는 연애에서 볼 수 있는데 평범하면서도 으레 누구나 할 수 있는 사랑, 이것이 에쿠니씨가 전작들에서도 아무렇지않게 무덤덤히 풀어냈던 사랑이기도 하다. 혹은, 그녀가 꿈에 그리는 이상적인 사랑이 그럴지도. 그리고 세심한 엄마 쪽은 현재의 에쿠니씨의 삶의 방식이 아닐까, 하는 -그리고 내가 상상하는 에쿠니씨의 모습- 가장 적절했던 에쿠니씨의 모습이었다.

 

 타인의 시선을 철저히 배제한 소설, 이라고도 할 수 있고 자녀들의 잘못된 행보에 어떠한 지적도 하지 않고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과연 올바른 가족애인지 묻는 어떤 분의 리뷰를 보았다. -이건 정말 우연적으로 읽은거지만, 읽고 좀 마음이 상했다.- 우선 가족이라는 공동체는 타인의 시선에 부닥치는 관계가 아니다. 독립적인 성향이 강한 일본에서라면 그것은 더더욱이나 배제되어질 수 있는 시선이다. 구태여 일본소설이 한국처럼 타인의 일에 떠들기 좋아하는 문화에 맞출 필요는 없다는거다. 소요의 이혼이라던가, 시마코의 동성애, 그리고 성인물로 취급받는 리쓰의 취미생활에 가타부타 이야기하는 건 더더욱이나 아니올시다이다. 미성년자도 아닌 소요의 이혼은 자신의 의지에서 온 결단이고 시마코의 동생애 역시 감히 손가락질 받을 만한 사랑이 아니다. 쉽게 볼 수 없다고 해서 그것을 틀렸다고 말하는 것은 그것이야말로 가족이라는 공동체에서는 묶일 수 없는 에쿠니씨가 배제한 타인의 시선이다. 리쓰의 취미 생활 역시 타인에게는 성인물이겠지만, 인형을 만드는 리쓰의 의도가 그것이 아니라면, 일종의 프라모델일 뿐인것이다. 어째서 이 모든것이 반사회적인 것이라 취급을 하는지 모르겠다. 또한 '일본' 소설이니 '일본' 문화에 맞춰지는게 당연한것인데도 도대체 '일본' 소설을 국내 소설인 마냥 읽으려고 하는건지, 이것은 이 책을 읽는 이의 자세부터가 틀린것이다. 에쿠니씨가 타인의 시선을 배제하고 썼다면, 우리가 배제하며 읽어야 하는 것은 일반적 '보통'의 상식이다. 책이라고 하여 무조건적인 지헤와 배움을 주는 것은 아니다. 안목을 넓히려면 차라리 이런 허구 소설말고 자기계발서를 읽는 것이 빠를것이다.

 

 내게는 그저 예쁘기 그지없는 가족의 모습이었다. 공동체 의식에서 어우러지는 개개인의 존중이 그러했고 무엇보다 에쿠니씨가 숨을 불어넣은 소요와 시마코, 고토코, 리쓰의 캐릭터가 사랑스러웠다. 다부진 큰 언니 역할을 소화해 낸 소요와 사랑이 전부인 애처로운 시마코와 평범하지만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싶은 고토코 그리고 귀여운 어린 동생 리쓰까지. 좀 더 그들의 이야기를 듣지 못해 아쉬웠던만큼 적은 페이지였지만 에쿠니씨의 다음 작품은 분명 다시금 연애소설이 되어지기를 바래본다. 흩날리는 문체에서 벗어나려 노력한 티가 역력했던지라 조금은 답답했던게 사실이다. 그런 간결함이 싫어, 늘상 에쿠니씨에게 야무진 문체로 소설을 썼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는데 왠지 모르게 간결한 문체가 그리워진다. 분명, 가볍게 마음을 휑 - 하니 비워주는 건 단연코 에쿠니 가오리, 이 작가 한 명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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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만의 비밀스러운 삶
아틀레 네스 지음, 박진희 옮김 / 비채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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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존재감 미미한 소수처럼은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

다시 말해 나는 내 삶을 증명해보일 것이다!

 

 


 

 소설은, 독일 수학자 베른하르트 리만의 평전을 집필하던 노르웨이의 한 수학교수의 실종으로 발견 된 그의 일기장을 토대로 이루어진다. 수학의 미지수와 같았던 이 소설은 결국 옮긴이의 말마따라 '리만의 가설은 그래서 무엇입니까?' 라고,묻고 만들었다. 소설을 읽은 후에도 베른하르트 리만의 가설을 인터넷으로 뒤지며 어떻게든 이해라도 해보려는 것을 보면 이 책은, 수식으로만 남아있던 그의 삶을 풀이해내는 것에 성공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베른하르트 리만의 제타함수. 수학이라면 실용적으로 쓰여지는 것 외에는 별반 관심이 없는지라 소설을 읽기 전 가장 먼저 한 일은 리만의 가설인 제타함수를 인터넷으로 찾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단연 '오 마이 갓!'을 외치게 할 뿐 알 수 없는 수식들의 연속이었다. 몇몇 블로그까지 들쑤시며 읽어도 함수에 관한 빈약한 지식으로는 도통 이해할 수 없는 그림 혹은 그저 문자들의 배열일뿐이었다. 책이 이야기하려는 주제조차 파악치 못한 상태에서, 이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방향조차 잡지 못한 채로 책을 펼쳤을 때는 수학교수의 제자라도 되는 양 너무도 정직하게 읽고 있는 -소리내어 읽기도 하며-  나를 발견했다. '그래, 이것은 소설이다.' 알지 못했으며 구태여 알려고도하지 않았던 베른하르트 리만이라는 천재 수학자의 삶을 그린 평전과도 같은 하나의 소설에 불과하다.

 

 19세기의 천재 수학자의 삶을 쫓는 수학교수는, 리만의 삶의 집필을 위해 글쓰기 강좌를 다닌다. 두 아이와 아내가 있는 수학교수의 가정은 꽤나 평범한 듯 보이지만 수학교수의 미미한 균열은 그 일상적이면서도 안정된 소속감에서 일어난다. 리만의 평전을, 기존에 출간되어진 작품들과는 다르게 -좀 더 정확하고 구체적이며 누구나 쉽게 리만의 삶을 알 수 있도록- 집필하고 싶었던 수학교수는 자신의 글쓰기 능력의 향상을 위해 강좌를 다니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잉빌드라는 여자를 만나면서 수학교수의 일기에 여자에 대한 것들을 기록하게 된다. 여자와의 만남, 그것은 불륜이거나 허상이다. 수학교수의 기록되어진 일기에는 리만의 평전을 집필하면서부터 시작되는데 잉빌드와 함게한 모든것들이 담겨져있다. 여자는 수학교수가 리만의 평전을 집필하는데 있어 조언을 하거나 추가되어질 내용과 참고가 될 만한 문헌들을 함께 알아보고 조사하며 도움을 준다. 감칠맛나게 이어지던 수학교수와 여자의 애정행각은 불온한 듯 위험하다. 자신의 집에 들어서면 가족과 함께하기보다는 자신만의 카타르시스인 방안의 컴퓨터와 함께하는 시간이 많을때마다 수학교수는 현재 자신의 일상의 단조로움을 질색하다가도 강좌에서 만나는 여자를 떠올리며 아내와의 이혼을 결심하기도 한다. 그저 부는 바람으로 치부하기에는 숙학교수의 일기장의 여자와의 만남은 당장이라도 여자를 위해, 그리고 자신의 새로운 삶을 위해 살아왔던 몇 십년의 일상을 버릴 각오가 되어있었음이다.

 

 수학교수가 리만의 평전을 집필하면서 바랬던것은 수학계의 주목을 받는 일이었다. 그리고 리만의 가설을 바탕으로 별 볼일 없던 수학교수인 자신의 자리를 확고하게 잡기 위함이었다. 몇 백명의 수학자들도 리만의 가설을 풀지 못한것을 수학교수는 자신의 평전으로 리만의 가설을 증명하려했고 그것에 그 어느 누구보다다 더 가깝게 다가가려 했다. 소설은, 리만이라는 천재 수학자의 삶인 동시에 수학교수의 삶까지 투영하고 있다. 리만이 세운 가설은 언제, 그리고 누구한테서 증명되어질지는 미지수다. 수학교수가 생사를 알 수 없는 실종 상태로 머무른 것처럼, 리만의 제타함수는 현재의 수학계에서도 풀이해 내지 못하는 하나의 과제다. 또한, 소설이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리만의 제타함수 가설이 증명이 된다면 온라인의 전자상거래가 붕괴되어질 것이라는 위험성을 수학계에서는 추측해내고 있다. 리만이 살아있을때에는 주목받지 못했던 가설이 결국은 그가 죽고 세월이 지나서야 풀리지않는 가설로 존재한다. 수학교수의 일기로 풀어낸 리만의 삶은 가난하고 고단했지만 숫자가 지니고 있는 영원성에 비한다면 그는 이 가설이 증명되어지는 날까지 영원히 각인되어 질 것이다.

 

 수학교수를 이 책의 저자로 본다면, 그는 우리가 모르는 리만이라는 수학전채에 대한 이야기를 의도한대로 쉽게 풀어내주었다. 부끄럽게도 이 책을 접하지않았더라면 알지 못했을 위인임에 분명하다. 또한 리만이라는 인물과 함께 소설의 구성 또한 탁월했음이 분명하다. 읽은 것은 수학교수의 일기장에 불과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은 수학교수의 비밀스런 일기를 아내인 카린이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의연했던 한 마디 말에 아연해졌음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리만의 평전이라 생각했고, 일상에 질린 한 남자의 삶의 단면이라 생각하며 정독에 가까운 독서를 했는데도 저자는 독자가 생각치 못한 반전을 꽁꽁 숨겨둔 채 완벽한 소설로 마무리를 지었다. 수학에 관심이 없다면, 이러한 주제를 품고 있는 소설에 손이 가지 않는 책으로 치부되었을수도 있는 것을 흥미로운 소재를 곁들여 알지 못했던 것들을 일러주는 소설이다. 뜻 밖의 반전과 19세기의 수학 천재의 삶은 함께 어우러진 이 소설은, 어드레사의 추천사처럼 픽션에 익숙해져있는 독서에 힘을 불어넣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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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녀석 덕분에 반올림 27
이경혜 지음 / 바람의아이들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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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보다 더 '나'답게 살 수 있는 게 저 녀석이라면

'나'는 진정한 '나'를 위해 스스로 비켜 줘야 하는게 아닐까 ?

 

 

 청소년 문학이다. 가볍게 혹은 식후에 먹는 디저트처럼 문득 읽기는 하지만 이번은 다른 청소년 소설과는 다르게 중고등학생의 눈높이에 정직하게 맞춘 소설이라 할 수 있다.  「그녀석 덕분에」라는 이 작품집은 총 4개의 단편이 묶인 이경혜의 작품집이다. 이 작품을 정직하다고 이야기하는 이유는, 이 작품집에 등장하는 아이들의 이상적인 꿈과 사랑의 형태가 무척이나 올곧은 감정선을 따라가기 때문이다. 또한 너무나 있을 법하고, 그럴듯하여 믿게 만들고 실제로도 존재하는 이야기들을 다루었기에 청소년의 눈높이에 맞춘 가장 적절한 작품집이기 때문이다. 가장 민감하고 예민한 시절을, 우스꽝스러우며 매력있고 가뿐하게 끌어낸 소설집이다.

 

 첫 단편인 「베스트 프렌드」는 사랑과 우정사이에  겪는 복잡미묘한 감정 갈등을 보여주는 소설이다. 어린 시절부터 단짝이었던 남자'친구' 민재에게 이성친구가 생김으로써 오랜친구를 빼았겼다는 피해 의식에 사로잡힌 수현의 이야기다. 그 감정의 피해 의식이라는 것은 오랜 시간 그리고 언제까지고 영원한 친구로 자신의 옆에 머물러있을 것 같았던 민재가 떠남으로써 수현이 느끼는 감정은 흔히 연애를 하다 갑작스런 이별을 맞닥뜨린 상처받은 여자의 감정과도 같다. 학창시절, 이성의 감정 혹은 연애 감정을 알아가는 시절에서의 이런 감정은 몇 차례의 시행착오를 일으키기도 하고 혼란스러움으로 인해 뜻하지 않은 상처로 자리매김하기도 한다. 민재에게 이성친구가 생기기 전, 수현에게 고백을 한 뒤로 껄그러워진 사이가 결국은 민재가 다른 이성을 만남으로써 이 둘에게는 허물지 못 할 벽이 하나 둘 쌓여간다. 굳이 이 소설의 주인공인 민재와 수현이 아니더라도 이성이 친구가 될 수 있느냐, 없느냐는 여전히 확실한 답을 내릴 수 없을 큼 많은 인연들이 친구에서 연인으로 발전의 절차를 밟는다. 어제는 친구였지만 오늘은 연인이라는 연애 불변의 법칙은 어제의 친구가 오늘은 연인이었지만 내일은 친구가 될 수 없는 기이한 법칙이기도 하다.

 

 두 번째 단편인 「Reading Is Sexy」는 버스안에서 Reading Is Sexy라는 문장이 박힌 티셔츠를 입고 책을 읽는 여자를 뚫어지게 쳐다보다, 여자의 당돌한 외침으로 함께 버스에서 내리게 된면서 시작된다. 이 단편에서는 이성 친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과는 전혀 다른 가치관과 여유를 가진 여자에 대한 강한 호기심을 동반한 사랑 감정을 표현해낸다. 공부 잘 하는 이성 친구를 둔 까닭으로 그에 맞추어 나가다 보니 좋아하는 취미 생활이라던가, 꿈을 놓치며 지내던 때에 만난 허름한 집의 여자는 남자에게 있어 구원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세 번째 단편은 얕은 수위로 동성애을 그린 「학도호국단장 전지현」이라는 작품이다. 심심찮게 매체를 통해 하나의 소재로 자리를 잡은 이 '동성애'라는 코드는 청소년 문학에서도 등장한다. 자아의 정체성이 가장 위태로울시기라면 열일곱에서 열여덟쯤이라 말 할 수 있는데, 그것은 같은 인간으로서의 동경이라고도 할 수 있다. 흔히 이반아 혹은 레즈, 게이라고도 부르는데 내가 다니던 학교는 남녀 공학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반계열의 아이들이 몇 있었다. 그때에는 너도 나도 이반이라며, 남자처럼 머리를 짧게 자르거나 힙합바지에 연예인들을 따라하던 코스튬까지 그야말로 동성이라는 특별한 연애 감정이라는 것도 있다는 것을 그때, 알았었다. 고백하자면 어린 시절의 치기로 코스튬을 따라다니기까지 했다. 사실 이 작품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단편을 꼽으라면 이 작품을 꼽을만큼, 동성애라는 것에 흠뻑 취해있었음이다. 물론, 지금도 동성애를 다룬 작품이나 드라마 혹은 영화에 관심이 많다. 소수자의 사랑이라고도 하는 이런 사랑이야말로 애틋함을 넘어서는 절박한 감정을 단숨에 뒤흔들어버리는 무시치못할 강한 매혹적인 사랑이 아닐까. 그 뿐 아니다. 생각과는 다르게 마음이 움직이는 것에 관점을 둔 이 작품은 아주 절묘하게 위험 수위를 넘어서지 않으며 이야기를 끝낸다. 그것이 어떠한 여운, 그리고 아직은 색안경을 쓰고 보는 이 현실에 대한 조심성에 다가서는듯한 감칠맛나는 가장 적절한 마무리가 아니었나 싶다.

 

 이 작품집의 마지막 단편인 「그녀석 덕분에」는 끔찍히도 싫어하는 바퀴벌레가 등장한다. 그것도 바퀴가 인간으로 둔갑을 한다! 갑갑하기만 한 학교 수업을 마치고 집에 들어와보니 진짜 '나'는 여기에 있는데 또 다른 가짜 '나'가 집에 벌써 와 있다. 그리고 진짜 '나'는 집에서 쫓겨난다. 그리고 시작되는 일탈 아닌 일탈. 이 작품이야말로 청소년들의 공감표를 잔뜩 받을만한 작품임을 단언한다. 자유로움, 소설은 그것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꿈, 이상, 진정한 바람. 자신이 원하고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사회가 그리고 부모의 기대치와 안전한 삶을 보장받기 위해 잊혀지고 잃어버린 꿈을 다시금 찾아가는 이야기다. 결국 진짜 '나'는 자신의 삶을 떠나오면서 진정한 '나'를 찾게 된다. 청소년들 대부분이 꿈이 없거나, 우선은 대학입시를 바라보며 몇 년간의 의무교육을 받는다. 어떠한 계기나 동기부여가 없을시에는 모든 학생들은 모두 같은 절차를 지나오거나 뒤로 밀려나게 된다. 소설은 자신이 품을 꿈이 무엇인지 묻게 하며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지금의 당신은 어떠한 노력을 하고 있는지 혹 그것이 잘못된 것은 아닌지를 되짚어보게 한다. 그리고 꿈을 향해 달려나가는 것, 그것은 두렵지않음을 알려준다.

 

 내게 있어 돌아가고 싶은 시절이란, 없다. 그렇다하여 결코 후회없는 생의 길목을 걸어왔다고는 말할 수 없다. 다만, 기억하고 있는 모든것들을 제치고 솔선수범하여 아픈것들만이 그득한 추억길을 걸으며 지금의 나를 채찍질 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인간은 그저 추억하고 싶은 것만 가슴이 묻고 살아도 꽤 괜찮은 생명체다. 아쉬운 건 그저, 내가 책을 읽기 시작했을무렵 내게 맞는 성장소설을 단 한권도 읽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럼으로 나는 뒤늦게 문득이 생각날때마다 청소년 문학을 들춰본다. 그것이 내게는 지나 온 시절을 가볍게 툭툭 털어내며 현재의, 지금의 나를 가다듬을 수 있는  비루한 방법이기도 하다. 재밌는 책, 말 그대로 순박하게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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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사키 - 2010 아카데미 프랑세즈 소설 대상 수상작
에릭 파이 지음, 백선희 옮김 / 21세기북스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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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그녀는 굳어버린 짐승처럼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다. 그렇다.

그녀에게 남은 건 웅크린 동물의 모습뿐이었다. p.47

 

 

 

 

 소설은 1945년, 두번째로 원폭이 투하된 나가사키를 배경으로 한다. 2008년 5월, 아사히 신문을 비롯한 여러 매체들이 다루었던 벽장 속에 숨어 산 여자의 이야기다. 아니, 좀 더 정확히 짚어보자면 여자가 숨어 산 그 집 주인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사는 일에 일찍이 실망하고는 나가사키 변두리에 사는 오십대의 시무라 고보가 집 주인이다. 특별할 거 없는 날들에 시무라 고보의 일상이 뒤틀린 건 아주 미묘하고 아주 사소한 줄자의 눈금과도 같은 것이었다. 요구르트 하나, 음료의 양이 줄어들거나 사라짐으로 인해 독거노인, 시무라 고보의 공간이 벌어진다. 귀신이 아니라면 도둑이다. 기상관측사로 매일 정해진 시간에 출퇴근을 하는 시무라 고보는 자신의 부엌에 웹캠을 설치한다. 사건의 진상은 시무라 고보의 세 번째 눈인 이 웹캠이 모든것을 알게 해줄 것이다. 그리고 햇살, 그리고 피사체, 그리고 어떤 여인의 움직임. 누군가가 있다. 누군가가 자신의 집에 들어와 밥을 지어 먹고 차를 마시고 햇살을 만끽한다. 제 집인 양 익숙한 동선과 여유로움이 시무라 고보의 시선에 잡히는 순간 수화기를 들고 신고를 한다. 그리고 그 후, 시무라의 감정선에 이상 신호가 반응한다. 그 반응은 여자가 햇살을 만끽하고 있는 자신의 집에 전화를 건다. 여자가 절대로 받지 않을 전화를.

 

 일 년동안 남의 집 벽장 속에 살던 여자는 시무라 고보보다 나이가 두 살이나 많았다. '살 곳이 아무곳도 없었어요.' 라고, 진술한 여자는 판결에서 다섯달의 징역을 받는다. 여자의 숨어 살던 삶은 대체로 벽장이 아닌 시무라 고보가 집을 비우는 사이, 햇살이 쏟아지는 거실이나 부엌에서 이루어진다. 처음 시무라 고보의 집에 들어섰을 때는 잠깐 노곤한 몸을 쉬게 할 생각이었던 것이 벽장이 여자에게 좋은 은신처로 몸에 익숙해지면서 일년이라는 세월이 흐른것이다. 동안, 여자는 자신이 숨어 사는 곳의 주인의 흔적을 쫓기도 하고 주인이 입는 옷, 먹는 음식, 집에서의 동선을 파악한다. 적어도 그 주인의 여동생이 그에 대해 아는 만큼 알 수 있을 때가 되었을 즈음엔 이미 그녀의 식성이나 습성들이 시무라 고보를 닮아있었으며 조심스러웠던 집에서의 삶이 결국 여자를 위태롭게 할 만큼 익숙해져 있었다. 꼭, 주인인 시무라 고보가 자신이 여기 이 벽장에 숨어 산다는 걸 알면서도 모르는 척 받아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 만큼 말이다. 적어도 자물쇠를 뜯고 들이닥치던 경찰에게 연행되기 직전까지도. 

 

 그리고 시무라 고보에게 전하는 여자의 편지. 왜 그녀가 그 집 벽장에 살게 되었는지, 하고 많은 집 중에 왜 하필 그 집일 수 밖에 없었는지. 그 집에 관한 애착은 시무라 고보씨에게 뒤지지 않을거라는 고백 아닌 고백. 여자의 편지가 시무라 고보에게 잘 전해졌는지는 알 수 없다. 여자의 편지는 잘 봉해져 중개업자에게 전해졌을 뿐이고 그 후로 시무라 고보가 그 편지를 읽었는지에 대해서는 소설에 나와있지 않다. 납득할 수 없었던 감정선에서 헤메였던 시무라 고보가 법정에서, '더 이상 그 집에서 살 수가 없어요.' 했을 때의 최악의 악몽이라던가-벽장 속에 살던 노인은 연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누군가가 있을 것 같다는 식의-, 독거 노인의 깊이를 알 수 없는 허망한 고독함들이 엉키면서 소설은 급작스레 끝이 난다. 여자의 편지는 그저, 애틋함 혹은 정당성 혹은 회의성에 국한되어있다. 이 소설이 본격적으로 다루어야했던 소재가 단 몇 페이지로 허무맹랑하게 끝난다. 나의 안목을 탓하라면 그러하겠지만, 여자의 애틋함조차 지지부진한 탓에 편지를 두 차례나 읽었음이다. 그리고, 독자가 궁금해하고 읽고싶었던 것은 벽장 속에 살던 여자를 모른체 살던 시무라 고보의 별 볼 일 없는 일상이 아닌, 벽장 속에 웅크려 살던 여자의 삶이다. 

 

 아쉽다. 이런 실화를 이렇게밖에 구현내지 못한 이 소설이말이다. 실화를 소재로 했다한 들, 빈약한 구성에 눈살이 찌푸려지는 건 어쩔 수 없음이다. 저자가 그저 기사를 토대로만 해서 실화 그대로를 옮겨 놓았다면 기름기 젖은 허구성을 쫙 뺀 소설이라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이건 화제가 된 기사 몇 줄만 가지고 억지스레 끼워맞추거나 스토리를 있는대로 늘어뜨린 소설일뿐이다. 어떠한 에피소드도, 소설을 한층 돋보이게 복선도, 반전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옮긴이가 '시작부터 한눈팔 틈 없이 단숨에 읽힌다'는 말에는 신빙성이 없다. 단숨에 읽히기는 한다. 페이지도 적었을뿐더러 벽장 속에 살던 여자의 삶이 언제쯤 발각될지, 그것을 쫓으며 읽었을뿐이니 그럴 수 밖에 없음이 사실이다.  그 때 그 시절, 원폭 투하가 되었던 삭막했던 시절을 곱씹으며 나가사키를 떠올린다해도 소설은, 화제가 되고 많은 사람들의 놀라움에 대한 기대치를 완벽하게 무너트린다. 몇 차례 2008년 5월의 신문기사를 찾았지만 어디서도 찾아 볼 수 없다. 여자가 왜 그 집 벽장에 살게 되었는지, 하고 많은 집 중에 왜 하필 그 집일 수 밖에 없었는지에 대해 적으려다 만다. 책에 대한 예의가 아니기도 하지만, 그 이유만이 이 소설에서 볼 수 있는 단 하나의 키워드가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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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이 눕는다 - 김사과 장편소설
김사과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사랑안에서 아름답게 굶어 죽는 것,  

그것이 내 꿈이었다.

 

 

 

 여자를 보았다. 나와 같은 사고와 병적인 환멸에 사로잡힌 여자를 이 소설에서 보았다. 1984년 생, 나와 동갑내기 소설가가 그려낸 허구의 여자이거나 혹 소설가 자신의 모습일지도 모를 여자였다. 동갑내기의 작품을 읽는 건 꽤나 열등감을 자극하는 일이었지만, 김영하와 조영일의 논쟁에서 불거져 나왔던 이 소설가의 이름을 무심히 지나칠 수 없었다. 읽지 못한 책들이 방치된 채 방바닥에 널브러져있기는 했지만 이 책만은, 되도록이면 빨리 구입하여 읽고 싶었다. 별다른 기대도 없었거니와 막연히 김사과의 약력을 노려보다, 페이지를 넘기며 침을 한 번 꿀꺽- 삼켰다. 그러고는 정확히 팔랑팔랑팔랑 세 번째 장을 넘기면서 자세를 고쳐 잡았다. 그리고, 웃었다. 그 곳에 내가 있었다. 어느 소설속에서도 만나 볼 수 없었던 내가, 거기, 있었다. 아니, 그 여자처럼 살고 싶어했던 어느 한 시절의 내가 거기 있었다. 음악과 책 그리고 술과 사랑만있으면 온 세상이 내 것 같았던 그런 시절의 내 모습, 그 낭만적이기만했던 삶이 이 소설에 존재한다. 실로, 감격적이었다.

 

 실패한 소설가인 여자처럼, 걷는 것에 가진 모든 시간을 허비했던 때가 있었다. 그때의 난 정확히 열여덟 살이었고 보이지않는 꿈을 쫓아 걷고 걷고 또 걸었다. 그리고 여자처럼 책도 읽었으며 책을 읽지않는 사람들을 멍청이 취급을 하기도 했다. 친구 많고 윗사람에게 싹싹한, 나 보다 예쁘고 다부진 언니에게 열등감을 느끼면서도 나와 달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담배를 배웠으며 더불어 술도 배웠다. 여자가 그림 그리는 을 만났을 때, 나도 누군가를 만났었다. 여자가 그림 그리는 의 집으로 짐을 옮겼을 때, 나 또한 그 누군가의 집에서 하루종일 뒹굴고 책을 읽고 티비를 보고 컴퓨터를 하고 음악을 들었다. 여자와 풀 처럼 매일매일 섹스를 하기도 했으며 매일매일 술을 마시고 매일매일 그 누군가와 함께였다. 실패한 소설가, 여자에게 있어 그림 그리는 이 그런것처럼 그 누군가는 나의 삶이었고 목표였으며 희망이었고 전부였다. 그림 그리는 이 그랬던것처럼 나 또한 돈이 떨어지면 종종 아르바이트를 했으며 돈이 수중에 들어오면 담배를 사고 술을 사고 맛있는 음식을 그 누군가의 집에서 시켜먹었다. 읽고 싶은 책을 읽고 듣고 싶은 음악을 듣고 먹고 싶은 술과 음식을 먹으며 여자와 풀 그리고 나와 누군가는 지나칠정도의 평화로움과 현실과는 동떨어진 생활에 익숙해졌으며 망가져갔고 사랑은 여전했으며 위험수위에 도달해있었다. 여자와 같이, '지금 이 순간'을 잡아두는 방법은 오로지 죽음, 그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었다. 

 

 여자는, 돈에 엉켜버린 세상을, 현실을 부정했으며 경멸했고 침을 뱉었다. 허기에 대한 굶주림의 이유가 돈이 없다는 사실을 이해 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 세상의 모든 먹을 것, 그림 그리는 의 집 보다 더 좋은 곳이 여자의 것이 아니고 여자가 있을 곳이 아니어도 여자는 행복했다. 사랑안에서 아름답게 굶어 죽는 일, 그것이 여자의 꿈이었다. 노을빛이 젖어드는 옥상에서도, 길거리의 싸구려 음식들도, 현실을 망각할 수 있는 탈출구가 오로지 술을 마시는 것으로 국한되어질때도 그림 그리는 의 옆이라면 여자는 행복했다. 그림 그리는 풀의 그림을 술에 취해 여자가 망가트렸을 때, 그로인해 절망에 가까운 그림 그리는 과의 끝이 예견되었을때도 여자는 그림 그리는 이 자신의 것이라서, 그리고 그 그림 그리는이 여자를 사랑한다는 사실에 여자는 삶의 의미를 사랑안에 옭아맸다.  그리고 공백, 그리고 침묵, 그리고 무의미한 삶. 여자가 그림 그리는 의 집을 떠나 자신이 살던 집으로 돌아가, 회색빛의 거리를 다시 걷고 돈과 돈으로 결탁하여 지어진 세상의 건물들 사이로 자신의 삶을 다시금 끼워넣는다. 아무런 의미도, 그림 그리는 풀 없이는 아무런 의미도 새겨지지않는 삶을 견디며 살아 낼 뿐이었다. 사랑안에서 아름답게 죽고 싶었던 여자의 꿈이 사그라들고 현실과의 타협을 시도하고 있었다.

 

 그런 때가 있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이고, 오로지 누군가를 사랑하는 이 마음 하나만 있다면야 불가능이란 없을거라고 믿었던 때가. 그리고 평생 돈을 벌지 않고 일을 하지 않아도 여유있는 행복에 충만할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었다. 적어도 돈의 의미와 돈의 가치를 알지 못했을 때, 누군가를 미치도록 사랑하고 있었을 때, 그 누군가가 나의 돈이었고 음식이었으며 생명이었고 삶의 이유가 되었을때였다. 사랑, 그게 전부였고 사랑, 그거 하나면 충분했다. 여자가 그림 그리는 의 집을 떠나오면서 다시금 제자리를 찾았을 때, 나 또한 그 누군가의 곁을 떠났을때였다. 마음 둘 곳이 마땅히 없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눈 앞의 현실을 두고 마냥 등을 돌리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다시 그 누군가를 만나면 더 풍족하게 사랑하고 싶었다. 더 좋은 담배를 태우고 더 좋은 음식을 먹고 지하 단칸방이 아닌 더 좋은 곳에서 그 누군가와 살고 싶어 나 또한 현실과의 타협을 시도했다. 그리고, 그 누군가와 다시 재회했을 때는 더 이상 사랑 하나만으로는 행복해질 수 없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다. 절망감, 그것이었다. 그림 그리는 과의 재회에 손을 잡고 노을빛 젖어드는 옥상에서 춤을 추는 여자를 이해할 수 없음에 여자의 낭만적인 삶을 경멸할만큼 절망했었다. 그 절망에 다만, 그림 그리는 을 따라 추락하고만 싶었다.

 

 참으로, 애달픈 소설이다. 사랑 하나만으로도 소설을 쓸 수 있다는 것이 새삼스러웠다. 여자와 그림 그리는 이 그려내던 지나치게 작위적이었던 퍼포먼스들을 선뜻 받아들일 수 없음에도 통쾌했으며 유쾌했다. 지나 온 시간과 시절을 되묻는 소설이기는 했지만 웃으며 읽을 수 있어서 즐거웠던것도 사실이다. 다만 이 소설에 별 다섯개를 줄 수 없는 이유가 있다면, 그건 아직 김사과만의 색깔이 없기 때문이다. 문체와 더불어 소설의 분위기가 전부 전경린을 닮아 있다. 전경린 이미테이션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불쾌하지않을 정도이긴 했지만 안타까웠다. 부디, 그녀가 경멸했던 현재의 세속적인 삶을 쫓는 사회를 바꾸는 작가로 거듭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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