밝은 밤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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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려지지 않는 나이가 있다. 13층 아파트 베란다에서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던 장면들로 채워졌던 시간. 무에 그리 힘들었을까. 지금의 시선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뚜렷한 이유조차 기억나지 않건만. 기억에 남아있는 이유와 잊힌 이유들이 중첩되어 서러운 감정들을 수증기처럼 머금었나.

감정은 기억보다 오래 남는지 현재의 마음이 과거에 담겼던 감정의 코팅지로 둘러싸인다. 손가락 끝으로 코팅된 비닐을 당기니 살갗이라도 벗겨지는 듯 아리다.

서른 언저리의 내가 눈가에 둔탁한 그림자를 탈피하듯 남기곤 후다닥 되돌아간다. 나는 정말 괜찮은 걸까. 스스로 질문하고 답을 찾아 선명해 보이는 선을 따라간다. 이내 끄트머리는 안개 자욱한 길로 이어진다.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인 듯 옅은 꼬리를 흘리는 비행운이 된다. 선뜻 잡지도, 깔끔하게 돌아서지도 못한 채 매번 서성이는 오십 대가 현재의 나다.

 

상처는 상처를 여는 열쇠인가. 작가로부터 소설 속 주인공으로 이어지는 상처의 도미노 끝에 선 듯 덮어왔던 상처가 서서히 틈을 보인다. 소설로 전개되는 이야기가 점점 투명해지더니 아득한 너머로 어정쩡한 삼십대의 내가 보인다. 다른 상황의 이야기건만 그 안에 담긴 익숙한 파편 몇 조각에 시선이 머문다.

소설밝은 밤은 상처의 외피로 둘러싸인 치유의 이야기이다. 서른둘의 지연과 외할머니의 우연한 만남을 시작으로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다양한 여인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엄마, 외할머니, 증조할머니와 그녀들 주변에 있는 세 명의 여인들은 결혼으로 이어진 관계, 이별, 가족, 죽음, 사회적 배경을 원인으로 각기 다른 상처를 품는다.

주요 시대적 배경에는 백정이 차별받던 시대부터 일제강점기, 천주교 박해, 히로시마 원폭 투하, 한국전쟁 등 현대사의 굵직한 사건들이 담긴다. 그 시대를 건너는 여인들은 위태위태한 음표로 보이지만 강한 의지력으로 스스로의 삶을 향한다. 치열함을 넘어서는 숭고함을 뿜어낸다.

 

당신을 고통스럽게 하거나 커다란 상처를 입히는 건 무엇인가. 나의 경우, 관계가 주는 상처가 가장 아팠다. 커다란 아픔은 가장 가까운 관계에서 시작된다. 책에서도 지연과 엄마, 엄마와 외할머니 등 모녀 사이의 뒤틀어진 관계가 비중 있게 다뤄진다. 이들의 갈등은 주변 인물들과의 관계와 맞물린다. 작가는 단단하게 꼬여있던 매듭이 어떤 과정을 거치면서 서서히 풀어지는지 밀도 있게 보여준다.

촘촘한 깊이로 스미는 문장에 주춤, 언젠가 심장에 새겼던 서러움을 담은 익숙한 문장들을 보며 몇 장을 넘기기도 전에 멈칫한다. 밝은 밤을 건너는 동안 자주 아프겠구나. 마음에 고여 있던 물기가 철가루라도 된 듯 서서히 눈두덩을 향한다. 눈가가 뜨거워진다. 괜찮아져야만 했던 괜찮지 않은 나를 외면하며 괜찮아진 줄 알던 내가 보인다.

그럼에도 손가락은 새벽까지 이끌리듯 책장을 넘겼다. 외면할 수 없는 흡인력이 작가에게서 온 건지, 소설 속 그녀에게서 온 건지, 이제는 마주하고 싶다는 무의식적인 간절함에서 온 건지, 혹은 이 모두의 공명으로 인한 건지 까닭 모를 중력에 이끌리듯 빠져들었다.

 

기쁨이나 즐거움에는 자연스러운 흐름이 있다. 반짝이는 햇살을 머금은 감정들은 크고 작은 강물로 존재를 돌다 증발한다. 반면 상처에서 배어나온 물기어린 감정은 찐득하다. 지쳐버린 정맥혈과 같아 스스로 흐르기에는 힘이 겹다. 마음의 혈관에는 거꾸로 흐르지 못하게 해주는 판막이 없다.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그것은 종종 뒷걸음을 치다 심장 한 구석에 쌓인다. 차곡차곡 접힌 채로 딱딱하게 굳어진다. 일상의 박동이 시작되면 다른 감정의 물결에 가려져 아래로 가라앉는다.

책을 통과하는 내내 열병처럼 이십여 년 전의 나를 앓았다. 이해받지 못한 서러움이, 빛도 소리도 없는 우주공간을 오롯이 혼자 유영하는 듯했던 외로움이, 먼지처럼 날아가 버린 원인을 따라가지 못한 채 덩그마니 남아있던 먹먹함이 한꺼번에 몰려들었다. 그럭저럭 견딜만하다 여겨왔던 감정들이 켜켜이 쌓여있던 지층이 되어오니 태풍에 휩쓸린 듯 바닥이 드러났다.

훌훌 떨쳐내고 싶던 감정의 귀퉁이를 여전히 붙들고 있었음을 깨닫는다. 줄줄 올이 풀린 실오라기를 차마 놓지 못해 습관처럼 손가락에 감고 있었던 걸까.

 

누구나 마음으로 이루어진 행성을 가슴속에 품는다. 마음의 행성에는 다양한 감정들이 뒤섞여있다. 사랑, 기쁨, 분노, 즐거움, 행복, 슬픔, 아픔, 그리움, 외로움 등이 모여 행성을 만든다. 감정들은 수시로 우리의 안팎을 들락거린다. 찰나로 스치는가 하면 눅진하게 눌러 붙다 영혼의 심연으로 가라앉는다.

몰랑몰랑한 행성의 크기는 시시각각 변한다. 크기에 따라 다른 중력을 나타내는 행성처럼 마음마다 중력의 크기가 다르다. 다가오는 자극에 반응하며 상황과 사람을 다른 인력으로 끌어당긴다. 누군가에게는 대수롭지 않은 손수건이 다른 이에겐 물에 흠뻑 젖은 거대한 솜이 될 수 있는 이유를 여기에서 찾는다. 이런 상상을 하면 다른 이의 상처가 조심스럽다.

다른 중력을 지녔으므로 동일한 무게감을 지닌 상황은 존재하지 않는다. 답답했던 소설 속 인물의 행동도 같은 시선으로 바라보면 이해가 된다. 나의 무게감과 당신이나 가상의 인물이 느끼는 그것은 분명히 다를 터이다. 그러니 함부로 재단하지 말 것. 매번 스스로 다짐한다.

 

밤하늘에는 오래된 과거가 있다. 허블 망원경이 찍은 사진울트라 디프 필드에는 백삼십억 년 전의 우주가 담겨있다던가. 빛의 속도가 유한하기에 지금 내가 올려다보는 별빛은 과거의 별에서 출발했으리라.

밤하늘은 왜 어두운가. 독일의 천문학자 올베르스는 처음으로 의문을 제기한다. 성간 가스와 먼지가 별빛을 가로막아서, 빛의 속도가 유한해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빛의 속도보다 우주가 빠르게 팽창해서 등 다양한 인물들이 타당한 이유를 찾기 위해 노력한다. 과학적 진위를 떠나 나에게 밤하늘은 위안을 주는 마음의 안식처이다.

낮의 하늘보다 밤의 하늘은 강한 인력으로 나를 당긴다. 과학적인 사실을 알지 못했던 십대에도 밤하늘이 그저 좋았다. 잿빛 감정을 담은 채 터벅터벅 걷다가도 문득 올려다보면 나를 둘러싼 공기 위로 까마득한 우주까지 뻗어있는 이불이 부드럽게 마음을 감싸주는 것만 같았다. 어둠이 품고 있는 별이, 반짝이는 눈물 같은 별이 주는 위안에 서늘한 공간을 걸으면서도 따뜻했다.

 

밤은 어둡다. 어두우니 밤이다. 밝은 밤이라 했을까. 고운 비단으로 지은 옷감인 듯 환한 책표지를 가만가만 어루만진다. 이 책을 읽고 나서 며칠간 밤의 하늘을 자주 쳐다보았다. 먼 하늘에서는 드문드문 별빛이 반짝였다.

별빛은 그 빛이 출발한 까마득한 과거의 시간으로부터 온다. 결국 밤하늘을 빛나게 해주는 건 과거이다. 인간의 삶도 마찬가지 속성을 지니는 건 아닐까. 고통스럽던 과거는 아직까지 내게로 도달하지 못한 별빛이다. 빛으로 다가와 눈으로 스며들어 나와 이어진 과거는 더 이상 나에게 고통만을 안겨주지는 않으리라. 외로운 이들에게 위안의 빛으로 점점이 흩날리는 눈송이처럼 말이다.

작가의 상처가 환하게 빛나는 밤이 된 것도 그녀의 고통이 빛으로 닿았기 때문이리라 짐작한다. 별빛은 별을 향한 이에게만 보인다. 어둠으로 가득한 공간에서 고개를 들고 눈을 뜨는 건 의지이며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과거의 고통을 똑바로 응시하는 이에게 밤하늘은 더 이상 어둡지 않다.

 

올려다보는 밤하늘이 완전히 밝아진 건 아니다. 과거로 타임 슬립하면 매콤함이 남는다. 들숨과 날숨이 폐로 들락거릴 때 공기는 말끔하게 비워지지 않는다. 나의 삼십 대는 어정쩡하게 폐에 머물던 공기였나. 그래도 새벽에 가까워진 듯 서러움이 덜하다. 질끈 감았던 눈을 뜨고 실눈으로나마 상처를 마주하려는 마음이 생긴 걸까.

인간의 삶은 보편적인 패턴으로 이어지는 줄기로 존재하는가 보다. 밝은 밤의 상처에 기대어 나의 상처를 들여다본다. 상처를 향해 손끝을 내밀어 가만히 더듬어본다. 최은영의 밤이 상처를 향해 한 뼘의 손을 내밀 용기를 건네주었나.

외면한 마음은 거기 그대로 머문다. 매순간 자라는 몸처럼 시간에 끌려가지 않는다. 스스로 보듬어 꺼내지 않으면 치유되지 않는다. 치료를 하려면 상처를 들여다봐야 한다. 가까이 다가가 쓰라린 상처를 건드려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사금파리를 꺼내어 당신에게도 기꺼이 보여줄 순간이 언젠가는 올 것만 같다. 손끝이 뜨거워진다.


p12, 5째줄: 눈이 기화 → ~ 승화 or 융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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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10-07 22: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만큼 따뜻한 리뷰네요. 축하드려요 *^^*

나비종 2022-10-08 06:00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축하의 말씀에 제 마음이 따뜻해지네요.^^ 날이 많이 쌀쌀해졌습니다. 감기 조심하세요~^^

romio 2022-10-16 1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좀 늦었지만, 저도 리뷰를 읽고 잔잔한 여운을 느낌니다,, 저는 오십대 남자지만,,

나비종 2022-10-16 21:21   좋아요 0 | URL
따뜻한 책입니다. 혹시 읽지 않으신 책이면 읽어보세요. 남성의 시선에서는 어떻게 비춰질지 궁금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