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서 오세요, 휴남동 서점입니다
황보름 지음 / 클레이하우스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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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 냄새는 나무 냄새를 닮아서 좋다. e북보다는 만질 수 있는 종이책을 좋아하는 이유다. 닿을 수 없는 우주인 듯 까마득한 디지털 말고 손끝으로 느껴지는 나무의 감촉을 좋아한다. 편안하게 책을 둘러볼 수 있는 서점이라는 공간이 이래서 좋다. 서점에서 책과 책 사이를 거닐면 숲에 들어와 있는 듯하다. 편안하다. 서점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하나둘씩 사라지더니 이제는 동네에 하나 찾아보기 힘들다.

처음부터 완성된 건축물로 둘러싸인 공간은 없다. 기초공사를 하고 기둥을 세우고 자재와 자재를 연결하는 과정이 반복되어야 비로소 물리적인 공간이 만들어진다. 건축자재가 만드는 공간이 물리적이라면, 공간이 담고 있는 정서는 화학적이다. ‘몸이 긍정하는 공간, 나 자신으로 존재하는 공간, 나를 더 좋은 사람으로 만드는 공간’. 내게 이런 공간이 있던가. 황보름 작가는 이런 공간을 소설에 담는다. 상상만으로도 숨이 탁 트인다.

공간의 정체성은 물리적인 요소와 화학적인 요소와의 시너지로 결정되는 듯하다. 드나드는 사람들 사이의 케미가 조화로운 공간은 따뜻하면서도 향긋하다. 책에 소개된 킨(Keane)의 앨범 <호프스 앤드 피어스>를 찾아 들어본다. 산책하듯 책 속을 걸어간다. 나무 냄새가 나는 공간으로 둘러싸인 상상을 한다. 첫 장을 넘겼을 뿐인데 마음이 느른해진다. 시선도 마음도 모든 감각이 이완된다.

 

소설어서 오세요, 휴남동 서점입니다는 작가가 꿈꾸는 화학적 공간에 관한 이야기이다. 공간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그린 책이다. 서점을 매개로 등장인물들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개개인의 삶에 담긴 마음의 공간이 변화하면서 그들 사이의 관계로 채워지는 공간을 완성한다.

일에 지친 주인공 영주가 하던 일을 그만두고 휴남동 서점을 만들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등장인물들은 모두 무언가에 지친 사람들이다. 사람에 지치고, 관계에 지치고, 사회에 지치고, 삶에 지쳐있다. 이들은 말없이 기다려주고 지켜봐 주면서 마주 선 존재 그대로를 긍정해준다. 작가는 이들 사이의 대화와 심리변화를 통해 일과 글과 삶의 본질에 접근한다.

좋은 책에 대한 소설 속 정의가 마음에 남는다. ‘삶을 이해한 작가가 쓴 책, 작가의 깊은 이해가 독자의 마음을 건드린다면, 그 건드림이 독자가 삶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면’ 좋은 책이라고. 작가가 엄청난 내공으로 삶을 이해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어느 누가 삶의 모든 면모를 이해하겠는가. 100년 가까이 오랜 시간을 걸어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으로 흘러가는 광대한 우주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이 책은 좋은 책이라고 말하려 한다. 적어도 글쓰기와 일하기와 인간관계에 대하여 깊이 고민하여 애틋하기까지 한 작가의 마음이 묻어나오기 때문이다. 그 마음이 고스란히 전달되어 나의 심장을 뛰게 하였기 때문이다.

 

소설을 읽을 때면 힘 하나 들이지 않고 다른 세계로 여행을 온 것 같아 마냥 신이 난다는, 자신만의 정서에서 벗어나 타인의 정서에 다가가게 해줘서 소설이 좋다는 주인공을 보며, 소설의 매력을 생각한다. 예전의 나는 소설이란 장르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현실감이 없어서, 잡을 수 없는 허상을 향해 시선을 준다는 점에서 거부감이 있었다.

소설은 허구다. 한데 소설이 그 어떤 다큐멘터리보다 현실적으로 다가오는 때를 종종 만났다. 소설 속 이야기가 다가와 내 삶의 변화가 이루어지는 경우이다. 그 순간 종이에 새겨져 있던 평면적인 문장은 생명력을 얻는다. 꿈틀거리는 현실이 되어 나를 통해 살아난다. 소설을 현실로 구현하는 건 이런 면에서 독자에게 달려있는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관점이 서서히 달라졌다.

이야기 속 이야기. 러시아 인형 마트료시카처럼 책 안에 담긴 책들에 대한 소개가 자연스레 소설 속 등장인물의 서사와 연결되어서 좋았다. 소설과 책 소개.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은 기분이다. 점점 이야기가 좋아진다. 결국 세상은 이야기로 가득한 게 아닐까. 나의 이야기이거나 당신의 이야기이거나 혹은 나와 당신의 사이에 있는 이야기이거나.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는 관심이 없다. 아이러니한 건 그러면서도 다른 이들의 이야기를 좋아하기도 한다는 점이다. 이야기의 색채가 자신과 얼마나 닮아있는가에 따라 저마다 공명하는 걸까.

 

거울 보듯 나를 자꾸 들여다보게 하는 책이다. 나의 일과 나의 글, 주변인들과의 관계, 현재와 미래를 자꾸 들여다보게 되었다. 즐겨보던 프로그램이 끝나면 마음이 리셋되는 것 같다는 주인공의 생각에서 내가 드라마를 좋아하는 이유를 발견한다. 계속 삶을 리셋하고 싶은 욕구가 표출된 걸까.

스펙을 쌓는 과정을 단추에 비유한 내용에 마음이 아프다. 단추는 있는데 끼울 구멍이 없다는 말에 깊은 공감이 가 고개를 끄덕인다. 포기를 한 것이 아니라 그 길을 벗어나겠다는 선택을 한 것 뿐이라는 말이 멋지다. 무기력이 느껴지지 않아서, 주체적인 삶을 향한 굳은 심지가 보여서이다.

통제 가능한 시간 안에서만 과거, 현재, 미래를 따질 것, 지금 이 순간에 완전히 존재할 것, 누군가를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사는 삶보다 내가 살고 싶은 삶을 사는 게 더 맞다는 내용에서 힘을 얻는다. 짐이 무거우면 잠시 내려놓거나 덜어내면 된다. 감당할 만큼의 짐만 들고 걸어가면 되는 거다. 감당하지 못할 짐을 아등바등 움켜쥐고 있는 건 욕심이 아닐까.

희망을 얘기하는 작가의 시선이 좋다. 단춧구멍이 없는 옷에 대한 해답을 이렇게 제시할 줄 몰랐다. ‘옷을 바꿔 입었지. 그런데 그 옷에는 구멍이 먼저 뚫려 있더라. 구멍에 맞게 단추를 만들었더니 잘 꿰졌어.’ 순간 코끝이 찡했다. 모두가 같은 옷을 입거나 똑같은 단추를 지니고 있을 필요는 없다. 나에게 이쁜 단추를 나만의 스타일로 달고 다니면 그만이다.

 

마음이 가까워지는 과정을 이리도 담백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야하지 않으면서 설레는 느낌이 뭉클하다. 두 주인공 사이에 흐르는 공기가 부드럽게 다가온다. 풍수지리에 의하면 무의식은 본능적으로 내게 좋은 기와 안 좋은 기를 구별한다고 한다. 간혹 까닭 모를 느낌이 오가는 걸 보면 맞을 때도 있는 듯하다.

대화가 잘 통하는 사람을 만나면 둘 사이에는 바람이 흐른다. 마음의 결이 일치하면 투명한 흐름이 만들어져 기분 좋게 출렁인다. 그 순간 두 사람의 삶에는 마법이 걸린다. 넘기 어렵던 산이 후 불면 날아가는 먼지처럼 순식간에 쪼그라든다. 향긋한 비눗방울 안에 들어간 듯 둥둥 마음이 가벼워진다.

책 읽는 것 같아요. 지금 이 시간이요. 우리가 책 속을 걷는 거 같아요.” 출장 후 잠시 들른 초록의 산책길에서 함께 걷던 동료가 봄 햇살을 닮은 표정으로 말한다. 좋은 사람이 주변에 많은 삶이 성공한 삶이라는 책 속의 문장이 고리처럼 연결된다.

어떤 사람이 좋은 사람일까.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바라봐주는 사람, 나의 에너지와 공명을 일으켜 삶의 불꽃을 활기차게 되살려주는 사람,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존재할 수 있도록 시간과 공간을 따스하게 데워주는 사람. 좋은 사람으로 둘러싸인 공간은 상상만 해도 행복감을 준다. 열심히 살고 싶다. 그런 사람을 만나기 위해, 스스로도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집 안에 있는 물건의 70%가 불필요한 물건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요즘 나는 정리 삼매경에 빠져있다. 아름다운 쓰레기를 조금씩 정리하는 중이다. 지금은 쓰지 않지만, 내일도 쓰지 않겠지만, 언젠가는 쓸 것 같아 자리를 차지하던 물건이 의외로 많다. 지금 쓰지 않고 내일도 쓰지 않을 거면, 그 언젠가도 쓰지 않으리라는 걸 깨닫는다.

잘 산다는 건 잘 정리하면서 사는 거라는 걸. 두려워서, 눈치 보여서, 후회할까 봐 정리하지 않고 넘어가는 경우가 얼마나 많아.’ 소설 속 대화를 떠올리며 물건을 정리한다. 인간관계도 마찬가지 속성이 있는 듯하다. 사람이 물건은 아니지만, 전화번호 주소록을 정리하면서 비슷한 속성을 본다.

오늘 연락하지 않겠지만, 언젠가는 연락할 것 같아 남겨두었던 사람들의 전화번호를 삭제했다. 오늘 연락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내일은 연락하고 싶을까. 아마도 나의 삶은 전화번호를 삭제하기 전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으리라. 한결 가뿐해진다.

가족과 함께 할 때 불행하다면, 한 번 가족이라고 해서 계속 가족일 필요는 없다는 문장이 후련하다. 삐걱거리는 가족관계임에도 불구하고 의무감과 사회적인 시선에 묶여 스트레스를 받던 지인에게 말해주고 싶다. 그러므로 지금 할 일은 오늘 연락하고 싶은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것,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사람을 무심코 흘려보내지 않는 것.

 

해를 바라보며 퇴근하는 것이 소원이던 나날이 있었다. 주섬주섬 퇴근 후까지 일이 이어지던 시절이다. 꾸역꾸역 모여들던 일에 질식해버릴 듯했다. 일에 깔려 소진되는 듯하여 종종 절망감을 느꼈다. 나는 무엇을 위해 일을 그리 열심히 했던 걸까.

나만 힘들면 된다는 생각이 잘못이었다. ‘일하는 재미는 적당한 일의 양에 달려있다는 것, 일이 사람을 소진시키면 안된다는 것, 남을 위해 일하는 순간에도 나 자신을 잃지 않아야 한다는 것’. ‘일은 밥 같은 거였어요. 매일 먹는 밥. 이제 소박한 밥을 정성스레 먹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나를 위해서요.’ 누구보다 힘들면 안 되는 대상의 1순위, 의미 있는 일의 기준점은 나여야만 했다.

퇴근 후의 시간으로 하루의 무게중심을 바꾼 지 얼마 되지 않는다. 나의 낮은 밤을 위해 존재한다. 집에까지 일을 가져오고 일이 남으면 잠이 오지 않았건만. 요즘은 퇴근 후에는 학교 일을 내려놓으려고 노력한다. 처음에는 어색하더니 마음이 가벼워졌다. 나만의 시간이 좋아서, 혼자 있는 시간이 너무 좋아서 낮의 시간은 견딜 만한 것이 되었다.

만조는 하루 중에서 해수면이 가장 높아지는 때이다. 나의 만조는 퇴근 후 커피숍에 앉아있는 시간이다. 하루 중 이 시간만 확보하면 그런대로 살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라는 문장에 맞장구를 친다. 온전히 나 자신으로 존재하는 시간이라는 말에도 공감하며.

 

자주 가는 커피숍의 아르바이트생으로부터 쪽지와 두부 과자 선물을 받은 적이 있다. 나의 모습을 보고 많은 걸 배웠다고, 나처럼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너무 멋있으시다고. 그저 나를 위한 시간을 보냈을 뿐인데, 퇴근 후 이른 저녁을 먹고 나와 책을 읽고 독후감을 쓰고 시를 쓰고 교재 연구를 했을 뿐인데.

나의 행동과 일상이 누군가에게 바라볼 수 있는 무언가를 줄 수도 있다니 기분이 묘했다. 비언어의 효과는 언어보다 영향이 크다는 생각이 든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정직한 파도로 직진해선 바라보는 사람의 심장에 닿는 듯하다.

어떤 대상에 관심을 기울이다 보면 결국은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게 된다는 문장에 공감한다. 나에게 쪽지를 건네었던 학생도 결국 나의 모습을 통해 스스로 삶을 들여다본 셈이 아닌가. 서로 다른 종교라도 최상의 경지에서는 하나로 이어지는 것처럼, 관심을 기울이는 대상에 대해서도 비슷한 속성이 적용되나. 계속 대상을 향해 걸어가다 마주치게 되는 사람은 자기 자신, 한 사람이니까. 글을 쓰든, 그림을 그리든, 음악을 하든, 예술을 하는 궁극적인 목적도 나를 바라보기 위함이 아닐까.

책 속에 나오는 꽤 많은 문장을 따라 적었다. 등장인물을 통해 작가가 독자에게 하는 말을 그냥 흘려보내고 싶지 않았다. 옮겨 적은 글씨를 바라보며 다시 나에게 말을 걸었다. 책은 기억이 아니라 몸에 남는다던가. 나의 몸 어딘가에 남아있을 문장이 마음의 외투가 된 듯 든든하다.

 

문장은 글로 만든 화살이다. 다른 이의 심장을 향하는 화살은 정확한 과녁을 가리켰을 때 비로소 시위가 당겨져 날아간다. 그리곤 찌르르 심장을 울린다. 이 책의 많은 문장이 나에게 그러했듯이. 내 생각과 같은 문장을 여러 번 마주쳤을 때 뜻이 맞는 친구를 만난 듯 반가웠다.

작가님과 작가님의 글은 얼마나 닮았나요?’ 문장을 보는 순간 찔끔한다. 나의 글은 얼마나 나와 싱크로율을 보이는가. ‘작가의 목소리라는 여섯 글자도 며칠 동안 마음 언저리를 맴돈다. 좋은 문장이 목소리를 분명하게 드러내 준다는 문장에 공감한다. 나의 글에는 나의 목소리가 담겼는가. 다른 이의 목소리를 따라 하는 재미없는 앵무새가 되는 순간은 없는가. 매 순간 경계하며 문장을 쓰리라 다시금 마음을 다진다.

주인공 영주는 유럽의 독립서점을 둘러보고 와서 책방의 정체성을 정립한다. 모든 책방이 개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 개성은 책방을 운영하는 주인에게서 나온다는 점, 개성을 만드는 데 필요한 건 용기라는 점, 주인의 용기가 손님에게 가닿기 위해 필요한 건 진심이라는 점.

글에도 적용해본다. 글에도 자신만의 색채가 필요하다. 세상 어디에도 없는 색채를 만드는 건 진심을 담은 올곧은 용기이리라. 이런 문장을 만들고 싶다. 나만이 쓸 수 있는 창조적인 글을 이 세상에 꺼내 보이고 싶다. 나의 문장을 주도적으로 끌고 나가는 모습을 상상하니 설렌다.

 

대형 유명 출판사에서 출간된 책이면 서툰 문장이어도 실제보다 괜찮은 책으로 보이는 경우가 있다. 이 책은 정반대에 속한다. 발행인과 편집자가 동일인이다. 독립서점인 휴남동 서점처럼 독립출판사 느낌이다. 추천 글도 없고 이 출판사에서 출간한 다른 책 광고도 없다. 이런 유형의 책이 좋다. 겉표지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 온전하게 작가의 문장으로만 채워진 책 말이다.

읽고 싶은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는 작가의 말에 살짝 소름이 돋는다. 보고 싶은 문장들이 눈앞에 마술 글씨처럼 나타나서 이리도 공감이 갔던가. 나도 내가 읽고 싶은 이야기를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출발선에서 대기하는 달리기 선수처럼 가슴이 뛰었다.

작가라는 직업에 대한 물음에 결론을 내지 못했던 답을 발견한다. 진심을 담아 쓴 글이 누군가의 심장을 울린다면 그게 바로 작가라는 것을. ‘솔직하고 정성스럽게’. 제대로 잘 쓴 글을 정의하는 황보름 작가를 보며 글을 쓰는 마음을 정돈한다.

산들바람 부는 대청마루에 앉아 담백하고도 정성스레 차린 밥상을 받은 기분이다. 상추, 풋고추, 된장찌개, 쌈장, 오이와 밥공기에 묻은 밥풀까지 긁어먹은 다음 누룽지에 숭늉까지 마신 듯 개운하다. 작가가 만든 공간을 지나오니 멋진 화살을 만들고 싶어진다. 나만의 문장으로 만든 화살을 들고 나 자신으로 존재하는 공간을 둘러보는 상상을 한다. 홀가분하면서 뭉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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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현림의 미술관에서 읽은 시 - 작가의 젊은 날을 사로잡은 그림 하나, 시 하나
신현림 지음 / 서해문집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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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가지 예술분야를 아우른다는 건 얼마나 멋진 일인가. 한 가지로도 일품요리로서 충분하지만, 어울리는 두 장르는 밥과 반찬인 듯 조화롭다. 예술이라는 장르의 경계를 생각한다. 그림과 시는 분명 다른 장르이지만 표현 방식의 차이만 있을 뿐 근본적으로는 차이가 없는 지도 모른다. 색과 색의 경계선을 구분 지을 수 없도록 채색한 스푸마토 기법의 <모나리자>처럼 내면세계를 그린다는 시각에서 보면 경계가 허물어진다.

작은 박물관 하나를 통째로 선물 받은 느낌이라는 이해인 수녀, 한 편 한 편의 글들이 주파수를 제대로 맞춘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처럼 한 점 잡음 없이 마음을 일렁이게 한다는 황인숙 시인, 미술은 말이 그친 자리에서 피어난다는 박영택 미술평론가의 추천 글을 보니 마음속에 설렘이 피어난다. 작가의 세계관을 알고 싶어 인터넷을 검색한다. 자신이든 남을 위해서든 영혼의 쓸모 때문에 시를 쓰는 거라는 생각에 공감하며 이제부터 읽을 책의 분위기를 상상한다.

우리들은 무언가와 이어지기를 바라며 그 이어짐이 사람과 사람일 때 더없이 따스하다는 서문의 문장이 모닥불처럼 온기를 준다. 명화와 시 속에서 깊고 뜨겁게 숨쉬기를 바란다는 그녀의 의도대로 책 장의 징검다리를 그런 호흡으로 건널 수 있을까.

 

신현림의 미술관에서 읽은 시는 그림과 시의 콜라보이다. 작가의 젊은 시절을 데워주었던 그림과 시를 연결한 에세이다. 책의 제목처럼 주 무대는 다섯 개의 전시실로 이루어진 미술관이다. , 절망, 사랑, 고독, 위로 등 다섯 가지 주제에는 정서의 색채별로 나열된 그림과 시가 매칭 된다.

수록된 시의 종류는 다양하다. 화가가 드러내고자 하는 감성과 연장선상에 놓이는 듯 시가 연결되기도 하고, 동 제목의 시가 놓이기도 한다. 그림과 시를 양팔저울에 놓고 질량을 잰다면 그림 쪽으로 중심이 기운다. 시는 그림이 등장하는 순간에 흐르는 BGM 효과를 낸 달까. 작가가 고흐와 브뢰헬의 작품을 좋아하는지 이 두 화가의 작품은 두 점씩 수록되어 있다. 그림에 대한 그녀의 애정은 사소한 요소에도 드러난다. 화가에 대해서는 출생과 사망이 표기되어있지만, 시인에 대해서는 푸시킨과 도연명을 제외하고는 이름만 실려 있다.

한적한 시골에 자그마한 미술관을 짓고 수집한 그림을 전시한 큐레이터가 우연히 들른 나그네에게 소장품을 하나하나 설명해주는 장면을 상상한다. 지극히 주관적인 책이다. 한 작품 한 작품을 지날 때마다 작가가 계속 말을 거는 듯하다. 나는 이런 느낌을 받았는데 당신은 어떤가요? 나는 이 작품에서 슬픔을 보았는데 당신에게도 그게 보이나요? 하고.

 

노랑, 분홍, 카키, 스카이블루, 보라색. 각 장을 시작하는 페이지의 색깔이다. 간지처럼 끼워진 색깔의 장을 다섯 손가락에 끼워 한꺼번에 바라본다. 조화를 이루는 파스텔 톤의 무지개가 떠올라 마음이 안정된다.

그림 한 쪽, 시 한 쪽에 더해진 짤막한 해설은 대부분 한 쪽을 넘지 않는다. 그림과 시에 대한 개입을 최소화하려는 노력이라 판단한다. 작가는 그림과 시를 연결 짓는 것으로 8할의 역할을 한다. 예술이 뿜어내는 향기를 호흡하는 건 독자의 몫이다. 때문에 다음 작품으로 넘어가기 전에 한 호흡을 멈추게 된다. 여운을 음미하며 떠오르는 생각을 정리하게 만들어준다. 한 점의 작품에 네 쪽씩 할당된 느낌이랄까. 그림--작가-독자의 연결고리가 자연스레 만들어진다.

김정희의 <세한도>에 숙연해지는 신경림 시인의 <다시 느티나무가>가 연결되며 누구나 인생의 세한도가 하나쯤은 있을 거라는 작가의 멘트가 이어진다. 그저 버틸 수밖에 없는 날들, 춥고 곤궁한 날들을 언급하는 말에 대학교 2학년 즈음의 장면이 불쑥 떠오른다. 식당 서빙을 하다 쓰러져 주방의 뒷방에 누워 눈물을 흘리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담긴 날이다. 그때가 50대 어머니의 세한도가 아니었을까. 나의 세한도는? 그저 버틸 수밖에 없었던 30대 정도였던 듯하다.

 

칸딘스키의 <푸른 하늘>과 푸시킨의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앞에서 오래 서성인다. ‘마음은 미래에 살고 / 현재는 언제나 슬픈 것이라는 문장이 따스하다. 그림에 담겨 꿈틀거리는 대상에게서 자유로운 생명체가 연상된다. 마음이 산뜻해진다. 언젠가는 날아오를 수 있다며 토닥토닥 부드러운 깃털 같은 위로를 준다. 드넓은 하늘의 색채와 어우러지면서 풍선처럼 둥둥 미래의 행복을 보여주는 것만 같아 편안해진다.

아무도 걸어가 본 적 없는 / 그런 길은 없다 // 나의 어두운 시절이 / 닮은 여행을 하는 / 모든 사랑하는 이들에게 / 도움 될 수 있기를’. 나의 글이 시의 문장과 같기를 바라며 베드로시안의 <그런 길은 없다>에 나오는 문장에서 위안을 받는다.

황지우 시인의 <너를 기다리는 동안>은 볼 때마다 설렌다.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 내 가슴에 쿵쾅거린다 /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 (중략) /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 너였다가 /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 (중략) /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 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언제 이토록 두근거리는 시를 쓸 수 있을까. 넘사벽의 시 앞에서 잠시 부러워한다.

 

몬드리안의 <빨강, 파랑, 노랑의 구성>을 보는 순간 마음이 정갈해진다. 산다는 건 번잡한 물건들, 온갖 감정의 피로를 하나하나 정리하는 단순함에 그 본질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작가의 해설에 공감한다. 요즘 물건을 하나둘씩 정리 중이다. 미련이 묻은 아름다운 쓰레기를 간택할수록 속이 시원해진다. 몸과 마음이 별개가 아니듯 감정도 마찬가지인가. 단순함에 깃든 아름다움에 매력을 느낀다. 과학자들도 이런 심정으로 자연현상을 공통적으로 아우르는 규칙을 발견하기 위해 노력하는 거겠지.

골비츠의 그림 <죽은 아들을 껴안고 있는 어머니>는 보는 순간 전율이 인다. 흑백의 선들이 꿈틀거리면서 어머니의 절망을 뿜어낸다. 선의 음영만으로 이리도 절절한 마음을 표현할 수 있다니! 파울클레의 그림 <황금물고기>는 빛나는 햇살을 고스란히 옮겨놓은 듯하다. 고흐의 붓 터치가 좋다. <자고새가 있는 밀밭><별이 빛나는 밤>.

클림트의 <키스>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그림이다. 실용성을 추구하는 내가 거의 유일하게 감상의 목적으로만 곁에 두는 아이템이다. 모든 날들이 좋았던 도깨비님처럼 그림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들이 그저 좋다. 지인들에게 어필한 결과, 꽂지도 않는 머리핀, 쿠션, A4용지만한 종이액자그림, 2단 우산, 3단 우산, 머그컵을 선물 받아 소장중이다. 아이돌 굿즈를 모으는 심정이 이와 비슷할라나.

 

깊고 뜨거운 시간을 보냈다. 시처럼 읽히는 그림이 있는가 하면 그림인 듯 생생한 풍경을 펼쳐 보여주는 시도 있었다. 화가와 연결되며, 시인과 연결되며, 작가와 연결되며, 때로는 과거의 나와 연결되며 따스한 시간을 호흡했다. 보이지 않는 영혼의 흔들림을 시각화한다는 점에서 모든 예술은 자체로 경이로움이다. ‘어떤 시는 / 우주만큼 / 크다 // 어떤 / 그림은 / 연인만큼 / 다정하다는 뒤표지의 문구처럼 예술작품 너머의 마음들과 연결되다보니 한동안 잊고 있던 나의 심장 소리가 들렸다.

그림들을 보니 사진과의 차이점이 보인다. 사진도 빛과 구도에 따라 다양하게 표현되는 장르이지만 그림은 내면세계를 보다 역동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도구인 듯하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자연스럽게 몸과 마음을 연결하고 때로는 영혼의 안팎을 한꺼번에 겹치게 만들 수도 있으니까.

새로운 풍경을 보면 상쾌한 공기가 스며들어와 숨을 한껏 들이마시게 된다. 마지막 책장을 덮고 나니 마음이 후련해졌다. ‘가슴이 답답하다는 건 고인 물처럼 꼼짝없이 마음이 정체될 때 그렇다. 차라리 한껏 흔들리고 나면 의외로 쉽게 정리될 때가 있다는 작가의 생각에 공감한다. 예술작품을 접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으리라. 새로운 그림이나 글이나 음악은 가슴을 향해 이색적인 숨결을 불어넣어주니까. 예술작품은 그렇게 한껏 우리를 흔들어놓으며 영혼을 데워주는 게 아닐까.

 

 

p58 그림 <빨강, 파랑, 노랑의 구성>의 색채: 보라색파란색

p15, p182의 작가 이름: 쿠스타프 클림트구스타프~

p269 1: 산모통이산모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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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집 식물상담소 - 식물들이 당신에게 건네는 이야기
신혜우 지음 / 브라이트(다산북스)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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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팡이 짚은 어르신인양 시들시들하다가도 좋아하는 환경을 만나면 금세 청춘 모드로 돌변해버리는 존재. 식물만큼 환경의 변화에 민감하게 교감하는 대상이 있을까. 거대한 녹색 날개를 펼친 공작새처럼 창밖에서 하늘거리는 나무를 바라본다.

커피숍의 2층에 있는 이 자리를 좋아하는 이유는 하나다. 글을 쓰다 간간이 고개를 들면 초록빛이 바로 눈으로 들어오기 때문이다. 햇살이 묻은 양 군데군데 노랑이 눈에 띈다. 머지않아 갈색비가 내리면 겨울잠을 자겠지.

동물이 직진의 삶을 살아간다면 식물은 원형의 삶을 반복한다. 극서의 열대지방이나 극한의 냉대지방에서는 삶의 방식이 다르겠지만 나는 사계절 속에서 살아가는 다이내믹한 식물들이 좋다. 새눈이 트고 잎이 자라고 꽃을 피우다 잎을 떨구고 다시 삶을 준비하는 과정은 인간의 일생의 축소판 같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식물의 삶은 반복된다.

삶의 사이클을 품은 채 몇 천 년 동안 한 자리를 지켰다는 나무를 보면 경외감을 느낀다. 장수하는 거북이나 여타 동물들도 인간의 수명을 넘어선다지만 식물의 그것에 미치지는 못하는 듯싶다. 어쩌면 식물은 그 옛날 진시황도 이루지 못한 영생에 가까운 삶을 살아가는 게 아닐까.

 

이웃집 식물상담소는 식물을 사랑하는 식물학자의 에세이다. 식물학자라면 당연히 식물을 사랑하는 게 아니냐고? 모든 학자가 연구대상을 사랑하는 건 아니다. 냉철하게 학문적인 대상으로만 보거나 그 분야에 재능이 있는 사람들도 있으니까.

신혜우 작가에게 식물은 더불어 살아가는 친구에 가깝다. 객관적인 독자로서 이렇게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중간 중간에 그려진 식물 그림 몇 장만 보면 절로 알게 된다. 작가의 마음이 투영된 그림에 초코파이 CF가 겹쳐진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진다. 화가이기도 한 그녀의 그림에서 애정이 물씬 풍긴다.

4개의 부로 들어가는 각각의 출입문에는 덩굴처럼 그려진 표지 그림의 변주가 있다. 1부는 열매, 2부는 꼬투리와 꽃, 3부는 단풍과 잎, 4부는 무로 돌아간 식물과 다시 초록 잎이다. 오른쪽과 왼쪽 아래 부분의 그림이 조금씩 다르다는 점을 알아채며 섬세한 표현력에 미소를 짓는다.

겉표지에 드러난 첫 인상은 결이 고운 아름다움이었다. 따스하고 잔잔한 동화를 연상했다. 인상적이었던 건 <서문> 직전에 그려진 도깨비쇠고비였다. 말라비틀어진 이파리를 어찌나 정성스레 그려놓았던지. 이 책에서는 아름다움을 넘어 흙냄새, 땀 냄새를 맡을 수도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예상이 맞았다. 그림에 끌려서 들어갔다가 내용에도 못지않은 매력이 있음을 깨닫는다. 책의 제목처럼 이 책에는 식물을 소재로 하여 찾아온 사람들과 상담한 이야기가 주로 담겨있다. 그들의 대화는 식물로 시작하여 삶으로 마무리된다. 소재가 식물일 뿐이다. 상담에서 오고가는 주된 정서는 대상에 대한 올바른 사랑이다.

사랑에 바르고 틀린 게 있겠냐마는 과도한 사랑은 상대에게 상처를 입힐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 식물은 우리에게 잘못된 사랑의 결과를 온몸으로 보여준다. 과하게 물을 주었을 때 썩어가는 뿌리로, 과하게 편안한 장소에서는 아름다운 꽃을 절대 피우지 않는다.

집에만 오면 얼마 지나지 않아 죽어버리는 식물을 보며 나의 똥 손을 탓했으며 꽃이 피지 않아도 원래 그러려니 했다. 집에 놔두었다가는 말라비틀어질 거라는 생각에 식물을 위한답시고 아파트 화단 한 구석에 슬그머니 심어둔 적도 있다. 추운 바깥에서 얼어 죽으리라는 걸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

원래 더 자랄 수 있는 열매 식물이 많다는 작가의 말에 주춤한다. 맞지 않는 환경에 머물 때, 식물은 시크한 초록만을 반복한다. 근근이 버티다 삶을 마감한다. 생명체는 환경과의 상호작용으로 삶을 유지한다는 사실을, 꽃이 피지 않을 때는 이유가 존재함을 언제부터 잊고 있었을까.

 

신혜우 작가의 글에서는 풀 냄새가 느껴진다. 스스로 존재하는 자연 같기도 하고 연약한 듯 보이면서도 강한 내면이 보인다. 아무도 상처받지 않는 글쓰기를 목표로 한다는 작가의 말이 따스한 이불 같다. 나의 글로 누군가 상처받을 수 있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 의식적으로 이런 생각을 하며 글을 쓴다는 사실 자체가 놀라웠다.

책에서는 어린이 상담자들도 많이 등장하는데 그들과의 대화를 보며 교육의 본질을 생각했다. 적합한 환경에서는 모든 식물이 무럭무럭 자란다고 한다. 아이들 안에 있는 잠재력을 끌어내는 게 교육의 본질이니까. 이제껏 나는 얼마나 그들에게 적절한 환경을 만들어주었던가. 식물 이야기를 들으며 다시금 생각이 많아졌다.

좋아하는 일과 잘하는 일 중에 작가는 좋아하는 일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녀의 글을 읽다보면 어떤 일이나 대상을 좋아하는 게 자연스럽고 행복한 일이라는 생각이 강해진다. 두 갈래 길에서 굳이 한 가지를 억지로 선택하려 고민하지 말라고 한다. 접힌 꿈은 언젠가 다시 펼치면 된다고, 접힌 채로도 더 멋진 무엇이 될지 모른다며 긍정적인 희망을 품게 만들어준다. 화가와 식물학자. 두 가지 모두를 포기하지 않은 작가는 결국 독자에게 두 가지를 다 맛볼 수 있는 아름다운 책을 선물한다.

 

책을 읽으며 철렁했던 건 절화에 대한 언급이다. 뿌리가 잘린 식물이 살아갈 수 없다는 건 조금만 더 생각하면 당연히 상상할 수 있는 사실인 것을. 잘린 꽃이 한 번도 살아 있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는 문장이 새삼스러웠다.

꽃집을 지나치다 뿌리가 잘린 꽃을 보면서도 예쁘다는 생각만 해왔다. 관점의 차이가 놀라웠다. 식물을 가까이에 둔 사람의 시선에는 꽃이 그렇게 보이는 거였구나. 식물을 인간이라 상상하며 절화에 대입하니 섬찟하다. 하얀 빛과 연두 빛이 어우러진 소국을 좋아하는데 이제부터 어찌해야 하나 갈등이다. 알고 나서도 마냥 모르는 듯 바라볼 자신이 없어서.

숟가락일까요, 젓가락일까요. 단감 씨앗을 버리기 전에 상담 샘께서 물으신다. 그게 뭔 소리예요? 여유 있게 미소 지으신 샘은 감 씨를 반으로 가르신다. ! 숟가락 모양의 배가 보인다. 싹이 터서 장차 식물로 자라날 부분을 라고 한다. 교과서에 그려진 종자의 구조를 실제로 처음 보았다.

종자의 구조를 얼마나 많이 가르쳤던가. 이론과 실제의 괴리가 느껴져 살짝 무안했다. 감 씨가 반으로 갈라진다는 사실을 새삼 인지한 순간 찌르르 전율이 일었다. 이론과 실제가 다르듯 학문적인 식물과 생명체로서의 그것을 인지한다는 건 분명 차이가 있으리라.

 

식물은 가구가 아니다. 꽤 오랜 시간, 은연중에 식물을 화장대나 침대와 별반 다름없는 사물로 인식해왔다. 식물이 우리와 마찬가지로 숨을 쉬는 존재라는 사실을 잊고 살았다. 하늘거리는 초록 색종이로 만든 조형물정도랄까.

주방 창가에서 키우는 몇몇 식물들이 있다. 화분 안의 식물이 살아있는 생명이라 인지한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어느 날 문득 설거지를 하는데 식물이 숨을 쉰다는 사실이 확 다가오는 거다. 엉뚱하게도 말이 없는 친구처럼 나를 바라본다는 생각이 들자 마음이 따뜻해졌다.

한데 희한하게도 생각이 바뀐 시점부터 서서히 식물들이 생기를 찾아가는 듯했다. 새끼 손톱만한 분홍빛이나 손가락 두 마디 정도의 보랏빛이 주방 창가에서 흔들거리기도 했다. 갈색으로 다 말라비틀어지는 잎을 보아도 절망하지 않게 되었다. 그럴 때가 되었음을, 인내심을 갖고 기다리면 다시 연둣빛 잎을 보여줄 것임을 믿기 때문이다.

책을 다 읽고 나니 작가가 왜 시든 식물을 그렸는지 이해가 되었다. 식물은 정형화된 이론이 아니라 치열한 삶을 살아가는 실제임을 알았던 게 아닐까. 생명으로서의 자연스러움은 잡티 하나 없는 피부에 있지 않음을. 검버섯이나 주름진 얼굴에 시간과 햇살과 바람과 우주의 기운이 고인다는 사실을.

 

 

p140, 2째줄: 대게 대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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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우스터
김호연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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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음을 탐하는 늙음의 이야기. 소설 파우스터의 모티브는 괴테의파우스트이다. 회사 메피스토를 매개로 젊음을 구매하는 노인들이 삶을 조종당하는 젊은이들과 삼각구도로 연결된다. 회사에서 젊은이들의 뇌에 몰래 심은 칩이 안테나 역할을 하며 그들의 경험을 노인들의 장치에 전송한다. 노인들이 안마 의자에 헬멧과 같은 장치를 장착하면 젊은이들의 시각, 청각, 후각 등 모든 감각을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다. 노인들은 자본과 권력을 이용해 의도적인 상황을 만들고 젊은이와 가까운 인물들을 포섭하여 모바일 애완견을 키우듯 젊은이의 삶이 흘러가도록 조종한다.

젊음을 착취하는 노인들을 파우스트’, 젊음을 빼앗기는 청년들을 파우스터라 칭한다. 소설은 파우스터가 파우스트의 존재를 인지하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문을 연다. 주인공이 야구선수라 용어가 생소하여 하나하나 검색해야 했지만 문장의 흡인력은 낯선 허들을 부드럽게 지나도록 만든다. 쫓고 쫓기는 두뇌싸움과 그들의 밀당이 블록버스터급 영화처럼 마지막까지 긴장감 있게 펼쳐진다.

묵직한 태풍처럼 휘몰아치는 책이다. 탄탄한 구성과 두께의 중압감을 넘어서 진공청소기 같은 전개가 펼쳐진다. 무방비한 상태로 이런 책을 만나면 한동안 멍하다. 탁월한 문장력과 속도감이 느껴지는 내용에 압도당한다. 참 좋았다며 단순하게 표현하고 싶지 않아 의욕적으로 노트북 앞에 앉는다. 마음을 글로 표현하는 데 어려움을 느끼는 편은 아니건만 상대적으로 초라해 보이는 나의 문장에 주눅이 든다. 며칠 만에 후다닥 읽어놓고선 멈칫거리기를 반복하니 리뷰는 보름이 넘도록 진척이 없다.

소설 불편한 편의점을 읽었을 때도 비슷했다. 그나마 짧은 분량에 일상의 소소한 풍경을 그린 이야기라 낄낄대면서도 뭉클한 느낌을 가까스로 적었건만. 생과 사로 이어진 길목에서 반드시 지나야 하는 늙음이라는 심오한 주제라서 갈피를 잡지 못하는 걸까. 고민 끝에 늙음이 끄집어낸 신변잡기스런 생각들을 두서없이 나열하기로 한다. 끝내 소설의 깊이를 포용하지 못하는 나의 한계를 인정한다.

 

요즘 자꾸 예뻐지는 인간이 있다. 이미 충분하여 더 이상의 업그레이드는 필요 없건만 30년은 더 젊어 보인다는 경이로운 말까지 듣는 지경에 이른다. 당신의 짐작이 맞다. 나비종의 글을 몇 번 접해보면 이 인간이 종종 제 잘난 맛에 산다는 사실을 절로 알게 될 테니. ‘젊다예쁘다는 동의어가 아니라고? ~ 젊음은 자체로 아름다움임을 몇 십 년 후의 당신은 절감하리라. 사회성 멘트 10년을 DC 한다 해도 찬란한 청춘으로 돌아간 듯 마음이 통통 튄다. 지난달까지만 해도 퇴행성관절염에 고지혈증에 만성위염의 삼재를 짊어진 노인 모드였기에 최근의 변화는 자체로 경이롭다. 무슨 일이 있었던가. 일상을 되감기한다.

첫째, 듣는 음악이 변했다. 이용권의 기한이 만료되는 바람에 연장과 신상을 고민하는 과정에서 잠시 예전에 저장했던 음악을 듣고 있다. 30대 때 듣던 노래들이다. 재생될 때마다 각각의 음표는 지나간 장면들을 매달고 넘실거린다. 서툰 모습 그대로도 의미 있고 눈부시던 시절로 종종 타임 슬립 했다.

둘째, 입던 옷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자연스레 그 옷을 입던 모습이 떠올랐다.

셋째, 아이들이 타지에 나가는 바람에 타발적 신혼부부모드가 되었다. 새삼스러운 어색함에서 조금씩 나아간 한 발의 효과가 서서히 쌓임의 미학을 펼치는 중이다. ‘사이좋은 부부 코스프레가 반복되니 코스프레가 빠져버렸다.

넷째, 몇 가지 일들이 BGM으로 깔리니 새삼 머리가 눈에 들어왔다. 희끗한 소금이 올라와 축 늘어진 미역 줄기 같았던 모발 모발. 퇴근길에 불쑥 미용실에 들렀다. 어둑해질 때까지 텅 빈 위를 감당한 보람이 있었다. 볼륨 매직 셋팅으로 다시 부활했다.

다섯째, 이 여세를 몰아 지난 주말에는 몇 년 만에 26년 지기의 집에 놀러갔다. 자잘한 일상의 이야기, 속상했던 에피소드, 예전에 함께 했던 추억들이 이틀 동안 우리를 둘러쌌다. 말줄임표와 침묵이 대화 사이에 끼어들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시간들. 에너지를 완충하고 회춘이 되어 컴백했다.

 

몸이 변하면 마음이 변하는 걸까, 마음이 변하면 몸이 변하는 걸까.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질문처럼 애매하다. 둘 다 명제를 증명할만한 사례가 어느 정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과도한 체중으로 움츠러든 모습을 보이며 사회생활에 어려움을 겪던 사람이 다이어트 성공으로 삶이 180도로 바뀌었다는 경험담은 몸의 변화가 마음의 변화로 이어진 예이다. 실체인 몸은 즉각적으로 변화를 만들거나 확인할 수 있다.

반면 마음의 변화가 만들어내는 몸의 변화는 발현 범위가 상대적으로 좁아 보인다. 사랑에 빠진 이의 얼굴이 예뻐진다든가 마음이 즐거우면 표정이 온화해지는 것처럼 주로 얼굴을 통해 약간의 변화만이 드러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은 듯하다.

<시계 거꾸로 돌리기 실험>은 이러한 편견을 가볍게 깨뜨린다. 1979, 미국 하버드대의 심리학과 엘렌 랭어 교수는 70~80대 노인 8명을 대상으로 흥미로운 실험을 진행한다. 20년 전의 환경을 재현한 고립된 공간을 노인들에게 제공한 다음, 20년 전으로 돌아간 것처럼 집안일을 직접하고 생활하도록 주문한다. 1주일 만에 나타난 결과는 놀랍다. 마음만 청춘으로 돌아간 게 아니라 그들 모두는 시력, 청력, 기억력, 지능, 악력 등 신체 나이가 50대 수준으로 변화한다. EBS<황혼의 반란> 에서도 왕년의 스타 5명을 대상으로 1주일 간 비슷한 컨셉으로 시간 여행을 한 결과 동일한 결과를 얻는다. BBC<더 영 원스>라는 프로그램도 마찬가지의 결과를 보여줬다고 한다.

시간을 되감기한 실험 결과를 해석하는 다양한 의견들을 검색해보았다. 수긍이 가는 해석이 눈에 띈다. 주변의 환경을 변화시키는 것만으로는 효과가 미미하다는 거다. 시간을 거슬러가는 과정에는 매번 함께 하는 사람들이 존재했다는 것. 그들과 상호작용하며 관계를 맺는 것이 중요하다는 관점이다. 최근 나의 젊음이 발현되기 전에도 오랜 친구와의 푸릇한 대화의 시간이 있었음을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젊음과 늙음을 동일한 비중으로 다루니 독자에 따라 두 가지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는 책이다. 젊은이의 입장에 선다면 자유의지에 의한 주체적인 삶에 초점이 맞춰지리라. 노인의 입장이라면 자유의지를 젊은이에게 투영하여 젊음을 맛보려는 삶이 마음에 남을 터이다. 그렇다면 나는? 50대는 애매하다. 젊음과 늙음 사이를 서성이는 어정쩡한 경계랄까.

나는 후자의 입장에 조금 더 오래 머물렀다. 파우스트로서의 삶을 보니 생각이 많아진다. 표면적으로는 파우스트가 파우스터를 노예인 듯 조종하지만 이는 실체 없는 거품처럼 허무하고 안쓰럽다. 대리만족하는 삶이 과연 의미가 있을까. 나의 것이 아닌 젊음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진정한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나. 스스로의 근육 없이 번듯한 목발에 의지하는 걸음으로 언제까지 갈 수 있는가.

책표지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몽환적인 표지 그림이다. 복잡한 나뭇가지 아래 인간들의 옆모습이 보인다. 그림자 작가라는 나현정 작가의 명칭이 생소하여 다른 작품을 찾아본다. 흑백의 뒤엉킨 선들이 시선을 붙든다. 컬러감보다 무채색이 어울리는 작품 세계를 지닌 작가이다. 갈수록 무채색에 끌린다. RGB 0,0,0255,255,255 사이의 그러데이션이 인간의 섬세한 감정을 재현하는 것 같아서이다. 몸과 마음의 변화 역시 무채색 못지않게 섬세하니 책의 내용에 적절한 그림이다.

몸과 마음은 본디 하나라서 일란성 쌍둥이와 같은 속성을 지닌다며 나만의 결론을 내린다. 무엇이 먼저인지 구분 없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몸이 젊어지면 마음이 젊어지고 마음이 젊어지면 몸이 젊어지는 변화가 이어지니까. 그 둘은 쌍방향의 화살표 사이에서 에너지를 주고받으며 삶의 흐름을 만드는 지도 모른다. 충전과 방전을 반복하는 과정에서 서서히 삶의 배터리가 줄어드는 것이리라. 시계를 거꾸로 돌린다는 건 과거에 얽매인다는 의미가 아니다. 찬란했던 에너지의 불씨를 되살린다는 의미이다. 몸과 마음은 온전한 나의 것이어야만 삶으로서의 가치가 있으며 우리는 모두 아직 늦지 않았다. 마음이 늙을 때 육체는 마음에 동조하여 사그라지는 지도 모르니.

 

p109, 밑에서 8째줄: 움켜진 움켜쥔

p322, 밑에서 9째줄: 모르겠군요. 모르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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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만난 물고기
이찬혁 지음 / 수카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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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잔한 바다에서 물방울들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린다면 어떤 느낌일까. 찰랑찰랑한 풍경 소리와 비슷할까. 다정한 숨소리인 듯 작은 알갱이들의 소리가 퍼져나갈까. 원자 단위의 입자들은 늘 진동하고 소리는 매질을 통해 전달되는 진동의 에너지이니 황당무계한 상상은 아닐 터이다. 가시광선 바깥에 존재하는 적외선이나 자외선처럼, 가청주파수 너머로부터 울리는 크고 작은 소리들이 온 세상을 가득 채우고 있는지도 모른다.

빛조차 빠져나오지 못한다는 검은 구멍에서 소리가 울려 퍼진다니! 지난 8, NASA는 블랙홀의 소리를 공개했다. 24천만 광년의 은하단에 있는 블랙홀은 57~58옥타브로 증폭시킨 소리로 존재감을 드러낸다. ‘천상오싹의 상반된 평가를 받는 34초의 소리로부터 예술가의 정체성을 발견한다. 크고 작은 소리를 내는 삶에 담긴 의미를 발견하여 표현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음악가든 화가든 문학 작가든 공통적인 속성을 품는다. 섬세한 촉수로 들릴락 말락 존재감조차 어필하지 못하는 삶의 숨결을 증폭시킨다는 점이다. 선율이냐 색채냐 문장이냐 필터의 종류만 다를 뿐이다. 맥박인 듯 활어처럼 팔딱거리는 삶의 의미를 전하면서 스스로도 전율을 느끼는 순간을 상상한다. 이어폰으로 전해 듣는 블랙홀의 소리처럼 생경하면서도 묘하다.

 

음악을 먼저 들을까, 책을 먼저 읽을까. AKMU의 정규앨범 항해를 검색하니 10곡의 목록이 보인다. 앨범의 모티브라는 책의 소개 글. 잠시 고민하다 책을 먼저 펼친다. 예술과 연결된 문학은 어떤 느낌일까.

소설 물 만난 물고기는 음악을 통해 진정한 예술의 의미를 찾아가는 성장 일기이다. 주인공 은 여행을 하며 여러 인물들로부터 예술가로서의 면모를 찾으려 시도하지만 번번이 실망한다. 몽환적인 해야와의 만남은 그의 삶의 분기점이다. 현실과 상상을 넘나드는 공간 묘사, 자유로운 영혼을 지닌 캐릭터와의 대화는 4차원적인 분위기를 뿜어낸다. 그녀와의 사랑과 이별은 그에게 많은 깨달음을 남긴다.

픽션의 바탕에는 작가의 내면세계가 BGM처럼 펼쳐진다. 이야기의 흐름은 단지 거들뿐, 본질은 등장 인물간의 대화에 있다. 곳곳에 음악가로서의 열망과 고민이 묻어난다. 작가는 두 주인공이 함께 하는 풍경에 자신의 사유를 얹어 자유와 예술로서의 음악과 삶의 의미를 찾아간다.

표현한 것이 곧 자신이 되는 사람, 자신이 한 말을 지키는 사람, 그리하여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사람. 책 표지의 바다처럼 푸른 시선을 지닌 작가가 정의하는 예술가에게서 바다 냄새가 난다. 그들이 있기에 우리의 세상은 조금씩 넓어지고 깊어지는 걸까.

 

삶의 모습에 대한 당위를 뱉어내곤 그대로 살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 때면 가끔 버거웠다. 내 자신이 얼마나 위태위태한지, 얼마나 보잘 것 없는지 잘 아는 나는 종종 가라앉았다. 실제의 나와, 나를 돌아보는 나와의 거리가 지나치게 가까워서 그렇게 보이는 걸까. 혹은 물에 잠겨 짧아 보이는 두 다리였는지도 모르겠다. 뱉은 말을 지킬 수 없을 것 같으면 그냥 할 수 있는 만큼의 말을 하면 된다는 문장에 뜬금없는 위로를 받는다. 예술과 삶의 싱크로율을 말하는 문장이지만 어쩐지 마음의 짐이 가벼워진다.

음악이 서랍인 듯 추억을 넣고 다닌다는 작가의 말에 공감한다. 강한 인력으로 나를 당기던 음악은 종종 누군가를 담은 이야기와 함께 흘렀다. 함께 듣던 음악은 곁에 없는 그를 순식간에 불러왔다. 함께 먹던 음식은 더 이상 그 때의 맛이 나지 않았다. ‘라는 재료가 빠졌기 때문이다. 스치는 향기에 눈물이 나는가 하면 익숙했던 풍경이 의 부재로 낯선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대상과 결합된 시각, 청각, 후각, 미각은 종종 환경으로부터 불현 듯 다가오는 호르몬을 경험한다. 특별했던 이를 공유한 음악은 공간 전체를 울리며 물처럼 심장을 향하여 스며든다. 흠뻑 젖은 마음이 마를 때까지 꿈인 듯 타임 슬립 하는 순간을 만든다. 감각할 수 있는 영역보다 드넓은 공간에 존재하기에 감각이 증폭되는 순간을 맞이하는 걸까.

 

앨범 수록곡의 노랫말을 하나하나 찾아본다. 모두가 책 속의 이야기와 연결된다. 문학적으로 서툰 몸짓이 음악과 겹쳐지니 책을 바라보는 시선이 몰랑해진다. 작가가 고민했던 예술가를 한 명 알게 된 것 같아서. 앨범에 실린 곡들의 탄생 배경을 음악가로부터 직접 전해들은 기분이다. 큐레이터와 천천히 대화하며 미술작품을 감상하고 온 느낌이랄까. 더불어 작가의 음악관과 삶을 바라보는 시선이 자연스럽게 묻어나온 문장들을 통과하니 그의 음악을 보다 친근한 마음으로 마주할 수 있었다.

전주만으로 공기가 물결치던 곡. 가수의 목소리가 들리기도 전에 벌써 좋아서 귀 기울이던 작품. 공간의 울리는 맑은 목소리가 쨍쨍한 태양의 화살처럼 소리 없이 가슴에 꽂히던 순간. 선율을 쓰담쓰담하는 담담한 가사에 다시 반해버린 노래. <어떻게 이별까지 사랑하겠어, 널 사랑하는 거지>5분여 동안 나를 다른 공간으로 데려가곤 했다. 그리고 이런 감각의 경험은 매번 현재진행형이다.

책을 덮고 곡을 다시 듣는다. 눈밭에 난 발자국을 따라 걷듯 흘러나오는 가사를 하얀 종이에 적는다. 시처럼 보였던 가사에 이야기가 얹어지니 이전보다 묵직해진다. 음표가 귓가에서 울릴 때마다 무심코 흘려보냈던 글자 하나하나가 생명력을 품은 꽃잎으로 되살아난다.

책을 다시 펼쳐 휘리릭 넘기니 첫 장과 마지막 장에 보이는 바다 사진이 눈에 들어온다. 책장 넘기는 소리가 잔잔한 물결 소리인 듯 착각이 인다. 노래하듯이 살아간다면 얼마나 자유로울까. 바다 속 물방울처럼 살아간다면 삶이 얼마나 찰랑거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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