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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의 붕괴
제레드 다이아몬드 지음, 강주헌 옮김 / 김영사 / 2005년 11월
평점 :
휘몰아치던 사흘은 뽀얀 가루 한 줌을 존재의 흔적으로 남긴다. 87년의 시간을 되감기 하여 빅뱅으로 압축해 놓은 느낌표가 대지의 하얀 점으로 찍힌다. 삶이 붕괴되어 자연으로 돌아가는 순간은 이토록 짙고 짧다. 옅은 안개 속을 걷는 듯 몽환적인 몇 달이 흐른다.
"커피 우유 맛이 난다." 영양 팩을 드시고 오랜만에 푹 주무셨다며 해사하게 웃으시던 날. 이틀 전에는 말끔하게 목욕도 시켜드리고, 손톱도 깎아드린다. 점심으로 삶아드린 국수, 평소 좋아하시던 복숭아 캔, 저녁으로 전날 사다 드린 소고기 야채죽까지 드시던 날. 한 끼도 굶지 않으시고 초저녁 잠자리에서 고요한 마침표를 찍으신 당신을 떠올린다. 축축한 물기가 심장으로 스민다.
마음이 젖어 들 때 의외로 광대한 사막 같은 글이 위로가 된다. 자박자박 건조한 친구와 걷다 보면 조금씩 물기가 말라간다. 단지 함께 있었을 뿐인데, 인류가 걸어온 드넓은 세상을 펼쳐 보여주었을 뿐인데. 묵직한 시간 안에서 인간의 삶이 먼지인 듯 다가온다. 문명의 붕괴를 다루는 글이 덤덤하게 나를 토닥인다.
『문명의 붕괴』에서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환경 문제를 중심으로 과거 문명 사회의 붕괴 요인을 다섯 가지로 진단한다. 무분별한 행위로 인한 환경 파괴, 지구 온난화 등 기후 변화, 적대적인 이웃, 우호적인 무역국의 지원이 중단되거나 줄어든 경우, 환경 문제에 대한 사회 구성원의 대응 등이다.
이스터 섬, 핏케언 섬과 헨더슨 섬, 아나사지, 마야, 바이킹, 노르웨이령 그린란드에서 한때 번성했던 문명은 침묵의 바다에 잠긴다. 저자는 각각의 사회가 붕괴한 원인을 치밀하게 분석한다. 붕괴 요인은 앞에서 제시한 다섯 가지 범주 안에서 일정한 패턴을 보인다. 전부이거나 그중 일부에 해당하거나.
더 나아가 비슷한 조건인데도 다른 현상을 보이던 사회와 비교한다. 그들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점을 발견한다. 놀라운 점은 방대한 인류의 역사를 다각도로 분석하여 일정한 패턴을 찾아냈다는 점이다. 우리가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는 과거의 열쇠로 미래의 자물쇠를 열고자 함이리라. 그는 위기에 빠진 현대 사회의 붕괴를 우려하며 지구의 미래를 조망한다.
찬란하게 번성했던 문명도 한 인간의 삶처럼 붕괴한다. 저자가 또 사회의 붕괴 원인을 네 가지로 본다. 새로운 시도에 대한 결과 예측의 실패, 문제의 근원에 대한 인지 실패, 가장 빈번하게 일어난다는 해결 시도의 실패, 능력 밖이라 성공하지 못한 해결책들이다. 구체적인 사례를 곁들이니 4D 영화를 감상하는 듯 현실감이 확 살아난다.
르완다에서의 대량 학살, 하나의 섬에 존재하는 도미니카 공화국과 아이티와의 차이, 중국의 환경 문제, 오스트레일리아의 채굴 사례 등은 위기에 빠진 현대 사회의 모습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황폐해지는 현재는 뉴스 속에 자주 담기는 현실로도 생생하다. 현재 진행형으로 악화되는 지구를 보면 미래가 위태위태해 보여 불안감이 커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희망을 놓지 않는다. 암담하지만 그래도 희망은 있다고, 결코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아니라며. 환경 문제의 원인이 우리 자신이므로 해결의 주체도 우리일 수 밖에 없으니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자고 말한다. 세계 안에서 개인의 힘은 미약해 보인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지구 표면의 70% 이상을 차지하는 바닷물도 물방울 한 방울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그의 제안은 막연하지 않고 구체적이어서 신뢰가 간다. 감성적으로 무턱대고 잘될 거라 말하는 게 아니라 과학적으로 조목조목 근거를 제시한다. 그의 말에 기대고 싶어진다. 참고 문헌에 적힌 여섯 가지 제안을 다짐하듯 하나하나 기록해 본다.
환경을 생각하는 정치 후보에게 투표하기, 소비자로서 무엇을 사고 사지 않을 것인지 결정하여 환경을 생각하는 기업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종교적 가르침을 근거로 환경에 대한 인식 심어주기, 주변 환경을 개선하는 데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기, 나의 노력이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되도록 하기, 여윳돈이 있다면 생각을 함께하는 단체에 기부하여 힘을 보태기.
저자의 글을 따라가다 보니 저절로 발이 들썩인다. 전부가 아니어도, 단 한 가지만이라도 실천한다면 문명을 만들어가는 우리의 미래가 지금과는 다르지 않을까. 죽음이 필연적이라는 걸 몰랐던 이처럼 퍼뜩 깨닫는다. 말줄임표로 걸어가는 삶에서도 우리가 고민할 문제는 마침표를 잘! 찍는 방법이라는 사실을.
'마지막으로 나무를 베었던 사람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14장의 제목을 읽는 순간, 살짝 소름이 돋는다. 묵직한 문장이 시선을 붙든다. 한꺼번에 불타버리는 게 아닌 다음에야 한 그루, 두 그루 나무를 베던 그들에게 분명 마지막 번째 나무는 존재했으리라. 마지막이라는 사실을 알았을까. 알았더라면 섣불리 그 나무를 베어내지는 못했을 것 같은데. 그렇다면, 왜 그 사실을 몰랐을까. 꼬리를 무는 생각이 이어지다 '섭동'이란 단어가 떠오른다.
'섭동'은 천문학에서 종종 언급되는 현상이다. 커다란 천체의 궤도 운동이 주변 천체들의 미약한 중력의 영향으로 아주 미세하게 궤도가 교란되어 복잡해지는 현상을 말한다. 결과론적으로 과거 사회를 바라보면 이보다 더 답답할 수 없지만, 그러데이션처럼 일어나는 미세한 어긋남을 마지막의 그 사람은 알아채지 못한 게 아닐까.
불과 몇 시간 후를 상상도 하지 못한 채, "어제는 편히 주무셨대." 형제들의 단톡방에 자랑했던 나처럼. 원하는 기간만큼 약을 주겠다는 닥터의 물음에 "일단 한 달 치 주세요." '너무 짧게 말했나?' 속으로 생각했던 나처럼. 딱 한 팩 맛보고 가신 당신을 내일도 모레도 당연히 볼 수 있으리라 가볍게 친정집을 나섰던 그날의 나처럼.
일상을 회복하고 있는 요즘, <우리들의 발라드>라는 노래 경연 프로그램도 시청한다. 탈락한 팀의 인터뷰 내용이 인상적이다. 꼭 이기지 않아도 좋다고, 어쨌든 유튜브랑 이런 데 계속 박제가 되는 거라서, 어딘가에서 저희가 노래한 영상을 다시 돌려볼 걸 생각하니 너무 기분이 좋다고.
그들의 노래 '취중진담'을 BGM으로 들으며 인터뷰 내용을 떠올린다. 너무 기분 좋아할 그들의 해맑은 미소를 떠올리니 덩달아 기분이 좋아진다. 경연에서는 탈락했지만, 그들의 노래를 다시 찾아 듣는 누군가가 있다면 그들의 이야기는 붕괴되지 않은 문명처럼 계속 이어지는 게 아닐까. 따스한 화음이 어우러지는 울림에 위로를 받으며 인간 삶의 붕괴를 다시 생각한다.
인간의 삶에 있어 죽음이 붕괴의 순간은 아닌 듯하다. 생물학적 DNA가 내 안에 있고, 내게로 전해진 사랑이 순간순간 재생되는 동안에는. 당신의 문명은 계속 이어진다 말할 수 있으리라. 게다가 나는 소리를 박제하는 그들처럼 당신의 존재를 이 글에 박제하는 중이니까.
깨끗한 공기, 햇살, 나무 그늘처럼 소중한 것은 무게감이 없다. 당연하다 여기며 미세한 변화를 알아채지 못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지 모른다. 유발 하라리는 <넥서스>에서 '역사의 유일한 상수는 변화'라고 말한다. 역사 속에서 일어나는 섭동이 내게 속삭인다. 영원한 건 없으니 지금 이 순간 나의 삶을, 내가 살아가는 시간과 공간을, 함께 걸어가는 이들을 위해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라고.
거리를 걸을 때, 불현듯 당신이 말을 건넨다. '제일 하고 싶은 게 뭐냐? 아빠한테 그만한 능력이 생겼어. 뭐든 말해 봐.' 당신의 마음이 든든하게 귓가에 맴돈다. 옅은 안개가 커다란 목화 꽃으로 피어나 내 몸을 감싼다. 포근해진 공간으로 희미한 미소가 향긋하다.
차선 변경을 하지 못해 질주하는 차들을 흘끔흘끔 바라볼 때, '천천히 해~' 뒷좌석에 장착된 내비게이션인 듯 당신의 음성이 재생된다. 이토록 커다란 부피감으로, 이토록 가뿐한 무게감으로! 당신이 남기고 간 문명의 흔적이 구스다운 이불처럼 나를 폭 둘러싼다. 조급했던 마음이 서서히 속도를 늦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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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7, 3째 줄: 몸도 → "몸도
p144, 5째 줄: 조앤 반 틸버그 → 조 앤 반~
p255, 지도: 린다스판 섬 → 린디스판 섬
p522, 지도: 시드니 근처의 그레이트디바이딩 산맥 → 오스트레일리아알프스 산맥
p702, 9째 줄: 뚜렷이 → 뚜렷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