밝은 밤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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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려지지 않는 나이가 있다. 13층 아파트 베란다에서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던 장면들로 채워졌던 시간. 무에 그리 힘들었을까. 지금의 시선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뚜렷한 이유조차 기억나지 않건만. 기억에 남아있는 이유와 잊힌 이유들이 중첩되어 서러운 감정들을 수증기처럼 머금었나.

감정은 기억보다 오래 남는지 현재의 마음이 과거에 담겼던 감정의 코팅지로 둘러싸인다. 손가락 끝으로 코팅된 비닐을 당기니 살갗이라도 벗겨지는 듯 아리다.

서른 언저리의 내가 눈가에 둔탁한 그림자를 탈피하듯 남기곤 후다닥 되돌아간다. 나는 정말 괜찮은 걸까. 스스로 질문하고 답을 찾아 선명해 보이는 선을 따라간다. 이내 끄트머리는 안개 자욱한 길로 이어진다.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인 듯 옅은 꼬리를 흘리는 비행운이 된다. 선뜻 잡지도, 깔끔하게 돌아서지도 못한 채 매번 서성이는 오십 대가 현재의 나다.

 

상처는 상처를 여는 열쇠인가. 작가로부터 소설 속 주인공으로 이어지는 상처의 도미노 끝에 선 듯 덮어왔던 상처가 서서히 틈을 보인다. 소설로 전개되는 이야기가 점점 투명해지더니 아득한 너머로 어정쩡한 삼십대의 내가 보인다. 다른 상황의 이야기건만 그 안에 담긴 익숙한 파편 몇 조각에 시선이 머문다.

소설밝은 밤은 상처의 외피로 둘러싸인 치유의 이야기이다. 서른둘의 지연과 외할머니의 우연한 만남을 시작으로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다양한 여인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엄마, 외할머니, 증조할머니와 그녀들 주변에 있는 세 명의 여인들은 결혼으로 이어진 관계, 이별, 가족, 죽음, 사회적 배경을 원인으로 각기 다른 상처를 품는다.

주요 시대적 배경에는 백정이 차별받던 시대부터 일제강점기, 천주교 박해, 히로시마 원폭 투하, 한국전쟁 등 현대사의 굵직한 사건들이 담긴다. 그 시대를 건너는 여인들은 위태위태한 음표로 보이지만 강한 의지력으로 스스로의 삶을 향한다. 치열함을 넘어서는 숭고함을 뿜어낸다.

 

당신을 고통스럽게 하거나 커다란 상처를 입히는 건 무엇인가. 나의 경우, 관계가 주는 상처가 가장 아팠다. 커다란 아픔은 가장 가까운 관계에서 시작된다. 책에서도 지연과 엄마, 엄마와 외할머니 등 모녀 사이의 뒤틀어진 관계가 비중 있게 다뤄진다. 이들의 갈등은 주변 인물들과의 관계와 맞물린다. 작가는 단단하게 꼬여있던 매듭이 어떤 과정을 거치면서 서서히 풀어지는지 밀도 있게 보여준다.

촘촘한 깊이로 스미는 문장에 주춤, 언젠가 심장에 새겼던 서러움을 담은 익숙한 문장들을 보며 몇 장을 넘기기도 전에 멈칫한다. 밝은 밤을 건너는 동안 자주 아프겠구나. 마음에 고여 있던 물기가 철가루라도 된 듯 서서히 눈두덩을 향한다. 눈가가 뜨거워진다. 괜찮아져야만 했던 괜찮지 않은 나를 외면하며 괜찮아진 줄 알던 내가 보인다.

그럼에도 손가락은 새벽까지 이끌리듯 책장을 넘겼다. 외면할 수 없는 흡인력이 작가에게서 온 건지, 소설 속 그녀에게서 온 건지, 이제는 마주하고 싶다는 무의식적인 간절함에서 온 건지, 혹은 이 모두의 공명으로 인한 건지 까닭 모를 중력에 이끌리듯 빠져들었다.

 

기쁨이나 즐거움에는 자연스러운 흐름이 있다. 반짝이는 햇살을 머금은 감정들은 크고 작은 강물로 존재를 돌다 증발한다. 반면 상처에서 배어나온 물기어린 감정은 찐득하다. 지쳐버린 정맥혈과 같아 스스로 흐르기에는 힘이 겹다. 마음의 혈관에는 거꾸로 흐르지 못하게 해주는 판막이 없다.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그것은 종종 뒷걸음을 치다 심장 한 구석에 쌓인다. 차곡차곡 접힌 채로 딱딱하게 굳어진다. 일상의 박동이 시작되면 다른 감정의 물결에 가려져 아래로 가라앉는다.

책을 통과하는 내내 열병처럼 이십여 년 전의 나를 앓았다. 이해받지 못한 서러움이, 빛도 소리도 없는 우주공간을 오롯이 혼자 유영하는 듯했던 외로움이, 먼지처럼 날아가 버린 원인을 따라가지 못한 채 덩그마니 남아있던 먹먹함이 한꺼번에 몰려들었다. 그럭저럭 견딜만하다 여겨왔던 감정들이 켜켜이 쌓여있던 지층이 되어오니 태풍에 휩쓸린 듯 바닥이 드러났다.

훌훌 떨쳐내고 싶던 감정의 귀퉁이를 여전히 붙들고 있었음을 깨닫는다. 줄줄 올이 풀린 실오라기를 차마 놓지 못해 습관처럼 손가락에 감고 있었던 걸까.

 

누구나 마음으로 이루어진 행성을 가슴속에 품는다. 마음의 행성에는 다양한 감정들이 뒤섞여있다. 사랑, 기쁨, 분노, 즐거움, 행복, 슬픔, 아픔, 그리움, 외로움 등이 모여 행성을 만든다. 감정들은 수시로 우리의 안팎을 들락거린다. 찰나로 스치는가 하면 눅진하게 눌러 붙다 영혼의 심연으로 가라앉는다.

몰랑몰랑한 행성의 크기는 시시각각 변한다. 크기에 따라 다른 중력을 나타내는 행성처럼 마음마다 중력의 크기가 다르다. 다가오는 자극에 반응하며 상황과 사람을 다른 인력으로 끌어당긴다. 누군가에게는 대수롭지 않은 손수건이 다른 이에겐 물에 흠뻑 젖은 거대한 솜이 될 수 있는 이유를 여기에서 찾는다. 이런 상상을 하면 다른 이의 상처가 조심스럽다.

다른 중력을 지녔으므로 동일한 무게감을 지닌 상황은 존재하지 않는다. 답답했던 소설 속 인물의 행동도 같은 시선으로 바라보면 이해가 된다. 나의 무게감과 당신이나 가상의 인물이 느끼는 그것은 분명히 다를 터이다. 그러니 함부로 재단하지 말 것. 매번 스스로 다짐한다.

 

밤하늘에는 오래된 과거가 있다. 허블 망원경이 찍은 사진울트라 디프 필드에는 백삼십억 년 전의 우주가 담겨있다던가. 빛의 속도가 유한하기에 지금 내가 올려다보는 별빛은 과거의 별에서 출발했으리라.

밤하늘은 왜 어두운가. 독일의 천문학자 올베르스는 처음으로 의문을 제기한다. 성간 가스와 먼지가 별빛을 가로막아서, 빛의 속도가 유한해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빛의 속도보다 우주가 빠르게 팽창해서 등 다양한 인물들이 타당한 이유를 찾기 위해 노력한다. 과학적 진위를 떠나 나에게 밤하늘은 위안을 주는 마음의 안식처이다.

낮의 하늘보다 밤의 하늘은 강한 인력으로 나를 당긴다. 과학적인 사실을 알지 못했던 십대에도 밤하늘이 그저 좋았다. 잿빛 감정을 담은 채 터벅터벅 걷다가도 문득 올려다보면 나를 둘러싼 공기 위로 까마득한 우주까지 뻗어있는 이불이 부드럽게 마음을 감싸주는 것만 같았다. 어둠이 품고 있는 별이, 반짝이는 눈물 같은 별이 주는 위안에 서늘한 공간을 걸으면서도 따뜻했다.

 

밤은 어둡다. 어두우니 밤이다. 밝은 밤이라 했을까. 고운 비단으로 지은 옷감인 듯 환한 책표지를 가만가만 어루만진다. 이 책을 읽고 나서 며칠간 밤의 하늘을 자주 쳐다보았다. 먼 하늘에서는 드문드문 별빛이 반짝였다.

별빛은 그 빛이 출발한 까마득한 과거의 시간으로부터 온다. 결국 밤하늘을 빛나게 해주는 건 과거이다. 인간의 삶도 마찬가지 속성을 지니는 건 아닐까. 고통스럽던 과거는 아직까지 내게로 도달하지 못한 별빛이다. 빛으로 다가와 눈으로 스며들어 나와 이어진 과거는 더 이상 나에게 고통만을 안겨주지는 않으리라. 외로운 이들에게 위안의 빛으로 점점이 흩날리는 눈송이처럼 말이다.

작가의 상처가 환하게 빛나는 밤이 된 것도 그녀의 고통이 빛으로 닿았기 때문이리라 짐작한다. 별빛은 별을 향한 이에게만 보인다. 어둠으로 가득한 공간에서 고개를 들고 눈을 뜨는 건 의지이며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과거의 고통을 똑바로 응시하는 이에게 밤하늘은 더 이상 어둡지 않다.

 

올려다보는 밤하늘이 완전히 밝아진 건 아니다. 과거로 타임 슬립하면 매콤함이 남는다. 들숨과 날숨이 폐로 들락거릴 때 공기는 말끔하게 비워지지 않는다. 나의 삼십 대는 어정쩡하게 폐에 머물던 공기였나. 그래도 새벽에 가까워진 듯 서러움이 덜하다. 질끈 감았던 눈을 뜨고 실눈으로나마 상처를 마주하려는 마음이 생긴 걸까.

인간의 삶은 보편적인 패턴으로 이어지는 줄기로 존재하는가 보다. 밝은 밤의 상처에 기대어 나의 상처를 들여다본다. 상처를 향해 손끝을 내밀어 가만히 더듬어본다. 최은영의 밤이 상처를 향해 한 뼘의 손을 내밀 용기를 건네주었나.

외면한 마음은 거기 그대로 머문다. 매순간 자라는 몸처럼 시간에 끌려가지 않는다. 스스로 보듬어 꺼내지 않으면 치유되지 않는다. 치료를 하려면 상처를 들여다봐야 한다. 가까이 다가가 쓰라린 상처를 건드려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사금파리를 꺼내어 당신에게도 기꺼이 보여줄 순간이 언젠가는 올 것만 같다. 손끝이 뜨거워진다.


p12, 5째줄: 눈이 기화 → ~ 승화 or 융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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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10-07 22: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만큼 따뜻한 리뷰네요. 축하드려요 *^^*

나비종 2022-10-08 06:00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축하의 말씀에 제 마음이 따뜻해지네요.^^ 날이 많이 쌀쌀해졌습니다. 감기 조심하세요~^^

romio 2022-10-16 1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좀 늦었지만, 저도 리뷰를 읽고 잔잔한 여운을 느낌니다,, 저는 오십대 남자지만,,

나비종 2022-10-16 21:21   좋아요 0 | URL
따뜻한 책입니다. 혹시 읽지 않으신 책이면 읽어보세요. 남성의 시선에서는 어떻게 비춰질지 궁금하네요.^^
 
물 만난 물고기
이찬혁 지음 / 수카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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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잔한 바다에서 물방울들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린다면 어떤 느낌일까. 찰랑찰랑한 풍경 소리와 비슷할까. 다정한 숨소리인 듯 작은 알갱이들의 소리가 퍼져나갈까. 원자 단위의 입자들은 늘 진동하고 소리는 매질을 통해 전달되는 진동의 에너지이니 황당무계한 상상은 아닐 터이다. 가시광선 바깥에 존재하는 적외선이나 자외선처럼, 가청주파수 너머로부터 울리는 크고 작은 소리들이 온 세상을 가득 채우고 있는지도 모른다.

빛조차 빠져나오지 못한다는 검은 구멍에서 소리가 울려 퍼진다니! 지난 8, NASA는 블랙홀의 소리를 공개했다. 24천만 광년의 은하단에 있는 블랙홀은 57~58옥타브로 증폭시킨 소리로 존재감을 드러낸다. ‘천상오싹의 상반된 평가를 받는 34초의 소리로부터 예술가의 정체성을 발견한다. 크고 작은 소리를 내는 삶에 담긴 의미를 발견하여 표현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음악가든 화가든 문학 작가든 공통적인 속성을 품는다. 섬세한 촉수로 들릴락 말락 존재감조차 어필하지 못하는 삶의 숨결을 증폭시킨다는 점이다. 선율이냐 색채냐 문장이냐 필터의 종류만 다를 뿐이다. 맥박인 듯 활어처럼 팔딱거리는 삶의 의미를 전하면서 스스로도 전율을 느끼는 순간을 상상한다. 이어폰으로 전해 듣는 블랙홀의 소리처럼 생경하면서도 묘하다.

 

음악을 먼저 들을까, 책을 먼저 읽을까. AKMU의 정규앨범 항해를 검색하니 10곡의 목록이 보인다. 앨범의 모티브라는 책의 소개 글. 잠시 고민하다 책을 먼저 펼친다. 예술과 연결된 문학은 어떤 느낌일까.

소설 물 만난 물고기는 음악을 통해 진정한 예술의 의미를 찾아가는 성장 일기이다. 주인공 은 여행을 하며 여러 인물들로부터 예술가로서의 면모를 찾으려 시도하지만 번번이 실망한다. 몽환적인 해야와의 만남은 그의 삶의 분기점이다. 현실과 상상을 넘나드는 공간 묘사, 자유로운 영혼을 지닌 캐릭터와의 대화는 4차원적인 분위기를 뿜어낸다. 그녀와의 사랑과 이별은 그에게 많은 깨달음을 남긴다.

픽션의 바탕에는 작가의 내면세계가 BGM처럼 펼쳐진다. 이야기의 흐름은 단지 거들뿐, 본질은 등장 인물간의 대화에 있다. 곳곳에 음악가로서의 열망과 고민이 묻어난다. 작가는 두 주인공이 함께 하는 풍경에 자신의 사유를 얹어 자유와 예술로서의 음악과 삶의 의미를 찾아간다.

표현한 것이 곧 자신이 되는 사람, 자신이 한 말을 지키는 사람, 그리하여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사람. 책 표지의 바다처럼 푸른 시선을 지닌 작가가 정의하는 예술가에게서 바다 냄새가 난다. 그들이 있기에 우리의 세상은 조금씩 넓어지고 깊어지는 걸까.

 

삶의 모습에 대한 당위를 뱉어내곤 그대로 살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 때면 가끔 버거웠다. 내 자신이 얼마나 위태위태한지, 얼마나 보잘 것 없는지 잘 아는 나는 종종 가라앉았다. 실제의 나와, 나를 돌아보는 나와의 거리가 지나치게 가까워서 그렇게 보이는 걸까. 혹은 물에 잠겨 짧아 보이는 두 다리였는지도 모르겠다. 뱉은 말을 지킬 수 없을 것 같으면 그냥 할 수 있는 만큼의 말을 하면 된다는 문장에 뜬금없는 위로를 받는다. 예술과 삶의 싱크로율을 말하는 문장이지만 어쩐지 마음의 짐이 가벼워진다.

음악이 서랍인 듯 추억을 넣고 다닌다는 작가의 말에 공감한다. 강한 인력으로 나를 당기던 음악은 종종 누군가를 담은 이야기와 함께 흘렀다. 함께 듣던 음악은 곁에 없는 그를 순식간에 불러왔다. 함께 먹던 음식은 더 이상 그 때의 맛이 나지 않았다. ‘라는 재료가 빠졌기 때문이다. 스치는 향기에 눈물이 나는가 하면 익숙했던 풍경이 의 부재로 낯선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대상과 결합된 시각, 청각, 후각, 미각은 종종 환경으로부터 불현 듯 다가오는 호르몬을 경험한다. 특별했던 이를 공유한 음악은 공간 전체를 울리며 물처럼 심장을 향하여 스며든다. 흠뻑 젖은 마음이 마를 때까지 꿈인 듯 타임 슬립 하는 순간을 만든다. 감각할 수 있는 영역보다 드넓은 공간에 존재하기에 감각이 증폭되는 순간을 맞이하는 걸까.

 

앨범 수록곡의 노랫말을 하나하나 찾아본다. 모두가 책 속의 이야기와 연결된다. 문학적으로 서툰 몸짓이 음악과 겹쳐지니 책을 바라보는 시선이 몰랑해진다. 작가가 고민했던 예술가를 한 명 알게 된 것 같아서. 앨범에 실린 곡들의 탄생 배경을 음악가로부터 직접 전해들은 기분이다. 큐레이터와 천천히 대화하며 미술작품을 감상하고 온 느낌이랄까. 더불어 작가의 음악관과 삶을 바라보는 시선이 자연스럽게 묻어나온 문장들을 통과하니 그의 음악을 보다 친근한 마음으로 마주할 수 있었다.

전주만으로 공기가 물결치던 곡. 가수의 목소리가 들리기도 전에 벌써 좋아서 귀 기울이던 작품. 공간의 울리는 맑은 목소리가 쨍쨍한 태양의 화살처럼 소리 없이 가슴에 꽂히던 순간. 선율을 쓰담쓰담하는 담담한 가사에 다시 반해버린 노래. <어떻게 이별까지 사랑하겠어, 널 사랑하는 거지>5분여 동안 나를 다른 공간으로 데려가곤 했다. 그리고 이런 감각의 경험은 매번 현재진행형이다.

책을 덮고 곡을 다시 듣는다. 눈밭에 난 발자국을 따라 걷듯 흘러나오는 가사를 하얀 종이에 적는다. 시처럼 보였던 가사에 이야기가 얹어지니 이전보다 묵직해진다. 음표가 귓가에서 울릴 때마다 무심코 흘려보냈던 글자 하나하나가 생명력을 품은 꽃잎으로 되살아난다.

책을 다시 펼쳐 휘리릭 넘기니 첫 장과 마지막 장에 보이는 바다 사진이 눈에 들어온다. 책장 넘기는 소리가 잔잔한 물결 소리인 듯 착각이 인다. 노래하듯이 살아간다면 얼마나 자유로울까. 바다 속 물방울처럼 살아간다면 삶이 얼마나 찰랑거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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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로서 충분히 괜찮은 사람
김재식 지음 / 북로망스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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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방울 백만 개가 모여서 하나의 빗방울을 만든다는 말을 들어본 적 있는가. 자연 현상의 본질은 과학을 넘어 인문학의 영역에 머물기도 한다. 철학적 관점에서 해석을 해도 의미가 깊은 문장이 있다. 빗방울이 살아남아 바다가 된다는 작가의 글을 보고 과학교과서에 나온 문장을 떠올린다. 백만 개도 훨씬 넘을 빗방울이 모여 바다를 이루는 장면을 상상한다. 곱씹을수록 마음이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다. 우리의 생각도 이런 빗방울들의 집합체이리라. 빗방울이든 거대한 바닷물이든 모든 물은 하나에서 시작된다.

인간의 몸은 수조 개의 세포로 이루어진다. 당신과 나는 다르지만 우리는 인간이라는 공통적인 끈으로 묶인 존재다. 인간의 세포에는 각각 46개의 염색체가 담긴다. 모양과 기능이 달라도 공통적인 염색체마냥 한 권의 책은 수많은 문장의 세포로 이루어진 생명체이다. 하나의 제목으로 묶여 주제를 향해 달려가는 책속의 문장들을 보며 염색체를 떠올린다.나로서 충분히 괜찮은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향하는 세포들이다.

 

이 책은 시의 형식을 취한 에세이다. 찬란한 운율의 맛보다 순두부의 그것에 가깝다. 제목을 차례로 나열해본다. 1장은 기대해도 돼, 기대어도 돼’, 2장은 나는 나대로 충분히 아름다워’, 3장은 빗방울은 살아남아 바다가 된다’, 4장은 행복의 방향을 조금만 바꿔봐’. 조선 후기 백자의 담백함이 떠오르는 4개의 장은 제목만으로 마음을 다독인다. 작은 빗방울을 연상하며 차례에 쏟아지는 문장들은 천천히 음미한다. 읽는 것만으로 마음이 서서히 데워진다.

단편소설인 듯 생각의 조각들이 작은 이야기가 된다. 자연스럽게 심장을 두드린다. ! 나도 옛날에 이런 생각을 했었지잊고 있던 기억의 단편들이 부유한다. 작가는 어디서 들어봤음직한 문장, 언젠가 한 번쯤 했던 생각을 느린 화면으로 재생한다. 그의 특별한 점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일상에 숨어있는 작은 보석을 보여준다는 거다. 평범함에 담긴 본질이 그만의 해석으로 드러난다.

마라 탕의 자극을 기대한 독자라면 다소 밋밋하게 비춰질 수도 있겠다. 책속의 문장들은 역동적인 봄의 시작보다는 봄 한가운데에 비추는 오후 햇살에 가깝다. 따뜻하게 마음을 두드린다. 문장을 따라 덩달아 흐르는 호흡이 평화롭고도 느려진다.

 

위안이 되는 몇몇 문장을 만난다. 모르는 길로 가도 집에 갈 수 없는 건 아니라는 사실, 사람들의 말에는 아무런 힘이 없으며 진짜 힘은 내 마음의 변화에서부터 나온다는 것, 무엇을 하면서 살면 좋을지 알고 싶다면 무슨 일을 할 때 행복한지 보라는 것, 좋았던 기억이 후회로 남거나 잘못된 줄 알았던 일이 삶을 좋게 변화시키기도 하니 수많은 선택 앞에서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

냉철한 문장도 보인다. 정리가 안 되는 건 쓸모없는 것들에 대한 미련이 남아서라는 것, 사람들이 굳이 궁금해 하지 않을 내 삶의 단편들을 보여주는 데 신경을 쓰느라 시간을 뺏기지 말라는 것, 나를 힘들게만 하는 것은 나를 위해 떠나는 게 좋다는 것, 쌓인 사람들도 정리가 되어야 내게 어떤 사람이 소중한지 눈에 보인다는 것, 나를 희생하는 것과 잃는 것은 다르다는 것, 누군가에게 어떤 사람인지는 내가 아니라 그 사람이 정의하는 거라는 것, 물질적인 것은 다시 돌려받지 않아도 되는 만큼만 주어야 한다는 것, 내가 바라보는 세상은 나의 선택이 만들어낸 결과라는 것, 사람은 변하지 않고 달라진 상황에서야 보지 못했던 모습을 보는 것뿐이라는 것, 누군가에게 인정받는 것보다 나에게 인정받는 게 중요하다는 것.

 

잠시 과거로 여행을 떠날 때가 있다. 예전에 했던 생각은 예전의 나를 불러온다. 영화 <시네마 천국>의 마지막 장면처럼 먹먹하기도 한 감정으로 오래된 필름을 돌려본다. 나 같은 친구가 한 명만이라도 있었으면 좋겠어. 스스로 들기 어려울 정도로 마음이 무거울 때 어린 나는 종종 이런 바람을 떠올렸다. 한동안 흐린 나날을 보내다 그럭저럭 빠른 일상으로 돌아가는 순환을 반복하곤 했다. 어디로 가야하죠 아저씨의 답, <나에게로 가는 길>은 이런 시간들이 모여 이루어졌으리라.

반복된 시행착오의 과정을 3단계로 정리한다.

1단계, 세상 어디에도 없는 너, 우울 모드. 나 같은 친구를 찾아보지만 있었으면 좋을 그런 인간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2단계, 천상천하유아독존, 절대고독 모드. 세상은 결국 혼자 사는 거다.

3단계, 이 안에 나있다, 거울 모드. 있었으면 좋을 그런 인간은 바로 나! 내가 나의 친구가 되면 된다. 나에게 가장 좋은 친구는 바로 나이다.

 

잔잔하게 반짝이는 날, 바다를 바라보며 모래사장에 나란히 앉아 오고가는 파도 같은 얘기를 이따금씩 두서없이 나누는 풍경. 말하지 않아도 같은 색으로 물들어버릴 것 같은 두 마음. 책을 읽는 내내 이런 장면 속 주인공이 된 듯했다. 무심코 흘려보낼 뻔한 일상의 빗방울을 살리는 노하우를 전수받은 기분이다. 무슨 말을 하든 무슨 생각이든 다 포용될 것 같은 분위기에 젖어 제목으로 위안 받고 내용에 공감하며 일상과 나의 소중함을 깨닫는 시간을 보냈다.

작은 행복의 특별함을 아는 작가는 담담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낸다. 김재식의 시선을 따라가며 덩달아 나의 이야기를 찾아보았다. 나 이런 적 있다 말하면, ? 나도 그럴 때 있었다고 답했다. 이럴 때는 이렇게 바라보았다 하면, ! 무릎을 치며 새로운 길을 찾은 듯 설렜다.

누구나 자신만의 바다를 품는다. 빗방울은 살아남아 바다가 된다는 작가의 문장을 떠올린다. 책 속의 문장들이 빗방울로 남은 걸까. 심장으로 떨어진 문장들이 나의 바다를 향해 흐르는 것만 같다. 빗방울을 살리는 건 온전히 나의 몫임을 안다. 나의 가장 소중한 친구인 나를 응원한다. 이 순간 스스로에게 지지를 보내고 싶을 당신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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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은 부드러워라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65
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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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글자는 맞았다. 뛰어난 점이 너무 많아 경이로울 정도라는 어니스트님의 추천글에서 결국 나는 두 번의 경..를 경험했으니까.

첫 번째 경이! 믿기지 않지만 대장내시경s eve 의 방대한 드링킹을 능가하는 511쪽을 꾸역꾸역 넘겼다는 점이다. 바로 내가!

두 번째 경이! 이토록 마지막까지 줄기차게 재미없기도 쉽지 않다는 경이다.

마지막 장을 덮는 손이 511쪽의 후유증으로 부들부들 떨리는 듯 착각이 들었다. 굳이 찾고 싶지는 않지만 궁금은 하다. ......에서 경이를 찾아야 했던 건가요.

 

소설이 다큐는 아니지만 잘 만들어진 이야기는 홀로그램 효과를 낸다. 진짜 일어났던 일 아닐까 의심할 정도로 손에 잡힐 듯 실감난다. 내용면에서 많이 아쉬웠던 책이다.

첫째, 구상은 좋았으나 서사 구조가 약하다. 주요 테마는 충분히 시선을 끌만한 화두이다. 정신과의사 딕과 정신병에 걸린 그의 아내 니콜과 신인배우 로즈메리 사이의 삼각관계를 다룬 이야기. 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인종폭동, 살인, 결투, 발작 등 자극적인 요소가 사이사이에 등장하지만 발가락 끝만 적시다 쏙 들어간다. 뚜껑은 열었으나 꺼내다 만 건더기인 듯 어정쩡하다.

둘째, 조연과 엑스트라의 포지션이 애매하다. 꿰지 않은 구슬이 서 말이다. 연결성이 약하다. 로즈메리를 마마 걸로 만든 그녀의 어머니를 비롯하여 몇몇 비중 있어 보이는 부인들도 등장하지만 주인공들을 서포트하는 배경으로서의 역할도 미흡하다. 손톱 아래 거스러미처럼 서사가 살짝 일어나다 사라진다. 지나가는 사람 1,2,3가 뜬금없이 소그룹으로, 개별적으로 잠깐씩 등장만 했다 퇴장한다.

둘째, 일관적인 시점이 없어 산만하다. 처음에는 딕과 사랑에 빠진 로즈메리의 이야기인가 싶다가 갑자기 딕과 아내 니콜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결론적으로 딕과 니콜이 피날레를 장식한다. 로즈메리는 연기 못해서 비중이 줄어든 주인공마냥 나중에는 슬그머니 사라진다.

셋째, 제목은 무슨 이유로 갖다 붙였을까. 밤은 부드러워라는 존 키츠의 시 <나이팅게일에게 부치는 노래>의 구절에서 인용한 제목이라고 한다. 전문이 궁금해서 찾아본 시가 오히려 설득력이 있다. 시에서 묘사된 밤의 결은 명확하다. 그대와 함께 있기에 부드러운 밤이다.

이 소설은? 여주인공이 둘이니 2지선다형이건만 답을 고르기 어렵다. 둘 다 부드럽다고 말하기에는 애매하다. 제목에 심오한 의미가 있나? ‘부드러워라로 번역된 단어 ‘tender’의 의미를 찾아본다. 의학용어로 접촉 혹은 가압에 대한 비정상적 과민성을 뜻한다. 남자 주인공이 정신과의사이니 혹시나 중의적인 뜻인가 싶지만 그 정도는 아닌 것 같고. ‘tender’의 다른 의미로 감시인, 돌보는 사람, 간호인의 의미도 발견한다. 남자 주인공이 정신병에 걸린 아내를 돌보는 관계도 언급이 되니 혹시나 이건가. 그럼, 간호인 = ? 워워, 이것도 아닌 것 같다. 멋있는 시의 구절을 차용한 피츠제럴드를 그냥 받아들이자. 하지만 솔직히 여주인공 투 탑 중 어느 누구와의 관계에서도 부드러운 밤의 느낌은 찾지 못하겠다.

 

이제껏 읽어왔던 소설은 대개 두 부류였다. 내용이 재미있거나 묘사 형식이 아름답거나. 둘 다 괜찮은 작품은 드물더라도 적어도 한 가지 요소에서는 독서의 의미를 찾을 수 있었다.

묘사는 문체와 연결되어 일관적인 방향의 결을 만든다. 강물처럼 유려하게 흐르는 문체는 약간의 햇살만 받아도 반짝반짝 빛이 난다. 묘사 자체로도 흡인력 있게 독자를 빨아들이는 에밀 졸라처럼. 내용에서 재미 찾기에 참패한 나는 매력적인 묘사라도 건지려고 시도한다. 매의 눈으로 썩 괜찮은 표현을 뒤진다.

초반의 배경과 이야기는 겉돌았고 배경 자체에 대한 묘사도 이미지화하기 어려웠다. 화려한 묘사를 시도한 흔적은 묻어나나 난반사되는 빛처럼 일관성이 없어 조잡했다. 당최 뭔 얘기를 하려고 이 문장을 쓴 건지 이해가 안 되는 문장조차 곳곳에 등장한다. 배경과 서사와 문체의 삼위일체는 아무나 시전 할 수 있는 게 아님을 깨닫는다. 졸라님이 나의 눈높이를 너무 고급지게 올려놓으셨나.

영어를 모르는 무식자로서 함부로 꺼낼 말은 아니지만 원본의 문제인지 번역의 문제인지 솔직히 모르겠다. 반대로 꺾인 팔꿈치처럼 억지스러움이 곳곳에서 느껴져서 줄기차게 독서에 집중하기 어려웠다. 주춤주춤 가다서다 반복하니 내용의 흐름이 끊어졌다. 이야기는 흘러야하는데 말이다. 맥락이 뚝뚝 끊겼다.

하도 분위기 파악이 안 되어 맨 뒤의 해설에라도 기대를 걸었건만 해설, 너 마저. 밤이 부드러운 이유를 찾는 독자 앞에 개츠비는 왜 이리 자주 얼쩡거리는가. 하도 많이 등장해서 빈도를 헤아려보았다. 위대한 개츠비밤은 부드러워라둘 다 13회씩 언급된다. 본 작품에 대한 해설이 충분히 이루어진 이후에 추가 해설 개념으로 두 작품의 비교가 이루어지면 좋았겠다. 개츠비를 빼고는 밤 자체로 홀로서기 해설은 불가능했을까.

 

최대한 순화된 문장으로 리뷰를 작성하려고 노력했음을 밝힌다. 아무리 거르려 해도 몇 년 묵은 변비덩어리처럼 도무지 걸러지지 않는 부분은 솔직히 언급했다. 별점 12사이에서 갈등한다. 취향 차이겠지, 그렇게 생각하기로 하자. 인내심을 시험하는 프리미엄 레벨 테스트를 통과했다는 걸로 위안을 삼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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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감 2022-07-26 23: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진짜 팍팍 스킵하면서 읽었는데도 속터졌는데, 나비종님은 정말 꾸역꾸역 다 읽으셨나봅니다... ㅎㅎㅎ 대단하십니다. 경이로움을 체험하셨군요. 뭐라도 건진 거라 봐야 할까요 ㅋㅋㅋ

그래, 딱 삼각관계가 시작된다는 구상은 좋았어요. 음음 이건 로맨스 장르겠다 싶었는데, 점점 산으로 가다가 아에 증발해서 비가 되어 내리는... 대체 무슨 이야기야!!!! ㅋㅋㅋㅋㅋㅋㅋㅋ 있어보이는 여러 인물들이 정말 스치듯 지나가곤 하는데, 난 왜 무슨 기대를 하며 그 인물들에 집중했던가 싶고...

내용과 제목의 연관성은 못찾겠어요. 감도 안 오고요. 부드러운 인물도 없고 부드러울만한 상황 같은게 없는데 말이에요. 아니면 그저 있어보이는 중2병들의 제목짓기 같은 건 아닐지........
그래요. 스토리가 약하면 글맛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이 책은 정말 아무것도 없습죠. 그리고 그놈의 번역!! 정말 심각하더라고요! 이걸 편집부에서 아무도 태클걸지 않고 통과시키다니. 일을 하는건지 마는건지... 여튼 고생하셨습니다... ㅎㅎ

나비종님. 제가 한동안 개인적인 문제로 독서활동은 접어야 할 것 같아요. 완전히 독서를 끊는 건 아니겠지만 꽤 긴시간을 떠나있게 될 듯합니다. 그래서 나물모임도 이제 어려울 것 같아요^^; 꽤 오래 같이 해왔는데 참 많이 아쉽네요. 지금까지는 우리의 시즌1이었다 생각하려해요.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시즌2를 하게 될 날이 오면 좋겠어요. 너무 일방적인 통보가 되었네요. 건강히 잘 지내시고 독서도 꾸준히 하시는 나비종님 되시길 바랄게요! 그동안 저랑 함께 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

나비종 2022-07-29 20:24   좋아요 1 | URL
스킵이 안되더라구요.ㅡㅡ; 헤밍웨이님의 안목을 믿고 혹시나 혹시나 했죠. 체할 것 같은 기분으로 다 읽기는 했으나 남는 게 없어서 허탈했습니다.

구상 자체는 좋았아요. 로맨스가 아닌 스릴러라도 일관성이 있었으면 그럭저럭 반전매력을 느끼며 읽을만 했을 텐데 말이죠. 인물 낭비가 너무 심했어요. 소설은 엑스트라조차 의미를 가지고 등장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비중이 없다면 하다못해 배경효과로라도 작용해야 하건만 이도저도 아닌 인물들이 많아서 이건 뭐지 싶었습니다.

맞아요. 허세성이 짙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부드러운 밤과의 연결고리를 못찾겠더군요. 번역이 거슬렸던게 저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라 다행입니다.^^;

개인적인 문제가 부디 안좋은 일은 아니기를 바랍니다.
친정어머니께서 담낭절제술을 받으시는 바람에 화요일부터 오늘까지 상주 간병을 하느라 답변이 늦었습니다. 물감님의 글에 대한 댓글은 핸드폰으로 간단하게 작성할 수 있는 종류가 아니라... 다소 늦은 시각 며칠만에 얻은 자유로운 시각에 커피숍에 와서 노트북을 두드립니다. 이 댓글을 바로 읽으실지 아니면 기약없는 어느 미래에 읽으실지 알 수 없는 거로군요.
갑작스럽지만 그래도 이렇게 시즌1의 마지막 댓글을 남겨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아무런 설명없이 슬그머니 사라지는 만남들도 허다한 세상에 진심어린 마무리에 뭉클합니다. 시즌2가 예고되어 있다면 그 언젠가를 기다리면 되죠, 뭐. 꾸준히 읽고 쓰다 보면 다시 글로 이어질 날이 오리라 믿습니다.
건강하세요~^^
 
작별인사
김영하 지음 / 복복서가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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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법은 명쾌하면서도 단순하다. 01로만 숫자 표현이 가능하다. 짤막한 아라비아 숫자라도 엿가락처럼 쭉 늘어난다. 걱정 없다. 컴퓨터에게 길이는 문제가 되지 않으니. 이진법을 사용하는 로봇. 기계에게는 망설임이 없다. 잘못된 결론일지라도 오류 앞에서 당당하다. 참 또는 거짓을 바로 외친다. 로봇의 삶은 ONOFF로 이루어진다. 삶이 1이라면 죽음은 0. 중간이 없다.

반면 인간은 복잡하다. 애매모호하다. 결론을 내리기까지 수많은 망설임을 거친다. 어정쩡한 세모가 삶의 전 과정에 장맛비처럼 쏟아진다. 인간의 삶은 01사이를 무수히 오가는 순간들의 집합이다.

만일 당신에게 삶과 죽음의 명쾌한 선택지가 주어진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불로장생 GO? 이제 그만 STOP? 워워, 머릿속에 떠오르는 아름다운 동양화는 잠시 접어두자.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란 말이다. 당연히 사는 게 좋지 않겠느냐고? 과연 그럴까? 진지하게 다시 물으니까 불로장생을 외치려다 불초소생 모드가 된다고? 여기 판단을 돕기 위한 소설이 있다.

작별인사는 로봇과 인간이 공존하는 미래를 그린 이야기이다. 작가의 말처럼 이야기는 한 번밖에 살 수 없는 삶을 수백 배, 수천 배로 증폭시켜주는 놀라운 장치이며, 살 수도 있었던 삶을 상상 속에서 살아보게 해주니까. 이 책의 주제는 한마디로 선택이니 얼떨결에 햄릿이 된 당신의 선택지는 윤곽을 드러내리라.

 

선택을 중심으로 소설을 바라본다면 주인공은 철이, 선이, 민이 등 세 명이다. 이들은 각각 인간형 로봇, 인간, 로봇을 대변하는 캐릭터이다. 이야기는 휴머노이드의 시점에서 전개된다. 주연급 조연인 최 박사의 연구 주제로 언급되는 <인공지능의 윤리적 선택>은 작품의 주제를 관통한다. 인간에 가깝게 구현된 로봇은 인간 삶의 궤도를 선택할 것인가, 로봇의 삶을 따를 것인가. 인간의 삶과 로봇의 삶으로부터 각 존재의 죽음을 목도한 휴머노이드는 결국 그가 생각하는 최선의 끝을 선택한다.

모바일 캡슐, 생분해되는 그릇, 휴머노이드, 하이퍼 리얼 휴머노이드, 인간다운 휴머노이드, 재생 휴머노이드, 휴머노이드 재활용 업체, 폐휴머노이드, 폐로봇, 플라잉캡슐, 사용감이 없는 아이, 유전자 배양육, 아파트형 농장, 무선통신모듈, 디지털 구름, 기계지능. 상상만 해도 빠른 속도감을 안겨주는 미래의 용어들이 보물 상자의 금화인 듯 쏟아져 나왔다. 아직은 현실감 없는 이야기이면서도 언젠가는 이런 풍경이 펼쳐질 수도 있을 것 같은 생각에 묘했다.

도무지 상상이 가지 않는 이야기에 처음부터 빠져들었다. 이런 모습이 아닐 수도 있지만 이런 모습일 수도 있겠다 싶어서. 01사이를 롤러코스터처럼 오가며 미래를 상상하는 시간을 보냈다. 하늘에서 땅까지 아찔한 진자운동을 한 공유님의 심장처럼 내 마음은 책 한 권을 통과하는 동안 우주에서 인간까지 진자운동을 하였다. 작가는 순간순간 인간의 삶에 대한 질문을 두고 갔다. 그 안에서 인간 존재의 의미를 찾아보라고, 가장 적절한 마침표를 선택해보라고.

 

제목을 볼 때만 해도 상상하지 못했다. 사랑이야기인가. 겉표지만 보고 헤어진 연인을 그리워하며 멍하니 바다를 응시하는 내용이라 지레짐작했다. 왜 책 제목을 보고 연인과의 관계를 떠올렸을까. <뇌의 착각>을 제목으로 하는 내셔널지오그래픽채널의 짧은 영상이 생각난다. 뇌는 주변의 상황을 조합한 다음, 이미 있는 데이터와의 싱크로율을 비교분석하여 짧은 시간에 상황을 판단한다는 거다. 이런 이유로 종종 오류를 일으킬 수 있다나.

착각이 깨지는 것이 성장이라는 문장이 나온다. 유튜브 영상에서 어느 뇌 과학자는 말한다. 인간의 뇌는 실패를 하면서 점점 그것을 보완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고. 좌절만 하지 않으면 실패가 데이터화되어 보다 나은 결과가 도출된다고 한다. 더 많이 느끼고 타인과 교감할수록 훨씬 풍부해진다는 작가의 문장처럼. 감정의 데이터도 뇌에 축적되면서 영역을 확장하는 것이리라.

아마도 인간에게는 모든 것이 담겨있을 거다. 기쁨, 슬픔, 노여움, 아픔, 행복 같은 감정의 영역에서부터 논리, 비교, 분석 같은 이성적인 영역, 삶과 죽음에 이르기까지. 살아가면서 경험하고 행동하고 생각하는 모든 정보들이 보편적이고 특별한 장소에 새겨져있으리라. 다만 전원 버튼을 누르지 않아 눌리지 않은 스위치처럼 비활성상태로 잠들어있을 지도 모른다.

 

책은 질문이 담긴 스위치이다. 작별인사는 삶과 죽음과 우주와 인간과 미래의 스위치를 누른다. 인간답다는 건 무엇인가. 무엇이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가. 육체와 영혼이 결합된 생명체에서 하나만이 존재한대도 인간이라 칭할 수 있는가. 기계와 인간이 결합된다면 어디까지를 인간이라 말할 수 있는가. AI 발달의 한계는 어디까지인가. 감정도 01의 코드로 입력이 가능한가.

인간과 기계의 가장 큰 차이는 감정을 포함하는 마음의 영역이리라. 작가는 묻는다. 마음은 기억일까, 어떤 데이터 뭉치일까, 외부 자극에 대응하는 감정의 집합일까 하고.

내 생각에 마음은 감정의 감각이다. 시각, 청각, 후각, 미각, 피부감각 등 몸은 다섯 가지 감각의 형태로 외부 자극을 수용한다. 몸과 마음은 연결이 되어있다고 본다. 몸으로 느끼는 감각이 뇌로 전달되는 과정에서 감정의 문을 두드리며 지나가는 거라고. 다양한 몸의 감각은 반드시 감정의 영역을 통과하고 그 과정에서 다양한 감정의 스위치가 켜져 마음으로 나타나는 거라고 생각한다.

간단한 감정이라도 뇌와 몸의 모든 부분이 함께 작용하여 느껴야 한다는 문장이 인상 깊다. 뺨을 간질이는 햇살처럼 결이 섬세하다. 문장 하나도 허투루 쓰이지 않았다는 느낌이랄까. 챕터의 연결이 자연스러워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진다. 흡인력 있는 전개로 가독성이 좋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천히 읽기를 권한다. 각각의 챕터에서도 완성된 퍼즐만큼의 의미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아메바와 세균 등 단세포 생물의 번식력은 엄청나다. 세상을 뒤덮어버릴 듯 증가한다. 하지만 치명적인 단점이 하나 있다. 미세한 변수에도 전멸할 수 있다는 점이다. 결국 생태계의 주도권은 다양한 변수로 재현 가능한 존재가 쥐는 듯하다.

인공지능에서 단세포 생물을 떠올린다. 01로 존재하는 대상으로 말이다. 그렇다면 인간이 다양성을 지닌 한 약해보이더라도 희망은 있다. 만일 로봇이 인간만큼의 다양성을 지닌 존재로 거듭난다면? 환경에 따라 유성생식과 무성생식을 하는 히드라와 같은 성향을 보이게 된다면? 여기까지. 나머지 상상은 당신의 몫이다.

MBTI 붐이다. 무료간이검사를 해보니 ISFJ 였다 최근엔 INFJ 로 나온다. 언젠가는 E가 나온 적도 있다. 불과 몇 년 새에도 조금씩 뒤집히는 게 인간의 성격이다. 16가지 유형이지만 두 가지로 나뉜 성향의 %까지 고려하면 무수히 많은 채도의 스펙트럼으로 표현되리라.

소설 속 박사가 AI 고양이를 만들면서 성격을 설정하는 데 고민하는 장면에 놀란다. 로봇의 성격이라니!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발상이다. 표준화된 AI의 성격은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 설정 권한이 주어진 이에게 달려있으리라. 인종이나 민족을 구분해온 인류의 역사를 돌아본다. 미래에는 AI의 성격 결정권을 쟁탈하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까.

 

책 속에 등장하는 천자문 속 문장들은 우주의 속성을 자연스레 끌어온다. 가끔 우주를 상상하면 몸이 붕 뜨는 것 같다. 검고 검은 고요의 세계. 소리조차 전달되지 않는 광막한 공간. 독자의 시야는 순식간에 우주로 확장되다 그 안의 인간 존재로 시선이 머문다.

우주 사이에서 밀고 당기는 천체들의 힘을 상상한다. 색에도 넓이가 있다면 가장 넓은 색은 검은색이 아닐까. 블랙홀인양 모든 존재들을 흡수하니까. 이미 우주 자체가 거대한 블랙홀인지도 모른다.

밤의 하늘이 본질에 가깝다는 옛 중국인들의 생각에 공감한다. 낮에는 태양의 강렬한 빛 때문에 우주의 본모습이 가려진 거라는 문장을 읽으며 태양빛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안대를 상상한다. 습관적으로 하늘 천, 따 지를 외칠 때만해도 천지현황의 의미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건만.

우주의 대부분은 그냥 텅 비어있다. 원자도 마찬가지이다. 세상은 프랙털의 중첩인걸까. 우주 안에서 별들을 중심으로 공전하는 크고 작은 천체들이 얼핏 원자핵 주위를 도는 전자들과 흡사해 보인다. 전자구름으로 모호하게 표현하더라도 거시적으로 바라보면 비슷한 느낌이다.

무해하고 장엄한 카오스라는 작가의 문장이 마음에 들어온다. 열역학 제2법칙이 지배하는 거대한 우주. 헝클어진 채 아무 일도 없던 듯 수많은 삶과 죽음을 품는다. 질서를 세워도 무너뜨리는 거대한 힘이 담긴 대상이다. 지구의 시간과 우주의 시간을 언급하는 작가를 따라가며 그 안에 존재하는 인간의 시간을 생각한다.

 

전체 블록을 설정하고 Ctrl+C 키를 누를 때마다 숨을 멈춘다. 손가락 하나 잘못 놀리다가는 1초 만에 망하기 때문이다. 삭제가 간단해지는 세상이다. 지우개가 왕복하는 시간만큼 느리게 삭제되던 시절을 건너 Backspace 키나 Del키 하나로 순식간에 삭제되는 시대에 서있다. 글을 쓰는 동안 나만 아는 이야기는 우주에서 태어나고 죽는 존재들처럼 탄생과 소멸을 반복한다. 보고 싶지 않은 것들을 간단하게 보내버릴 수 있는 미래, 선택받은 소수가 원자핵인양 세상을 조종하고 나머지 존재들이 전자처럼 떠도는 세상이 펼쳐질까.

삶은 평생 나를 바라보는 여정이다. 매순간 나를 바라보기 위해 초점을 맞추는 과정으로 채워진다. 지금 이순간도 나의 마음은 다양한 환경의 자극에 반응하며 01사이를 오간다. 운전석 앞 유리에 그려진다는 내비게이션처럼 마음이 색깔 있는 홀로그램으로 펼쳐진다면 어떨까.

영원하지 않은 것을 보고 덧없음을 느끼던 때도 있었다. 진시황이 불로초를 구하는 데 성공했다면 삶이 행복했을까. 육체를 옷처럼 바꿔 입고 데이터로 지속되는 삶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영원한 삶과 영원하지 않은 삶 중 어느 쪽이 더 의미가 있을까. 몇 년이 지나도 그대로인 조화보다 며칠 만에 져버리는 생화가 지금의 내게는 더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한계는 절실함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이 예정되어 있다면 지금 이 순간 내 앞에 있는 사람과 나의 감정이 유일한 의미로 절실해지리라. 절실한 순간을 촘촘하게 건너온 마침표는 또 다른 시작의 스위치로 작용할 테니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작별인사의 의미를 여기서 찾아도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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