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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평범한 미래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10월
평점 :
타임머신을 꿈꾸는 잿빛 시간은 탄성력을 지닌다. 심장을 향해 오가는 파도처럼 철썩이며 굳어가는 심장을 할퀸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결혼 따위는 하지 않을 거야. 반복된 생각 끝에는 매번 마침표 대신 도돌이표가 찍힌다.
미래가 올까. 까마득하게만 보이는 시간을 가늠할 때마다 생각했다. 정말 미래가 올까. 나에게 당신과 함께하는 미래가 있을까.
저녁이면 거울 앞에 돌아와 선 누이가 되어 보글보글 된장찌개에 풋고추를 찍어 먹으며 지나온 낮의 이야기들을 액션영화 리뷰하듯 주절거리는 삶. 평범한 저녁의 풍경이라 여기는 일상이 실은 많은 이들이 꿈꾸는 비범임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삶은 좀 더 진하고 보다 징하다. 거울 앞의 민낯처럼 지질한 모습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현실이다.
김연수의 소설집 『이토록 평범한 미래』는 시간을 건너는 인간의 삶에 관한 통찰이 담긴 이야기이다. 2014년부터 2022년까지 문예지 등에 발표한 8편의 단편이 수록된 모음집이다.
소설집을 접할 때면 종종 시간을 거슬러 발표 순서에 따라 작품을 읽는다. 저자의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고 싶어서이다. 작품마다 색상과 채도는 다르지만, 공통으로 과거-현재-미래로 이어지는 삶을 숙고하는 시간을 건넨다. 삶을 어떻게 걸어가야 할지 방향성을 제시한다.
이번 책은 전반적으로 평소 선호하는 스타일은 아니다. 이야기를 꾸역꾸역 따라가느라 힘이 든다. 개인적인 취향으로는 다소 밍밍한 게 종이 씹는 맛이 난다. 찢어진 종이의 절단면처럼 전개되는 이야기를 따라가다 낭떠러지를 만난 기분이다. 모든 수록작을 한데 묶어 결론을 내리는 듯한 표제작 <이토록 평범한 미래>만 좋았다.
한 권의 책을 읽는 동안 독자의 세상은 온통 책으로 둘러싸인다. 책 속에서 흘러나오는 향기가 향수처럼 마음에 묻어 코팅된다. <이토록 평범한 미래>를 읽을 때 이런 현상은 특히 두드러졌다.
이 소설의 주제는 ‘미래가 현재를 결정’한다는 것이다. 앞으로 일어날 일들이 원인이 되어 현재의 일이 벌어진다고. 직접적인 사례로 도박하는 사람이 등장한다. 그는 계속 지면서도 자신의 선택지를 고집한다. 기대하는 미래가 다가올 확률을 예측하기 때문이다. 미래에 대한 기대감이 현재의 행동을 결정하도록 만든다. 강하게 공감했다.
미래에 대한 기대감이 없는 경우는 어떨까. 책에서 언급된 메시지의 흔적을 일상의 곳곳에서 발견한다. 삶이 <이토록 평범한 미래> 시점으로 해석되니 한동안 머릿속을 떠나지 않던 질문이 심장 속 메아리처럼 둥둥 울린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소설이 해결책을 알려준다.
다소 몽환적으로 전개되는 <재와 먼지>라는 SF소설이다. 동반자살을 결심한 두 남녀가 자살하는 순간, 시간을 거슬러 과거를 다시 체험한다는 내용이다. 두 사람은 이 시간 여행을 계기로 세 번의 삶을 공유하게 된다.
첫 번째는 그들의 삶이 동시에 끝나기까지의 삶이다. 삶을 사랑으로 도치해도 맥락은 이어진다.
두 번째 삶부터가 환상특급이다. 동반자살을 시작으로 그들의 시간은 날마다 하루씩 당겨진다. 함께 한 경로를 거슬러 간다. 따로 걸어온 시공이 겹치는 첫 만남에 이를 때까지. 내일이 과거이므로 일어날 일을 미리 아는 삶이다. 최초의 시점에 다다른 두 사람은 서로 얼마나 사랑했는지를 깨닫는다.
세 번째 삶은 다시 정상적으로 흐른다. 두 번째 삶을 통해 ‘가장 좋은 게 가장 나중에 온다고 상상하는 일이 현재를 어떻게 바꿔놓는지 알게 된다.’ 그들의 미래는 분명 이전과는 다르게 흐르리라.
세 번의 삶이 문신처럼 심장에 각인된다. 상상이지만 얼마든지 상상으로 실현이 가능한 삶이다. 현실을 넘나들면서 펼쳐지는 이야기를 따라가며 이름도 모르는 한 사람을 떠올린다. 알라딘 커뮤니케이션이 최근에 런칭한 창작 플랫폼 <투비컨티뉴드>에 에세이를 업로드하는 분이다. 간결하고 자연스러운 글의 흐름이 딱 내 취향이다.
식물을 심어 판매하는 일을 하는 이분의 꿈은 ‘제주에서의 삶’이다. 꿈이야 누구나 꿀 수 있으며 많은 이들의 로망이 제주이니 여기까지는 특별할 게 없다. 평소처럼 글을 읽다가 나는 독특한 작품을 발견한다. 제주에서의 삶이 펼쳐지는 미래를 상상하며 쓴 단편소설이다. 작가의 아바타인 듯 묘사되는 에세이 형식의 글이 꽤나 구체적이다. 작은 충격이었다. 미래를 당겨와서 살아가는 삶이 언젠가는 꼭 이루어질 것만 같은 상상에 덩달아 설렜다.
어제는 김연수 작가가 제시한 방법을 따라 해본다. ‘내 앞의 세계를 바꾸는 방법이지요. 다른 행동을 한번 해보세요. (중략) 아주 사소할지라도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살겠다고 결심하기만 하면 눈앞의 풍경이 바뀔 거예요.’ 그의 문장대로 일상이 흘러갈까.
“할머니 산소에 다녀오려고.”
집에 내려온 아이들을 역까지 배웅하고 한 시간 남짓 떨어진 시골에 있는 외할머니 산소에 다녀온다고 말하는 당신.
그 순간에 작가의 문장을 떠올린 나는 “잘 다녀와요.”를 “같이 갈까요?”로 바꾼다.
아이들이 올라가면 커피숍에서 글을 쓰려던 참이다. 계획적인 J가 갑작스레 뛰어든 일정을 선택한 이유는 단 하나다. 당신과 함께 할 시간이라는 점이다.
타이밍은 절묘했고 결과는 놀라웠다. 시골은 결혼하기 전에 들르던 장소다. 산소로 가는 길은 미래를 알고 두 번째 삶을 사는 듯 착각을 일으킨다.
따사로운 언덕 아래 포슬포슬한 바닥에서 절을 하며, 가는 길에 사 간 막걸리를 단비 드리듯 봉분에 뿌리며, 몸을 일으키다 듬성듬성 고개를 내민 연둣빛 손톱만 한 새싹을 바라보며, 언덕을 내려오다 누군가 쌓아놓은 흙더미를 보며 순식간에 삼십여 년 전으로 타임슬립을 한다.
인근의 시골집에도 들른다. 여전히 햇살 같은 표정으로 해물짬뽕과 탕수육을 맛깔스럽게 만들어주시는 이모님들 앞의 남녀는 이십 대로 돌아간다. 옥상으로 올라가는 철제 계단 끄트머리에 조는 듯 앉아있는 고양이 위로 옥상에서 빨래 걷는 할머니와 대화하던 수줍은 예비 손주며느리가 겹친다.
쭈그려 앉은 화장실에서 무릎관절염을 실감할 때까지 곳곳에 묻은 흔적들이 새싹인 듯 튀어나온다.
창작 플랫폼 <투비컨티뉴드>에서 즐겨보는 작품을 읽다가 알게 된 영화가 생각난다. 미래를 알고 현재를 살아가는 이야기를 그린 SF영화이다. 테드 창의 소설을 모티브로 제작되었다는 영화 <컨택트>에는 7개의 다리를 가진 외계인 헵타포드가 등장한다.
그들의 시간은 지구인의 개념과 다르다. 과거-현재-미래에 걸쳐 전 생애를 볼 수 있다. 삶에서 죽음까지의 모든 과정을 알고 시작하는 삶이다. 마지막이 예정된 삶은 시한부 환자의 애틋한 나날처럼 매 순간 소중하다. 스스로 선택한 삶이기에 허투루 보낼 수 없다.
세 시간 동안 미래의 시점에서 시간을 거스른 듯 시골을 다녀오며 삼십여 년을 압축하여 돌아본다. 출렁이는 파도에 가려 오랫동안 잊고 있던 장면을 기억해낸다. 붉은색과 흰색의 양면 패딩에 머리 묶은 여자와 그녀의 눈동자에 환한 햇살을 품게 해주던 남자. 마주 선 두 사람이 미소 짓는 풍경이다.
시골에서 돌아오는 길에는 김연수가 언급한 바다를 떠올린다. ‘우리 존재의 기본값은 행복이다. 우리 인생은 행복의 바다다. 이 바다에 파도가 일면 그 모습이 가려진다.’
당신과 대화하다 어느 순간 꾸벅꾸벅 졸았나. 눈을 뜨면 굽이굽이 산길이, 다시 눈을 뜨면 잔잔한 강물이, 또다시 눈을 뜨면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 보였다. 왼쪽에서 느껴지는 온기 너머로 잔잔한 봄의 바다가 펼쳐진다.
평온하게 이어지던 평범한 대화였다. 당신도 역시 그 고양이를 보았구나. 할머님의 무덤 주변에 돋아난 새싹을 보며, 막걸리를 뿌리며, 흙더미를 보며, 같은 짬뽕을 먹으며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을까. 두 사람의 마음이 정오의 시곗바늘인 듯 겹친 평화로운 오후 시간, 두 번째 삶 너머로 세컨드 윈드가 따스하게 불었다. 당신과 함께하는 세 번째 삶이 평범한 미래를 향해 흐른다는 신호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