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마 이야기
나카무라 후미 지음, 양윤옥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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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각 모두가 아픔으로 점령된다

정신을 잃는 것도 허락되지 않는 고통에 엎어지고 쓰러지면서

이것이 인간의 길에서 벗어난 자에 대한 벌이라고 절절이 깨닫는 것이다. p.535

 

 

 

 나카무라 후미, 일본인 작가 이름만 봐도 안타까움에 자연스레 긴 숨이 흘러나왔다 . 나카무라 후미의 첫 작품을  손에 쥐었을때는 질서정연했던 일본은 그야말로 처참히 부서진 후였고 현재까지도 최악의 상태는 나아지지않고 생지옥의 현장으로 끝없이 치닫고 있을 뿐이다. 역사의 원수라해도, 속절없이 눈물이 찬다. 아는 이가 일본에 거주하거나 유학생활을 하는것은 아니지만 인간이 얼마나 유약한 생명체인지 다시금 깨닫게 된다. 만개한 벚꽃이 흐드러지게 필 시기일텐데, 절망뿐이다. 할 수 있는 건 손 끝을 모으는 것 뿐 달리 방법이 없다. 다만, 모두가 무사하길 이제 그만 멈춰주기를 바라고 또 바랄뿐이다.

 

 나카무라 후미의 「염마 이야기」는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엔터테인먼트 소설 제 1회 대상 수상 작품으로서 불로불사의 문신을 손바닥에 새긴 채 살아가는 한 염마의 이야기다. 이 소설은 무사들이 활발히 활동했던 막부시대부터 일본이 지나 온 역사를 더듬으며 이야기를 풀어낸다. 일본의 문신 역사를 살펴보면 그 최초기록이 17세기 말에 발행된 한 소설 작품이라고 한다. 주로 하급계층의 사람들 사이에서 일반적인것으로 되었다는데 가장 인기가 있었던 문신은 연인들의 이름을 일본 발음대로 새기는 문신이나 종교적인 맹세를 새기는 것이였다. 소설 속 염마의 문신은 일종의 주술이 걸린 마물과도 같은 것이다. 손바닥에 자신의 강한 의지와 함께 신귀를 불어넣어 새기는 것으로 염마는 불로불사의 문신을 새기면서 죽을수도 그렇다고 순리에 따라 늙을 수도 없는 생을 살아가게 된다. 칼에 맞아 헐떡거리면서도 살고싶다, 라는 의지 하나가 만들어 낸 결과였다. 목이 잘리거나 심장에 강한 타격을 입지 않은 이상 그리고 몸에 든 신귀가 수명을 다하거나 신귀가 숙주의 몸을 싫증내지않는 한, 염마의 목숨은 더 이상 인간의 것이 아니다. 불로불사의 몸으로 타인과는 다른 모습으로, 살아간다는 것. 문신으로 인해 치유의 능력이 발휘되지 못 할 만큼의 즉사가 아닌 이상은 멈춰버린 시간속에 외로이 살아야하는 것이다.

 

 소설의 이야기는 사무라이가 활발했던 시절, 그러니까 염마가 아직 신귀 문신을 새기기 전, 적의 부대에 밀정으로 들어갔던 염마의 신분이 노출되면서 배신자로 낙인이 찍혀 적의 부대로 부터 도망을 치면서 시작된다. 손바닥에 신귀의 문신을 새겨준 스승 바이코부터 적의 부대에 밀정으로 있을 때 염마를 챙겨주었던 오카자키 그리고 바이코의 마지막 후계자라 믿었던 불로불사의 살인마 야차. 처음, 사무라이 이야기가 불거져나왔을때는 무협인가, 싶을 정도로 뜨근미지근할 뿐 도통 소설의 장르를 정의 할 수 없었다. 무사를 다룬 무협지나 문신으로 주술을 거는 판타지체계의 소설이라면 오랜만에 접하는 장르라고 반가운 마음으로 즐거이 읽을 수 있겠다 싶었는데 오카자키의 죽음으로 염마에게 남겨진 나쓰라는 소녀의 출현으로 소설은, 진정한 삶과 죽음을 다룬다. 염마의 멈춰버린 시간으로 딸이자 여동생, 누이, 어머니, 할머니 그리고 사랑하는 여인이 되기도하는 나쓰는 불로불사의 능력을 지녔지만 그것이 얼마나 불행한 행복인지를 가늠하게 해 준다. 사랑마저도 한량없음을, 주어진 생의 감사함을, 세상에 영원함을 부여할 수 있는것이 있다 해도 그만큼의 고통이 동반함을 이야기한다. 몇 백년을 홀로 살아가야 할 염마의 곁을 함께 지켜 줄 수 있는 건 염마와 같은 능력을 가진 자뿐일지도 모른다. 문신으로 인한 연으로 염마를 비호해주던 무타 노부마사나 자신과 같은 신귀의 능력을 가졌지만 그 수명이 다해 염마를 떠난 고양이가 그러하듯 생명이 다 하는 것에는 각자의 때가 있기 때문이다. 스스로 자신의 손바닥에 불사의 신귀 문신을 새겨 살인을 저지르고 죽은 자의 심장을 태워 먹던 바이코의 후계자 야차, 그와 동행을 해야할지도 모를일이다. 

 

 손목에 붕대를 칭칭 감고 다닌적이 있었다. 대일밴드로는 상처가 가려지지않아 어쩔 수 없이 뜨꺼운 물에 손목에 화상을 입었다는 핑계로 둘러댔다. 죽자고 벌인 일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살자고 대충 저지른 일도 아니었다. 그 상태로 욕조에 몸만 담그면 끝나는 일이었다. 마른 수건으로 가까스로 지혈하며 터져나오던 피 보다 더 많은 눈물을 쏟아냈다. 모르겠다. '살고'싶어서 그런건지, '살아야'해서 그런건지는. 다만, 죽음이라는 문턱이 그리 쉽지만은않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지나 온 시간이 많을수록, 버려야 할 것들이 많을수록 생에 집착은 더욱 더 강해질뿐이다. 누군가 내게 불로불사의 생을 견디겠느냐 묻는다면 내 대답은 아니오, 다. 생각컨데, 이 질문의 답은 자신이 현재 어느 위치에 있는지를 두고 보면 분명 대답은 달라질것이다. 아니오, 란 대답이 현재를 부정하는것은 아니지만 앞으로 서른해는 더 어쩌면 당장 내일을 내다볼 수 없다 할지언정 구태여 운명을 거스리고싶지는 않기 때문이다. 염마의 마지막 말 처럼, 나 역시 오직 내일만을 바라보며 살기 때문이다. 모두에게 각자의 생이 있고, 각자에게 주어진 길이 있다면 그 생을 충만하게 살아가는 것, 그것만이 존재여부를 따질 수 없는 신에게 고마움을 표하는 길이다. 삶과 죽음의 경계는 얇은 습자지 한 장, 그 차이일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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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행관람차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27
미나토 가나에 지음, 김선영 옮김 / 비채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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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상은 단 하나.

애도할 상대도, 책망할 상대도, 위로할 상대도

전부 가족이라는 사실. 그뿐이다.  p.326

  

 


 

 나름의 독립을 선언하지도, 벌써 삼년째다. 골목마다 즐비했던 주택단지에서 벗어나 복도식 아파트로 거주지를 옮기면서 소박하긴 하지만 꿈꿔본 적 없던 '내 집'을 갖게 되었다. 더 이상은, 부모님의 소소한 간섭에서 벗어났다 생각하여 기뻤고 그런 부모님에게서 멀어진다는 생각에 슬프기도 했다. 누구나 그러하겠지만, 가족에 관해서는 더욱이나 내 부모님에 관해서는 나는 좀 각별하다. 어릴때부터 그러했지만, 지금도 내 부모님은 불로장생 할 운명이라 생각하고 있다. 스치는 바람 한 점도 절대적으로 내 부모, 가족을 다치게 할 수 없다. 설사, 미나토 가나에게 풀어 낸 이번 작품 「야행관람차」의 사건의 당사자가 내 부모의 일일지언정. 어디까지나 내 부모, 내 가족의 문제일 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아무리 부모가 자식을 죽이고 자식이 부모를 죽이는 시대에 발을 딛고 살아간다 한 들, 시대와 개개인의 가족은 별개다. 가족이라는 틀 안에 엉글어진 사이가 아니라면 모두가 타인일 뿐 제 2,3의 단체에서 조차도 끌어안을 수 없다면 모른체 살아가면 그만인것이다.

 

 장르소설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미나토 가나에의 「속죄」를 읽고서부터다. 연이어 그녀의 작품인 「고백」을 읽고 뒤이어 「소녀」도 구입했지만, 책장에 고스란히 꽂혀 있을 뿐 읽지 못한 채로 이번 작품 「야행관람차」를 먼저 읽었다. 그녀의 신간이라는 점도 한 몫했지만 간헐적인 문학 슬럼프도 요즘들어 심해진 탓이다. 전작들도 그러했지만 이번에도 '아이들'이 사건의 중심에 서 있다. 엔도 가족의 버르장머리없는 히스테리 소녀 아야카와 다카하시 가족의 노력파 모범생 신지, 유명한 시립고에 다니는 히나코가 그들이다. 평범하고 조용했던 다카하시 가족의 주택에서 새어나오던 신지의 고함소리와 신지의 부모인 준코의 비명에 가까운 절규가 터져나오면서 사건은 시작된다. 살인 사건, 그것도 엘리트 의사 남편을 아름답고 조용하기만 했던 아내가, 부부간의 말다툼으로 인해 트로피로 남편의 뒷통수를 내리찍어 살해한 살인사건이다. 발칵, 고급 주택들이 자리매김 하고 있는 히바리가오카가 뒤집어진다. '히바리가오카', 그곳은 부의 상징 혹은 명문교 학생들이 모여사는 엔도 가족의 꿈이자 아야키의 히스테리의 이유이며 다카하시 가족의 엉거주춤식 무언의 강압이 존재하는 터전이다. 그곳에 오르려는 엔도 가족에게는 그저 '이웃'에 일어난 살인사건이고, 그곳을 내달리고만 싶은 다카하시 가족에게는 당장 눈 앞에 떨어진 자신들의 부모의 살인 사건이다. 소설은 '이웃'과 '가족'을 매치시켜 이야기를 풀어간다. 이웃의 살인 사건으로 피해를 입었다고 생각하는 히스테리 아야카, 사건이 터진 날 행방불명 된 신지, 이모네집에 맡겨진 히로키 그리고 연락이 닿지 않는 또 다른 남매 요시유키. 애초부터, 몸에 맞지 않은 옷을 입고 몸에 맞지 않는 터전에 자리를 잡은 것이다.

 

 전에 살던, 주택이 즐비했던 곳에서는 앞 집이고 맞은편 집이고 번갈아 시끄러운 싸움 소리가 난무했었다. 심지어는 냄비, 후라이팬, 가전제품 뭐든 상관없이 현관문을 통해길바닥으로 내동댕이 쳐 질 정도였다. 그때마다 내 방 창문을 슬며시 열고는 조심스레 지켜보다 소리가 잦아들면 창문을 닫고 잠이 들었다. 신고를 할까, 몇 번 휴대폰을 손에 쥐었다가 내려놓기를 반복하면서도 안방까지 들릴 이 소리에 아무런 미동도 없이 모른체 주무시는 부모님을 보며 그저 지켜보기만 했었다. 비록, 그 맞은편 집에 같은 학교에 다니는 친구가 살고 있었음에도. 어느 한 사람의 외마디 비명이 아닌 이상 그러니까 결정적인 사건이 일어나지않는 한 내게는 그 싸움에 끼여들만한 명분이 없었던 것이다. '이웃'에 사는 동갑내기 친구일지언정. 아야카의 히스테리를 견디다 못한 엄마의 갑작스런 행동을 저지시킨 또 다른 이웃인 고지마 사토코처럼 그 동네에 대한 애정 또한 없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니, 있다 한 들 히로키의 친구 아유미처럼 사건 당사자가 되어버린 친구에게 쉽사리 다가갈 수 없는 것 또한 현실일것이다. 가장 친한 친구에게 가장 보여지기 싫고, 보여서도 안되는 일을 들킨 히로키의 마음을 어떤식으로 위로를 해야하는지 지금조차도 모르고 그런 위험 수위에 찬 일에는 닥쳐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히바리가오카로 오르는 언덕길 병을 앓고 있던 아야카에게 축적되어있던 명문교에 속하지 못한 상처와, 한계에 부딪힌 자신과 맞닥뜨린 신지의 꿈이 박탈되어지는 것은 소설을 넘어선 현실과도 같다. '치열하게, 좀 더 치열하게.' 이것이 세상이 청소년들에게 부여한 과제가 아니었던가. 좀 더 안정적인 생을 원한다면 자신의 가치를 높여줄 수 있는 기본과 기반을 닦으라는 공통분모의 첫 걸음을 새겨놓은 것이 아니었던가 말이다. 수도 없이, 용의 꼬리가 될 바에야 차라리 뱀의 머리가 되라는 소리를 들으며 자랐다. 구태여 상위권이 아니어도 좋으니 하고 싶고, 품은 꿈이 있다면야 세상이 닦아놓은 기반이 아닐지언정 자신이 세워놓은 기준안에서는 최선을 다하는 최고가 되라는 말이다.  누구도 대신 해 줄 수 없는 소년, 소녀들의 꿈을 짓밟는 건 결코 그 부모가 되어서는 안된다.  부모 자신의 바람과 꿈이 아닌 그들의 꿈에 활력을 불어넣어주는 일, 그것이 어르며 달래야 할 부모의 자식이 아닌 세상으로 내보내야하는 가족의 일원으로서의 할 일이다. 믿음, 소망, 사랑. 타인과 엉글어지는 우리네 인생사라 해도 맹목적으로 믿어주고 소원해주고 품어주고 다가서는 것이 가족이 아닌 이상 또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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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블 판타지
무라야마 유카 지음, 김성기 옮김 / 문학의문학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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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하다. 외설적이다. 음란하다. 도발적이다. 짜릿하다. 유쾌하다. 검은 활자 사이로 '색()'이 돋는다. 그리고, 서른 다섯의 그 여자처럼 자유롭고 싶다. 이 책을 읽으며 내가 느낀 짤막한 감상이다. 오로지, 여자의 폭발적인 성욕으로 그려지는 끈적거리는 스토리는 단박에 온 몸을 화끈, 달아오르게 만든다. 파격적이다. 읽은 책 중, 이 보다 더 '색' 짙은 소설은 처음이다. 일본의 기성작가가, 그것도 자전적 성향이 짙은 관능적인 소설을 여성 작가가 집필했다는 것은 대단한 용기이며 일종의 커밍 아웃을 한 셈이다. 책의 뒤 표지를 보면 에쿠니 가오리, 요시모토 바나나와 함께 일본의 3대 여류작가라는 타이틀이 걸려있다. 심심한 에쿠니 가오리의 문체와 종잡을 수 없는 요시모토 바나나의 문체를 염두에 두고 생각한다면 무라야마 유카라는 작가는 그리 달갑지 않다. 심심하거나 종잡을 수 없는 간결한 문체는 에쿠니 가오리와 요시모토 바나나로 충분하다고 생각했고 좀 더 솔직해지자면, 매혹적인 표지와 선정적인 표지 글귀가 아니었더라면 책을 들춰보지도 않은 채 미뤄두었을 것이다. 그렇다. 이 소설은 순도 100% 짜리다.

 

 나는 이 책을 단순히 '포르노 소설'로 치부하지 않는다. 로맨스 혹은 일반적인 소설에서 사랑이라는 소재와 그 사랑이 불러일으키는 짜릿한 애정 행각의 모습을 좀 더 깊게 그리고 좀 더 야릇하게 과감히 스케치 한 것이지 아주 작정하고 '섹스소설'을 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소설의 여 주인공이 비단 자신의 성적 만족감만을 위해 남자와의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다. 마음이 먼저가 아닌 몸이 먼저 사랑을 일깨우는 것, 그 또한 사랑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10년 남짓, 남편과의 결혼 생활에서 독립을 선언한 여 주인공이 도쿄로 이주하면서 이야기는 본격적으로 여자의 삶 혹은 작가 자신의 여정을 토로한다.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어떠한 삶을 살고 싶은지에 대해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묻고 답하며 자신의 성 정체성과 마주하며 몸과 마음을 하나의 사랑으로 일치시킨다. 그저 '좋은 감정'에서 시작한 마음들이 '연애 감정'을 키우고 그것이 짙은 '사랑'으로 번지는것이 흔히들 하는 플라토닉 사랑이라면 이 소설에서 보여주는 사랑은 격정적인 부딪힘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사랑한 후, 그 정체성을 보듬어주고 끌어안아주는 이를 만나 더 깊이 자신과 더불어 타인을 끌어안는 것, 이것이 소설 「더블 판타지」에서 보여주는 인간의 혹은 여자의 본능적 사랑이다.  

 

 누군가는 사랑은 곧 섹스라 말하고 다른 누군가는 섹스를 인간의 짐승적 욕정이라 말한다. 물론, 소설에서 말하는 사랑은 섹스와 하나로 일치한다.  다만, 동인지나 포르노에서나 등장할법한 사디즘, 마조히즘을 거침없이 자유롭게 다룬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섹스가 사랑에 있어 필수사항이라면 사랑에 있어 섹스는 선택사항에 불과한다고 생각한다. 옮긴이는 이 작품으로 인해, 무라야마 유카의 팬들이 등을 돌리거나 새로이 다른 팬층이 확대될거라 확신했다. 물론 나는 후자 쪽이다. 더불어 기회가 닿는다면 얼마든지 그녀의 전작들을 찾아 찬찬히 읽어 볼 생각이다. 이보다 더 자극적이지도 강렬하지않아도, 스토리를 이어나가는 그녀의 필력 또한 다른 여류 작가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확연히 느꼈기 때문이다. 또한, 그녀의 자전적 성향이 짙은 작품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애기하자면 내 개인적인 취향과도 하나 다를바 없다는 것이 본격적으로 이 작가, 무라야마 유카를 더 없이 좋아하는 계기로 삼아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한 장 한 장 넘기는 페이지가 아쉬웠던만큼, 앞으로 그리고 지속적으로 이런 작품들을 다루어주기를 개인적으로 바라는 바다. 덧붙이자면, 경멸스러울수도 있고 수치스러울수도 있다. 충분히 변태적인 소설로도 치부될 수도 있음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 모든것들은 소설의 결말이 달래 줄 것을 믿어 의심치 않으며 극구 추천하는 바이다. 되려, 독자의 성향을 찾아줄지도 모를 일임을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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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의 심장부에서>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나라의 심장부에서
존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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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니까, 나는 이 책을 정확히 삼등분으로 잘라 읽었다. 문단마다 이어진 숫자를 따라 80페이지 가량을 넘겼고, 망설임없이 마지막 페이지로 넘겨 옮긴이의 말을 읽고는 뒷장부터 앞으로 80페이지를 읽었으며 마지막으로, 책의 딱 절반부분을 갈라 앞, 뒤 순서없이 마구잡이로 읽었다. 여자의 끊임없는 망상과 고독에 찬 독백, 부리는 하인에 의한 성폭행과 부적절한 관계에 선 아버지를 향한 총알까지 모두 여자의 독백을 통해 들으며 읽었다. 고백컨데, 이런식의 갑갑하기만 한 문자배열식의 글은 진저리가 난다. 한 작가에게 두 번은 주지 않는 부커상을 두 번 받았다는 명성조차도 잔뜩 힘이 들어간 내 눈의 긴장을 풀지는 못했다. 책을 펼칠때마다 '그래, 그래도 한 번 부딪혀 보자' 라는 식의 각오를 세우고는 읽기 버거운 책을 읽는 첫 번째 방법을 나는 시도한거다. 앞서 말했듯 마구잡이로 읽기, 그것이다. 국외소설은 좀처럼 읽히지가 않는데, 갑작스런 미션과 함께 받아 든 이 책은 훑어보는 단계에서 부터 막막하기 그지없었다. 읽다가 막히는 종종 기이하게도 로맹 가리를 떠올리기도 하고 다자이 오사무를 오버랩시키기도 하면서 자기 세뇌까지 하며 읽었으니 책장을 모두 넘겼을때는 왈칵, 하니 긴 숨을 뱉어냈다.

 

 여자의 일생이라고 해도 될런지. 끊이없이 이어지던 여자의 과대망상과 환멸에 사로잡힌 여자의 독백은 흥미로웠던 반면 꽤나 괴팍했다. 순간, 미스터리를 읽는 기분인가 싶으면 여자의 처지가 안타까워 마음을 쓸어내릴라 치다가도 다시금 미간을 한껏 좁히게 된다. 옮긴이의 말을 토대로 하자면 인종의 차별과 식민지 시대를 미화시킨 작품이라는데, 좀 더 개인적으로 솔직해지자면 그 어느 부분에서도 주인공들의 비애를 눈치 챌 수 없었다. 어쩌면, 옮긴이의 말 처럼 너무도 완벽하게 미화된 작품으로서, 그들의 애증과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는지도 모를일이다. 단, 내가 느꼈던 건 글이 굉장히 절제적이고 단단하다는 거였다. 문체 자체도 그러했지만 헨드릭의 말투에서는 가장 진득하게 묻어났음은 물론, 아버지의 절도적인 언행들이 머릿속으로 그려질만큼 굉장히 둔탁하고 강한 메리트였다고 볼 수 있다. 페이지를 쉽사리 넘길 수 없었던 점과 더불어 같은 문단을 몇 차례 반복하여 읽어내려도 도통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었는가 하면, 어처구니없고 돌연한 행동에 웃음이 나기도 했다.

 

 「나라의 심장부에서」의 책은 그저 어떤 시대, 어떤 인물, 어떤 풍경을 막연하게 그려내는 것이 아니다. 여자의 보이지않는 내면의 창을 누군가가 걷어 올려주는 것으로서 제2의 삶과 구원에 대한 손짓이다. 비록 마구잡이식의 작품에 대한 가당찮은 독서였다 할지언정, 결코 여자의 목소리를 쉬이 흘려보낸 것이 아니다. 여자의 독백에서 시작해 여자의 독백이 끝이 아니듯, 독백은 또 다른 독백을 낳는다. 이야기의 흐름에 발을 맞출 수는 없었지만 오히려 맥을 끊고 읽는 것이 부자연스러운 그녀의 공간속에서나마 살아남을 수 있는 비법이 아니었나싶다. 여자의 갈망, 혹은 구원이 사랑이었는가 싶다가도 결국, 끝은 고독으로 남겨지는 것은 그녀의 삶이 아닌 여자다운 혹은 여자의 삶을 그린 하나의 자화상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본다.  

 

 한 번더 그리고 다시 한 번 더 읽어봐야 할 책임을 안다. 여자의 형성과 고독으로 이루어진 여자의 생이 조금 더 마른 가슴으로 차오를때즈음, 망설임없이 다시 한 번 이 책을 읽을 생각이다. 첫 시작부터 동의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었던 여자의 와해 된 생활을 나 역시 겪을테고, 언젠가는 일어날 일임을 알기 때문이다. 구태여 찾아 읽지 않아도 내 몸이, 내 가슴 밑바닥에 또아리를 틀고 있는 수 많은 말들이 한꺼번에 터져나와 그을려 타닥타닥 타들어갈지도 모를일. 그저, 형체의 중심부를 잃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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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즈니스
박범신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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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며칠 전, 시장 상인들의 처절한 시위와 굳건한 반대를 무릎쓰고 ㄷ사의 주상복합 아파트내에 대형마트가 들어섰다. 내가 거주하는 ㅎ시에서의 ㄷ사의 주상복합 아파트는, 건물을 지을 당시부터 '부자 아파트'라는 이름으로 주민들의 입에 오르내렸었다. 그도 그럴것이 높은 분양가로 인해 입주시기가 몇 차례씩 밀려나며 분양가가 급격히 하락했고 가까스로 아파트 전 세대에 불이 켜진것이 불과 채 두 달도 되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런 부자 아파트에 지하 5층짜리 대형마트의 입점은 당연한 결과로 납득할 수 있겠지만 300미터 반경에 있는 전통시장은 그야말로 폭격탄을 맞은것과 다름없었다. 이에 따른 시장 상인들과 대형마트는 극단적인 갈등에 부딪히며 불철주야 시위로 번져가려는 찰나 겨우내 대형마트의 오픈은 시장 상인회와의 상생안 타결이라는 명목하에 수차례 진행되어 온 양측의 협상이 마무리되었다. 그 상생안 타결이라는 것이- 점포자체의 과도한 행사 자제를 비롯 가두판매, 무료 배달 서비스, 지역방송 홍보 금지등에 협력하겠다는 내용을 담은 합의서, 그 종이 한 장 달랑이었다. 오픈 이틀 째, 구경도 할 겸 장을 보고 나오는데 세상에나, 수십 년 동안 교통 편의를 위해 존재했던 지하도가 그냥 묻힌게 아니구나 싶었다. ㄷ사의 주상복합 아파트를 중심으로 구도시와, 신도시로 나뉘는 것이었다. 아파트 앞으로는 시청을 비롯한 높은 아파트들을 바로보고 뒤로는 아파트 하나 없이 울퉁불퉁 낡고 스러질듯한 시멘트집이 전부였다. 전통 시장으로 향하는 골목 지름길이 단번에 모습을 감추고, 출구 조차도 그쪽으로는 통하지 못하게 오로지 지하철 개통 확정이라는 커다란 현수막이 몇 년째 펄럭이는 시청을 향해 있었다. 불현듯, 버려진 마을이구나 하는 생각이 쓸쓸히 가슴께로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흔히들 떠드는 강남과 강북의 경계 편차는 결단코 그곳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닌, 이 작은 시 마저도 몸살을 앓게 만들었다.

 

 아들의 과외비를 벌기 위해 매춘을 하는 여자의 삶은 소설 「비즈니스」가 겨냥하는 그 첫 번째, 자본주의의 폭력에 대한 이야기다. 전혀, 우습지도 몰상식하지도 않은 이야기다. 아무것도 모르던 어린 시절 그러니까 갓 중학교를 졸업했 때, 궁핍하고 어려웠던 생활고가 못 견뎌워 생각의 끝에 걸린 것은 단연 몸을 파는 것 뿐이었다. 어디까지나 스스로가 갖는 마음가짐의 문제였고 직업의 좋은 예든 나쁜 예든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그때의 나에겐 오로지 돈, 목적은 그뿐이었다. 소설 속 여자의 삶 또한 그랬다. 가정의 기둥이 되어야 할 기반은 뭉개져 주저 앉아버린지 오래였다. 뒷걸음질 쳐 끌어앉힐 수 있다면야 좋을 대파, 쪽파하며 서로 사랑해를 부르던 시절의 남편은 메마른 삶을 사는 것이 아닌 의 삶을 견디고 있었음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쓰레기더미로 전락해가던 여자가 사는 구시가지에서 적어도, 자신의 아들만큼은 매춘을 하는 여자 자신과 무능력한 남편의 삶처럼 무력하게 살게 하고 싶지 않은 꿈, 그것, 바로 마지막으로 품을 수 있는 여자의 희망이자 세상 모든 부모의 간절함일 것이다. 여자에게, 걸어서도 뛰어서도 향할 수 없는 신시가지는 네 발로 기어서라도 가야 하는 자본주의 시대의 현 주소였다. 여자에게 물어야 할 것은 매춘을 왜 했느냐가 아니라, 어떠한 시대가 여자, 어머니가 매춘을 하게 하느냐는 것이다. 시대가 행하는 폭력, 그것은 비단 얼굴에 멍이 들고 팔 다리가 부러지는 것이 아닌 가슴에 포도알 같은 피멍을 방울방울 안고 사는 것이다.  

 

 아내를 잃고 초로한 횟집에서 자폐아 아들과 사는 남자의 삶은 소설 「비즈니스」가 겨냥하는 그 두 번째, 자본주의의 정당성에 대한 이야기다. 유독성 폐기물을 싫고 달리는 차들의 악취로 인해 아내를 잃은 남자는 결국 자신의 아들을 공해로 인한 자폐아로 품에 안게 된다. 그리고 그들의 거처인 구시가지의 버려진 횟집, 그 횟집을 찾기 위해 남자는 부유한 이들의 재산을 훔치는 도둑질을 감행한다. 밀림에서나 나올 법한 '타잔', 남자의 삶. 한 때, 그런 자가 있었다. 부유한 이들의 재산만을 훔치는 현실 세계의 '타잔'말이다.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청춘의 길목에 발을 들인 시기였고 소설 속 주민들이 그러하듯 나 또한 '타잔'을 마냥 나쁜 놈이라 치부하지는 않았다. 더 말할 것 없이, 도덕성을 따지기 전 통쾌하게 쓸려내려가던 자본주의에 대한 반감이 본능적으로 끓었기 때문이다. 매춘을 통해 만난 여자와의 만남과 피어나던 동질성 사랑은 그야말로 자본주의를 버틸 수 있는 단 하나의 출구와도 같다. 무더기무더기 피던 이팝나무 한 그루가, 현재를 견디게 하는 과거이 듯 무더기무더기 불어나는 자본주의의 폭력을 견딜 수 있게 하는건 마음을 나누는 이의 작은 어깨만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소설 「비즈니스」가 겨냥하는 마지막 세 번째는, 자본주의의 퇴폐와 파멸이다. 남자의 아들이 유독성 폐기물로 인한 자폐증상이 퇴폐요, 스스로 비즈니스 맨을 자처했던 시장은 파멸이라 할 수 있다. 매춘을 하는 여자가 입은 자본주의 폭력의 결과는 퇴폐를 불러오기 마련이고 남자가 행하던 자본주의 정당성은 비즈니스만이 자본주의에서 우선시되던 것에 대한 파멸을 불러온다. 신시가지를 위해 존재했던 구시가지의 모습은 낯설지않다. 현재 사회에서도 빈번히 일어나는 일면이 겨우내 소설에서 부각이 된 것이다. 시인인 황지우 선생님의 말을 잠시 빌리자면 '문학은 혁명에 관여하지않고 혁명의 조짐에 관여한다고' 했다. 소설은, 그저 허구가 아니다. 현실은 언제나 소설의 모티브가 되기 마련이고, 언론이 말하지 않고 모른척 하는 것에 대한 소수자들의 진실 된 언어의 소통이다. 자본주의 사회가 폭력을 휘두르는 가해자라면 알면서도 등 떠밀려 휘말려가는 현대인들은 피해자다. 남자의 '타잔'을 모방하는 열망의 범죄가 결코 도덕성에 어긋나는 것이라 확신 할 수 없 듯, 자본주의는 몰락 직전까지 이율배반의 성격을 뛸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사는 서러운 하층민들의 딜레마적인 삶이다.

 

 올해, 스물 여덟이 된 나이가 우스워질때가 있다. 스무 살이 되었을 때 처음으로 아르바이트를 하며 월급을 받아 쥐던 봉투의 감촉은 그야말로 짜릿 그 자체였다. 어디까지나 일한 만큼의 댓가였고 더 열심히, 더 많이 하고 받고 싶은 욕심 또한 자연스럽게 받아들였졌다. 적어도, 그 때에는 백 만원도 채 되지 않는 돈으로도 훗날에는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하고 갈망하는 이른 바 '부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지금의 나는 지리멸렬한 이 사회의 자본주의를 모르고 살아야 했다. 돌고 도는 돈에 쩔쩔매는 삶은 살지 않아야 맞는 것이다. 스무 살이 그러했듯 스물 여덟의 지금 역시, 달라진 것 하나 없이 버티고 있다. 한 살 한 살, 내 나이가 많아질수록 이 사회 역시 좀 더 많은 것을 요구하고 내 나이보다 열곱절은 더 많이 높아진다. 그것이 내가 하층민에서 위로 오를 수 없는 이유이다. 그저, 좀 더 나은 내일을 바라는 것. 그저, 그런 희망 하나 등불처럼 달고 이 사회를 걸어나가야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이 사회의 무언의 폭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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