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을 건 몸뚱이 하나밖에 없었다. 평생 그렇게 살았고 앞으로도그럴 터였다. 하지만 이제 앞으로 얼마나 더 굴러갈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뼈는 노동에 닳고 살은 술에 녹아났다. 그렇게 늙은 몸뚱이는 풍화에 점차 스러지는 중이었다. - P121
얘야, 잊지 마라. 사는 건 누구나 다 매한가지란다. 그러니 딱히 억울해할 일도 없고 유난떨 일도 없단다. - P182
할아버지는 고개만 끄덕일 뿐 더는 묻지 않았다. 그는 아버지 얘기를 꺼낼 때마다 역정을 냈지만 그때는 그저 담담한 표정이었다.-뭐, 누군들 안 그랬겠느냐마는 니 애비도 고생 많이 했다. 사업한답시고 집까지 다 팔아먹고 알거지가 되었지만 어쩌겠니, 제푼수가 그것밖에 안되는걸. 그게 다 살아보려고 애쓰다 그런 거니달리 원망할 것도 없다.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은편 산자락엔 잎이 돋기 시작한 참나무 사이로 커다란 벚나무 한그루가 연지처럼 고운 빛깔을뽐내고 있었다. - P213
"수림아, 어떤 사람이 어른인지 아니?"순례 씨가 대답 대신 질문을 했다."글쎄."막연했다. 순례 씨, 길동씨 부부, 박사님, 원장님, 2학년담임쌤………… 주변에 있는 좋은 어른은 금세 꼽을 수 있지만."자기 힘으로 살아 보려고 애쓰는 사람이야.""순례 씨 생각 동의."주변에 있는 좋은 어른들은 자기 힘으로 살려고 애쓴다.다른 사람을 도우면서. - P53
고민이 많으면 책을 읽어도 내용을 음미하기 어렵다. 눈에만 글씨를 담을 뿐 그 속뜻이 마음까지 와 닿지 않는다. 그럴만한 마음의 여유가 없는 탓이다. 하지만 한 글자 한글자 직접발음해가며 소리내어 글을 읽으면 전혀 느낌이 다르다. 마치가장 가까운 사람이 다독여주듯 자신의 목소리를 통해 스스로위안을 얻을 수 있게 된다. 가장 쉬운 치유법인 셈이다. 게다가그림책은 글의 양이 적기 때문에 시간을 많이 들이지 않아도자주 낭독할 수 있다. - P79
유럽인들이 외국어를 쉽게 익히는 첫번째 이유는 외국어를 단순히 하나의 언어로 보기 때문이다. - P24
서울에서는 계절의 바뀜을 알리는 것이 라디오 정도였다. 서울에서 조금만 떨어져도 풍경과 계절은 믿어지지 않을 만큼 친한 사이여서 창경원 숲마저 무척 외로운 놈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들에는 왜병煥도 대신에 벼들이 차 있고 멀리 보이는 산성은 권총 한자루보다도 허약해 보여서 역사는 무척 외로운 놈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산성 밑의 마을까지 뻗어 있는 길에는 자동차 한 대 보이지 않아서 마치 곡예단의 사자처럼 울 안에 갇혀서 윙윙 소리지르며 정해진 장소를 빙빙 돌고 있는 서울의 그 많은 차들이 얼마나외로운가를 알게 된다. 훌륭하기 때문에 외로운 것도 외로운 것임에는 틀림없다. - P3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