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리골드 마음 세탁소
윤정은 지음 / 북로망스 / 2023년 3월
평점 :
품절


뜨거운 별을 품은 평균 온도 270의 우주는 뜨거운가, 차가운가. 낮과 밤으로 이루어진 하루는 밝은가, 어두운가. 수묵화의 주인공은 붓으로 그린 부분인가, 여백인가. 기쁘면 절로 눈물이 흘러나올 때가 있다. 아픈 기억은 기억되는 게 좋은가, 지워지는 게 좋은가. 뫼비우스의 띠처럼 하나로 이어진 많은 것이 모순되는 두 가지를 모두 품는다.

소설메리골드 마음 세탁소는 아픈 기억에 대한 상반된 질문에 답을 건네준다. 각기 다른 마음의 얼룩을 품은 이들이 세탁소 사장인 지은을 통해 치유를 받는 에피소드들이 담긴다. 판타지적 요소가 담겨 몽환적인 느낌이다. 얼핏 드라마 <호텔 델루나>가 떠오른다. 소설 속 인물들이 안고 있는 아픔은 이보다 더 현실적일 수 없다. 소설의 형식을 취하는 다큐멘터리랄까.

현실과 비현실이 오가는 이야기를 따라가며 널린 빨래의 표면에서 반복되는 증발과 응결을 떠올린다. 눈에 보이지 않는 기체에서 눈에 보이는 액체로, 액체에서 기체로 수시로 상태가 변하는 물방울의 정체성이 소설의 분위기와 닮아있다.

 

주인공 지은은 타인의 슬픔에 공감하고 치유하는 능력과 원하는 것을 실현하는 두 가지 능력을 지닌 인물이다. 실현 능력을 잘못 발휘한 소녀는 한순간에 가족을 잃는다. 가족을 찾기 위해 수 세기를 넘나들다 치유 능력을 발휘해야 실현 능력이 발현된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녀는 메리골드 마음 세탁소를 세운다. 제공한 옷을 입은 손님의 상처가 얼룩으로 드러나면 세탁을 해주거나 주름을 펴고 위로의 차를 만들어 건네주는 게 주인의 역할이다.

드러나는 상처는 제각각이다. 밖에서 문을 잠그고 어머니가 일을 나갈 때마다 느꼈던 외로움을 지닌 재하, 사랑의 얼룩에 아파하는 연희, 인플루언서로 살던 삶을 지우고 싶은 은별, 상처를 기꺼이 안고 가겠다는 재하의 어머니 연자, 모든 일이 자신 때문이라 자책하던 과거와 인정을 받아야 안도했던 날들과 가족들 때문에 생긴 시간에 대한 강박을 지우고 싶다는 영희.

그들의 얼룩을 지워주는 지은의 얼룩은 항상 입고 있는 검은 바탕의 붉은 꽃무늬로 형상화되어있다. 세탁소 주변에서 따스한 김밥을 건네주는 분식집 사장과 지은의 눈물을 목격하며 그녀에게 사랑을 느끼는 해인이 온기 어린 울타리로 등장한다.

 

마음이 아프면 꺼내어서 얼룩을 지우고 다려서 펴고 햇볕에 널어 잘 말리면 된다니! 눈물이 마음으로 흘러들어 심장에 얼룩으로 남는 장면을 상상한다. 심장의 얼룩이 다시 마음 밖으로 흘러나오는 상상도 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을 시각화한 문장을 보니 마음이 보송보송해진다. 등장인물들의 눈물이 말라가는 과정을 따라가며 덩달아 개운해진다.

주인공을 통해 건네는 위로가 따뜻하다. 문제를 끝까지 피하지 않고 겪어낼 것, 슬픔이 때론 살아가는 힘이 되기도 한다는 것, 도움이 필요해 보이는 낯선 타인을 대가 없이 도와주라는 것, 진짜 행복과 가짜 행복을 구분하지 못하는 뇌를 속여보라는 것, 자신을 잃어가면서까지 지켜야 할 관계는 어디에도 없다는 것, 나를 모욕한 감정이나 언행을 택배처럼 반품하면 내 것이 아니라는 것.

손님들을 치유하며 마음의 얼룩을 제대로 흘려보내는 비법을 깨달은 주인공은 결국 스스로 상처를 치유 받는다. 마음 안 날씨는 나의 것이며 오늘 이 순간,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라는 것. 윤정은 작가의 메시지는 분명하다.

 

어둠이 품은 빛을 보여주는 작가의 시선이 마음에 든다. 각기 다른 상황에 위로를 건네는 장면에 봄빛이 맴돈다. 절대적인 능력의 보유자인 지은의 상처가 치유되는 과정도 깔끔하게 그려진다. 인물들의 상처가 조명이 되어 나의 상처를 비춘다. 깊은 곳에 숨겨둔 상처, 떠올릴 때마다 매번 울컥한 상처, 시간이 연고가 되어주던 상처. 깊고 얕은 상처들이 얼룩처럼 마음의 바다를 유영한다.

특히 마음에 드는 내용은 재하의 어머니 연자가 상처를 대하는 태도이다. 등장인물 중 유일하게 얼룩을 지우지 않는 인물이다. 객관적으로 가장 기구한 삶으로 보이는 그녀는 살아있는 한 모든 얼룩이 아름답다고 말한다. 주름만 조금 펴달라는 말에서 느껴지는 단단함과 뭉클함이 여운으로 남는다.

컬러링북을 연상시키는 송지혜 작가의 세세한 그림도 좋다. 표지에는 세탁소의 전경을 그리고 본문에서는 중간중간 에피소드가 바뀌는 장면에서 건물의 부분 부분을 다르게 끼워 넣은 발상이 신선하다.

사소하게 마음에 들지 않는 점은 마음이 세탁되는 과정을 묘사한 문장들이 다소 반복되는 듯하다는 거다. 신선한 발상이나 반복된 서술이 이어지니 임팩트가 희석되어 긴장감이 떨어진다. 소설의 전개가 다소 식상해지는 느낌이랄까.

 

프렌치 메리골드의 꽃말은 반드시 오고야 말 행복이다. 작가는 소설 속 주인공의 능력이 특별한 전유물이 아님을 시사한다. 마음이 시키는 대로 살아가는 능력은 이미 우리 안에 있다고. 마음이 믿는 대로 살아간다면 행복은 반드시 오고야 마는 햇살인 듯 자연스레 마음의 꽃을 피워주리라.

코끼리를 냉장고에 넣는 방법을 아는가. 단순하면서도 놀라운 진리가 담긴 농담 말이다. ‘1단계, 냉장고 문을 연다. 2단계, 코끼리를 넣는다. 3단계, 냉장고 문을 닫는다.’이다. 마음을 꺼내는 데 이 비법을 적용해본다. 마음의 문을 연다. 얼룩진 상처를 꺼낸다. 토닥토닥 말린다. 잘 말린 상처는 더 이상 상처가 될 수 없다. 다만 흔적으로 남을 뿐이다. 문을 열고 상처를 들여다보는 순간, 치유는 시작된다.

당신은 무엇으로 마음의 문을 여는가. 나는 마음이 색채를 잃거나 사막을 품을 때면 글을 쓴다. 빈 문서 1에 내가 정한 크기로 마음을 담은 발자국이 걸어간다. 내가 원하는 속도만큼 천천히 혹은 빠르게. 모니터에 펼쳐진 마음을 바라본다. 시린 마음을 덜어낸 자리는 종종 뜨끈해진다. 그 순간, 온기가 심장을 향해 흘러든다. 하얀 바탕 위의 글씨들이 마음의 얼룩인 듯 출렁거린다.



p39, 밑에서 4째줄: 돌아가가면 돌아가면

p130, 밑에서 5째줄: 첫사랑 과 첫사랑과

p139, 13째줄: 세 사람을 ~

p169, 2째줄: 안 가겠더라고요 안 가겠다~

p264, 9째줄: 곁은 지키는 이들 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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