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프라 윈프리, 위대한인생 Oprah Winfrey and the Glamour of Misery]의 저자 에바 일루즈, 그녀의 또 다른 저서 [감정 자본주의 Cold Intimacies]가 도서관에 입고되었기에 대출해왔다. "자본은 감정을 어떻게 활용하는가?"라는 질문이 핵심인 듯하다.  

2007년 출간된 이 책은 [오프라 윈프리... ](2005) 이후에 나온 저서인데, 저자는 감사의 말에서 악셀 호네트 덕분에 나올 수 있었다고 밝혔다. 그가 프랑크푸르트대학 아도르노 강의를 맡긴 덕분에 아도르노에서 하버마스 그리고 호네트로 이어지는 '비판이론'을 다시 공부하면서 이 세 편의 강의록이 탄생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의 문화현상을 '비판이론'으로 분석해본 강의서(말이 되는지 모르지만)인 모양이다. 이 여자, 재밌는 책을 쓰는 사람이네.  

어제 천안함 침몰로 유명을 달리한 '푸르디 푸른' 젊은이들의 영결식 중계방송을 보면서 울었다. 아, 왜 '푸르디 푸른'이라고 유독 젊은이들의 죽음을 그렇게 말하는지 새삼스럽게 느꼈던 장면이었다. 영정 사진 속 모습은 정말이지 가슴이 저릴 정도로 너무 앳되어 보였다. 젊은이들의 죽음을 맞이할 때마다 '다 큰 자식'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된 부모의 마음이...... .  

그러면서도 한 편으로 영결식 진행방식에 유심히 관심을 기울였다. 가슴 아파 눈물이 나면서도 그 준비된 온갖 의식과 이벤트 광경은 참으로 괴이하고도 불편했다. 더욱이 유족들을 몇 명씩 나눠서 헌화하고 분향하게 하는 장면은......  영결식과 안장까지를 생중계 해주는 시대, 의식의 전시, 이벤트화. 뭐, 작년부터 유독 큰일을 많이 당한 관계로 이제는 낯설지도 않은 거지만, 짠하고 울어야 하는 일도 TV의 편성과 편집에 의해 감정의 고조를 겪으며 시청률로 계량화되는 것 같다. 저녁 KBS 9시 뉴스는 '최고의 예우를 갖추다' 를 몇 번씩 반복하며 강조했다.  

어찌됐든 이 젊은이들의 죽음은 애도되어야 하고 충분히 보훈되어야 한다. 다만, 진정한 애도를 위한 여러 일들이 여전히 진행중인 듯하다.  

오늘로써 휴가 아닌 휴가는 끝날 듯 싶다. 아마 오후나 내일 오전쯤 보내올 거고, 일요일부터는 싸매고 또 싸움을 시작해야지. 읽고 싶어서 가져다 놓고 구입해 놓은 책들이 여전히 많은데 좋은 시절 또 다 보냈다. 여전히 손시려운 날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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쬐끔 여유가 생기면 여지없이 책으로 향하는 마음이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오늘은 게이고의 1996년작이라지만, 우리에겐 신상인 [명탐정의 규칙]을 주문했다.  

 

 

 

 

 

 

 

'초현실 자학 미스터리'란다... ㅋㅋ 발상이 재미있다. 미스터리 장르에 대한 패러디와 자학적인 규칙 까발리기. 등장인물들이 대놓고 자신들을 만든 작가를 비웃는다.   

 

 

 

 

 

 

 

안소니 버클리 콕스의 이 소설을 떠올리게 한다는 글을 봤는데, 이 해맑게 다소 멍해보이는 고양이 표지를 집에 가지고 있는지 없는지 아리송해 죽을 지경이다. 읽은 것 같지는 않은데 구입한 것 같기도 하고,... 이 고양이가 도대체가 낯설지 않은 이유는 뭘까? 집에 있을까, 없을까? (고양이가 아니라 개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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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츠오카 세이고의 [지식의 편집]을 대충 훑어봤다. 21세기는 주제의 시대가 아니라 '방법의 시대'가 될 것이라는 주장에는 그렇겠다고 수긍했다. 지금의 고민이기도 하고.  

세이고는 독자가 자신의 편집술을 시험해 볼 수 있도록 문제를 내놓았는데, 그 중 무라카미 하루키의 [양을 쫓는 모험]과 관련된 문제가 나온다.  

<편집연습4> 여기에 어떤 소설의 첫 부분이 쓰여 있다. 이 짧은 대화에서 어떤 것들을 상상할 수 있을까? "장례식은 어디에서 할까?" 내가 물었다. "글쎄, 잘 모르겠는데." 친구가 말했다. "그나저나 그 애 집이나 있었을까?" - 무라카미 하루키, [양을 둘러싼 모험]에서-(문학사상사에서 나온 책 제목은 [양을 쫓는 모험]이다) 

도대체가 [양을 쫓는 모험]이 어떤 내용이었는지가 가물가물한 거라. 그래서 다시 읽기 시작했다. 다시 보면서 하루키의 유머러스함에 키득키득 웃기도 하면서 재미나게 보고 있다. 레이몬드 챈들러식의, 주인공 '나'가 이상한 사건에 얽혀들면서 그야말로 쫓고, 찾는 얘기가 전개되는데, 중반쯤 보고 있는 지금도 결말이 어땠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마치 처음보는 추리소설처럼 읽게 됐다.  

양을 찾아, 더 정확하게는 양을 찍은 사진에 얽힌 사연을 쫓아 모험을 떠나기 전에 '내'가 읽는 책이 [셜록홈즈의 사건기록]이라는 책이라는데, "내 친구 와트슨의 생각은 한정된 좁은 범위의 것이기는 하지만 매우 집요한 데가 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된다고 한다. 도대체 이 책은 뭐지, 하면서 또 뒤지다가 [셜록홈즈의 사건집The Case Book of Sherlock Holmes]인 것 같다는 결론을 내렸다. 한 번 보고 싶다. 레이몬드 챈들러가 아니라 셜록홈즈라. 실제로 참고했던지 교묘하게 꼰 트릭인지 잘 모르겠다. 오랜만에 셜록홈즈도 읽을 것 같다.      

 

 

 

 

  

 

 또 한 권 흥미진진하게 읽고 있는 책이 에바 일루즈의 [오프라 윈프리, 위대한 인생]. 

원제가 "Ophra Winfrey and the Glamour of Misery"이다. 번역책의 제목을 오프라 윈프리라는 인물의 관심에 기대 마치 오프라에 대한 사적인 얘기를 말하는 것처럼 지은 듯한데, 오프라 윈프리와 그녀의 토크쇼를 둘러싼 현상에 대한 사회문화적 분석서라고 할 수 있겠다.  

오프라 윈프리가 다루는 주제들과 그것들을 대중들에게 펼쳐보이는 방식들을 면밀히 분석하고 있는데 대중문화에 대해 면밀하고도 흥미진진한 얘기를 들려주고 있어서 유익하다.  

"가난한 사람은 계량화될 수 있지만 고통받는 사람은 계량화될 수 없다." 

오프라 자신의 인생도 그렇고 토크쇼 게스트들도 고통받는 혹은 고통받아온 사람들에 공통점을 두고 치유와 실패, 그리고 또 다시 치유에 도전하는 특별한 이야기들을 다루는 형식에 주목했다. 저자는 지식인들이 감성을 드러내고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려는 시도를 경시하는 태도 때문에 더욱 오프라 윈프리와 그녀의 토크쇼가 지닌 현재적 의미를 놓치고 있다고 지적한다. 현대의 대중들이 자아를 찾는 방식에 대해 분석하는 하나의 사례로 좋은 책이라고 보여진다.  

우리 TV의 넘쳐나는 토크쇼들과 비교해볼만 하지 않을까? 많은 연예인들이 자신의 이름을 걸고 '오프라 윈프리'같은 토크쇼를 해보는 게 소원이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서 그들이 오프라 윈프리와 그녀의 토크쇼에서 무엇을 보는지가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이 책 역시 중반쯤 보고 있다.     

 

   

 

 

 

 

알라딘이 대형 사고를 만난 건가 보다. 때마침 사고 나기 전 외서 주문을 했다가 뭐, 이유가 일시적 절판이라 입고 시일이 더 걸린다기에 취소했다. 딴 데서 할 수밖에. 나름 급하게 보고 싶었던 건데... .... 알라딘... 작년 연말의 좋지 않은 일을 겪은 후, 어째 불안해 보이는 건 괜한 걱정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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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일에 써 먹을 수 있는 책들 외에는 제대로 읽을 수 없는 날들의 연속이다. 전쟁치르는 분위기... . 이런 땐 알라딘이나 서재들을 힐끗 거리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흩어지기에 가급적 들르려 하지 않는데, 아침 내내 머리 싸매고 있다가 도서관으로부터 문자받고는 딴 데로 새고 있다.  

커트 보네거트의 [신의 축복이 있기를 , 로즈워터씨]가 도서관에 입고됐기에 예약을 해뒀는데 이제사 대출이 가능하다는 문자였다. 젠장. 하이드님의 페이퍼를 보고 용기를 내볼까 하는데, 지금으로서는 읽기 어렵지... 싶다. '유머와 재치'를 잘 보여준다는 이 책이 오히려 읽기를 두렵게 한다. 유머와 재치.... 무서운 말이다. 누군가에겐 그렇게 다가오겠지만 누군가에겐 이게 뭐지, 뭔 소리야?... 이렇게 의아스러워지면 그 책과는 빠이빠이다.

 

 

 

 

 

 

 

한국 소설들 좀 챙겨보려고 노력했던 얼마 전, 한강의 [바람이 분다, 가라] 를 역시 도서관에서 대출해 짬짬이 읽어보려했다. 한강이란 작가의 소설을 처음 보는데. 처음부터 나를 사로잡는 글쓰기를 하지 못하고 있더라. 한 여자의 죽음을 놓고 죽음에 이르기까지를 알아가는 여자 주인공의 얘기가 기본 기둥인 거 같은데, 얼마 읽지 못했지만 어쨌든 도입부는 지루한 사설이 된 듯한 느낌이었다. 덮었다.   

소설은 집중할 수 있어야 즐길 수 있는 장르라는 생각을 다시 한 번 한다. 내겐 그렇다. 상황이 허락되지 않는다면 쿨하게, 욕심을 버리고 집중할 일에 전력을 쏟는 게 현명하다.  

근래 재밌게 읽은 책은, 트렌드에 대한 리뷰들이다. 트렌드를 반발짝만 앞서는 정도가 필요하다.크, 머리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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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일도 정신없고, 사회도 어수선하고.  

요즘들어 부쩍 '나이 먹는다'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순리'에 대해서도. 고리타분한 얘기라고 할지 모르지만, 나도 이러기 싫지만 어쩔 수 없이 드는 생각이다. 다른 무엇보다 가장 크게 느낄 수 있는 건 몸의 변화이기 때문에 왠만해선 몸이 변함에 따라 생각도 변하는 걸 막기는 어렵겠다...이런 생각이 든다. 단지 몸의 변화만을 얘기하려던 건 아닌데,... 산다는 건 몇 년 주기로 찾아오는 고비를 넘기며 끝에 이르는 거 아닐까 싶다. 연로하신 내 부모님, 거리에서 만나는 노년의 삶들을 보면서 늙는다는 거, 시간을 더 산다는 거에 대한 경외감... 한편으로 피로감과 슬픔을 느끼곤 한다. 중년의 사춘긴가? 

"세상에서 가장 끔직한 건 순진하게 살다가 뒤통수 맞는 인생이다."  

오현종의 소설 [거룩한 속물들]의 카피다. 순진하게 산다는 게 어떻게 산다는 건지, 속물처럼 생각하지 못하고 행동하지 못했을 때를 말함이다.  

이 소설을 몇 주 전 일요일 아침에 읽었다. 2주 전인가? 책이 참 슬프더라. '속물들'의 모습이란 게 예전엔 어떤 층위의 사람들이나 참 보기 드물게 노골적인 사람들에서나 볼 수 있었다. 속마음이야 어땠을 지 몰라도 대놓고 물적 욕망에 솔직한 사람들을 보는 시선이 우호적이진 않았다. 소설에는 주인공이 소개팅했던 남자와 버스를 타고 집에 가는 대목이 있다. 집이 어디냐고 묻고, 여자가 대답했을 때 남자는 다른 약속이 있다며 도중에 내리고 만다. 그걸로 그 남자와는 끝이다.  여자가 사는 동네, 주거 형태 등이 이 남자의 리스트에서 차지하는 순위와 기대치에 맞지 않았으므로 더 이상 이 여자를 만날 필요를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지역, 동네 구획적으로다가 가치, 가격이 매겨져 있으므로 참 편리하긴 하겠다. 목표하는 곳만 공략하면 시간, 노력, 자금을 줄이며 효과를 볼 수 있지 않겠는가. 대화 속에서 이런 식으로 어떤 사람에 대한 견적을 딱 뽑아내는 모습을 많이 본다. 이렇게 스스럼없이 이야기하는 걸 하등 이상하거나 계면쩍어하거나 민망해하지 않고 당연하게 내뱉는 모습을 보면서 아, 왠만한 사회학자 보다 사회를 꿰뚫고 있구나 ... 그런 생각을 한다.   

소설은 주인공이 마지막에 속물적 세계에 급격한 피로감을 느끼고는 소설을 쓰겠다고 선언하면서 노트북 자판에 손을 올리는 장면으로 끝난다. 대학졸업자, 20대 여자, ...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길에서 서성이고 있을까? 그래서 이 소설이 더 슬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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