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처럼 사소한 것들
클레어 키건 지음, 홍한별 옮김 / 다산책방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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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같은 소설이 있다. 불꽃처럼 화려하게 춤추지 않고 묵묵히 흘러가는 물과 나란히 가는 서사가 담긴 작품 말이다. 작가는 그 안에 빙하를 띄워 놓는다. 뜨거운 듯 차가운 얼음은 양면성을 보여준다. 활활 타는 불을 접하는 경험 못지 않다. 냉철한 이성으로 삶의 단면을 예리하게 파고 든다.

가까이 간 이들만이 물속에 잠긴 거대한 몸체를 본다. 작가가 뜨거운 열정을 쏟아붓는 건 소설이 완성될 때까지. 세상에 드러나는 순간까지다. 지혜로운 작가는 굳이 많은 것을 말하지 않는다. 그의 역할은 단 하나, 독자를 빙하 가까이로 끌어당기는 것. 이후의 일은 독자의 몫이다.

물속을 들여다보고 잠수를 하는 것도, 빙그르르 돌아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길을 가는 것도 책장을 넘기는 이가 할 일이다. 누구도 뭐라고 하거나 그를 비난하지 않는다. 상관없는 이에게 상응하는 책임은 없다. 대다수 사람들은 자신의 삶의 여집합에 무덤덤하니까.

지금 감당하는 삶만으로 충분히 버겁지 않은가. 나도 어쩌면 당신도. 빙하의 나머지 부분을 왜 들여다보지 않느냐고 비난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는 물에 비친 마음을 바라보는 자신이리라.

클레어 키건의 작품 『이처럼 사소한 것들 』은 물을 닮은 소설이다. 저자는 아일랜드의 모자 보호소와 막달레나 세탁소에서 고통 받으며 노동력을 착취 당하던 여자들과 아이들의 실화를 바탕으로 이야기를 만든다. 평범한 삶을 살아가던 주인공에게 핀 조명을 비춘다. 사건을 인지하고 따라가는 과정에서 겪게 되는 심리적인 갈등을 디테일하게 보여준다. 물에 비친 마음의 일렁임을 냉철하게 묘사하며 독자에게 묵직한 메시지를 건넨다.


 '뭔가 작지만 단단한 것이 목구멍에 맺히는' 느낌을 인지하는 섬세함, '애를 써도 그것을 말로 꺼낼 수도 삼킬 수도 없는' 영혼의 투명한 갈등, 스스로도 흔들리고 위태로우면서 또 다른 존재를 포용하고자 결심하기까지 내면이 변화하는 과정이 촘촘하게 서술된다.

미혼모에게서 태어난 주인공 빌 펄롱에게 미시즈 윌슨은 모자를 포용해준 은인이다. 그녀 덕분에 빌은 어린 시절을 무난하게 보낸다. 그는 석탄 등 땔감을 취급하면서 배달하는 일을 하며 살아간다. 그를 둘러싼 일상의 풍경은 자잘한 걱정거리의 허들을 넘어가는 평범한 모습이다. 다섯 명의 딸들에게 줄 크리스마스 선물을 아내와 고민하고 의논하거나, 크리스마스 케이크를 가족들과 만들며 소소한 기쁨을 누리기도 한다. 커가는 아이들을 흐믓하게 바라보는 부부는 서로의 덕이라며 상대에게 공을 넘긴다. 따스한 정이 두 사람 사이에 흐른다.

평범한 일상을 보내지만 그의 내면에는 거대한 공허가 자리한다. '모든 걸 다 잃는 일이 너무나 쉽게 일어난다'는 사실을 인지한다. '어딘가로 가고 있는 것 같지도, 뭔가 발전하는 것 같지도 않는 나날'을 중년의 나이에 마주한다. 그는 삶의 의미를 향해 물음표를 붙인다.  '멈춰서 생각하고 돌아볼 시간이 있다면 삶이 어떨까. 달라질까, 마찬가지일까, 엉망진창 흐트러지고 말까.' 

중년의 한 가운데 있는 나는 시간이 두렵다. 후다닥 빨리 날아가는 것도 아니고 느릿느릿 굼뜨지도 않는 그 시간이. 매순간 같은 속도로 움직이며 1초의 멈춤도 허용하지 않는 완벽을 느낀다. 융통성이라고는 조금도 없이 그저 나아가는 묵묵함을 서늘하게 안는다.


주인공의 일상이 묘사되는 소설 초반에서는 톨스토이의 소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가 떠오른다. 이야기 중간 중간에 눈에 띄는 삶의 철학이 깊어서이다. 이야기는 지루하지 않을 정도의 빠르기로 전개된다. 잠언이나 편안한 에세이 정도의 무게감으로 이 책을 대한다. 작은 여자 아이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쉬지 않는 초침처럼 움직이던 펄롱의 눈앞에 멈칫하게 되는 장면이 놓인다. 처음에는 수녀원에서 강제 노역을 하리라 짐작되는 아이들을 발견한다. 그 이야기를 집에서 들은 아내의 반응은 일반적이다. 그런 일은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첫 번째 균열이다.

그는 또 석탄 배달을 하러 갔다가 수녀원 건물의 석탄 광에 갇혀있는 맨발의 여자 아이를 발견한다. 작은 아이 한 명이 등장할 뿐인데 평온하게 흘러가는 듯 보이던 그의 삶에 생긴 균열은 더욱 커다래진다. 아이의 존재감이 연약한 가시인 듯 심장에 박힌다.

그의 심장이 껄끄러워진다. '여기 오지 않았더라면 좋았겠다, 그냥 모른 척하고 집으로 가버리고 싶다.' 까슬까슬한 감촉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가시를 그냥 빼버리면 그만이다. 가시는 연약하므로. 내면에서 자기 보호 본능과 용기가 치열하게 싸운다.

최종 선택의 문 고리는 자신의 마음 안에 있다. 사람을 움직이는 것도, 움직이지 않게 만드는 것도 가시 만큼의 존재감이다. '서로 돕지 않는다면 삶에 무슨 의미가 있나, 평생을 단 한 번도 세상에 맞설 용기를 내보지 않고도 자기 모습을 마주할 수 있나.' 치열한 싸움은 결국 용기의 승리로 돌아간다. 그는 아이의 손을 잡는다.


그렇다면, 해피 엔딩? 삶은 그리 만만하지 않다.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이 겨우 지났을 뿐이다. 하지 않은 일, 할 수 있었는데 하지 않은 일, 평생을 지고 살아야 했을 일을 넘겼을 뿐이다. 아이를 데리고 나온 주인공의 행동이 결과적으로 잘한 일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삶은 늘 그렇듯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선의가 지닌 힘을 믿는다. 소설에서도 현실에서도 세상은 아직 살만하다는 걸 믿고 싶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을 말하는 작가가 존재하고, '이처럼 사소한 것들'에 담긴 의미를 발견하는 독자가 있으며, '이처럼 사소한 것들'로 인해 박동이 빨라지는 당신과 나의 심장이 있기에 믿음의 이유는 충분하다. 

일상에서 마주치는 대부분의 일들은 발등을 철썩이는 파도 정도의 존재감을 지닌다. 어느 날 다가와서 발등을 툭 건드리곤 작은 포말로 부스러진다. 인간의 입장에서 물방울은 사소하게 보이지만 거대한 쓰나미의 시작도 결국 물방울 하나였을 터이다. 물방울을 이루는 수소나 산소 원자에 입장이라는 게 있다면 하나의 물방울은 온 우주가 되지 않는가. 이런 이유로 세상에 사소한 대상은 없다. 사소해 보이는 대상만 있을 뿐이다. 클레어 키건이 독자에게 말하고 싶었던 책의 제목을 의역하면 '이처럼 사소해 보이는 것들'이리라.   

사소해 보이는 차이는 우주 만큼의 의미를 품는다. 생각과 행동, 관심과 외면, 작가와 독자, 당신과 나의 차이 모두. 우주의 시간도 사소해 보이는 1초에서 시작되니까. 1초가 모며 1분이 되고, 1분은 1시간을 만들고, 그렇게 하루가 완성되며 촘촘히 쌓이는 하루는 계절을 지나 결국 우주의 시간으로 확장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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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나무를 찾아서 - 숲속의 우드 와이드 웹
수잔 시마드 지음, 김다히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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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처럼 찍히는 장면이 있다. 보고 또 보아도 자꾸 잊어버리는 50대의 나를 순식간에 10대로 돌려놓은 사진, 80대 노모의 알몸이다. 투명하게 증발해 버린 왼쪽 유방, 두어 겹으로 출렁이는 뱃살, 탄력을 잃은 피부, 왜소한 다리가 심장에 새겨지는 문신인 양 선명하게 각인된다. 어머니의 왼쪽 팔목이 골절되는 바람에 목욕을 시켜드리면서 보게 된 몸이다.

11cm 자그마한 체구로 조각되었다는 빌렌도르프의 비너스와 당신의 몸이 겹친다. 다산의 상징이라는 조각상 말이다. 밀로의 비너스처럼 육감적인 모습도 아닌데 왜 하필 '비너스'라 부르는지 의아하게 여기던 기억이 난다. 어머니라는 필터를 끼우니 그 이유가 한순간에 이해된다. 한때 날씬했을 몸이 그렇게 변해버린 이유를 간과하고 있었던 거다. 포동포동한 몸에 미의 여신이 가당키나 하냐며 고대인의 안목을 의심했다. 가볍게 웃던 기억에 무게감이 더해진다. 더 이상 우습지 않아진다.

셀 수 없는 날들, 나를 씻겨주시던 몸을 난생처음 씻겨드리고 왔다. 그 몸이 지나온 시간을 가늠한다. 수많은 나날 아기에게 젖을 물리던 그 몸에, 불완전한 세포를 내내 뱃속에 품어 온전한 생명체로 만들었던 그 몸에, 휘몰아치는 삶의 파도를 감내하며 울타리가 되어주던 그 몸에, 품 안에서 떨어져 나온 지금까지 여전히 줄 수 있는 무언가를 찾는 그 몸에 '비너스'처럼 적절한 명칭이 또 있을까.

 

어머니 나무를 찾아서는 식물계의 비너스가 걸어온 내밀한 삶의 여정을 탐구한 책이다. 동시에 어머니로서 살아가는 저자 수잔 시마드의 자전적 이야기이다.

거대한 숲을 논하는 대장정에 왜 개인의 삶이 끼어드는가. 간지처럼 끼워지는 저자의 일상이 처음에는 껄끄러웠다. 저자의 가계도를 둘러싼 배경지식까지 굳이 알 일인가. 연구 과정에서 등장하는 인물들이야 그렇다 쳐도 직계존속과 직계비속, 남편, 친구와의 소소한 관계까지 등장하니 마음이 뾰족해진다.

숲의 삶과 저자의 삶을 병치시킨 이유를 납득하게 된 건 책장 날개의 오른쪽 두께가 점점 줄어들면서이다. 지상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의 삶과 지하 네트워크로 연결되는 나무들의 삶이 호수에 비친 그림자인 듯 닮아있음을 깨닫는다. 세상을 채우는 삶의 방식은 적자생존만이 아니었던 거다.

경쟁만이 난무하는 듯 보이는 세계에도 따스한 협력은 봄꽃으로 피어난다. 프랙탈인 양 서로 닮은 속성을 발견하며 생명으로서의 삶을 보다 깊이 이해한다. 인간과 나무의 삶을 동시에 바라보니 서로의 영역을 가르는 경계가 무너진다. 숲속 나무들 사이에 경계가 없는 것처럼. 이 나무의 영역, 저 나무의 영역이라 선을 긋는 건 숲의 정체성에 무지한 인간의 잣대일 뿐이다. 다른 나무가 그늘을 드리우니 불편하겠지, 이 나무는 영양분을 일방적으로 빼앗아 갈 거야. 제멋대로 판단하여 도끼를 휘두르고 제초제를 뿌리는 인간에게 나무는 어떤 말을 하고 싶을까.

 

나무의 언어를 해석한다는 건 지난한 기다림을 감내하는 일이다. 왜 이곳의 숲은 무성하고 저곳은 황량해지는가. 왜 그곳은 타오르는 불꽃처럼 찬란하다 순식간에 사그라드는가. 고요한 침묵 속에서 묵묵히 뻗어나가는 삶은 정답을 알려주지 않는다. 그저 스스로 그러한 '자연'의 시간을 걸어갈 뿐이다.

비밀의 문을 열어보려는 삼림 과학자 수잔 시마드는 침묵의 언어에 도전장을 내민다. 한 사람의 뜨거운 열정은 종이 한 장 한 장에 선명하게 새겨진다. 학자로서의 순수한 호기심을 넘어서는 저자의 사랑이 보인다. 숲에 대한 애정이 없으면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할 도전들이 릴레이처럼 이어진다.

중간중간 세상의 편견이 가로 놓인 허들 경기에서 장애물은 생각보다 견고하고 높다. 조금이라도 편한 길을 찾아 흘러가는 전류의 속성과 닮아있다. 세상은 방해 요소로 보이는 나무를 당장 베어내거나 제초제를 뿌리면서 단기적인 이득을 취한다. 근시안적인 편견에 여성 과학자를 대하는 편견까지 더해지니 만만치 않은 여정이다. 생명의 본성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이를 증명하기 위한 그녀의 싸움이 시작된다.

영어로 제시되어 해석하지도 못할 참고 문헌의 기록을 보며 찡함을 느낀다. 34페이지에 달하는 책장을 천천히 넘겨본다. 연구에 담긴 열정의 땀방울을 가늠한다. 물방울이 모이고 모여 드넓은 바다가 만들어지는 장면을 상상한다. 이 많은 사람의 의지는 거대한 어머니 나무인 듯 한 권의 책을 만들어 낸다.

 

책 안에 촘촘히 기록된 저자의 글이 종이로 만들어지는 나이테 같다. 삶이 고스란히 찍히는 나무의 나이테처럼 말이다. 나무의 삶에는 지우개가 없다. 바람의 온기와 햇살이 머무른 시간이 화석처럼 남는다. 저자의 삶과 열정, 생명을 향한 애정이 고스란히 담긴 책을 보니 거대한 숲을 마주하는 기분이다.

한 사람의 의지가 이렇게 숲을 이루었구나. 장 지오노의 소설 <나무를 심은 사람> 이 떠오른다. 흑백 애니메이션을 다시 찾아본다. 소설인지 다큐인지 경계가 애매하여 실제로 일어났음 직한, 정확히 말하면 일어났었기를 바라게 되는 작품이다. 볼 때마다 뭉클하고 묵직한 메시지를 안는다.

나무라는 존재가 생명에 대한 경외감을 전해주는 이유는 무얼까. 끊임없는 나눔에서 그 이유를 찾는다. 나눔이 이루어지는 연결 통로, 저자의 놀라운 발견을 <네이처>에서는 우드 와이드 웹(wood wide web)이라 칭한다. 인터넷 네트워크처럼 나무들이 땅속 세계에서 거미줄처럼 얽힌 채 메시지를 주고 받으며 협력한다는 사실이다.

아카시아 나무들은 위험한 상황이 닥칠 경우, 그들만의 소통 방식으로 향기를 퍼뜨려 이웃 나무들에게 메시지를 전한다고 들었다. 서로 다른 종의 나무들은 빛을 두고 경쟁하지만 동시에 탄소를 공유하면서 협력하는 삶을 이어간다. 가문비 나무에서 출발한 저자의 연구는 미송과 자작나무, 오리나무로 영역을 넓혀가다 숲 전체의 연결망으로 확장된다. 그 중심에는 진균 네트워크가 존재한다.

 

진균은 '진짜 균'이라는 의미로 곰팡이를 가리킨다. 이들은 광합성을 할 수 없으므로 기생 생활을 한다. 균근은 곰팡이의 균사와 식물 뿌리의 상호공생체를 지칭하는 용어다. 균근균은 효모, 버섯을 포함하는 균류의 10%를 차지한다고 한다. 균근균은 많은 식물종과 공생을 한다고 알려져 있다.

식물의 95%는 대부분 균근성이라고 한다. 흙 속에 뻗어있는 뿌리만으로는 생존이 불완전하다는 의미이다. 촘촘한 균근으로 땅속의 물이 식물의 뿌리에 전달되면, 식물은 그 보답으로 진균에게 영양분의 일부를 건네준다. 완벽한 공생이다.

균근균은 크게 두 가지 부류로 나뉜다. 첫째, 외생균근으로 실처럼 생긴 균사가 식물 뿌리의 표피를 둘러싼다. 식물 세포 밖에서만 존재하고 뿌리의 안쪽까지는 침투하지 않는 균근이다. 둘째, 수지상균근은 나뭇가지 모양으로 뿌리 안쪽까지 뻗는다고 한다. 80% 이상의 육상 식물이 수지상균근균과 공생한다고 전해진다.

나무와 진균의 공생 관계에 나무들 사이의 공생이 더해진다. 홀로 자라는 뿌리는 잘 자라지 못한다고 한다. 에너지와 자원을 공유하며 다른 나무나 진균과 하나의 시스템을 이루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무도 저 혼자 자라지 못한다. 인간이 그러하듯이. 결국 인간 세계처럼 숲 역시 긴밀한 시스템으로 생명을 유지한다는 거다. 저자가 존경스러운 건 이 모든 사실을 사전 지식 없이 오롯이 실험으로 밝혀냈다는 점이다.

 

576쪽에 이르는 두께에 비해 실험 내용을 따라가기에는 예상보다 난해하지 않았다. 종종 전문적인 실험 과정이 등장하지만 나무보다는 숲 전체를 이해한다는 마음으로 접근한다. 다만 '묘목이 찾아낸 붙어서 자랄 토양은~' 처럼 일부 문맥이 어색하며 사소한 오타가 눈에 띈다. 문체에 익숙해지면 점차 나아지지만 매끄럽지 않은 노면을 걷는 듯 시선을 멈추곤 했던 과정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천천히 저자를 따라갔다. 속도를 내려야 낼 수 없었다. 듣도 보도 못한 버섯 이름이 꾸역꾸역 등장하기 때문이다. 세상이 이리도 버섯 천지였던가. 느타리, 양송이, 표고, 팽이 등 슈퍼마켓에 널린 버섯은 병아리 오줌이었던 거다. 애주름버섯, 비단그물버섯이 뭔지, 식용인지 독버섯인지 지식백과와 이미지를 찾으며 산책 걸음이 된다.

비글이 야외 변소에 빠져 구덩이 옆 땅을 판 이야기가 등장하는 장면에서는 토양의 구조를 떠올린다. 이론적으로만 알던 기반암-모질물-심토-표토에 대한 묘사가 구체적으로 이루어지니 더욱 생생하게 다가온다.

통나무에 깔리거나, 통나무 틈에 짓이겨지거나, 통나무를 부수려는 다이너마이트에 손이 날아가거나, 나무 절단용 회전 초커에 손가락을 잃거나, 통나무가 등에 떨어져 허리가 굽거나. 거대한 자연과 마주하는 나무꾼들의 삶이 묘사된 장면에서는 야생의 땀 냄새가 훅 끼얹어지는 듯하다.

나무를 대상으로 한 실험 과정에서는 설계부터 실행 단계에 이르기까지 동료 과학자가 된 듯한 기분으로 저자의 탐구 과정을 따라간다. 생물이니 변수가 많아 까다롭지만 그만큼 의미가 큰 작업이리라.

 

생물의 특성이 많이 알려지기 전, 생물은 흔히 동물과 식물의 두 가지로 분류되었다. 동물과 식물의 삶은 흑과 백처럼 서로 다른 영역에 있는 듯 보인다. 삶이 고스란히 기록되는 나무가 아날로그라면 매일 세포가 탈락하고 재생되는 동물은 디지털 생명체에 가깝다. 동물인 나의 몸을 이루는 세포는 태어났을 때 지니고 있는 그것이 아니므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무의 삶과 인간의 삶에는 공통 분모가 있다.

외생균근의 진균 균사가 풍성하게 붙어 둘러싸인 뿌리 끝 사진을 본다. 땅속에 투명한 튜브를 넣어 뿌리 사진을 찍을 수 있는 미니라이존트론이라는 기기로 촬영했다는 사진이다. 인간의 피부 아래에서 온몸에 걸쳐 존재한다는 거대 기관이 떠오른다. 유체로 채워져 있기에 피부를 절개하는 순간 허물어져서 결코 온전한 모습을 볼 수 없다는 '사이질'이라는 기관이다. 진균 균사와 사이질 모두 생명을 보호하는 방패처럼 든든한 구조이다.

알츠하이머의 신경 연결망과 균사의 연결망을 비유하는 장면을 넘어서니 시야가 확장된다. 발로 딛고 있는 흙이 거대 생명체의 일부로 여겨진다. 지구라는 존재의 뇌 속에 식물 뿌리와 균사가 얼기설기 연결되어 있는 듯이.

생물 다양성을 접하면서 학교의 아이들을 떠올린다. 각각의 학급은 모범생과 사랑이 더 필요한 아이들이 분포하는 군집이다. 다양한 아이들이 섞여있는 공간이 숲을 닮아있다. 숲과 더불어 자라나는 나무들처럼 어쩌면 아이들도 서로 다른 방식으로 갈등을 해결하면서 성숙하는 게 아닐까.

 

거친 피부를 두른 채 성숙하는 나무를 보며 어머니를 품고 있는 비너스를 연상한다. 청순가련형이나 매끈한 몸과는 거리가 먼 투박한 몸통은 군데군데 벗겨지고 패이거나 갈라져 있다. 고스란히 새겨진 삶의 굴곡이 어머니의 그것과 닮아있다. 숲을 만드는 근원, 어머니 나무 위로 나의 어머니가 겹친다.

내 생명의 근원이 사그라드는 걸 지켜본다는 건 필연적으로 다가오는 거대한 슬픔을 마주하는 일이다. 이 책에서 본 어머니 나무처럼 나의 어머니도 모든 걸 다 내어주고 언젠가는 자연으로 머무시리라. 그게 자연이야, 이게 자연스러운 거야,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심장을 다독인다.

모든 사물에는 언어가 있는지도 모른다. 소립자는 끊임없이 진동하며 소리는 진동이니까. 가청 주파수에 포함되느냐 아니냐의 차이일 뿐이리라. 나무의 언어를 상상하며 드넓은 지하 세계를 그린다. 포슬포슬한 흙 구슬을 얼기설기 꿰어 만든 이불을 덮고 숨 쉬는 공간. 그 안에서 다른 언어로 소통하는 생명들이 분주한 삶을 이어간다.

저자는 언급한다. 이 책은 어떻게 하면 인간이 나무를 살릴 수 있는가에 대한 책이 아니라 나무가 어떻게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가에 대한 책이라고. 말 없는 나무의 생을 알아가는 건 인간의 생을 이해한다는 의미일까.

고요한 침묵 속에서 이루어지는 지난한 걸음을 지켜본다. 나무의 어머니가 걸어왔고 나의 어머니가 걸어왔으며 어머니로서 내가 나아갈 걸음에 마음이 머문다. 뭉클한 감동이 진균에서 뻗어 나오는 균사처럼 심장에 퍼진다. 묵직한 파문이 인다.


p85, 5째 줄: 소량의 물이 느리게 흘러 모인 모이는 움푹 파인 지대 ~ 흘러 모이는 움푹 ~

p104, 첫째 줄: 향 해 향해

p155, 마지막 줄: 태더볼 테더볼

p169, 2째 줄: 자릴 자랄

p174, 4째 줄: 바와 대로 바대로

p180, 12째 줄: 상충부 상층부

p308, 6째 줄: 유층 유충

p318, 마지막 줄: 플루오렌센스 플루오레센스

p320, 첫째 줄: 텔리마크 텔레마크

p328, 밑에서 7째 줄: 식사으로 식사로

p377, 밑에서 10째 줄: 블루베리 블랙베리

p385, 밑에서 3째 줄: 라틴 어 라틴어

p465, 밑에서 11째 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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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비 2024-06-03 16: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이 책을 읽다가 알라딘을 클릭하게 되었습니다. 감동적이고 멋진 독후감 잘 읽었습니다.

여름비 2024-06-03 16: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이 책을 읽다가 알라딘을 클릭하게 되었습니다. 감동적이고 멋진 독후감 잘 읽었습니다.

2024-06-03 17: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최소한의 이웃 - 허지웅 산문집
허지웅 지음 / 김영사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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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라도 말할까.  '저, 버튼을 누르셔야죠.' 이미 골든 타임을 지나친 듯하여 그냥 입을 다문다. 20층 아파트인데 엘리베이터는 10층에서 11층을 넘어가는 중이다. 어색한 침묵 속을 방황하는 나의 눈은 문 왼쪽에 있는 광고 전광판에 고정된다. 졸지에 지하 주차장 층별 청소 일자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는 인간으로 등극한다.

혼자 탄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히려는 순간, 올라타시던 아주머니가 어색한 침묵의 또 다른 주인공이다. 내리는 층의 버튼을 누르지 않으신 그분이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 마자 응당 이루어져야 할 액션이 없음을 인지한 나, '버튼 안 누르셨어요.' 말할까 잠시 망설인다. '에이, 괜한 오지랖 부리지 말자. 알아서 누르시겠지.'

끝내 19층까지 올라가는 동안 어떠한 액션도 없다. 당신의 짐작이 맞다. 문이 열리면서 두 사람은 같이 내린다. 순간 움찔! 인사도 뭣도 아닌 어색한 각도의 고개 숙임 후에 미련 없이 돌아서서 좌우로 갈라진다. 마스크로 만난 이웃의 얼굴을 나는 아직도 정확히 모른다.

여기로 이사 온 게 2020년 2월이다. 앞집 사람들과 나 사이에 삶의 교집합은 없다. 불과 3m도 안되는 거리에서 살아가건만. 물리적인 거리가 가깝다고 무조건 이웃이라 부를 수 없음을 피부로 느낀다. 같은 집에 산다고 무조건 가족이라 말할 수 없는 것처럼.


허지웅 산문집 『최소한의 이웃』은 이웃으로서 어떤 태도로 살아가야 하는 지를 생각하게 만들어주는 에세이다. 저자는 <작가의 말>에서 팬데믹으로 인해 더욱 커진 분노와 불신을 거두고 최소한의 이웃이 될 수 있는 길을 모색하려고 책을 펴냈음을 분명히 밝힌다.

그가 정의하는 이웃은 단순히 옆집 사람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최소한의 나와 너, 혹은 가족을 제외한 불특정 다수를 이웃의 범주에 넣는다. 현실에서, 문학 작품에서, 영화에서 마주치는 다양한 이웃의 모습을 그린다. 우리는 짧은 일화를 통해 이웃의 모습을 보고, 이웃으로 존재하는 자신의 모습을 돌아본다.

군더더기가 없는 문장이 깔끔하다. 최소한의 단단한 뼈대 만을 보는 듯하다. <최소한의 이웃>이라는 제목만큼 내용도 멋지다. 맑고 올곧은 직선으로 만들어진 문장이 심장에 꽂힌다. <작가의 말>이 적힌 두 페이지를 읽었을 뿐인데 벌써 기분이 좋아진다. 허지웅 작가의 힘이다.

그는 무얼 알고 무얼 알지 못하는지 아는 사람이다. 우리말은 특히 조사에 따라 어감이 달라지는데, 그의 표현 중에 가장 마음에 드는 부분은 서술어의 표현 방식이다. '모른다'가 아니라 '알지 못한다'라고 표현한 점이다. 진중한 발자국이 다가오는 듯하여 신뢰감과 겸허함이 동시에 느껴진다.


내용은 크게 6부로 나뉜다. 각 부에서는 최소한의 이웃으로서 지녀야 할 덕목을 소개한다. 덕목과 함께 나름대로 정의한 용어의 의미에 공감이 간다. 1부 '애정'은 '두 사람의 삶만큼 넓어지는 일', 2부 '상식'은 '고맙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 3부 '공존'은 '이웃의 자격', 4부 '반추'는 '가야 할 길이 아니라 지나온 길에 지혜가', 5부 '성찰'은 '스스로 돌아보아야 한다는 고단함', 6부 '사유'는 '주저앉았을 때는 생각을 합니다'에 이르기까지.

각각의 에피소드는 서론-본론-결론이 깔끔하게 드러나는 구성을 지닌다. 여기에 감성이 더해지니 독자의 심장이 반응을 한다. 감성적인 논설문을 보는 듯하다.

도입부의 제목과 의미가 멋져서 내용을 읽기 전에 살짝 긴장을 한다. 막상 들어가 보면 겉도는 내용에 실망스러운 책을 종종 접한 기억 때문이다. 제목은 번지르르한데 이를 뒷받침하는 내용이 허술하거나 억지로 끼워 맞춘 듯한 경우 말이다. 1부를 읽고 나니 괜한 염려를 했음을 깨닫는다.

제목에 부응하는 내용이 알차게 들어 있다는 점을 이 책의 장점 중 하나로 꼽고 싶다. 구구절절 만연체로 지루하지도 않고, 너무 짧아 허탈감을 주지도 않는다. 한 호흡으로 읽기에 적절한 분량이다. 소제목이 없어도 누구나 제목을 붙일 수 있을 정도로 주제가 뚜렷하다.


이웃을 바라보는 작가의 관점에 공감한다. '서로가 서로를 구원해줄 전능한 힘 같은 건 없지만, 적어도 비참하게 만들지 않을 힘 정도는 가지고 있다는', '우리가 서로에게 최소한의 이웃일 때 서로 돕고 함께 기다리며 희망을 가질 수 있다는', '우리 모두는 결국 서로를 지키는 최후의 파수꾼'이라는 것.

갈수록 사람을 대하는 게 조심스럽다. 예전의 나는 다른 사람들을 함부로 판단하는 인간이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웃음 지으며 온화한 분위기는 다 뿜어내면서 속으로는 음흉하게 상대를 깐 적도 많았음을 고백한다. 종종 오만했던 나를 돌아보던 중이다. 이런 시기에 읽은 책이라 더욱 울림이 큰 걸까. 문장 곳곳에서 느껴지는 신중함과 타인을 바라보는 세심한 시선에 강한 매력을 느낀다.

자살을 바라보는 관점에는 그의 따뜻한 시선이 고스란히 전달되어 마음이 찡해진다. '그들이 생명을 내어주는 건 자신이 가진 것 가운데 그게 가장 무겁고 소중하기 때문이라는 것'.

'아무도 고맙다고 말하지 않음에도 누군가 하고 있는 것들이 기둥이 되어 떠받치고 있기에 하늘은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 '나눌 줄 모르는 둘보다 나눌 줄 아는 하나가 훨씬 행복하다는 것', '누군가를 구하고자 하는 자는 구제될 사람의 자격을 가리는 데 시간을 낭비하지 않을 거라는 것', '이웃은 오직 행동으로 결정된다는 것'.


며칠 전에는 행동이 소리 없는 말임을 깨닫는 순간을 경험한다. 이웃에 대한 책을 읽는 동안, 내내 생각을 하고 있어서 인지 저절로 같은 사무실에서 일을 하는 동료에게 시선이 갔다. 세심하게 관찰하니 이기적인 사람과 그렇지 않는 사람이 눈으로 들어온다고 생각하던 참이다.

지난 화요일, 퇴근 후에 사무실 바닥 왁싱 작업을 한다고 의자를 복도로 내놓고 가 달라는 전달이 왔다. 최소한의 도리는 나의 의자를 내놓고 가는 것이다. 한데 깜빡 잊고 그냥 퇴근해버린 동료들이 있는 거다. 1초를 망설이던 나와 달리 동료 세 명이 망설이지 않고 남은 의자들을 내놓는다. 평소 다른 분들을 자주 돕던 이들이다. 역시 하며 얼떨결에 같이 돕는다.

다음 날, 다시 복도에 있던 의자를 들여놓으면서 바람직한 이웃을 새롭게 발견한다. 업무 분장이 바뀌면서 우리 사무실로 몇 분이 자리를 옮겨오셨는데 그 중 한 명이다. 업무로 오가던 몇 마디 말고는 자세히 알지 못하던 분이다. 한데 나의 의자를 들여놓고 앉으려는 엉덩이를 이 분이 들썩이게 하신다. 아직 출근하지 않은 다른 동료의 의자를 계속 안으로 나르시는 데 조금의 망설임도 없다. 당연하지 않은 일을 당연하게 하던 행동은 어떤 말보다도 강력하게 그를 설명하고 있었다. 이 책 덕분에 친하게 지내고 싶은 유형의 동료를 빨리 발견하게 되었다. 


사람이 살아가는 이야기인지라 책을 읽는 동안 삶을 돌아보는 시간도 덩달아 가졌다. 저자의 생각에 공감하고  많은 문장을 메모했다.

'내가 쓰는 건 글이지만 결국 상대하는 건 사람이라는 것, 그리고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 '나라는 사람의 본질은 내가 저지른 잘못으로 정해지지 않고 그것을 수습할 방법을 결정하는 순간에 정해진다는 것', '변하는 모든 것에는 이유가 있는데 변하지 못하는 것들에는 그보다 더 큰 사연이 있다는 것', '어떤 사람은 3루에서 태어났으면서 마치 자기가 3루타를 친 것처럼 생각하며 살아간다는 것(배리 스위처)', '정답보다 오답에서 찾을 수 있는 게 훨씬 더 많다는 것', '내게 당연한 것들을 당연하지 않게 받아들이는 마음이야말로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될 수 있다는 것', '보이는 것이 늘 진실을 드러내는 건 아니라는 것', '중요한 건 경험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이후의 태도에 달려 있다는 것'.

오랜만에 제대로 매듭지은 결말을 본다. 소설도 아닌 에세이에 구조적인 이야기 전개가 있을 리 없지만, 저자는 '최소한의 이웃'을 주제로 펼친 이야기에 어울리는 결론을 내린다. 깔끔한 음식을 먹은 기분이다.

이제 남은 건 나의 행동이다.  나는 이웃으로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모든 책이 그러하듯이 책 속의 이야기는 독자의 행동으로 마무리된다. 그러므로 저자에게서 시작된 이야기는 아직 끝이 나지 않았다.


p54, 5째 줄: 개재 → 게재

p253, 첫째 줄: 기억하시나요 → ~.(마침표 빠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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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타는 작품
윤고은 지음 / 은행나무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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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내심을 도마 위에 올려놓고 고민한다. 그냥 책장을 덮어버릴까, 투비컨티뉴드할까. 야심차게 책 표지를 넘긴지 근 일주일이 되어가건만 하루 십여쪽을 넘기기가 여간 힘겨운 게 아니다. 목구멍이 부어서 음식을 넘기기 힘든 인간이라도 된 거 마냥 시퍼렇게 눈을 부라려도 글자들을 눈으로 집어넣기가 어찌나 힘이 드는지. 꾸역꾸역 집어 넣었다가도 되돌아가서 다시 읽기를 반복한다. 소설에서 이러기가 쉽지 않은데, . "왜 이 책을 추천하셨어요!" 독서 모임 도서로 추천한 이를 원망조차 할 수 없다. 그게 바로 나라서.

추천의 이유는 그럴싸했다. 불을 연상시키며 강렬하게 시선을 사로잡는 빨간 표지, 미술이라는 장르가 주는 신비감, 흥미진진한 뒤표지의 추천 글, '벌어질 모든 우연에 덫을 설치'했다니! '상상력의 빈곤을 자책하게 만드는 기묘한 설정,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는 놀라운 이야기'라니! 표지에 그려진 푸른 액자 틀이 블랙홀의 중심이라도 되는 양, 그 안에 바탕과 같은 빛깔로 쓰인 제목 '불타는 작품'은 일단 나의 호기심을 강한 인력으로 끌어당긴다.

 

문제는 끌어 당겨져서 입장까지는 했으나 이후로는 이정표 없는 광장에 내던져진 듯 많은 날들을 방황했다는 거다. 고갱님, 마이 당황하셨쎄요? 작가의 목소리가 음성 지원된다. 소설 분량의 절반이 넘어가도록 작품 제작조차 이루어지지 않는다니! 작품이 불타야 하잖아! 설마 마지막에 '그리고 작품은 불태워졌다, '은 아니겠지? 슬슬 불안해진다. 읽다가 그만 두면 의문의 1패를 한 듯 찜찜할 듯하다.

일단 도전하지만 줄거리를 요약하기조차 난감한 소설이다. 배달 알바를 뛰는 생계형 화가인 주인공 안이지가 미국 캘리포니아에 있는 로버트 예술 재단의 후원을 받아 작품을 제작할 기회를 얻는다. 재단의 후원 조건은 하나, 완성작 중 하나를 전시 마지막 날에 소각한다는 거다. 그녀는 작품 열 점을 완성하지만 소각될 작품에 대한 애정을 버리지 못하고 모조작을 만들어 이를 빼돌리게 된다. 여기까지는 평범해 보이지만, 재단 이사장인 로버트가 ''이고 개와의 대화가 이루어지며 소각할 작품을 고르는 주체가 바로 개라는 사실에서 나의 동공은 흔들린다.

 

내용의 분배는 더 당황스럽다. 어떤 소설이든 읽기 전에 대략 전개될 내용을 상상한다. 주인공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다하리라 짐작한다. 불타는 작품을 고르기 위한 예술가의 고뇌가 주제일지도 모르지. 대략 이렇게 생각한다.

분량의 1/3 정도인 101페이지에 이르러 주인공은 재단에 도착한다. 불에 탈 작품은 언급조차 없고 캘리포니아 도시만 불에 타는 중이다. 반복된 어긋남, 소통의 부재를 포함한 상황이 몹시 답답하여 내 마음도 열을 받아 불에 탈 지경이다. 다시 1/3 정도를 지나 240페이지에 도달하니 드디어 '오늘의 개' 연작이라는 작품 주제가 얼굴을 드러낸다. 이제 마지막까지는 100페이지 가량밖에 남지 않았는데 말이다.

한데 주제가 발표된 다음부터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된다. 막판 스퍼트가 시작된 로켓 발사가 이루어지듯 내용 전개는 점차 스피드를 높인다. 발화점에 도달하기라도 하듯 이야기가 휘몰아친다. 느릿한 전개를 불평하던 시간이 무색하게도 후다닥 마지막에 도달할 만큼 몰입한다.

 

물리학자 김상욱이 추천글에서 언급한 것처럼 나 역시 소설의 전개를 따라가며 동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떠올린다. 여왕처럼 군림하는 듯하는 개 '로버트', 말하는 토끼처럼 여왕과 앨리스를 이어주는 통역사들, 카드가 펼쳐지는 이상한 나라같은 도시 Q, 주인공이 무심코 던진 말을 고지식할 정도로 구현하는 그 안의 사람들. 여기저기 튀어나오는 판타지적 요소가 독자를 오묘한 세상으로 데려간다.

어느 방향으로 흘러갈지 도무지 짐작되지 않는 전개와 미스터리한 복선들에 쓸데없는 걱정이 생기기 시작한다. 로버트가 처음의 그 로버트가 맞을까? 로버트는 학대를 당하고 있었나? 로버트가 던진 두 작품 중 주인공이 집어든 건 과연 진품이었을까? 공항에서 샘 옆에 있던 건 로버트였을까? , , 이 많은 물음표를 어찌 다 수습하시려고 하시나요, 작가님? 결국 나는 윤고은 작가의 결론 앞에서 한 방 얻어맞는다. 수습은 내가 해야 하는 거였다. 훌훌 떨어진 로켓의 잔해들을 주워 나의 상상력으로 나머지 퍼즐을 완성해야 했던 거다.

 

로켓 발사가 이루어지는 과정을 문장으로 구현한다면 딱 이 소설로 비유할 수 있으리라. 거대한 몸체에서 정작 우주 공간으로 날아가는 건 맨 꼭대기에 있는 작은 덩이인 것처럼, 작가는 마지막에 인상적인 메시지 하나 만을 강렬하게 남긴다. 질척이며 덕지덕지 붙는 듯한 그동안의 전개는 발사를 위한 준비 과정이었던 걸까. 마지막에는 과감할 정도로 나머지 과정을 훌훌 털어낸다. 지구 중력을 이겨내고 우주로 날아가려는 발사체인 양.

지구 대기권과 우주의 경계선을 일컫는 용어 '카르마라인'이 마음에 남는다. 매일 아침 '오늘의 날씨' 카드를 받는 주인공과는 달리 로버트는 '우주의 날씨' 소식을 받아본다며 카르마라인을 언급한다. 서로의 영역이 다르다면서 말이다. 주인공 안이지는 자신에게서 출발한 말들이 로켓처럼 쏘아올려져 카르마라인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것을 덜어내야 하는지 생각한다. 나는 이 부분이 작가 윤고은의 고민과 맞닿아 있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고민했고, 결과는 적어도 나라는 독자에게는 성공적이었다.

 

지구 대기는 위로 올라갈수록 희박해지므로 우주로 돌입하는 명확한 경계막이 존재하는 건 아니다. 항공 관련 국제기구마다 우주의 시작으로 보는 기준이 다르다. 유럽국제항공우주연맹은 100km, 미국항공우주국은 80km 너머를 우주로 정의한다. 때문에 고도 106km를 다녀온 제프 베이조스는 우주 여행을 한 것으로, 고도 85km까지 다녀온 리처드 브랜슨은 영국인이기에 유럽의 기준에 따라 우주에 다녀온 사실을 인정받지 못한다.

이 책에서 작가가 설정한 카르마라인은 6장부터라고 판단된다. 물론 나만의 기준이다. 6장 이후로 고도를 높이면 드디어 작가가 설정한 우주 공간으로 돌입한다. 거기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올라가는 건 독자의 몫이다.

무엇이 진짜일 수 있는가. 어떤 것을 진짜라고 말할 수 있는가. 미술품 뿐 아니라 문학 작품에도 똑같이 적용되는 주제를 작가는 독자의 우주를 향해 쏘아 올린다. 나머지 이야기들은 로켓이 벗어던진 옷인 양 우수수 물음표 모양으로 떨어진다.

 

멕시코의 미술품 수집가가 143억원의 가치를 지닌 프리다 칼로의 그림을 불태웠다는 뉴스 기사를 본 적이 있다. 그림을 대체 불가 토큰인 NFT형태로 팔기 위해 칵테일 잔에 그림을 고정하고 불태우는 장면을 유튜브 영상으로 공개했다고 한다. 다만 소실된 작품이 원본인지 모조품인지 논란이 일고 있다는 기사다.

작가의 말에도 역시 원본의 기준을 고민한 흔적이 보인다. 그녀는 한 권의 책이 원본의 정체성을 가지는 시점을 명확하게 정의한다. 중력을 이겨내고 독자의 마음으로 넘어가 독자의 마음을 흔들 때, 하나뿐인 진짜가 된다고 말한다. 이 책의 마지막 문장과도 일맥상통하는 생각이다. '불타는 작품만이 진짜라고. 불타고 있을 때, 그 순간의 화력만이 사람의 영혼을 움직인다고. 그런 의미에서 화염을 피해 밖으로 나온 건 진짜일 수가 없다고.'

불타는 작품은 확실히 미괄식이다. 마지막 문장에서 그동안의 전개는 다만 거들었다는 사실을 한순간에 깨닫게 만드는 작품이다. 블랙홀로 들어갔다 화이트홀로 빠져나온다면 이런 기분이 들까.

 

이정표 없는 공간을 걸어가던 초입, 책을 쉽게 던져버릴 수 없던 이유 중 하나는 작가의 뛰어난 표현력이다. 뭔 내용이 이 따위야! 라며 후지다고 치부하기에는 문장의 표현력이 너무 고퀄리티를 뿜어냈기 때문이다. 내용 파악은 되지 않았건만, 좋았던 표현을 한 가득 메모한다.

'별을 보는 사람들이 잠의 입구로 기울고 해를 보는 사람들이 잠의 출구를 찾기 전, 디지털 시계의 숫자들이 한순간 증발해 버린다면 이 바늘 달린 시계들은 그대로 남아 숨이 멎은 시간을 보여준다, 얼핏 보기엔 내 마당에서 개가 뛰노는 것이나 개 마당에서 내가 뛰노는 것이나 비슷해, 작가가 사랑하는 작품을 로버트가 선택하는 게 아니라 로버트가 선택한 작품을 작가가 사랑하게 되는 구조, 그의 그림자가 돌돌 말아두었던 우산을 펼치듯이 커지고 나는 우산에서 톡톡 털어낸 물방울처럼 작고 하찮게 쪼그라든다, 어떤 사람은 미래가 아니라 과거를 고치면서 매일을 살아간다' 는 문장들에서는 대조적인 표현이 두드러진다.

 

기발한 발상에 감탄을 한 부분도 많다. 주인공이 움직이는 경로가 어떤 이동 수단을 사용하든 동그랗고 파란 점으로 요약된다든지, 두 다리가 한 장의 포스트잇처럼 나풀거린다든지, 산책할 개를 고르는 것조차 귀찮아하는 사람들을 위해 만들어졌다는 '오늘의 개' 서비스가 인스턴트 반려 욕구를 극단적으로 보여준다든지.

작가의 말에 나오는 '우리도 책처럼 저마다 원본인데' 라는 문장 앞에서는 보는 순간 찡해진다. 한동안 그 문장이 심장 곁을 맴돈다. 그래, 나의 원본은 바로 나인데 말이지. 예술품으로 말하면 진품인데도 종종 휘말리고 흔들리면서 스스로의 정체성을 잊고 살지 않았던가.

주인공의 상황에 몰입하며 작가라는 직업에 올인하기에는 생계를 유지하기 힘든 현실을 절감한다. 정여울이 해석에서 언급한 것처럼, 작가로서 어떤 작품을 창작해야 하는 건지, 창작자와 관객은 어떻게 소통해야 하는지는 모든 창작자들이 고민하는 문제이리라.

 

똑같은 계단을 올라가면서도 저마다 다른 생각을 한다. 물리학자는 계단의 높이와 몸무게를 이용해서 한 일의 양을 계산한다. 화가는 계단에 비치는 빛과 그림자를 인지하고 입체적인 굴곡으로 표현한다. 음악가는 계단을 밟는 경쾌한 발소리를 듣고 통통 튀는 리듬을 음에 담는다. 추리 소설 작가는 계단 끝에서 이제 곧 발생할 미스터리 사건을 상상할 지도 모른다. 수많은 이들이 자신이 몸 담고 있는 분야의 관점에서 주변 상황을 수용하고 해석한다. 같은 공간을 살면서도 다른 세상을 바라보게 되는 이유는 관점의 차이 때문이리라.

"사람이 어떻게 보고 싶은 거만 보니?" 주변인의 말에, "굳이 취향이 아닌 걸 볼 필요가 있나?" 당당하게 답해왔다. 현실도 충분히 복잡하므로 선택할 수 있는 문화 생활 만큼은 좋아하는 요소들을 누리고 싶어서이다. 이런 생각을 책에서 만큼은 예외로 적용해야 할 듯하다. 고정 관념의 중력에서 벗어나 카르마라인을 넘어서면, 거기, 상상도 하지 못했던 새로운 우주를 보게 될 테니까. 다른 세상이 궁금하다면, 다른 세상을 살고 싶다면.

 

p87, 3째줄: 있냐느고 있느냐고

p260, 중간: 배변욕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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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익병을 말한다 - 피부과의 역사를 바꾼 함익병의 직설
함익병.지승호 지음 / 비온뒤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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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체에서 가장 넓은 장기, 피부다. 제주도 해녀가 입는 잠수복을 떠올린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온통 검정 스키니스러운 천으로 둘러싸인 옷 말이다.

피부라는 옷을 전체적으로 인식해 본 적은 없다. 온몸을 구석구석 세밀한 시선으로 탐색한다. 지형으로 비유하면 파란만장하다. 어두운 얼룩과 작은 골짜기와 울퉁불퉁한 모래알들이 흩어진 얼굴, 왼쪽 발바닥은 군데군데 보호막이 벗겨져 있다. 양쪽 발뒤꿈치와 손끝은 사막이다. 윤기 좌르르 흐르는 비옥한 토양이 드물다. 전체적으로 건조 지형이다.

얼굴만은 깐 달걀이었던 적이 있었었었건만 까마득한 대과거이다. 시간의 공격 앞에서는 속수무책이 되나 이제는 까지 않은 신선한 달걀 표면이다. 거칠어졌다. 관리를 좀 할 걸 그랬나 때늦은 뒷북을 친다. 피부에 관한 진실을 말해주는 책을 읽으니 그나마 위안이 된다. 피부는 타고 난다는 점, 전적으로 유전적인 요소가 많다는 사실이다.

 

함익병을 말한다는 전업 인터뷰어 지승호가 피부과 의사 함익병을 인터뷰한 대담집이다.

인터뷰 작가 지승호의 글은 몇 번 접한 적이 있다. 들어가는 글에 시상식 수상 소감처럼 책이 나오기까지 관여한 모든 이들의 이름을 빠짐없이 언급하는 사람, 숨어서 일하는 이들의 노고를 아는 세심한 작가다. 독자가 원하는 방향으로 대화를 이끌어 가려운 데를 긁어주는 사람, 평소 그에 대해 가지고 있던 이미지다.

솔직히 함익병이란 이름은 처음 들어본다. 지나가던 직장 동료가 책 표지를 보더니, "! 이 사람~!" 한다. "유명한 사람이예요?" ", TV 예능 프로그램에 많이 나왔던 의사잖아요." 자연스럽게 그의 이름을 언급하는 말을 들으며 유명인인가 한다. 드라마에 한 번 꽂히면 줄기차게 본방을 사수하는 드라매니아지만 다른 TV 프로그램은 뉴스나 볼까 잘 보지 않으니까. 주문한 책을 받아보고 나서야 피부과 의사라는 사실을 알게 된 나에게는 오히려 인터뷰어인 지승호가 익숙하다. 졸지에 작가에 대해 아무런 배경지식 없이 오롯이 글로만 알아가는 기회를 갖는다.

 

6장으로 편성되어 있지만 내용은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 3'피부에 헛돈 쓰지 마라'4'피부, 무엇이든 물어보세요'에서는 피부 관련 지식을 언급한다. 피부과 전문의로서 피부 질환이나 상식에 관해 일반인들이 잘못 알고 있는 내용을 정확하게 짚어준다.

둘째, 1'함익병을 말한다'6'함익병이 말한다'에서는 인간으로서 삶을 살아가는 태도와 세상사에 대한 가치관을 엿볼 수 있다.

셋째, 2'대한민국 피부과의 역사를 바꾸다'5'호통왕 함익병'에서는 피부과 의사라는 직업을 선택하고 개업을 하기까지의 과정, 의료계의 현실, 직업인으로서 의사의 입장을 밝힌다.

피부 건강을 위해 함익병이 언급한 노하우는 한결같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고 골고루 잘 먹고 운동을 열심히 하고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것. 몸을 건강하게 유지하기 위한 실천 요소와 일맥상통한다.

 

인터뷰 내용 만으로도 한 인간적인 면모를 아는 데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어떤 사안에 대한 그의 견해를 듣다 보면 컴퓨터에 사용되는 단 두 가지 숫자, 01을 보는 듯하다. 그의 사고 체계는 깔끔한 알고리즘을 연상케 한다. 머릿속을 디지털화시키고 계량화시킬 줄 알면 복잡한 문제를 풀어가는 데 쉽다는 말에 공감한다.

최초로 레이저를 도입하여 피부과의 역사를 바꾸기까지의 과정에서 삶에 적극적으로 도전하는 자세를 배운다. 절박하면 두려움이 없어진다며 과감한 선택을 하는 결단력이 보인다.

주관이 확실하며 확고하게 자신의 의지를 믿고 행동하는 사람이다. 그런 성향이 말에서 드러난다. 어투와 내용뿐 아니라 문장의 배열 곳곳에서 그가 묻어 나온다. 어떤 성향의 사람인지 짐작해 본다. 요즘 유행하는 MBTI로 표현하면, 100%에 가까운 T가 포함된 ESTJ 유형이라 말할 수 있을까.

 

피부 질환에 대하여 상담을 받은 기분이다. 피부 관련 궁금증을 많이 해소한다. 감성적인 내용 없이 팩트만 말하니 오히려 편하다. 이렇게 명쾌하고 단순하고 시원할 수가! 의사로서의 행동 기준이 명확해 가족에게 할 수 있는 처방이라면 환자에게 권한다는 말에 신뢰가 간다.

피부 노화를 막기 위해 자외선 차단제나 보습을 말하지만 무엇보다 정신적인 안정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역시 만병의 근원은 스트레스인가. 거의 모든 발병의 원인으로 안 끼는 데가 없는 걸 보니! 릴렉스, 릴렉스가 필요하다.

그는 아토피 피부염, 제모, 여드름, 피부 노화 등 우리가 피부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왜곡된 지식을 바로 잡아준다. 가장 인상 깊은 내용은 각질이 제거 대상이 아니라 보호 대상이라는 거다. 주변에서 선크림, 아이크림은 꼭 발라야 한다고 자주 말해주지만 귀찮아서 제대로 바르지 않았다. 50대 중반이 되어서야 얼굴 피부에 위기의식을 느낀다. 그나마 선크림은 그럭저럭 바르는 편이지만 각질 제거도 해야 하나 망설이던 차이다. ! 안도의 숨을 쉰다.

 

직업인으로서 의사는 돈만 밝히는 것이 아니고, 돈을 밝히는 거라고 당당하게 말한다. 냉철하게 보면 무한한 봉사를 요구하는 거 자체가 무리이다. 어떤 직업에 종사하든 사명 의식은 있어야 하지만 직업을 갖는 중요한 목적은 생계를 유지하는 거니까.

의사로서의 고충을 말해주는 진상 환자의 사례를 접하며 작은 깨달음을 얻는다. 비교적 양호한 환자였지만 나 역시 불필요한 말을 간혹 했던 듯하기 때문이다. 증상을 듣고 정확하게 병을 진단하여 고쳐주는 게 의사의 역할이다. 이 과정에서 증상과 관계없는 말을 하는 건 본질을 흐리며 병을 낫게 하는 데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의료보험 수가를 듣고 그동안 지불한 돈에 비해 너무 많은 기대를 하고 있었구나 싶었다.

대학 병원에서 아버지의 뇌 건강 상태를 파악하기 위해 여러 검사를 권유받아 실시했던 기억이 난다. 유난히 검사를 많이 했던 이유가 돈과도 관련 있다고 생각하니 의심의 눈길이 간다.

 

세상 안에서 굳건하게 자신의 위치를 지키는 인간으로서의 자세를 보여준다.

왼쪽 눈으로 보면 왼쪽이 먼저 보이고, 오른쪽 눈으로 보면 오른쪽이 먼저 보이는 차이일 뿐이라며 사물의 본질을 언급한다. 소위 좌파와 우파도 편견 없는 시각으로 바라본다.

젊은 독자들에게 전하는 메시지를 보며 '그 답다'고 생각한다. 생을 관통하는 일관된 흐름이 있어야 하며 자신이 한 말에 마지막까지 책임을 다하는 삶을 사는 젊은이가 되었으면 한다고 당부한다.

문장에 담긴 내용과 어투는 그에 대하여 많은 걸 알려준다. 너무 직설적이고 비판적인 면모가 있어 초반에는 다소 거부감이 들었지만, 고유의 성격으로 인정하니 이해된다. 한 사람을 알아가는 데 책 한 권으로는 어림도 없음을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익병이란 사람을 조금은 알 것 같다. 누가 보지 않아도 바닥에 떨어진 휴지를 줍는 작은 행동으로도 인성을 판단할 수 있는 것처럼.

 

동네에 있는 내과 두 군데에 가본 적이 있다. 한 분은 나에게 몇 마디 묻지 않고 말을 유려하게 잘하신다. 또 한 분은 다소 무뚝뚝하시지만 증상을 디테일하게 물어보신다. 언제부터인가 후자 쪽으로 발길이 가게 되었다. 은연 중에 신뢰감을 가졌던 듯하다.

어제는 감기 증상으로 그 병원에 갔다. 의사는 질병을 고치기 위해 필요한 말만을 한다는 그의 말이 떠올랐다.

"어디가 불편해서 오셨어요?"

"아침에 일어나면 목이 아프고 콧물이 나요."

"언제부터 그런 증상이 나타났나요? 두통이나 몸살이나 설사는요?"

청진기를 등에 대고 여러 군데를 짚으면서 호흡 소리를 들어보신다. 이성적으로 의사 선생님의 말씀을 분석하니 곁가지 없이 병의 치유를 위한 길로 직진하고 있었다. 나 역시 질문에 부합하는 답만 한다. 진료는 2~3분 만에 클리어된다. 스마트한 환자가 된 듯해 뿌듯했다.

 

삶에 소신을 가진 그를 보며 나의 삶을 돌아본다. 건강해지는 방법을 말하는 그를 보며 건강을 돌아본다. 기대하지 않기에 실망도 없다는 그의 생각에 합리적이고 깔끔한 사고방식을 배운다. 그는 퍼즐 맞추기를 할 때 한 칸의 여유가 있어야 뭔가 새로운 시도를 해볼 수 있다고 말한다. 삶의 퍼즐을 완성해 가며 늘 한 칸의 여유를 가지는 삶을 꿈꾼다.

마음이 건강해야 몸이 건강하고, 몸이 건강해야 마음도 건강하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이 둘은 연속적인 연결 고리를 갖는다. 몸에 좋은 담백한 두부를 먹은 기분이다. 음미할수록 고소한 맛이 난다. 그들이 나누는 대화를 관망하며 몸과 마음을 돌아보는 시간을 보낸다.

누군가에게 말해질 수 있는 대상이 되고 싶다. 중력장에서는 휘고 나머지 공간에서는 직진하는 햇살처럼 융통성을 보이면서도 올곧게 빛나는 삶을 살고 싶다. 몸을 덮고 있는 스킨처럼 나의 삶을 감싸고, 촉촉한 얼굴로 만들어주는 스킨처럼 부드럽고 자연스럽게 나이 들고 싶어졌다.

 

p54, 5째 줄: 풀어가는데 풀어가는 데

p74, 밑에서 2째 줄: ,어떻게 , 어떻게

p83, 밑에서 2째 줄: 반말하는데 반말하는 데

p87, 밑에서 6째 줄: 묻는 데로 묻는 대로

p240, 마지막 줄: 마침표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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