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 기사 검색하다 <씨네21>에 실린, 영화 <나는 비와 함께 간다>에 대한 리뷰 [인간의 고통과 구원에 대한 집요한 물음](이화정)을 읽었다. 조쉬 하트넷과 이병헌, 기무라 타쿠야 세 명의 등장으로 화제를 몰았던 영화지만 감독은 트란 안 홍이다. 너무나 오랜만에 만나는 그의 영화다. 리뷰에서 '근래 들어 가장 용감한 그의 도전'이라고 했는데 나는 이 말에 십분 동의한다. 맞는 말이다. 근래들어 이런 영화를 만드는 것은 용감한 일이다. 근래의 한국 영화들에서는 더더군다나 찾아볼 수 없는 용감한 영화다. 영화라는 스펙트럼에는 이런 영화도 있는 거다. 한국에서는 점점 희귀해져가고 있는 영화. 정성일이 '교양'으로 봐줬으면 한다는 자신의 영화 <카페 느와르>가 어떤 모습을 띄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대놓고 말하지 않고 영화로 말하는 이들의 영화가 더 울리는 법이다.   

한국영화를 통해서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의 고통이나 구원에 대해 생각해 볼 일은 별로 없는 듯하다. 우리는 영화에서 그런 걸 찾거나 보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다.

이렇게 말하지만, <나는 비와 함께 간다>가 아주 뛰어난 영화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영상미의 배경으로 전락한 오지와 원주민들의 모습은 불편하고 날 것처럼 들이대는 감독의 '체'하는 버릇도 괘씸하게 느껴지지 않는 건 아니지만 - 게다가 부인인 트란 누엔케는 꼭 캐스팅 했어야 했는지... -, 그리고 꼭 예수의 얘기를 통해 구원이니 이런 얘기를 해야 하는지 보는 내내 답답함을 느끼긴 했지만 그래도 좋았다.  

고통없는 구원이란 이를 수 없는 것일까? 명랑한 캐릭터라곤 단 한 명도 나오지 않고 내내 무겁고 'thinking'만 하는 인물들로 가득 찬 이런 영화를 만들 수 있었다는 사실만으로 그저 감탄하며 봤던 영화다.  

트란 안홍의 다음 영화작업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 영화화다. 난 일단 예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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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09-10-20 1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이영화에 대한 다른분들의 평을 좀 읽어보고 싶었어요. 왜냐하면 저는 영화보는 내내 불편했고, 집중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지를 모르겠더라구요. 그래서 누군가에게 좀 설명을 듣고 싶었어요. 저는 영상미도 느낄수가 없었구요, 여자주인공(이라고 해야하겠죠?)릴리의 연기는 영화를 보다가 자꾸 옆길로 새는 것 같고 말이죠.

마지막 장면을 보면서도 좀 난감했어요. 왜 뜬금없이 예수의 부활을?

포스트잇님의 이 페이퍼를 읽으니 무슨말인지 좀 감이 잡히는 듯도 하지만 역시 이 영화는 제게 지나치게 어려운 것 같아요. 그런데 다음 작품이 상실의 시대라구요? 오, 이 작품은 어려웠지만 상실의 시대도 봐야겠어요.

이 영화에 대한 포스팅을 만나 반가운 마음에 댓글 남깁니다. :)

포스트잇 2009-10-20 17:56   좋아요 0 | URL
아,불친절한 글인데 댓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트란안홍의 이번 영화는 예전 그의 영화보다 훨씬 더 풀어서 설명해주고 보여줬다고는 생각하는데,그게 예수니 구원이니 뭐 이런 얘기를 하는 게 저는 그닥 흥미롭지는 않았지만 대신에 캐릭터와 캐릭터가 지닌 사연을 압축해가며 스토리를 진전시켜 나가는 방식을 저는 재밌게 봤습니다. 트란안홍이 변한건지 아니면 그도 투자받아 제작하고 상영할 수 있기 위해 어느 정도는 자신의 창작 방식에 변화를 줘야 한다고 의식을 한건지,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번 그의 영화를 보면서 이런 저런 생각을 하게 되더군요.
그래서 트란안홍이 만들 <상실의 시대>가 더 궁금해지고 기대되고요.
별탈없이 투자받아 제작되고 빠른 시일 내에 만나볼 수 있길 바랄 뿐입니다.
다락방님, 영화 좋아하시고 저보다 훨씬 많이 보시는 것 같은데, <상실의 시대>도 함께 두 손 모아 기대해보아요.~
 

어제는 영화를 두편이나 봤다. 허진호 감독의 <호우시절>은 극장에서, 에드워드 즈윅 감독의 <블러디 다이아몬드>는 케이블 TV에서. <블러디...>는 2시간이 넘는 영화인데다, 케이블 TV에서 하기 땜에 중간중간 광고가 끼어들고, 또, 1부, 2부로 나눠서 하느라 1부 끝나고는 한참을 쉬어야했다. 늦게까지 TV 보면 안되는데 이왕 본 거, 또 보고 싶기도 했고 해서 졸음과 피로를 참으며 겨우 봤다. 디카프리오는 점점 매력적인 배우가 돼 가는 것 같고, 현실 고발을 담고 있는 만큼 충격적이고 참담한 이야기가 영화 전편에 흐른다. 2007년 1월 개봉했는데, 관객 동원은 43만 정도였던 듯하다. 맞붙어 1위를 한 영화는 <마파도>였다. 할리우드영화도, <트랜스포머> 정도가 아니면 명함도 못 내민다.   

<블러드..>에서 솔로몬의 말, '사람들은 우리에게 문제가 있다고 말하기도 해요, 차라리 외국이 지배하던 때가 나았다고...' 아프리카 나라들이 유럽의 식민지에서 해방됐지만 여전히 착취 당하는 대륙으로 전전하며 내전 등으로 살육과 폭력이 끊이지 않는 현실에 대한 그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의 고민을 드러냄과 동시에 인종차별 인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아프리카와 아프리카인에 대해 갖고 있는 편견을 아프게 찌르는 말처럼 들렸다.  

<호우시절>을 보며... 울었다. 울면서 생각했다. '내가 눈물 흘리는 건 호르몬 때문이야.' 

혼자 본 것도 아니고 직원 중에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어서, 영화관을 혼자 찾아 버릇하는 나로서는 다소 불편했지만, 그래도 함께 보자는데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근데 주책없이 눈물이 흐르지 뭔가. 아, 민망했다. 평소의 카리스마와 냉정함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  

호르몬 때문이 크지만 그래도 눈물이 난 이유를 굳이 찾자면 이유가 있긴 하다. 굳이 밝힐 순 없고.  

<호우시절>은 '모든 걸 마음에 담아두고 살 수는 없다'는 말과 통하는 얘기를 담고 있다고 봤다. 쓰촨성 지진과 깊은 관계를 갖고 있는 이 이야기에는 두보초당의 아름다움과 봄날의 상큼함을 관광 안내 홍보처럼 보이기도 하는 영상을 많이 담고 있다. 정우성과 고원원이 영어로 대사를 주고받는식은 보는 데 이질감을 계속 느끼게 했다. 연기를 못해서가 아니라 왠지 자신들의 말이 아닌 외국어로 얘기를 하는 것을 보는 어색함이 맴돌았다.  

절정부분의 고원원의 울음을 보면서, 도대체 저 감정을 뭐라 봐야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혼재된 감정, 복잡다단한 그런 모든 감정을 분출하는 것이리라. 그래도 굳이 어느 쪽이 더 강했을까 라는 고약한 생각을 계속 했다. 허진호는 사랑을 둘러싼 이런 감정을 드러내는 데 과연 재능이 있다. 그래서 어제도 허진호 영화를 보러 간 게 아닌가? 로맨틱 코미디도 해보고 싶다 하니, 그의 다음 영화도 기대해본다.    

 

<호우시절>은 자세한 투자정보는 모르겠지만, 겉으로만 보면, 한국과 중국의 주연배우, 한국 감독, 배경 중국, 언어 영어&한국어로 요즘 심심찮게 시도되는 '글로벌' (글로벌한 마인드나 주제, 정서를 담고 있느냐가 아니라, 자본과 인적, 배급상황만으로 자국을 넘어선다는 의미에서) 프로젝트 중 하나이다. 이병헌 정도를 제외하곤 만족할만한 성적을 내지 못하고 있는 이런 프로젝트들에 대해 좀더 고민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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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여유가 생겨서인지(사실 여유부릴 때가 아니긴 하지만, 이러다 나중에 댓가를 치르는 거 아닌가 하는 걱정을 달고 사는 게 병인듯도 싶고... 어쨌든 틈만 나면 하고 싶은 게 있지 않은가) 계절이 계절이라서인지, 그냥 지금 이맘 때쯤이라서인지 고전이 그립다.     

 

1994년에 개봉했었던 영화였다. 15년 전이 돼버렸나? 그런데 왜 요즘 새삼스럽게 이 영화가 다시 떠오르는지 모르겠다. 원작을 이제야 보려 한다. 마틴 스콜세지의 몇 편 영화 각본을 맡았던 제이 콕스와 함께 스콜세지 자신도 각색에 참여했다고 정보에 나온다. 당시 볼 때도 좋았다고 기억하는데 소설 읽은 후 다시 볼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다.   

작가 이디스워튼의 [이선프롬]도 인상적이었다. 반전이라면 반전이랄 수 있는 결말 대목은 이 작가에 대한 기대를 더욱 높인다.  

 

 

 

 

 

 

 

조셉 콘래드의 [로드짐]은 민음사판으로, [어둠의 심연]은 을유문화사판으로 구입했다.   

 

   

 

 

  

 

 

 

조셉 콘래드와 조지프 콘래드, 그리고[암흑의 핵심]이 아니라 [어둠의 심연]이다. (p.s.[로드짐] 민음사편은 '민음사'에 걸맞지 않은 책 만듦새를 보여준다. 번역의 수준도 글쎄... 무슨 번역기에 넣고 번역한 모양, 투박하기 그지 없고, 오탈자도 심심찮게 찾을 수 있는 지경이다. 그리고 가끔 난 민음사의 세계문학전집 판형을 왜 굳이 이렇게 했는지 그것이 궁금하다.)

이 유명한 책들을 아직 읽어보지 못한터라 이번에 꼭 조셉 콘래드를 만나보려 한다.  

[어둠의 심연]은 영화 <지옥의 묵시록>에 모티브를 준 소설이기도 하다. 역시 영화는 오래 전에 먼저 봤고 이제야 그 아이디어의 핵심인 책을 보려 한다.  

   

고전에 속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오컬트 스릴러의 고전이라고 할 수 있는 윌리엄 요르츠버그의 [폴링엔젤]. 

 

 

 

 

 

 

 

 아, 이 역시 영화 <엔젤하트>를 먼저 봤다. 알란파커 감독의 89년 영화였으니, 나는 아마 90년대 때쯤 봤을 건데, 당시 이런 류의 영화를 처음 보고 정말 놀라워했던 기억이 새롭다. 이젠 뭐, 새롭진 않겠지만, 다시 봐도 여전히 매력적일 듯 하다. (p.s.알란파커 감독의 원작을 다루는 솜씨가 돋보였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영화의 매력이 더 압도적이다.) 

 

 다시 보기를 싫어하는 나지만, 책도 영화도 좋은 건 다시 보고, 또 보고 할 필요가 있음을 느낀다. 다시 보게 하는 책이나 영화가 좋은 거 아닐까? 책읽느라 도끼자루 썩는줄 모르겠지. 사는 게 이러다보니, 책 읽는 행위가 자꾸 눈치보인다. 이런 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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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로부터 영원한 격리.저자 마이클 길모어의 둘째 형이자, 냉혹한 살인을 저지른 개리 길모어를 사형, 총살형에 처한 미국 유타주의 형법과 여론이 원했던 것. 개리 자신이 총살형을 원했다. 사형을 적극적으로 요구했다. 죽음만이 자신을 자유롭게 해줄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이미 수없이 자살기도를 했고, 가석방돼 나왔을 때 그에게 주어진 낯선 세계에서 살아갈 그 어떤 의지도 가질 수 없었다.  

피해자 가족들은, 정말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아무 이유없이 개리에게 살해당한 그 피해자의 가족들은 개리가 사형을 선고받고, 개리 자신이 죽여달라는 적극적인 언론 플레이를 할 때, 그리고 결국 개리가 원하는 대로 사형이 집행되었을 때, 즉, 개리가 자신의 방식으로 사형을 끌어들이고 받아들였을 때, 속절없이 견뎌내는 것 외 달리 방법이 있었을까?

폭력이 점철된 인간사 때문이든, 좁게는 정착기 미국의 역사, 더 좁게는 길모어 가족사의 저열함과 폭력성 때문이든, 큰 형인 프랭크2세와 저자 마이클은 다른 길을 갔고, 개리와 게일런은 연속적인 범죄를 저지르다, 한 명은 총살 당했고 또 한명 게일런은 살해에 가까운 상처를 입고 후유증으로 죽었다.  

개리가 어린 시절부터 보호소와 감옥을 드나들며 거기에서 가해지는 교화라는 허구, 폭력적 감금의 영향으로 점점 더 걷잡을 수 없는 범죄와 타락의 심연으로 빠져들었다 해도, 개리 자신의 어쩔 수 없는 악의 성향을 변호하기는 어렵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 어찌해볼 수 없는 폭력의 근질대며 끓어오르는 분출 때문에 안타까운 것이다. 마이클의 분노, 안타까움, 죄책감과 두려움 등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건, 개리의 그 비뚤어져만 가는 행위가 그 어떤 것으로도 막지 못할 듯해 보이기 때문이다. 개리 자신도 그걸 알고 있었기에 죽음을 달라고 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지적이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오블라디 오블라다 인생은 브래지어 위를 흐른다]를 보다가 알게 된 책이 마이클 길모어의 [내 심장을 향해 쏴라]이다.   

 

 

 

 

 

 

 

[오블라디 오블라다...]는 채 다 읽지 못했는데, 하루키가 신문에 연재했던 에세이 모음집이다. 어떤 글은 좋았고, 어떤 글은 그다지 인상적이지 못했다. 하루키는 이 책의 일어 번역을 했다. 그래서 집사재에서 나온 이 책에는 하루키의 일본어 번역판에서 옮긴 하루키의 해설('후기')이 맨 앞에 실렸다. [태엽감는 새] 집필을 하는 도중에 번역에 손대기 시작했으니까 아마도 이 책을 번역할 때 '고배대지진', '옴진리교 지하철 독가스 사건'을 접하며 인간과 사회에 대해 한 걸음 더 바짝 관심을 가지고 있던 때였을 것이다.  

책을 번역하면서 하루키는 '인간으로서 정말 많은 것을 배웠다'고 썼다. 

소설가로서 하루키는 강렬한 현실의 인간 이야기 앞에서 소설가로서 자신의 위치와 역할을 다시 한 번 생각했던 듯하다.  

   
 

"'현 시대는 사실이 픽션보다 힘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런 말투가 유행이라 해도 나는 하고 싶지 않다. 세상사는 그렇게 단순명쾌하지 않다. 사실에는 사실 고유의 다이너미즘이 있으며 픽션에는 픽션 고유의 다이너미즘이 있다. 사실과 픽션과는 박자의 길이가 다르고 살을 붙이는 방법이 다르고 책임 소재도 다르다......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사실과 픽션이라는 두 다이너미즘은(물론 그것이 각각 양질의 것일 경우지만), 특성의 차이를 뛰어넘어 서로 점점 가까워진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사실에는 픽션적인 요소가 첨가되고 픽션은 사실적인 요소를 더욱 늘려갈 것이다." 

 
   

하루키는 이 책을 '정신적 상처의 연대기'라고 칭했다. 동시에 미국이라는 나라의 역사를 생각했다. 길모어, 그 중 외가의 뿌리에 흡착돼있는 모르몬교가 보여준 것처럼, 미국이 "격렬한 폭력에 의해 승리를 쟁취한 국가라는 것을 생각하면, 그 저주가 지금 어떤 사람들을 격렬하게 규정하는 것 또한 당연한 이치'"라고 하루키는 적었다.  

하루키는 '황폐'와 '유령'을 마이클 길모어가 자신의 뼈아픈 가족사를  쓰면서 쥔 키워드라고 생각하는듯했다. "먼 과거의 깊은 어두움으로부터 나타나, 그들의 목덜미를 붙잡고 지옥으로 끌고가는 무섭고 영원한 죽음의 영혼, 그것은 도망갈 수 없는 전승이며 유산이다." 

하루키 세계와도 닿아 있는 말처럼 보인다.  

우리의 '유령'도 이처럼 강렬하게 보여주는 이야기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줬음 좋겠다.     

p.s. 예전에 읽었던 천명관의 [고래]가 얼핏 떠오른다. 주인공 여인의 얘기를 통해 악몽과 현대사를 관통해 보여줬던 것 같은데 ... ..  


 

 

 

 

 

 

 

p.s. 모르몬교(몰몬교,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교회)의 창시자 조셉 스미스(조지프 스미스?)가 '모로니'신의 천사로부터 받은 고대의 황금접시에 새겨진 것을 옮긴 것이라고 하는 경전, 모르몬교의 '성경'과 같은 모양인데, 우리나라엔 아주 '귀한' 책이 돼버렸다. 마이클 길모어에 의하면 '성서적인 의미를 제거하고 남는 것은 다름 아닌 미국인들이 좋아하는 주제로 가득한 이야기, 즉 가족과 살인에 관한 이야기'라고 한다. 읽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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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많이 알려져 있는 듯 한데, 나는 최근에야 봤다.  
2006년 유종호 연세대 석좌교수가 학생들이 가장 감명깊게 읽고  흥미밌게 읽은 책으로 하루키 소설을 들고 있다는 점을 염려하면서,  
 
하루키 소설은 '문학의 죽음을 재촉하는 자기 파괴적 허드렛문학'이라고 규정했다. "[상실의 시대]에 중독된 독자는 그 작품의 화자가 읽고 있는 형성소설[마의 산]을 끝내 읽어내지 못하고 말 것이다. 마음의 귀족되기는 틀렸지만 그렇다고 흉될 것이 없는 시대에 살고 있는 셈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론] 중, '닫힌 역사와 열린 텍스트로서의 작품 읽기'(옮긴이의 글, 김춘미) 인용) 
  
재밌는 말은 또 있다.  
한국 칸트학회장인 강영인 교수는 <<포스트모던 칸트>>라는 글에서 하루키의 [1973년의 핀볼] 에서의 한 단락을 인용하면서  
 
"핀볼의 주인공들은 노닥거리는 데 칸트를 사용한다" 고 개탄(?)했다.   

"......칸트는 오늘날 세상의 바닥을 기어다닌다. 아무 여자 아이들하고 잠자리에서 깨어나는 젊은이의 아파트 구석에 굴러다니며 할 일 없이 무료할 때 한마디 인용되기 위한 칸트. 이제 칸트는 바닥생활이라는 새로운 운명을 살아 나가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는 진실에 대한 우울한 교훈이 아닌가? 흔히 말하는 모더니즘의 기획이 흙바닥에 떨어진 시대에 근대 계몽주의의 완성자 칸트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  

 

 

 

 

 

 

 

그냥 하루키 읽게 해주세요, 네?  

[1Q84] 때문인지, 아니, 뭐, 그저 전부터 솔솔 불어넣어진 하루키의 '사회참여'에 대한 기대(?)또는 마케팅 효과를 지나치게 확대해석하지 않았음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하루키만의, 또는 하루키 같은 소설가도 있는 것이지, 자기 스스로가 그런 뉘앙스를 풍기곤 한다해도, 하루키는 하루키지 다른 누군가가 될 수 없다는 생각이다.  

[상실의 시대]와 [신의 아이들은 모두 춤춘다]의 [벌꿀파이]가 얼마나 먼 거리에 있는지 잘 모르겠다. 아, 물론 [벌꿀파이]에서의 '결심'이 대단해 보인다면 뭐, 그렇게 봐줘도 되겠지.   

[태엽감는 새]에 나왔나, [양을 쫓는 모험]에도 나온 듯한데, '노몬한사건'에 대한 하루키의 관심과 연구가 '가해자이면서 동시에 피해자로 인식하는 일본인들의 보편적 정서이자 인식'을 느끼게 해주는 것도 사실이다. 한국인인 나는 읽으면서 걸리더라. 그게 하루키다(하루키였나?). 그의 한계라면 한계고, 그의 세계 인식이다. 이해하든지, 거부하든지. 지극히 하루키스러운가?

[1Q84] 2부의 손발이 오그라드는 아오마메와 덴고의 놀이터 엇갈림 씬은... 실망스러웠다.  

지난 6월 요미우리와의 인터뷰에서, 1995년 옴진리교의 지하철 사린가스 살포 사건의 이후 일들에 관심을 가졌던 일에 대해서도, 하루키는 피해자들보다는 평범한 인간성을 가졌던 사람이 세뇌를 받고, 정신을 차렸을 때는 언제 생명을 빼앗길지 모르는 사형수가 된 상황, 그 상황에 대해 몇 년 동안 생각해왔고, 그것이 [1Q84] 이야기의 출발점이 됐다고 말했다.   

그의 그런 대략적인 생각을 따라가보면, [1Q84]에서 '선구'의 리더에 대한 묘사를 왜 그렇게 했는지 이해가 가기도 했다.   

지하철 독가스 살포사건의 피해자들의 인터뷰를 정리한 책 [언더그라운드]는 우리 나라에 출판됐으나, 옴진리교 신자들의 인터뷰인 [약속된 장소에서]는 출판되지 않은 모양이다. [언더그라운드]의 저조한 판매실적이 [약속된 장소에서]에 여파를 미쳤을까? 

約束された場所で―underground〈2〉

하루키의 이야기 솜씨는 언제나 경탄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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