딴 책들은 못읽는데 심농 책들 놓기 힘드네. 지난 연휴 마지막날 저녁에야 비로소 시리즈 첫 권 [수상한 라트비아인]부터 읽기 시작했다. 어제 저녁에 [갈레씨, 홀로죽다] 완독. 오늘 저녁엔 세번째 권을 들 수 있겠다.  

 

 

 

 

 

 

 

 

 

 

[사나이의 목]과 [황색의 개]를 읽을 때는 뭐가 대단하다는 거지? 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도 사실. 그러나 이렇게 연속으로 선보이는 그의 작품들을 하나씩 보는 건 전혀 다른 독서의 맛을 준다. 왜 그렇게 내노라하는 작가들이 칭찬을 하는지 수긍이 간다고 할까. 심농 이후 범죄소설은 심농의 작품을 길게 늘였다해도 크게 틀리진 않지 않을까 라는 생각도 언뜻 스쳐지나갈 정도.  

[갈레씨, 홀로죽다]는 한 인물이 죽은 후, '살해된 후' 조사하는 과정에서 알게 되는 죽은 인물 자체, 그리고 그와 여러 사연으로 얽힌 인간들의 모습을 통해 범죄소설의 기본적인 매력, 죽은 사람이 죽음에 이르기까지 그의 개인사를 둘러싼 갖가지 인간 삶의 단면들이 속속 드러나는 그 비밀, 미스터리를 밝혀나간다는 매력을 읽을 수 있는 작품이었다.  

 

 

 

 

 

 

  

 

 

만약 아프리카 우림에서 비 때문에 꼼짝 못하게 되었다면, 심농을 읽는 것보다 더 좋은 대처법은 없다. 그와 함께라면 난 비가 얼마나 오래 오든 상관 안 할 것이다. (헤밍웨이)

더 넓은 맥락에서 봐야할지도 모르지만 지금까지 읽은 것만으로 보자면, 심농은 젊은이, 특히 배운 건 많지만 가난한 혹은 가난하지만 많은 걸 배운, 거기다 병을 앓고 있기까지 한다면 더욱, 혹은 병까지 앓게 하는 식으로, 그런 젊은이를 왜 그렇게도 냉담하게 대하는지 좀 의아한 면이 있다.    

심농의 버즈북 [심농, 매그레반장 삶을 수사하다]를 보면, 심농은 매그레시리즈를 쓸 때 늘 파리의 지도를 옆에 놓고 참고하며 썼다고 한다. 아마 수사과정을 따라 파리의 실제 장소를 바탕으로 창작작업을 했을 거라고 본다. 그러니 심농 시리즈 표지를 펼치면 1959년 파리 지도를 볼 수 있도록 '장식'한 것 같다. 아, 제길, 지역이름이며 도로명 한 번 찾아보려다 계속 실패하고 있다. 꼭 한 번만이라도, 속 시원히, 작품에 나온 지명들 따라 쭉 선 한번 그려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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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인터넷 뉴스들 훑어봤는데, 한겨레신문에 나온 이 기사가 인상적이었다. 이것은 늘 그렇듯이, 노출이나 태도 '수위'의 문제가 아닙니다요.

새 여성운동? ‘슬럿워크’ 논란 속 확산  (한겨레, 2011. 6. 7 이형섭기자)

4월 캐나다에서 시작…미국·유럽·호주로 번져
“슬럿 차림이 성폭행 불러” 경찰 발언이 촉발
“내 몸이고, 내 맘이야” 자기결정권 운동으로
일부 여성학자들 “성차별구도에 말려” 비판
* 슬럿워크: 헤픈 여자 옷차림으로 걷기 

 

“우리는 슬럿(헤픈 여자)처럼 입을 권리가 있다.”

캐나다에서 시작한 ‘슬럿워크’(SlutWalk)가 점차 전세계적으로 확산되면서 과연 새로운 여성운동으로 자리잡을 수 있을지에 대한 논란도 커지고 있다. 지난주 영국 카디프, 뉴캐슬, 에든버러 등에서 슬럿워크가 열린 데 이어 이번 주말 런던에서는 최소 수천명이 참가할 것으로 예상되는 행진이 계획돼 있다고 영국 일간 <가디언>은 전했다. 4월3일 캐나다 토론토에서 시작한 슬럿워크는 벌써 미국, 유럽, 오스트레일리아 등 30여곳에서 진행됐고, 앞으로 열릴 예정인 곳까지 더하면 100여곳에 이른다고 슬럿워크 누리집(slutwalktoronto.com)은 밝히고 있다.

지난 1월 캐나다 토론토의 요크대학에서 열린 ‘안전포럼’에서 경찰관 마이클 생귀네티가 “(성폭행) 피해를 당하지 않기 위해 여자들은 슬럿처럼 입지 말아야 한다”고 한 말이 이 새로운 여성운동을 촉발시켰다. 이 말은 성폭행의 책임이 여성에게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졌고 엄청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그 다음달 로버트 듀어라는 판사가 성폭행 사건에서 ‘피해자의 옷차림이 피고에게 잘못된 인상을 줬고, 피고의 잘못은 단지 여성이 (성행위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을 뿐’이라는 취지로 피고에게 벌금형만을 선고한 것이 캐나다 여성들을 폭발시켰다. 토론토 여성 3000여명은 4월3일, 말 그대로 슬럿처럼 입고 토론토 중심가를 행진하기 시작했다.

이 운동은 여성의 ‘슬럿처럼 입을 권리’를 포함한 ‘자기결정권’을 강조하는 운동으로 발전했고, 전세계 여성들에게 엄청난 지지를 받고 있다. 이들의 주장은 “이건 내 몸이고, 내 맘이야”라는 구호에서 쉽게 알 수 있다. 이들은 아예 슬럿이라는 말의 뜻을 바꾸기를 원하고 있다. 미국 정신분석학자인 수지 오바크는 영국 <비비시>(BBC) 방송에서 “슬럿이라는 말은 단지 여성들이 성적 욕구를 드러냈다는 이유만으로 선입견을 갖게 하는 말”이라며 “이 말에서 비꼬고 야유하는 의미를 제거하는 것이 우리의 목표”라고 말했다.

하지만 슬럿워크는 여성계 내부에서도 논란에 휩싸여 있다. 미국에서 활동중인 게일 다인스나 오스트레일리아의 멀린다 라이스트 등 유명 여성학자들은 슬럿이라는 용어 자체가 여성을 ‘마돈나와 창녀’로 나눈, 오랜 역사를 가진 성차별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말한다. 다인스는 <가디언> 투고를 통해 “여성들은 슬럿이라고 불려질 권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성폭력을 비난하기 위해 거리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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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gettable. 2011-06-08 19: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있던 동네에서도 이거 하던데ㅡ 전 한국에 돌아온다고 참여 못했지만요 ㅋㅋ 친구들이 얘기하길래 뭔가 했는데 이런거였군요! 재밋네요:)

포스트잇 2011-06-09 08:31   좋아요 0 | URL
한겨레가 늦게 옮긴건가 보네요. 저 경찰과 판사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지 좀 치가 떨리는 면이 있습니다. 대체 왜 그럴까요?
 

플라톤의 [크리톤]은 내일이면 사형에 처해질 친구 소크라테스를 탈옥시키기 위해 감옥을 찾은 크리톤이 탈옥은 못시키고 그냥 주구장창 대화만 하다만다는(....?), 대화록인 모양이다. 존르카레의 정치적 입장과 문학적 스타일이 이 [크리톤]에서 구사하고 있는 플라톤의 철학적 입장과 테크닉면에서 유사하다고 한다. 이렇게까지 확장해야 하나? 어쨌든 기회되면 한 번 읽어볼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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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지금까지 읽은 존 르 카레의 소설들은 차가움 속에서 어떤 아련한 슬픔이 담겨 있었다. 차가움은 르 카레가 늘 인물들과 그들의 상황에 거리를 두고 서술하는 데서 오는 듯하고 그러나 결국 파국으로 끝나는 마지막에 이르면 뭔가를 지키려고 했던 인물들의 죽음 혹은 실패에 깊이 동정할 수밖에 없다.   

 

 

 

 

 

 

 

  

 

[영원한 친구]는 9.11 이후 르 카레의 작품 중 하나다. 1931년생이니까 르 카레는 이제 여든이 넘은 노인이다. 그럼에도 2010년도에 [Our Kind of Traitor]를 출간했으니 꾸준한 그의 창작 열정은 놀랍고 어쨌든 존경스럽다. 전쟁과 냉전의 전성기 때를 통과해온 스파이소설의 대부가 지금은 어떤 작품을 쓸 수 있을까 싶겠지만 [영원한 친구]를 보면 그가 다루고 싶은 세상과 사람들에 대한 관심은 여전하다는 걸 느낄 수 있다. 전후 세대로서 20대를 동서냉전의 시대에 열혈청년으로 보내고 양진영에 포섭되어 이중스파이로 살아가던 그들에게 무심한 듯 찾아온 베를린장벽의 무너짐과 소련의 붕괴는 서툴지만 서둘러 도망쳐야 할 현실로 남은 채 새로운 시대로 넘어간다.  

간신히 찾았던 사랑과 가정의 행복마저 지키지 못했고 사업이 망하면서 빚을 진 채 관광안내원을 하던 먼디에게 어느 날 갑자기 옛 동지이자 친구 사샤가 나타난다. "내리막 길에 있는 냉전 건달 두 명"이라고 자신들을 정의한 사샤. 은퇴한 스파이인 먼디는 사샤가 예전의 '위대한 이중첩자'였던 모습은 사라지고 "그 대신 남의 말을 잘 믿고 감동 잘하는 공상가" 였던 대학시절의 사샤로 돌아왔음을 감지한다. 사샤가 다시 먼디를 찾아와 자신이 다시 몸담은 조직과 신념에 동참하기를 원할 때 왜 먼디는 뿌리치지 못한 것일까. 먼디에게 여전히 남아있는 그 무슨 이상과 신념이 있었을까. 그보다 그들은 'Absolute Friends'로서 결국 끝을 함께 할 수밖에 없다고 작가는 믿는 듯하다. 이 소설은 과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먼디와 사샤, 먼디를 통한 사샤를 죽 보여주면서 그들이 뚫고 나온 시대들을 거쳐간다. 인물들과 인물들 간의 심리가 다른 작품들보다 좀더 구체적이어서(아님 다른 작품들을 내가 미처 잘 보지 못해서일수도 있고) 마지막에 이르러 두 사람의 비극은 그동안 내가 읽었던 르 카레의 어떤 작품보다도 감성적으로 빠져들 수 있었다. 르 카레가 그 전보다 연민을 더 많이 품었기 때문일까.  

[죽은 자에게 걸려온 전화], [추운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도 다시 한 번 읽고 싶고, 또, 카를라 3부작 중 [팅커, 테일러...] 외 아직 번역되지 않은 [The Honourable Schoolboy]와 [Smiley's People]은 정말 읽고 싶다. 또 '소설쓰기 두려울 때 읽으면 좋다'는 [A Perfect Spy]도 관심 도서다.   

 

 

 

 

 

 

  

 

 

아직 르 카레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나름의 판단이 서지 않은 관계로 관련 자료도 보고 싶은데, 늘 생각은 그저 한 때의 생각으로만 남았던 나의 사정을 생각해보면 뭐 이 또한 지나가는 관심일 뿐이지 싶다.   

[Conversation with John le Carre]는 1965년부터 1999년까지 다뤄진 카레와의 인터뷰를 편집한 책이라는데 카레 자신의 얘기들을 많이 담고 있는 모양이다. 그가 좋아하는 문학얘기들, 작가들, 자신의 소설에 나온 인물들에 대한 얘기, 직업과 문학관 등 카레에 대해 좀더 알 수 있는 책일 듯하다.   

 

 

 

 

 

 

  

 

또 한 권, 1998년에 나온 저작인 모양인데 정치학과 인류학을 가르치는 교수의 르 카레 연구서도 궁금하다.  [The Spy Novels of John le Carre : Balancing Ethics and Politics]. 르 카레의 소설을 윤리와 정치 사이에서 줄타기하는 딜레마들에 주목하여 분석한 학술서적이다. 리뷰어들 중에는 '다소 현학적'이라고 지적한 사람도 있지만 대체적으로 재미있고 쉽게 읽을 수 있다고 하니 관심이 더 간다. 무엇보다도 2000년 이전의 르 카레 작품들에 나오는 주요 인물들을 정연하게 정리해주는 부록이 있는 모양이다. 탐나도다. 서문과 1장 정도는 인터넷에서 구할 수 있길래 프린터해서 보는 중이다. 좀 보고 책을 구입하든지 할 생각이다. 어떻게 될지 잘 모르겠다. 쩝. 6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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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히..., 이번 주말엔 기필코 책을 읽으리라? 했건만, 장담 못할 지경이다. 일단, 한밤중에 벌어지는 멘유-바르셀로나 축구를 보고싶다. 요즘 내 생활 리듬이나 체력으로 봐서 이 역시 쉽지 않을 듯하지만 이벤트를 기다리는 심정이다. 국내 프로축구는 승부조작건으로 들쑤셔지고 있지만, 어디나 돈이 걸린 곳에는 추악한 욕망이 터지고 만다. 물방울 다이아몬드는 어디 딴 데서 빛난다더냐? 누구 말대로 '생각의 기초체력'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이 분탕질하기 쉽고, 기초체력이 없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걸르는 가치망은 성기기 마련이어서 끝내는 저만 잘 살면 된다로 귀결되는 것 아닐까.  

일찍이 로쟈님 서재에서 소개받은 '한겨레 역사인물평전 시리즈'를 눈여겨봐놓고도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오늘 아침 소개기사를 다시 한 번 보면서 이 책들도 놓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이완용평전]. 자세히 들여다봐야겠지만 이완용 같은 사람들이 뭐 그리 새삼스러울 게 있을까 싶다. '제국주의 폭력에 분노하기 보다는 자신을 포함한 다수의 혜택을 위해 절대로 분노하지 않는 이성적 인간'. 인상적인 구문이다.   

 

 

 

 

 

 

  

 

언젠가 이쪽 사람들 얘기가 나오길 기대했던 적이 있었다. 윤치호도 그 때 봤던 사람이고. '분노'라는 키워드로 세상과 인간을 바라보는 것도 꽤나 흥미로운 주제가 될 것 같다. 사람은 언제 분노하는 게 맞나? 정당하고 멋있는 분노는 어떤 것일까? 분노가 지나가고 남는 건 뭔가? 분노는 '다스려야' 하나? 역사상 가장 멋진 분노는 뭐였을까? 가장 멋진 분노남, 분노녀는 누구누구일까... 아름다운 분노? ..... 5월 27일 새벽에 마지막까지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의 분노는 어떤가.  

'근대적 합리성'이 극단의 시대와 마주했을 때 어떻게 발현되는지 이완용을 통해서 미스터리를 풀어보고자 한 듯하다.    

인간은 원래 미스터리라서 인간 자체를 파보는 것이 어느 장르소설보다 흥미와 느낌을 주기 마련이다. 한때 평전을 열심히 보던 때가 있었는데 생활에 쫓기면서 찾아 읽기가 쉽지 않았다. 한국인물들의 제대로 된 평전을 기대해본다. 읽으며 분노도 하고 감동도 하고 가슴 아파하기도 하고, 드라마보듯이 세상과 시대를 살다간 인물들을 읽고 싶다. 평전을 대하는 올바른 자세가 아니려나? 내 감성대로 읽으련다.

  

 

 

 

 

 

 

 

 

미완성 유작이 되었지만 이병주의 [별이 차가운 밤이면]을 반갑게 읽었던 기억이 난다. 구한말 노비출신 박달세가 일본군인이 되고 중국에서 독립운동가들을 잡아들이는 앞잡이로서 영달을 쫓지만 흔들리는 마음에 마약으로 빠져드는 대목에서 소설은 중단되었다. 박달세가 '별이 차가운 밤'에 자신을 노비로 만든 양반 친아버지에 대한 분노를 세상에 대한 분노로 치환하며 복수를 다짐하던 대목에서 제목이 결정된 모양이다. 그의 분노와 흔들리는 자의식 사이에서 이병주는 어떤 길을 가게 했을까? 유작이 됐다. 한국역사인물평전 시리즈가 이병주의 소설보다 더 재미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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