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뜬금없이? 소설이라면 인물, 사건, 배경 등을 설정하고 전체적인 플롯에 따라 써 내려가야 하는 거 아냐?

 

-일반적인 문학작품의 장르에서는 그렇지. 근데 그 장르라는 게 말이야. 소설, , 수필 등으로 구분되는 틀이 처음부터 있었던 건 아니잖아. 어차피 문학은 창작이야. 세상에 없는 장르 하나쯤 추가되는 거, 썩 나쁘지는 않잖아?

 

-그래서 그, ‘조각 소설이란 게 뭔데?

 

-조각 케이크 알지? 비슷한 맥락의 문학 버전이랄까?

 

-문학? 뭐가 그리 거창해?

 

-카메라도 자동, 수동, 폴라로이드 등 다양한 종류가 있지? 케이크도 원통형만 있는 게 아니라 조각 케이크도 있잖아. 조각 피자도 있고. 드라마 영상도 2~3분짜리 클립 영상이 있는 것처럼. 일종의 조각 글들이 담긴 소설집인데 아주 짧은 장면만 등장한다는 거지. 결정적인 장면을 뜯어낸 한 장의 페이지를 보여주는 거지.

 

-인물도 사건도 제각각이라면 그게 잡글과 무슨 차이가 있겠어?

 

-어차피 독자들이 한 편의 소설 전체를 다 흡수하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고 봐. 각자 처한 상황에 따라, 자신이 가지고 있는 배경지식에 따라 전혀 다른 소설로 받아들이지. 모든 사람의 마음이 작가가 의도한 주제대로 움직이지는 않으니까. 주제와는 전혀 연관이 없는 사소한 표현 하나가 어떤 이의 마음에는 선명한 자국을 남길 수 있거든. 글의 예측 불가능성이자 매력이지.

조각 소설이란 각기 다른 음식이 차려진 소규모 뷔페식당이라고 생각하면 돼. 양이 많다고 해서 모든 이들에게 만족할만한 식사가 될 수 있는 건 아니니까. 아니면 간편하게 먹는 디저트 정도의 개념일 수도 있고.

너는 우리의 기억이 디지털이라고 생각하니? 아날로그라고 생각하니?

 

-소설 얘기하다가 갑자기 기억은 뭔 소리야?

 

-갑자기가 아니라 다 아우를 수 있는 얘기야.

 

-시간은 계속 흘러가고 우리는 끝없이 살아가니까. , 아날로그 아닐까?

 

-그럴 수도 있지만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면 디지털적인 요소가 많아. 예전 생각을 하면 어떤 장면들이 단편적으로 조각조각 떠오르지 않니? 앨범 속에 끼워진 사진처럼 말이야. 그 사진이 짧은 동영상처럼 몇 분간 움직일 뿐이지.

우리의 기억이라는 거, 일종의 짤막한 소설 같은 거라 생각해. 과거 얘기를 하는 사람들은 비꼬아서 말할 때 이러잖아. 소설 쓰고 있네~ 하고. 그거 정말 적절한 표현이지 않니? 그 기억에는 자신이든 자신이 관찰한 제삼자이든 주인공이 등장해. 사건이 있고 당연히 배경도 존재하지. 기억을 보강하기 위해 더 오래전의 사건도 끌어오는 플롯을 만들기도 하고. 이게 흥미로운 건 똑같은 기억이라도 회상 시점에 따라 주제가 달라진다는 거지. 홀로그램처럼. 똑같은 사람의 것인데 해석하는 시점이나 감정 상태에 따라 사랑이라는 주제에서 순식간에 증오로 변신하기도 하지.

내가 쓰고 싶은 조각 소설은 그런 기억의 소설 버전이라고 보면 돼.

 

-그런 짤막한 글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까?

 

-책을 읽을 때마다 가끔 생각해. 책을 통해 마음의 위안을 얻으면 참 좋겠다 싶은 이들에게 독서의 세계란 게 너무 길고 어렵고 거대한 세계가 될 수도 있겠구나. 세상에는 삶을 펼쳐내느라 종이 한 장 펼치기 어려운 사람들이 참 많은데 말이지. 모든 사람에게 거대한 바닷물이 필요한 건 아니니까. 아주 목마른 상태에서 황량한 사막을 걸어가는 이에게는 한 모금의 물만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살아가기 급급한 사람들이 너의 글을 볼까? 책 한 장 펼치기 어려운 노곤함 속에서? 네가 쓰는 글이 무슨 의미가 될까?

 

-그렇긴 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연의 힘을 믿어보고 싶어서. 새벽에 갑자기 깨어났는데 마음 둘 곳이 없어 허허로운데 우연히 클릭해서 읽은 나의 글에 공명하기를 바라는 거지. 전자레인지가 물 분자와의 공명으로 음식을 데우듯이 누군가의 마음이 따뜻해진다면 그걸로 충분하지 않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내 앞의 하얀 종이가 문득

내 마음 같아질 때가 있다

 

아득하게 펼쳐지는 여백에

마음 한 조각 던져놓지 못하고

마침표 하나 찍어보지 못하고

온통 공허로 가득한 공간이라니

 

아득한 눈밭을 걸어가듯

몇 발자국 떼어보다 되돌아오고

꾸역꾸역 다시 걷다 뒷걸음치고

투명한 맘으로 뒤덮인 공간이라니

 

내 앞의 하얀 종이가 문득

먹먹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불빛도 잠이 들고
소리도 잠든 시간
잠들었나 싶더니
깨어나는 마음이라니

잊자
잊자
잊어버리자
있는 힘껏 밀어내도

잊은 듯
잊어버렸나
또 다시 다가오니
자꾸만 내게 오니

심장을 철썩철썩
감정은 파도일까
쉴새없이 달아났다
쉴틈없이 차오르니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이불 옷 머리끈 양말 머플러 수건

비누 샴푸 린스 로션

칼 국자 수도꼭지 냉장고 손잡이

고무장갑 비닐포장지

빗 플라스틱 통

 

그리고  

물 파 쌀 달걀 치즈 햄 식빵 딸기 김 김치  

 

살아있지 않은 대상들이

오늘 몸에 닿은 전부

 

한때 살아있던 존재들이

그나마 내 안으로 들어와

텅 빈 위를 채웠구나

시린 몸을 데웠구나

 

살아있는 존재와 닿는다면

작은 온기나마 스며든다면

텅 빈 마음이 채워질까

시린 영혼이 데워질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시들어버린 파단인 양

비스듬히 누웠어도

매서운 바람 앞에

초록빛은 여전해 

 

겨우내 기다린 시간

차곡차곡 모았다가

한여름 보랏빛 기쁨

톡톡 터뜨리는 걸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