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란
공선옥 지음 / 뿔(웅진) / 2010년 10월
평점 :
품절


 

 

 

 갓 중학교에 입학했던 때인가. 겨우 여섯 살 밖에 되지 않은 조카가 뺑소니로 목숨을 잃었다. 막연하게나마 슬픔의 깊이를 감지하기는 했지만 죽음이라는 단어가 주는 생경함에 차마 울지도 못했다. 어떡해, 하며 그저 두 무릎을 끌어모아 앉아있는데 한 살 터울의 언니가 그런말을 한다. 어린 아이가 죽는다는 것은 천사가 되기 위해서라고, 하느님이 우리 조카가 필요해 어쩔 수 없이 일찍 데려가는 거라고. 장례식이 끝나고 한 달여 쯤 지나서야 이모를 볼 수 있었는데, 그 모습이 참 가관이었다. 헝클어져 산발이 된 머리에 여기저기 얼룩이 진 옷 차림, 가뭇없이 이어지던 실소와 울음 섞인 목소리. 가만히, 이모 곁에 앉아 말했다. '이모! 머리 좀 감아, 이게 뭐야.' 가만히, 듣고 있던 이모가 갑자기 깔깔 웃으며 '어머, 은주가 나 보고 머리 감으라네? 하하.' 했다. 그러다가도 방울방울 눈물을 떨구던 이모를 바라보며 철 없이 그런 생각을 했다. 그냥 민호가 여행을 아주 긴 여행을 간 거라고 생각하면 안되겠냐고. 그러면 좀 더 낫지 않겠느냐구. 그 울던 모습이 지워지지않아 이제와 생각해보면 함께 울어주지 못해 왈칵, 하니 미안한 울음이 가슴에 차오른다.  

 

 「영란」을 읽을 당시에는 까마득히 잊고 있다, 책을 덮고나서야 아들을 잃은 이모의 처연했던 모습이 떠올랐다. 「영란」은 아들과 남편을 잃고 황망한 세상과 맞서다 목포로 떠나 아픔을 딛고 일어서는 한 여자의 삶에 대한 이야기다. 장미가 엉글어진 사직동의 집이 여자의 삶처럼 수거되지 못한 쓰레기들로 널부러졌을 때, 남편에게 인센을 받지 못한 정섭이라는 한 남자를 만나 덩그러니 목포로 떨구어진 여자, 영란. 낡고 지친 영란의 삶이 조금씩, 목포라는 항구도시가 주는 시니컬한 인정과 무심히 받아들여지는 인심속에서 활기를 찾는다. 여자의 이름은, 여자가 목포에서 첫 도약을 시작하는 '영란여관'이라는 곳에서 따온 것이다. 자신 본연의 이름을 잃는 다는 것, 그리고 새 이름으로 살아간다는 건 여자 자신이 갖는 모멸감과 과거에 대한 스스로의 망각과도 같다. 사랑하는 이는 가슴에 묻는다고 했던가. 그런 영란의 가슴에 돌연 완규라는 목포 남자가 들어선다. 말 그대로 정말 돌연, 이다. 무슨 이런 전개가, 있을까 싶을만큼의 돌연, 사랑이 찾아든다. 부러, 완규의 조카까지도 영란의 품 속으로 뛰어든다.

 

 사람에게 받은 상처는 사람에게 치유를 받아야 한다 했던가. 영란은 굳이 목포가 아니어도 되었지만, 굳이 목포에 눌러앉게 된 것이 참 다행스러운 건 공선옥이 그린 저마다의 상처와 아픔을 품고 사는 목포 사람들의 담백한 인간미였다. 구태여 물어봄으로 상처를 헤집는 것이 아닌 유달산에서 울려퍼지는 노래가락이라던가, 숨은 길을 올라 맘껏 울 수 있는 장소가 있다던가, 묵묵히 타인의 삶을 받아들여 자연스레 치유되기를 어루만지는 듯 한 사람과 사람의 포옹,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위로가 됨이 사실이다. 자신 보다 더한 슬픔을 가진 자를 보며 위로를 받는 것 또한 인간의 간사함이 아니었던가. 그럼에도 영란은, 자신이 좋다는 완규를 쉬이 받아들일 수 없다. 영란의 가슴속에 스며들어 쓰러지고 싶을 때마다 말을 걸어오는 제 남편과 아들의 울림때문이었을 것이다. 아직은, 제 가슴속에 새로운 누군가를 품을 준비가 되지 않는다는 것. 그로인해, 마음을 열 수 없어 되려 상처를 입힐까 무서워 한 걸음, 두 걸음 멀찍이 물러선다. 그리고 다시, 제 가슴에 집을 짓는다. 치매에 걸린 할머니가 살고, 사람을 그리워했던 조인자의 슈퍼마켓 안 쪽. 그곳에서, 시멘트를 바르고 정원을 꾸며 새 집, 을 짓는다. 오로지 완규의 조카가 자신이 가꾼 집에서 공부를 하는 모습을 그리면서, 초로히.

 

 그 곳 목포에서는 누군가는 떠나고 누군가는 돌아온다. 잊자고 떠나고 그리워 돌아온다. 영란을 목포에 떨군 정섭이 완벽하게 아내와 딸에게 이별선고를 받아들이고 다시 목포에 발을 딛어 영란과 조인자가 이루어 낸 가게에 발을 들이는 것 처럼, 이별과 재회가 아무렇지않게 그곳 목포에서는 이루어진다. 저마다의 슬픔과 저마다의 삶이 각박한 서울 바닥에 내쳐져 상처로 머무는 것이 아닌, 항구 도시 목포에서는 서로의 슬픔에 안부를 묻는다. 괜찮다고, 그러니 슬픔 너도 안녕하라고.

 

 내게도, 매번 돌아봐야하고 지켜줘야 할 슬픔들이 있다. 방치해둔 채 내버려두면 한꺼번에 터져 그대로 무너져내리고야 마는 그런 슬픔들 말이다. 부끄러워 숨기는 슬픔이 있는가하면 술 한잔에도 휘청이는 슬픔이 있다. 잊어버리자 해도 돌아서면 눈물이 되어 품어줄 수 밖에 없는 슬픔들이 있다. 영란에게도 그러했듯 종종 그런 슬픔들이 말을 걸어오기도 하고 제 가슴 치며 속절없이 눈물바람으로 밤을 지새우게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떨쳐버릴 수 없는 슬픔에 대한 이유가 있다면, 양귀자의 소설 작품의 제목처럼 슬픔도 어느 순간은 힘이 되기 때문이 아닐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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