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견자들
김초엽 지음 / 퍼블리온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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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척질척 장마가 시작을 알리던 날, 빗물과 36.5도의 컬래버로 그들이 탄생한다. 나의 최애 운동화를 장악한 채 드러누워 있는 그들을 꾸깃꾸깃 신문지 몇 장으로 물리칠 수 있으리라 착각한 순간도 있다. 호시탐탐 상시 대기 중이던 생명체의 위력을 얕잡아 본 잘못이 크다. 신문지를 시작으로 균류와의 사투가 시작된다.

1단계 신문지 공격이 실패하자 2단계 손빨래를 시도한다. 뽀득뽀득 쓱싹쓱싹, 세탁기 탈수, 바지걸이에 한 짝씩 매달아 거실에서 우아하게 날개를 펼치고 있는 빨래 건조대에 건다. 선풍기 모가지를 상모처럼 돌린다. 완벽한 세팅이었다. 주룩주룩 비요일을 지나면서도 얼추 건조되었으니. 노동의 보람을 느끼며 잠시 뿌듯해 하였으나... 이런 된장같은 경우를 보았나! 말끔한 비주얼에 꼬리꼬리한 스멜은 반칙이지. 백기를 든 나는 자본에 굴복한다.

3단계 남편의 단골 세탁소에 맡긴다. 나흘 후 복귀했지만... 끈질긴 꼬리꼬리가 꼬리처럼 들러붙어 있다. 5천원이 무색하게도 굳건한 존재감을 뿜어낸다. 터덜터덜 패잔병이 된 나. 괜스레 뾰족해진 화살이 운동화 딜리버리를 향한다. 꼬리꼬리를 언급하지 않고 그냥 맡겼다는 말에 "맡기면서 냄새가 난다고 얘기 좀 하지." 푸념한다.

그날 밤, 아침저녁으로 남편 등에 발라주던 연고를 슬그머니 모른 척하는 소심한 복수를 한다. 거울 앞에 앉아 지난 며칠간을 냉철해진 이성으로 돌아보는 지금, 과녁의 방향이 잘못되었음을 인지한다. 나 대신 운동화를 맡겨준 당신에게 고마워하며 여전히 운동화를 점령하고 있는 균류를 향했어야 함을. 내 운동화가 그렇게 좋은 거니.

 

<파견자들>은 균류와 비슷한 속성을 지닌 외계 생명체와 인간과의 소통을 다룬 SF 소설이다. 미래의 어느 날, 우주에서 날아온 그들은 범람체로 불리며 놀라운 속도로 지상을 점령한다. 그들은 부분이면서도 하나의 거대한 신경망으로 존재한다. 대가리도 없고 팔다리도 없고 곰팡이의 균사처럼 복잡한 연결망을 이룬 채 접촉하는 생명체를 흡수하면서 뻗어나간다. 결국 인간들은 지하로 내몰린다.

책을 펼치기도 전에 겉표지의 강렬한 색채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노랑, 빨강, 초록빛이 어우러진 꽃을 닮은 식물들. 빛깔은 화사한데 분위기는 기괴하다. 어쩐지 느낌이 쎄하다. 살랑살랑 꽃향기가 퍼지는 게 아니라 짙고 습한 냄새가 뿜어져 나오는 듯 음산하다. 음지 식물이 양지로 나오면 이런 분위기가 날까. 아니, 아니, 음지 식물이라 일컫기에는 지나치게 화려하다. 그렇다고 양지 식물이라 여기기에는 극히 축축하다. 음지와 양지 모두를 차지한 채 사방으로 뻗은 몸을 척 걸쳐 놓은 무법자를 떠올린다.

물끄러미 바라보니 가운데 그려진 꽃이 낯설지 않다. 세상에서 가장 키가 큰 꽃으로 알려진 '타이탄 아룸'이다. 3m 정도, 무게 100kg가량, 꽃이 필 때 36도의 열을 발산하며 1km까지 악취를 퍼뜨린다는 거대한 꽃 말이다. 무슨 내용의 이야기일까. 껍질만으로 알맹이를 상상해본다. 내용과 연관된 그림일 텐데. , 제목 <파견자들>과 그림의 연결 고리는 뭘까. 도통 짐작이 가지 않는다. 당혹한 설렘을 안고 김초엽이 만든 세상의 문을 연다.

 

소용없으리라 짐작이 가면서도 세탁소에 전화를 시도한 나는 당혹스러움을 느낀다. 돌아온 답변은 허탈하다. "요즘 장마철이라 그런가 보네." "그러게요. (그래서 전문점에 의뢰한 거 아닙니까.)" "햇빛에 한 번 널어보세요." "...(그럴 거면 왜 맡겼을까요.)" "다음에는 좀 더 신경 써서 해드릴게요."". (다음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시나 봅니다.)"

혹시나 싶어 전문가가 흘린 멘트에 기대어 햇빛에 다시 널어본다. 하아. 내가 왜 그랬지. 비리비리한 장마철 햇빛에 근육질 파워를 기대한 내 잘못이 크다. 꾸리꾸리로 창대해지려는 꼬리꼬리, 너를 어쩌냐. 균류에게 화를 낼 수 없는 헛헛한 마음을 안고 재야에 떠도는 민간요법을 미친 듯이 줍줍한다. '운동화 냄새, 장마철 운동화, 운동화 세탁, 운동화 냄새 제거...' 운동화를 주인공으로 '냄새''세탁' 검색어의 미세한 변주가 시작된다. 햇빛, 삶기, 락스, 과탄산소다, 베이킹소다, 식초 등 살상 무기로 알려진 비방이란 비방은 죄다 끌어모은다.

삶았다가는 세균을 보내고 너덜너덜을 얻는다는 경험담이 눈에 띈다. 운동화 접착제가 열기에 녹는다나. 과탄산소다를 사용한 운동화 사진엔 노리끼리한 얼룩이 보인다. 꼬리꼬리를 보내고 그 자리에 냄새로 들어앉는다는 락스, 이미 실패한 햇빛 등은 탈락. 베이킹소다-식초의 정예 부대만 엄선한다. 적절한 분량 따위는 없다. 성에 찰 때까지 콸콸챱챱 물에 부은 다음, 하룻저녁을 잠재운다.

 

'파견자들'은 지상을 되찾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정예 부대다. 인간이 정착할 지상의 장소를 탐색하거나 범람체를 물리칠 방법을 연구한다. 감염되어 광증을 일으키거나 그들에게 흡수되지 않기 위해서는 저항성이 강해야 한다. 체력적으로도 막강한 지구력이 필요한 직업이라 몇 단계 시험을 통과해야 입문할 수 있다. 이미 파견자의 교관인 이제프 파로딘과 파견자를 꿈꾸는 정태린이 주인공의 양대 산맥이다. 여기에 범람체 덩어리인 ''이 가세한다.

이야기의 흐름이 호기심을 자극하여 매 장면, 전개 방향에 궁금증을 얹는다. 읽다 멈추어도 다시 재생을 시작할 때 이전 내용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서사가 펼쳐지는 속도는 빠르지 않건만 몰입감 있게 진행되어 긴장을 늦출 수 없다. 균류가 퍼지듯 소설 내용이 선명하게 각인된다. 갈증이 일어 물을 찾는 인간처럼 틈만 나면 책을 찾았다.

한 번 꽂히면 나의 머릿속은 온통 그것으로 가득 찬다. <파견자들>을 읽는 동안, 균류를 연상케 하는 범람체와 균류에게 공격당한 운동화 생각이 연결되어 나의 뇌를 점령한다. 더군다나 운동화는 논픽션 당면 과제이므로 운동화의, 운동화에 의한, 운동화를 위한 시스템 모드로 생각이 변환된다. 모든 감각 정보가 운동화를 해결하기 위한 연결망으로 흘러 들어간다. 리뷰도 별반 다르지 않다. 기승전 운동화다. 당신은 지금 뇌 안에 운동화 뭉치가 굴러다니는 인간이 쓴 '운동화--운동화--운동화' 형식의 리뷰를 읽는 중이다.

 

주인공 '태린'의 뇌 안에는 범람체인 ''이 굴러다닌다. 이제프를 포함한 어른들은 연구소에 아이들을 모아 놓고 비윤리적 연구를 시도한다. 범람체를 아이들에게 주입한다. 성장하는 인간의 뇌 안에서 범람체와 인간의 신경 세포가 어떤 상호작용을 하는지 분석하는 실험이다. 더불어 아이들이 성장하면서 광증에 대한 저항성이 어떻게 되는지도 알아본다. 태린은 이 사실을 모른 채 이제프를 동경하며 파견자가 되어 그녀와 함께 활동할 미래를 꿈꾼다.

범람체는 표면 진동과 분자의 확산으로 세상을 감지하고 소통하는 존재다. 말소리를 내지 않아도 된다. 인간과는 다른 감각으로 정보를 주고받는 셈이다. 인간은 소리로 의사소통을 하며 많은 정보를 시각으로 받아들인다. 눈만 뜨고 있으면 세상은 존재 자체로 시각의 대상이다. 반면 눈을 감으면 순간적으로는 세상의 스위치가 꺼진다. 점자 알아보기 활동을 한 기억이 난다. 시각을 감각 하지 못하면 청각이나 피부 감각 등 다른 감각이 민감해진다던가. 미각, 후각 등을 더해 다섯 가지 감각을 떠올리며 소설에 등장하는 생소한 감각을 바라본다.

다른 방식의 삶이 가능하다는 말은 들었지만 다른 방식의 감각이 가능하리라는 상상은 해본 적이 없다. 신경 세포의 기본 단위인 뉴런이 감각된다니! 작가가 창조한 새로운 관점에 평범한 정의들이 허물어진다. 상상의 범위가 대기권을 넘어 우주 방향으로 보다 확장된 듯한 기분이다. '너는 나를 기억하는 대신 감각할 거야.' 프롤로그에 등장하는 문장을 향한 물음표가 서서히 느낌표로 변한다.

 

한 몸을 공유하는 두 개체. ''인 인간 태린의 뇌 안에는 ''인 범람체 솔이 자리한다. 저자 김초엽은 존재의 정체성에 대한 심오한 질문을 독자에게 건넨다. 두 개의 자아가 공존하는 게 가능할까. 이제프를 비롯한 어른들의 답은 명확하게 '아니오'. 그들은 또 다른 프로젝트를 은밀하게 기획한다.

범람체들은 접근하는 대상들을 흡수하며 균류의 모양새로 빠르게 영역을 확장한다. 소설 속에서 묘사된 지상의 풍경과 쓰레기 매립 장소가 겹쳐진다. 몇백 년 지나야 겨우 분해가 된다는 고분자 화합물 덩어리가 점점 쌓여가는 지역 말이다. 수잔 시마드의 <어머니 나무를 찾아서>에 나오는 균근 연결망과 영화 <아바타>를 둘러싼 몽환적인 분위기가 담긴 필터를 끼운 듯 비슷한 느낌이 점점 진하게 뿜어져 나온다.

인간이 떠난 지표면에서 인간이 없던 원시 지구 초기의 모습을 상상한다. 가파르게 증가하는 각종 환경 데이터가 막연함을 선명함으로 바꿔 놓는다. 인간이 지상에서 살 수 없는 순간이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조급해진다.

인터넷 뉴스로 NASA의 화성 탐사 프로젝트를 보면서 상상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화성을 넘어 우주 공간으로 자유롭게 영역을 넓혀나가는 미래가 올까. 머리 위 방향으로 영역을 넓혀가는 인류만 상상하다 지상으로부터 추방되어 땅속으로 들어가게 된다는 가상의 이야기를 접하니 두려움이 살짝 엄습한다. 소설로 박제된 풍경이 미래의 어느 날, 소설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아서.

 

땅속을 벗어나기 위한 방법으로 파견자들은 범람체에 대한 파괴자가 되고자 한다. 일부 감염이 된 인간들을 이용하여 거대한 연결망으로 존재하는 범람체를 전멸시키려는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두 개체의 특성을 모두 지닌 태린은 파견자가 아닌 전달자로 활동한다. 그녀는 솔과의 소통을 통해 범람체와 공존하는 삶을 모색한다.

, , 나의 운동화는 그런 삶을 모색하지 않을 테다. 균류에 의해 운동화에서 쫓겨나 샌달을 전전하고 있는 나의 발바닥에게 옛 터전을 찾아주고 싶단 말이다. 마른 장마가 시작되었다는 기상 정보를 입수한 나는 출근 준비 전에 꼬리꼬리를 소환한다. 두 번의 세탁 코스를 마친 나의 아가는 비주얼만은 이미 백발 오브 백발이다.

이번에는 헹구기만 시도한다. MSG로 퍼퓸샴푸퓨어브리즈를 짜 넣은 다음 휘휘 헹궈준다. 탈수하고 다시 바지걸이에 걸어 앞 베란다의 빨래 건조대에 넌다. 햇빛이 이노무 잔당들을 싹 쓸어가길, 바람이 새로운 공격자를 후 날려버리길 바란다.

퇴근 후, 옷도 갈아입지 않고 베란다로 돌진한다. 흐읍~! 스멜이? ?? 살짝 아리까리하다. 다시, 흐읍! ............ 균류의 끈질긴 생명력을 뤼스펙하는 경험치만 추가한다. 하아. 도대체 왜! 신문지-손빨래(feat. 빨래 비누)-세탁소-햇빛-담갔다 헹구기(feat. 베이킹소다+식초+샴푸). 그동안의 개고생 코스가 다시보기로 주루룩 풀린다. 여기까지가 끝인가 보오~ BGM으로 깔린다.

 

이쯤 되면 한 번 해보겠다는 거다. 나는 균류와의 전쟁을 선포한다. 다시 검색 모드를 가동한다. 베이킹소다를 훌훌 뿌려서 나의 아가를 경극 배우로 만들어서 햇빛에 넌다. 해바라기 딜리버리가 되어 오전에는 뒷베란다에 놓았다가 오후가 되자 앞베란다로 옮기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다. 이번엔? ............ 나노 단위 운동화 입자에까지 침투한 듯 깊은 맛이 우러나는 곰국인 양 후각을 자극하는 존재감이란!

, , 빡치지 말고 이성적으로 원인을 분석해 보자. 온갖 명약을 쳐발쳐발콸콸 들이부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패배했을까. 잠시 과학자 모드를 가동시킨다. ? 틈새시장의 틈을 발견한다. 명약의 효험을 맹신한 나머지 화학 공격만을 시전했던 거다. 빡빡쓱쓱 물리 공격으로 협공을 시도하기로 한다.

베이킹소다, 식초, 세제에다 은둔 생활을 하던 2016년산 운동화 크리너까지 발굴한다. '2016'에서 살짝 멈칫했지만 광표백에 소취 작용이라는 문구를 보고 없는 것보다는 낫겠다 싶어서 동원한다. 성화 봉송 주자로 빙의하여 결연한 표정으로 운동화 솔을 치켜들고 전장으로 향한다. 동그란 목욕 의자에 앉아 초심으로 돌아가서 내 옷보다 더 구석구석 손빨래를 한다. 마지막 헹굼물에 식초를 풀어 혹시나 남아있을 세제 찌꺼기 잔당을 몰살시킨다. 헌 수건으로 정성껏 감싸서 세탁망에 넣은 다음 세탁기로 탈수한다. 이번 건조의 포인트는 속도전이다. 헤어드라이어로 살짝 말리고 신문지를 구겨 넣어 물기를 더 흡수시킨 다음, 바지걸이에 걸어 선풍기 상모를 돌린다.

 

지상에서 늪처럼 퍼져있는 범람체로 흡수된 인간의 몸은 분자 단위로 분해된다. 얼핏 인간이 잡아먹히는 듯 보이지만 외계 생명체가 보는 관점은 다르다. 다만 다른 형태로의 변이가 일어나 다른 형태의 삶으로 진입하는 거라고. 소설은 범람체가 흡수한 인간들의 자아가 여전히 그 집단 안에 존재함을 보여준다. 그런 식으로 범람체는 파이를 키우면서 영역을 넓혀간다. 그들은 개별성과 공공성을 동시에 지닌다. 가상의 존재이지만 어찌 보면 우리 인간에게도 적용할 수 있는 특성이다. 인간 역시 개별적이면서도 인드라망처럼 연결되어 영향을 주고받으니까 말이다.

주인공 태린과 범람체 솔의 공존 상황이 아주 뜬금없는 설정은 아니다. 우리의 몸 안에도 수많은 균류가 존재하고 있을 테니. 다만 균류에게도 자아가 존재한다는 창의적인 발상이 이처럼 매력적인 이야기로 탄생한다. 또한 내가 이 작품에서 높이 평가하는 점은 존재 차원에서 관점의 전환을 시도했다는 거다. 인간 안에 균류가 포함된 현재 상황을 뒤집어 지상을 점령한 균류 안에 인간이 흡수되는 상황을 설정했으며 공간적 배경 역시 지상과 지하를 뒤집어 인간을 지하에 배치한 점이다.

바라보는 세상이 보다 넓어진 느낌이다. 더욱 섬세하게 쪼개져서 감각을 자극하는 세상이 아름답게 다가온다. 선풍기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리는 보송보송한 운동화를 보니 기분이 좋아진다. 얼핏 향긋한 냄새가 희미하게 날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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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돈키호테
김호연 지음 / 나무옆의자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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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거리와 등장인물, 심지어 주제까지 너무나 잘 알지만 막상 읽어본 적은 별로 없는 문학 작품. 나에게 '고전'은 이런 의미였다. '읽고 싶다'가 아니라' 읽어야 하는데'에 가까웠던 책. 당위성은 절실하나 자발성은 거의 제로에 가까웠으니 고전을 읽어내느라 고전한다. 학창 시절의 심장에는 감동의 물결이 출렁일 틈이 없었다. 광활한 삶의 의미를 담기에 나의 그릇은 좁은 데다 경직되어 있었다.  

한데 시험으로부터 탈출하니 백조가 된 미운 오리 새끼를 영접한 기분이다. 우주 공간을 자유롭게 유영하다 별을 마주치면 이런 느낌일까. <데미안>,<오만과 편견>,<노인과 바다>,<프랑켄슈타인> 등 고전 소설을 뒤늦게 읽으며 생경한 느낌을 안는다. 스스로의 동기로 별의 중력에 끌리니 설렘이 깃든다.

인스턴트 식품인 양 시험 공부용 요약본만 휘리릭 맛보던 순간을 벗어나니 비로소 작품에서 우러나는 깊은 맛이 느껴진다. 시간과 공간을 건너온 삶의 경험치가 마음을 보다 유연하게 확장시킨 걸까. 몇몇 고전 소설을 읽으며 슈퍼마켓 매대 위에 누워있는 식자재 대신 생명력을 뿜어내는 실체를 마주하는 듯한 경이를 품는다.


이 책은 고전 소설 <돈키호테>를 모티브로 한 소설이다. 실제로 읽어본 사람보다 풍문으로 명성을 들은 이가 많을 것으로 짐작되는 고전. 나 역시 <돈키호테>를 읽어본 적은 없다. AI, ChatGPT가 일상으로 빠르게 침투하는 시대에 17세기 복고풍의 제목 앞에서 주춤한다. 첨단 미래가 휘몰아치는 마당에 과거를 답습하는 게 의미가 있나.

책 표지에 보이는 비디오 가게 간판과 교복을 입은 학생들을 보니 얼핏 <응답하라 시리즈>와 겹친다. 추억을 말하는 내용인가. 성급한 가설을 앞세우니 문을 열지도 않았는데 살짝 식상하다. 이거 다 아는 맛 아냐. 워~ 워, 어설픈 편견의 끝은 어디까지인가. 세상은 넓고 같은 소재로 펼칠 수 있는 이야기는 무한대로 발산하거늘.

작가는 <돈키호테>의 자유, 모험, 정의(正義), 꿈 같은 요소를 이 작품에 접목한다. 등장인물 역시 돈키호테, 산초, 둘시네아, 로시난테 등에 대응하는 인물들을 설정한다. 30세에 방송국 PD를 그만두고 엄마가 사는 대전으로 온 주인공 솔이 유튜브 채널 '돈키호테 비디오'를 개설하여 15세 때 동네 비디오 가게에서 추억을 만들어주던 돈 아저씨를 찾는 과정이 흡인력 있게 그려진다. <돈키호테>의 21세기판 리메이크 버전이랄까.


뒷부분의 '감사의 글'을 먼저 읽는다. "계속 쓰겠습니다." 마지막 문장이 어찌나 든든한지. 2013년에 작품 활동을 시작한 이후, 적어도 격년에 한 번, 2019년 이후에는 매년 책을 출간한 저자의 약력을 책날개에서 본다. 꾸준함이 주는 신뢰와 함께 뭉클함이 번져온다.

그의 소설 <파우스터>를 읽었을 때 받았던 강렬한 충격이 아직도 생생하다. <불편한 편의점>시리즈에서는 톡톡 튀는 재치에 반했다면 <파우스터>는 어나더 레벨 상상력으로 감탄을 안겨준 작품이다. 괴테의 <파우스트>도 읽어본 적이 없다. 주입식 교육 현장에서 살아온 덕분에 주제부터 등장인물, 줄거리까지 착실히 꿰고 있을 뿐이다. <파우스트>를 모티브로 했다는 말에 원작을 읽어보고 싶은 생각이 강하게 들었던 기억이 난다. 

<파우스터>의 매력에 폭 빠져 주변 사람들에게 여러 번 추천을 했다. 실감나게 상황을 묘사하며 서사를 이끌어가는 글의 힘에 반했다. 머지않아 꼭 일어날 미래인 것만 같았다. 2D로만 접하던 장면을 3D 입체 영상으로 감상한 듯 생생했다. <나의 돈키호테>에서도 작가의 필력은 여지없이 드러난다.


김호연의 작품은 매번 다음 장면을 궁금하게 만든다. 드라마나 영화인 듯 장면과 장면 사이의 쉼표가 명확하며 읽다 보면 영상으로 동시에 재생이 되는 듯하다. 이야기의 흡인력이 상당해서 마지막까지 궁금증을 유발한다.

초반에는 영화 '시네마 천국'이 떠오른다. 비디오 가게, 석유 난로, 예전 영화 등 소설에 등장하는 풍경들에 의식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던 삶의 흔적들이 펼쳐진다. 익숙한 대전의 동네명이 추억을 끌어온다. 예전에 가졌던 것과 놓친 것을 생각한다. 그 옛날 아픔을 꺼내 보이던 친구를 떠올린다. 보이는 것보다 사물이 가까이 있다는 볼록 거울이라도 마주친 듯 훅 다가오던 느낌이 소환된다. 친정 엄마의 반찬을 맛보는 순간처럼 몇십 년을 거스르는 타임머신을 타고 여행을 다녀온 기분이다.

소설 '어린 왕자'도 떠오른다. 여러 행성을 거치며 왕, 가로등 소등인, 학자 등을 만나는 것처럼 학원장, 학원강사, 출판계 및 영화계 종사자, PD 등의 삶을 돌아가면서 서술한다. 저자는 그 과정에서 업계의 모순, 자본주의와 결합한 인간의 본성을 날카로운 풍자와 함께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돈키호테에서 산초로, 다시 세르반테스로. 돈 아저씨는 결국 돈키호테를 창작한 작가인 세르반테스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한다. 산초에서 돈키호테로. 솔이 역시 스스로의 정체성을 찾는다. 이 책은 두 주인공이 나를 찾아가는 여정이 담긴 소설이기도 하다.

작가 역시 글을 통해 자신을 찾아가고 있으리라. 그처럼 몰입감 있는 이야기를 만드는 이가 고전 소설을 모티브로 한 소설을 시리즈로 창작한다면, 고전에 대한 관심이 덩달아 높아지지 않을까. 리메이크 곡으로 원곡이 재조명되는 것처럼 말이다. 원작은 자체로도 이미 훌륭하여 몇 세기 동안 읽히는 것이지만, 두 작품을 비교하는 건 또 다른 재미로 신선할 듯하다. 윈윈 리메이크랄까. 나의 리뷰 역시 당신을 이 책으로 끌어당기는 윈윈 리메이크가 되기를.

내가 원하는 게 뭔지 계속 생각 중이다. 지인들이 퇴직 후 글을 쓰면 되겠다, 책은 안 내냐며 가볍게 말하면 비슷한 무게로 웃어 넘긴다. 사실 책을 내는 데 회의적이다. 현실적으로 독서 인구가 많지 않을 뿐더러 보험 상품을 팔 듯 지인에게 강매하고 싶지도 않기 때문이다. 퇴직 후 인생 2막이 열리면 나는 어떤 모습으로 삶을 이어갈까.


이야기에는 몰입감과 이벤트가 있어야 한다. 약간의 미스터리와 상큼한 디저트처럼 뿌려지는 반전까지. 에필로그를 읽는 순간, 살짝 소름이 돋는다. 주어인 '나'의 주체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프롤로그와 본문 내내 '나'였던 솔이 대신 돈 아저씨가 등장한다.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의 '나의 돈키호테'는 서로 다른 인물을 지칭하게 된다. 소설의 주제를 관통하는 설정이라 판단한다. 우리 모두 서로에게 의미 있는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의미이리라.

이 책에 등장하는 멋진 문장들 중에서 내 마음의 원픽은 '인간은 서로에게 매개체' 라는 문장이다. 돈키호테 비디오도, 솔이도, 돈 아저씨도, 다른 인물들도 서로 얽히면서 영향을 주고 받는다. 소설 밖에서도 러시아 인형 마트료시카처럼 이 소설이 매개체가 되어 나에게 손을 내민다.

마침표가 되기보다 쉼표가 되겠다는 솔이처럼 삶은 문장 부호의 나열인 듯하다. 나는 지금 어떤 문장 부호를 통과하고 있을까. 누군가에게 '나의 돈키호테'라 불릴 순간을 위하여 지금은 내 삶의 모험을 시작할 순간인가. 돈키호테를 열정으로 바꾸어 발음해본다. 나의 열정, 내 삶의 열정... 어쩐지 키보드를 두드리는 손가락이 들썩이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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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이 너무 많은 어른들을 위한 심리학 (20만 부 기념 리커버 에디션)
김혜남 지음 / 메이븐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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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조건 반사에 가깝다. 책을 읽을 때마다 리뷰를 작성하는 건. 나에게 읽기와 쓰기는 열쇠와 자물쇠처럼 세트로 작용한다. 나는 왜 책을 읽는가. 왜 꼭 리뷰를 쓰는가. 마음의 물속을 들여다본다. 일렁임이 고요해지니 깊숙이 숨겨진 의도가 수면으로 떠오른다.

나의 행위를 이끌어온 이유를 이제 알겠다. 나를 알고 싶었구나. 휘몰아치는 비바람에 치여 브라운 운동을 하는 꽃가루처럼 나의 의지와 무관하게 떠다니고 싶지 않았구나. 원하는 방향을 향해 나의 자유 의지로 삶을 확장하고 싶은 바람이 컸음을 깨닫는다.

그럴싸한 포장지를 벗기면 나의 리뷰는 철저히 나의 심장을 향한다. 많은 사람을 위한다든지 사회에 뭔 이바지를 하고 싶다는 거창한 사명 의식 같은 건 없다. 연고를 바르듯 붕대를 감듯 살아오면서 받아온 크고 작은 상처들을 자가 치유하는 개인적인 과정일 뿐이다, 실은.

책이 의도하는 방향과 다른 엉뚱한 목적지에서 마침표를 찍곤 하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리뷰는 나를 위한 재구성이므로. 이 책이 그런 책이었나요? 그런 책이었을리가요. 철저히 제 위주로 뽑아낸 악마의 편집인 거죠. 작가에게서 오징어를 받은 셀프 닥터 쉐프는 당당하게 건더기를 제거하고 오징어 향 첨가 요리를 만들어버린다.


악마의 편집을 위해서는 선행 작업이 필요하다. A4 용지 절반 크기의 이면지와 펜을 준비한다. 책을 읽다 마음에 들어오는 문장을 만나면 종이에 옮겨 적는다. 그때그때 떠오르는 생각이나 의견도 같이 메모한다. 완독을 하면 나의 원픽으로만 이루어진 메모 문장들을 정독한다. 나만의 레시피를 만들어 요리한다. 결국 쭝얼거리고 싶은 생각을 글로 적는 셈이다. 종종 만들어지는 에세이스러운 리뷰에서 작가의 문장은 단지 거들 뿐이다.

예외인 책들도 있다. 작가와 나의 목적지가 같을 때이다. 이 책도 그런 부류에 속한다. 생각이 너무 많은 어른들? 딱 나네! '후회 없는 삶을 살고 싶은 당신에게 해 주고 싶은 말들'이라니! 부제에도 마음이 동한다. 정신분석 전문의가 분야 관련 내용을 적은 책이니 문체만 요상하지 않으면 실망스럽지는 않으리라. 메모 분량이 늘어 12포인트 크기의 글자로 12장을 채웠을 때 예감한다. 악마의 편집이 그다지 필요 없으리라는 것을.

『생각이 너무 많은 어른들을 위한 심리학』은 삶에서 본질적인 고민을 안게 되는 사람들에게 건네는 행동 지침이 기록된 책이다. 저자 김혜남은 각각의 상담 사례를 예로 들어가며 이정표를 제시한다. 30여 년 동안 사람들을 치료한 경험과 스스로의 삶을 통해 깨달은 사실을 서술한다. 사례 별로 등장하는 아무개 씨의 삶과 나와의 교집합을 발견한다. 심리 상담을 받는 내담자가 된 듯 저자의 말을 경청한다.


<스페셜 에디션을 펴내며>와 <Prologue, 후회 없는 삶을 살고 싶다면>에 저자가 하는 말의 핵심이 있다. 바꿀 수 없는 것들에 매달리지 말고 바꿀 수 있는 것에 집중하라는 것, 지금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을 하라는 것, 세상과 사람들을 온몸으로 부딪혀 보라는 것, 그 과정에서 생긴 상처는 당신을 더욱 강하게 만들어 단단한 인생을 만들어줄 거라는 것이다.

저자는 최선의 선택을 하는 방법을 소개한다. 쓸데없이 많은 정보를 모으는 데 힘 빼지 말고 가장 중요한 기준을 네 가지 정도로 줄일 것, '저걸 선택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미련부터 버리고 선택을 최고로 만들기 위해 애쓸 것, 최악의 경우를 떠올려 보면 답이 보인다는 것,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반드시 후회하니 뭐라도 시작해야 그다음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부정적인 사고의 대표적인 패턴에도 공감한다. 첫 번째, 나는 실패자요,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극단적인 흑백 논리이다. 두 번째, 좋은 결과는 우연이고 나쁜 결과는 내 탓이라 생각하며 의미를 확대 혹은 축소하는 경우이다. 세 번째, 나는 쓸모없는 인간이라고 생각하며 사고의 오류에 근거하여 부정적인 자기상을 만드는 경우이다. 다른 사람이 똑같은 실수를 했을 때 그에게 해 줄 말을 당신 자신에게 해 주라는 말이 따뜻하게 다가온다.


나는 걱정이 참 많은 사람이었다. 여기서 중요한 건 앞의 문장이 과거형이라는 점이다. 소심이 디폴트라 온전한 대범을 장착하는 건 불가능하지만 지금은 걱정이 많이 줄었다. 걱정 해소와 관련된 말들이 도움을 주었기 때문이다. 반가운 문장이 눈에 띈다. 걱정의 40%는 현실에서 절대 일어나지 않는 일, 30%는 이미 일어난 일, 22%는 사소한 일, 4%는 우리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일이니 4%만이 우리가 바꿀 수 있다는 내용이다.

저자는 쓸데없는 걱정으로 인생을 낭비하지 않는 팁을 소개한다. 첫째, 통제 불가능한 것과 가능한 것부터 구분하는 것이다. 둘째, 불안은 결코 나를 해치지 못한다는 점이다. 셋째, 지금 당장 무엇인가를 하라는 것이다. 명확하고 확고한 선택으로 결정을 내리는 순간, 걱정의 50%가 사라지고 결정을 실천에 옮길 때 40%가 사라진다는 내용에 후련함을 느낀다.

선택에 대한 멋진 문장도 만난다. '자극과 반응 사이에는 공간이 있다. 그리고 그 공간에서의 선택이 우리 삶의 질을 결정짓는다.' 오스트리아의 정신과 의사였던 빅터 프랭클이 한 말이라고 한다. 음미할수록 멋지다. 두려우면서도 적극적인 의지를 불러일으키는 말이다. 잘못을 하거나 사건이 일어나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이에 대한 태도는 사람마다 다르니까. 그 섬세한 차이가 삶의 스펙트럼을 다양하게 만들어내리라. 


날카로운 화살이라도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만이라는 문장에서 예전에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린다. 현자스러운 이가 타인이 하는 말을 화살로 비유하며 이런 말을 한다. 말의 화살은 당신의 근처에 떨어지지만 직접 당신의 심장을 뚫지는 못한다고. 굳이 화살을 주워서 심장에 꽂는 사람은 그 말을 곱씹으며 속상해 하는 당신 자신이라고. 화살의 유혹을 뿌리치기가 어려웠지만 그 내용을 되새기며 상처를 치유하려 노력한 시간들이 있다.

모든 감정은 옳다는 문장을 보며 나의 감정을 들여다본다. 감정을 두려워하지 말고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라는 말, 일에 대한 비판을 당신에 대한 비난으로 받아들이지 말라는 말을 천천히 보듬는다. 감정 표현법에도 귀를 기울인다. 나는 ~ 라고 느낀다고 말할 것, 격한 상태에서는 공명 현상을 일으키므로 가급적 표현을 삼가할 것, 감정에 충실하되 감정을 너무 믿지 말 것을.

화가 나는 것과 화를 내는 것은 다른 문제라는 문장에 담긴 냉철함을 본다. 화를 다스리는 가장 좋은 방법 6가지를 메모한다. 먼저 숫자부터 셀 것, 타인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지킬 것, 화를 낸 이유는 사실 두렵기 때문이라는 것, 화났을 때는 어떤 결심이나 행동을 하지 말라는 것, 화내는 것을 내일로 미루어 보라는 것, 인생에서 사람보다 소중한 것은 없다는 것이다.   

 

친밀한 관계에 대한 저자의 문장을 지나며 그와의 관계에 새로운 공기를 불어넣는다. 가까워지는 것이 거절당하는 것보다 더 두려울 수 있다는 것, 가깝다는 이유로 나의 방식을 강요하지 말 것, 친밀해지고 싶다면 상처 입을 각오부터 할 것, 가까워졌다고 생각한 순간이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는 것.

'경청'이란 상대방이 지금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말에 들어 있는 마음을 이해하는 작업이라는 말에 코끝이 시큰하다. 방금 그가 건넨 말 너머에 있는 마음을 본다. 당신, 이걸 알아주기 바라는 구나. 말의 껍질을 벗기고 한 뼘 더 들어가니 마주 선 이의 마음이 보인다.

숨을 고를 시간을 만들 것, 상대방이 말하는 도중에 비판하지 말 것,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 감춰진 감정을 헤아려 볼 것, 보디 랭귀지에 더 주목할 것,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만 질문할 것, 피곤하고 지쳐 있을 때는 양해를 구할 것, 듣는 것을 즐길 것, 결정적인 순간에만 말할 것을 타인을 대하는 8계명으로 여기고 마음에 새긴다.

화목한 가정은 싸움이 없는 집이 아니라 싸워도 금방 화해하고 풀 수 있는 집이라는 말, 슬픔을 나누는 방법은 그저 곁에 같이 있어주면서 손을 꼭 잡아 주거나 가만히 안아 주거나 등을 토닥여 주면서 같이 슬퍼해 주면 된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바꿀 수 있는 것에만 집중하는 삶, 잠시 모든 짐을 내려놓고 그냥 나만 챙기는 삶,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삶. 저자가 그리는 풍경을 바라보며 불완전했던 과거를 소환한다. 이상적인 풍경이 다가오기를 간절히 바라며 버티고 또 버텼던 순간들이 스친다. '결코 완벽한 때는 오지 않는 법입니다.' 저자의 문장 앞에서 멈칫한다.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는지 모른다. 바라는 삶을 유예하며 나를 질질 끌고 왔던 건 짐을 내려놓을 용기가 부족했던 까닭임을.

과정으로서의 삶은 완벽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때까지, 그때까지만을 바라지만 '그때'는 오지 않는다. 그때를 좇는 내가 늘 그때보다 뒤에 있기 때문이다. 지금 해야 할 일, 하고 싶은 일을 먼저 생각하라는 저자의 권유는 이런 이유로 가장 현명한 처방이다. 42세에 파킨슨 병 진단을 받고 그로부터 22년을 걸어온 저자가 삶을 대하는 적극적인 태도에 깨닫는 바가 크다.

모든 성장에는 성장통이 따른다는 말, 우리 모두는 자연 치유력을 갖고 있다는 말에서 힘을 얻는다. 마음이 서서히 정리된다. 정리의 본질은 나를 기준으로 중요도를 판단하여 물건들을 재배치하는 것이다. 같은 맥락으로 감정이든 관계든 재배치를 해본다. 영화 <곡성>에 나온다는 대사처럼, "뭣이 중헌디?" 스스로 질문한다. 예전보다 기준이 명확해지니 답을 내리는 마음이 후련하다.


말을 하는 것과 듣는 게 별개일 때가 많다. 타인을 향하는 말은 수학에서의 여집합과 같다. 내 입에서 나오면서도 나를 제외한 마음을 향한다. 한쪽 방향 화살표처럼. 제대로 듣기 위해서는 음원과 마주 서야 한다. 고요한 장소에서 타인의 말을 듣는 좋은 방법은 책을 마주하는 거다. 낯선 문장을 거울인 듯 마주 보는 순간, 글은 타인의 말이 되어 나의 마음으로 흘러든다.

작가의 말을 따라간다. 그녀의 목소리를 모르니 마음속으로 천천히 읽는다. 낯선 저자의 문장이 담담하게 심장을 울린다. 글로 말하는 친구를 눈앞에 데려온 듯한 기분이다. 영혼의 속도에 맞춰 문장과 함께 시간을 걸어간다. 막연하던 생각이 실체로 구현된 문장들을 본다. 방금 요리한 반숙 계란을 톡 터뜨리는 순간처럼 따뜻한 노른자가 느리게 흘러나온다.

가랑비처럼 젖어드는 글자에 기대어 며칠을 보낸다. 수많은 글자들이 모닥불을 피우는 나뭇가지라도 되는 양 마음에 서서히 온기를 전한다. 그동안 나, 많이 지쳐있었구나. 온종일 정신없이 일하다 침대에 눕는 순간 그제야 피곤했음을 깨닫는 사람처럼 뒤늦게 마음을 살핀다. 눅눅한 습기가 배어드는 줄도 모르고 안개 자욱한 길을 걸어왔을까. 점점 보송보송해지는 느낌이 뭉클하면서도 그저 좋다.


p17, 2째 줄:   : → : : (콜론 하나 빠짐)

p224, 4째 줄: 아니 하는 만 못한 → 아니 하느니만 못한

p240, 밑에서 3째 줄: 밀려vv설 → 밀려v설(띄어쓰기)


* 개인적인 아쉬움

p12~14, 프롤로그의 파킨슨병 관련 문장과

p14, 30대 관련 문장이

각각 p80~82, p289~290의 본문 내용과 중복된다.

저자의 의도는 이해가 되지만 프롤로그가 조금 짧았아도 괜찮지 않았을까 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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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와 얼굴
이슬아 지음 / 위고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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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기 사 와야 하나?"

"나 오늘 안 나갔는뎅."

"엄마, 2단계는 생략된 말이라구. 구글도 이렇게 까다롭지 않아. 아빠한테 콕 집어서 딸기를 사오라고 해야지."

옆에서 듣고 있던 딸의 핀잔이다.

"새삼스럽지도 않아."

진짜 새삼스럽지 않은 말투에 웃음기가 묻어있다. 

오늘 집 밖으로 안 나갔으니까 딸기를 사 왔을 리가 없잖아. 그러니까 사오라는 얘기지. 속으로 구시렁거린다.

돌아와 거울 앞에 서서 문장으로 옮겨 놓는다. 꺼내어지지 않은 말, 생략된 말, 투명하던 말들이 이제야 보인다. 뭉텅 잘린 문장에 살을 붙이며 의도를 유추했을 당신, 종종 답답했겠구나.


말 뿐만 아니라 얼굴도 그렇다. 사회에서 꺼내어지지 않은 얼굴, 세상에서 생략된 얼굴, 삶에서 투명하던 얼굴들이 있다. 이슬아 작가의 『날씨와 얼굴』은 이런 얼굴들을 스케치한 칼럼집이다. 2021년 1월부터 2023년 1월까지 경향신문에 기고한 글들과 새로 쓴 글 몇 편이 수록되어 있다.

저자는 지구 온난화로 변해가는 날씨에 우리 모두는 운명공동체임을 강조한다. '모두'의 범주에서 누락된 대상을 하나하나 끄집어낸다. 그녀가 지칭하는 '모두'는 인간만을 지칭하지는 않는다. 보다 범위를 넓혀 비인간 동물을 아우른다.

인간은 잦은 착각 속에 산다. 지구 위에 인간만이 존재하는 듯 비뚤어진 '천상천하 유아독존'을 외친다. 인간의,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세상이라는 오만함 속에서 삶의 패턴을 그린다. 나의, 나에 의한, 나를 위한 세상이라는 이기심과 더불어 말이다.


1부, '동물에 대해 잊어버린 것'은 동물의 삶과 죽음 등 2단계가 생략된 과정에 대한 이야기이다. 작가는 동물이 고기의 형태로 식탁 위나 슈퍼마켓 진열대에 놓이기 이전의 삶을 조명한다. 처음부터 고기로 존재하는 동물은 어디에도 없으니까. 동물은 인간과 동등한 생명의 무게를 지닌 존재임을 상기시킨다.

언제부터 소고기, 돼지고기, 닭고기의 결과물만 바라보게 되었을까. 뭉텅뭉텅 잘려서 깔끔하게 포장되기 이전에 살아있었을 모습을 한 번이라도 떠올려본 적이 있던가. 인간과 대등하게 살아 숨 쉬는 생명체였음을, 인간과 똑같이 생명을 다하면 죽음을 맞이하는 생물이었음을 너무나 당연한 듯 잊고 지내왔다.

생명 활동을 유지하기 위한 먹이 사슬은 생태계의 자연스러운 이치이리라. 다른 생명에 나의 삶을 빚지는 건 필연적인 과정일 테지만 인간의 모든 행위를 정당화하는 근거가 될 수는 없다. 공장식 밀집 사육이나 동물이 강제 당하는 삶은 인간이 저지르는 명백한 착취의 결과이다.


작가가 비거니즘을 표방한 이유는 동물에 대한 착취에 동참하지 않으려는 강한 의지의 실천이다. '고기'라는 언어로 불리기 이전의 생명체로서의 삶을 존중한다는 마음의 표현이다. 저자는 언어가 은폐하는 폭력의 실체를 까발린다. 물에 사는 동물이지만 죽기 전까지는 '고기'로 불리다 죽으면 '생선'으로 변모하는 존재를, '고기' 덩어리로 포장되어 구체적인 고통이 씻겨 나간 생명체를 담담하게 묘사한다.

처음에는 오타인 줄 알았다. 15쪽에서 소 한 '명'이라는 말을 보며 이런 실수를 하네 싶었다. <목숨을 세는 방식>에 대한 칼럼을 읽고 서야 '마리'를 생명으로 여기는 의도된 명명이었음을 깨닫는다.

세상 대부분의 일을 '어차피'와 '최소한'의 싸움으로 보는 이슬아 작가의 시선에 나를 돌아본다. '어차피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와 '그래도 최소한 이것만을 하지 않겠다'는 문장을 번갈아 읽는다. 삶의 많은 장면에서 핑계처럼 기대왔던 '어차피'를 반성하며 '최소한'을 향해 마음을 뻗어본다.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가장 예쁘냐. 2부, ' 나 아닌 얼굴들'은 나만 예쁜 줄 아는 인간이 쳐다보지 않는 얼굴들을 보여준다. 쿠팡 노동자, 이주여성, 시각 장애인, 농업인, 청소 노동자, 저소득 가구, 장애인, 보호 대상 아동, 아픔을 다스리는 이들, 성소수자, 빈곤층, 여성 등 타인의 얼굴을 차례로 비춘다.

더위는 모두에게 공평하게 오지 않는다며 '내 더위의 무게와 그들 더위의 무게가 다르다'는 문장 앞에 한참 머문다. 묵직하게 내리 누르던 어린 시절의 더위를 떠올린다. 조금만 더워도 에어컨을 틀고, 한겨울에 집에서 반팔을 입던 작년의 행동이 겹친다. 날씨에 무관하게 살 수 있음에 매 순간 감사해야 하는 것을. 얼마나 지났다고 잊어버렸나.

<깊게 듣는 사람>에 대한 칼럼이 커다란 울림으로 다가온다. '아주 깊게 들을 수만 있다면, 아주 깊게 말할 수만 있다면.' 정혜윤의 『마술 라디오』에 나온다는 문장 앞에서 서성인다. '내가 직접 하지 않는 노동으로 내 삶이 굴러간다는 사실이 자주 새삼스럽다'는 이슬아 작가의 문장 앞에서도. 내 삶에 다시 한 번 감사하는 시간을 갖는다.


3부, '반복하고 싶지 않은 것의 목록'을 읽으며 지금까지 언급되었던 내용들을 되새긴다. 저자는 각종 개발과 건설 사업으로 파괴되는 환경을 언급하며 하늘과 땅과 물에 난 길들이 인간만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쓰레기는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아직 쓰레기가 아니었음을 말하는 그녀는 '너무 많은 옷이 너무 빨리 만들어지고 너무 조금 입은 뒤 너무 쉽게 버려지는 세상' 의 모습을 개탄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노력하는 사람들은 분명히 있다.  '모두가 버리지만 모두가 치우지는 않는 세계에서 어떻게든 해보려는 사람들'이다.

이슬아 작가는 삶에서 반복하고 싶지 않은 것의 목록을 작성한다. 반복하지 않기 위해 어떻게 실천을 하고 있는지, 그 실천을 이어나갈 건지 다짐을 적는다. 더불어 한 사람의 삶의 앞뒤에 스며들어 생략된 인간과 비인간적인 존재를 잊지 않으려 한다. 그 모습을 문장으로 지켜보는 나에게도 작은 파문이 인다.


오만한 일부 인간은 생략된 존재를 망각한다. 생태계라는 거대한 집단을 인간 중심의 세상으로 바꾼다. 맑은 날, 저 혼자 햇살을 쬐며 목소리를 낼 수 없는 다른 이들을 그늘에 가둔다. 비 오는 날, 저 혼자 우산으로 시선을 가리며 수많은 동물들을 토르소로 만들어버린다.

조각 미술에서 '토르소'는 얼굴과 팔 다리가 생략된 작품이다. 이탈리아어 '몸통'에서 유래된 말이라고 한다. 예술 작품으로서의 토르소는 몸통에만 시선을 집중시켜 인체의 아름다움을 강조한다. 하지만 생명체는 예술 작품이 아니다. 마음대로 생략할 수 없고 생략되어서도 안된다.

 '얼굴을 지닌 당신께 드립니다.' 책 날개를 펼치니 저자의 문장이 들어온다. 나는 얼굴을 지닌 존재인가. 나 아닌 대상의 얼굴을 볼 수 있는 존재인가. 작가가 글을 통해 내미는 투명한 손이 보이는 듯하다. 무심코 생략해왔던 얼굴들이 느리게 재생된다. 


"(지난 주에 내가 새끼 손톱 만한 것까지 몽땅 뜯어서 초토화 시켰던 상추가) 쪼끔 올라왔어."

"엄마, 그렇게 말하면 어떻게 알아들어!"

"왜에? 알아들었지?" 미소 짓는 남편에 의기양양해지는 나, "봐봐!"

돌아와 거울 앞에 서서 문장으로 옮겨 놓는다. 꺼내어지지 않은 말, 생략된 말, 투명하던 말들이 이제야 보인다. 뭉텅 잘린 문장에 살을 붙여 정확한 의도를 유추한 놀라운 당신, 나는 이제야 놀라는 중이다.

"아까 내가 상추 얘기할 때 주어를 생략했었어?" "어." "근데, 어떻게 알아들었어?" "올라올 게 그거 밖에 더 있어?"

나의 토르소 화법에서 생략된 얼굴을 보는 당신에게서 은은한 햇살의 온기가 느껴진다. 내가 보지 못했던, 보고도 지나쳐왔을 많은 얼굴들이 떠오른다. 그들을 향한 이슬아 작가의 온기와 당신의 온기가 겹치니 덩달아 나도 맑은 날 햇살 한 가닥이 되고 싶어진다.



※ p172, 10째 줄: 중이다 공장식 ~ → 마침표 빠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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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개의 파랑 - 2019년 제4회 한국과학문학상 장편 대상
천선란 지음 / 허블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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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은 무슨 색일까. 바다를 비추는 거울인 듯 파랑으로 나타나다 구름으로 뒤덮인 잿빛을 보여준다. 눈부신 빛의 노랑을 쏟아내다 후두둑 투명한 물방울을 흩뿌리는가 하면 반원형의 우아한 일곱빛깔 화살을 쏘아 보낸다. 날카롭고 하얀 얼음 꽃을 훌훌 날리다 불그스름한 난로로 물든다. RGB 색상 코드에서 하늘색으로 지칭하는 (173,216,230)이나 (135,206, 235)등 몇몇 단일 코드의 빛깔만은 아니다. 

RGB는 빨강(Red), 녹색(Green), 파랑(Blue)이다. 트루 컬러(True Color)의 경우, 세 가지 빛깔은 각각 256가지로 구현된다고 한다. 이들을 순서쌍으로 조합하면 256*256*256 이니, 16,777,216가지 색상이 가능하다. 천만 가지 이상의 다채로움을 한꺼번에 품는 대상이 존재할까. 그나마 근사치에 가까운 게 '하늘' 아닐까. 고유 명사로서의 정체성을 담은 '하늘의 색'은 시시각각 달라진다. 당신과 나의 것이 다르며 나의 하늘 역시 매순간 다르다.  

바다가 변화무쌍하다고 하던가. 물로 채워진 공간보다 하늘은 보다 신비롭다. 동양화의 여백처럼 지구의 공기나 구름 사이를 우주의 기운으로 채우기 때문이다. 우주와 지구의 공존이랄까. 3차원 입체 공간이 2차원으로 보이는 하늘에서 평면으로 펼쳐진다. 단순하지만 많은 대상을 표현할 수 있는 이진수, 0과 1을 떠올린다. 정반대의 의미를 품은 채 다양한 조합으로 어우러지는 숫자가 어쩐지 하늘의 정체성과 닮아 보인다.


책 표지에 그려진 하늘을 보다 창밖으로 펼쳐진 실제 하늘을 향한다. 파랑이 맑다. 제목을 물끄러미 응시한다. 파랑이 천 개나 된다니! 어떤 이야기가 무려 천 개나 되는 파랑을 품고 있단 말인가. 파란 대문 한가운데 뚫린 구멍으로 마블링처럼 일렁이는 하늘을 바라본다. 아직 깨어나지 않은 문안의 세상을 상상한다.

조심스럽게 문을 연다. 뭘까. 시작과 중간과 끝이 가늠되지 않는 이 문장은 뭐란 말인가. 방금 읽었던 내용이 소설의 시작인가. 아니면 여기부터인가. 설명하기 어려운 얼떨떨함. 소설입구에서 느낀 첫 감정은 당황에 가까웠다.

출구에 도달해서야 작가의 빅픽처가 보인다. 서두와 말미에 각각 같은 장면이 등장하는 수미쌍관의 깔끔한 구성임을 이해한다. 잠시 '나'로 등장하는 화자는 휴머노이드다. 로봇의 관점에서 전체 이야기를 따스한 이불인 듯 폭 감싸며 결론을 맺는다. 본문은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전개된다.

<천 개의 파랑>은 휴머노이드와 동물과 인간의 삶을 향해 화살표를 건네는 소설이다. 미래의 지구에서 각각의 개체는 어떤 삶의 형태로 살아가게 될까. 기계인 휴머노이드에게 '살아간다'는 말은 모순된 표현으로 보인다. 한데 이 책을 읽다 보면 이질감 없이 로봇의 삶을 수용하게 되는 마법이 일어난다.

   

휴머노이드 '콜리'는 폐기를 앞둔 기수 로봇이다. 미래의 사람들은 다칠 위험이 있는 사람 대신 로봇을 기수로 세우며 엄청난 속도감에 열광한다. 한데 콜리의 제작 과정에서 우연히 인지와 학습 관련 칩이 잘못 삽입된다. 이로 인해 콜리는 인간과 인간, 인간과 동물의 연결 고리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한다.

작가는 콜리가 폐기되기까지의 과정에 인공호흡을 하듯 생생한 서사의 숨결을 불어넣는다. 엑스트라처럼 스쳐가는 각 분야의 로봇에도 시선이 간다. 편의점에서 일하는 서비스직 업무용 로봇, 거리 청소 로봇, 경비 로봇, 재난구조용 소프트 로봇, 은행원, 암 제거 수술법에 동원되는 나노봇 등. 미래 세상을 미리 체험하는 듯하다.

로봇의 미래는 어떨까. 윤기 좌르르 흐르는 번쩍거림은 영원하지 않다. 기계도 옷처럼 낡아가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산소와 접촉하며 서서히 부스러진다. 지구에서 만들어지는 한, 이 행성에 산소가 있는 한, 획기적인 소재로 만들어지지 않는 한, 녹슴이나 삐걱거림은 필연이리라.

쓸모를 다하면 새 것으로 교체되는 로봇. 뛰어난 AI가 등장하지만 인간이 주도권을 쥐고 있는 한, 독특한 소모품일 뿐이다. 로봇은 인간의 삶에 얼만큼 근접하여 연결될까. '사용'이라는 표현이 어색해지는 시기가 올지도 모른다. 그리스 신화의 '피그말리온'을 떠올린다. 과학기술이 발달하면 구현 가능한 현실이 되지 않을까.


콜리를 태우는 말 '투데이'는 안락사가 확정된 경주마이다. 로봇인 기수를 태운 말에게는 과중한 속도감이 요구된다. 살아있는 말이 감당하기에는 혹사 수준의 빠르기다. 이기적인 인간 앞에서 다른 생명체는 허울뿐인 정체성을 지닌 존재가 되는가. 고통을 느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로봇과 거의 동등하게 취급된다. 다리 연골이 모두 닳아 없어진 말들은 자연 수명을 누리지 못하고 일회용 컵처럼 교체된다.

투데이의 입장이라면 가장 고통스러운 점은 무얼까. 작가는 이를 자유로운 삶에 대한 억압으로 본다. 육체의 고통보다 더욱 큰 좌절을 느끼게 하는, 자기의 이유로 삶을 이끌지 못한다는 점이다. 투데이의 상황은 주인공 투탑 중 휠체어 생활을 해야 하는 '은혜'의 삶과 연결된다.

장애인으로 살아가면서 겪는 불합리, 사회적 시선, 가족 및 친구와의 관계가 은혜의 관점에서 담담하게 서술된다. 차라리 없느니만 못한 어설픈 도움이 자기 만족을 위한 배려로 포장되는 상황을 바라본다. 시간을 되감기 한다. 무심코 행동하고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순간이 있을 듯하여 숙연해진다.

언니의 장애로 인해 많은 욕구를 제거하며 살아온 인물 '연재'는 또 다른 주인공이다. 그녀는 로봇을 다루는 데 천재적인 재능을 보인다. 연재는 부서진 로봇 콜리를 집으로 가져와 부활시킨다. 로봇에 대해서는 거침없는 그녀이지만 인간 관계에는 서툴다. 같은 반 친구 '지수', 어색했던 엄마 '보경'과의 관계는 콜리를 매개로 자연스러워진다.


소방관인 남편을 갑자기 잃은 보경의 시간은 과거에서 멈춰있다. 두 딸에 대한 책임감으로 '슬픔을 배출할 수 있는 골든타임'을 놓쳐버린 인물이다. 살아내야 하는 시간은 파도처럼 끊임없이 밀려오는데 남편에 대한 그리움을 한껏 품고 있는 내면의 시간은 '고여 있다.'

콜리와의 대화를 시작으로 그녀의 시계는 조금씩 움직인다.  '그리움은 기억을 하나씩 포기하는 거야. 그리운 시절로 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현재에서 행복함을 느끼는 거야.' 답은 이미 그녀 안에 있다. 문을 여는 방법을 잊어버려 안에서 꺼내지 못했을 뿐. '들을 수 있는 귀와 끄덕일 수 있는 고개'. 콜리가 건네준 건 단지 그 뿐이다.

보경의 시간을 객관적으로 응시하던 콜리는 그녀의 말을 통해 투데이에게 자유를 줄 수 있는 방법을 발견한다. '살아 있다고 느끼는 순간이 행복한 순간이에요. 행복만이 유일하게 과거를 이길 수 있어요.' 콜리-은혜-연재를 주축으로 한 투데이 구출 작전이 긴밀하게 계획된다.

우여곡절 끝에 투데이는 다시 경마장에 선다. 천천히 달리기는 책 속의 인물 뿐 아니라 책 밖의 독자에게도 필요한 연습이리라. 투데이의 걸음이 점점 빨라진다. 살아있다는 느낌이 주는 행복감이 고통을 덮는 마법으로 작용한다. 더 큰 자유를 선물하고 싶은 콜리는 복구될 수 없음을 알면서도 일부러 말에서 떨어지면서 무게를 줄여준다.


떨어지고 있다는 표현을 '하늘에서 멀어지고 있다'로 구현하다니! 하늘과 땅을 뒤집는 관점이 신선하다. 흡인력 있는 전개에도 불구하고 문장이 품고 있는 무게감으로 책장을 넘기는 속도가 느려진다. 작가는 소설 속 문장을 통해 근원적인 질문을 던진다. 기술의 발전이 인간에게 무엇을 가져다주느냐, 무엇을 가져다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느냐고. 로봇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서사는 앞으로 살아갈 미래의 모습을 그려볼 시간을 건넨다.

프로그램과 명령어로만 작업을 수행하는 로봇의 세상에는 0과 1이 가득하다. 단순함이 오히려 명확하다. 너 자신을 알라 하며 줄기차게 질문을 던졌다는 테스형처럼. 소설 속 로봇이 등장 인물에게 하는 질문은 독자를 향해있기도 하다. 휴머노이드의 질문을 따라가며 인간이란 존재를 근본적인 단계에서부터 응시한다. 인간다운 게 뭔지, 인간을 인간으로 만들어주는 게 무언지 곰곰 생각한다.

로봇은 하나부터 열까지 디테일한 모든 요소를 0과 1로 입력하지 않으면 절대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않는 존재다. 다른 관점으로 바라본 정의를 잘근잘근 음미한다. 호흡의 정의부터 살아있다는 것의 의미, 행복, 슬픔, 그리움, 과거 등 당연한 듯 받아들이던 말의 의미가 불현듯 낯설다.


하늘을 내려다보는 기분이다. 그토록 다양한 빛깔로 변화무쌍한 파랑에서 작가가 심어 놓은 주제들이 군데군데 별처럼 빛난다. 어느 하루는 '시간'이, 다른 하루는 '장애'가, 다음날은 '그리움과 행복'이, '미래와 과거'가, '관계와 이해'가 두더지 게임처럼 불쑥불쑥 고개를 내민다.

리뷰를 쓸 때마다 종종 표현력의 한계를 마주한다. 느낌을 표현할 적절한 문장들을 찾지 못할 때면 답답하다. 느낌에 똑같은 정답은 없음을 안다. 당신과 내가 다르듯 같은 책을 읽은 우리의 심장은 다른 파장으로 울릴 터이다. 마음의 바다에 그물을 던져 나만의 정답에 근접한 문장들을 건져 올리고 싶은 바람에 감기를 앓듯 방황한다. 

유성처럼 내게 떨어진 단어들로 작은 알고리즘을 만든다. 이들을 전부 연결하는 빅픽처를 만들고 싶지만 바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햄스터처럼 맴도는 생각들이 빠져나올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알고리즘의 루프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일주일을 보낸다.

알고리즘이란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명령들을 순서대로 나열해 놓은 것이다. 출구를 찾는 과정에서 많은 질문을 스스로 던진다. 무슨 말을 할까. 나는 무슨 말을 하고 싶은가. 작가가 세상에 건네는 주제는 명확한 실체로 독자 앞에 놓여있으리라. 변수는 각기 다른 자리에서 이를 바라보는 독자에게 있다.


휴머노이드, 동물, 인간. 책 속에 담긴 세 가지 대상을 보며 RGB 색상표를 떠올린다. 각각의 대상을 대표 색상으로 대응시키면, 휴머노이드는 블루, 동물은 그린, 인간은 레드 정도가 될까. 독립된 존재로 있으면 단지 3가지 색상인데. RGB가 한데 모여 서로를 덜어내면 얼마나 다채로운 스펙트럼이 펼쳐지는가! 또 이들이 하나로 합쳐지면 얼마나 올곧은 흰색이 되는가! RGB의 본질에서 연결 고리가 되는 알고리즘을 발견한다.

RGB의 유성 물감을 막 떨어뜨린 미래의 세상을 상상한다. 아직 섞이지 않은 물과 유성 물감이 눈앞에 놓인 입체 공간이다. 조화로운 무늬를 만들 수 있는 막대기는 내 손에 있다. 또 다른 마블링을 떠올리는 당신의 손에도 물론. 얼마만큼의 세기로, 어느 방향으로, 얼마의 시간 동안 저을까. 미래의 모습은 RGB의 알고리즘을 만드는 우리에게 달려있다.

0과 1의 명료함이 위로가 될 때가 많다. 안개 속인 듯 뿌연 시간과 마음을 선명하게 짚어주니까. 감정이 실리지 않는 로봇 콜리의 문장에서 열감을 느낀다. 알고 있는 모든 단어들을 천 개의 파랑으로 받아들이는 시선이 뭉클하다. 다시 읽는 뜨거운 문장에 마음이 달아오른다. 나는 몇 개 정도를 찾을 수 있을까. 보물찾기를 하는 아이가 되어 책갈피처럼 숨겨진 파랑을 세상에서 찾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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