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ncer in the dark |
Dancer in the dark를 보고 이 영화의 그 거친 촬영은 그 흔들리는 화면의 불규칙한 율동으로 내 상상력의 나래를 요동치게 한다.
[내용과 형식의 뒤석임]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란 화두는 '내용에 대한 형식의 종속', '내용의 우위성과 그 초월성'을 전해준다. 달을 보게 되면 그 손가락은 더 이상 필요없고, 그 손가락에 시선을 남겨두면 오히려 달을 보지 못하게 된다. 이는 진리에 대한 언표의 한계성과 진리에 대한 이성적 파악의 한계 곧 체험적 지식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불교의 성향이 드러나있는 관점이다. 이것을 기독교에 적용해보면, 예수는 하나님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된다. 결국 하나님을 보게 되고 깨닫게 되면 더 이상 예수에 집착하면 안된다. 그런데, 이런 관점에 대해서 김진 목사님께선 기독교는 다른 점이 있다고 하신다. 기독교에서는 그 진리를 가리키는 손가락이 곧 하나님이라는 점이 다르다는 것이다.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그것을 들었던 때는 알수 없었다. 그 후에 파니카를 공부하면서 어느 정도 그 의미를 알아가기 시작했고, 이 영화를 보면서 한 가지 깊은 이해로 다가가게 되었다.
이 영화는 기존의 뮤지컬 영화와는 근본적인 차이를 지니고 있다. 보통 뮤지컬 영화는 어떤 내용을 전하기 위해서 음악과 춤을 도구(형식)로 사용한다. 그러나 이 영화에는 형식이 단순하게 내용을 위해 존재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형식이 내용으로 침투하고 있고, 형식과 내용의 경계가 허물어져 있다. 이 영화는 눈이 점점 멀어져서 장님이 되는 어머니가 자식도 그렇게 될 것을 알고 자식의 눈을 수술해줄 돈을 모으면서 일어나는 상황을 통해서 모정을 그려낸다. 영화가 전하려는 직접적인 내용은 자식에 대한 사랑인 것이다. 그 내용을 표현하는 형식은 음악과 춤이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는 음악과 춤이 그 시작점에서는 영화의 현실과 연결되어 있어서 그 경계로서의 시작점을 삭제되었다. 현실에서 흔하게 접할 수 있는 소음-공장의 기계소리, 기차가 달리는 소리, 그림그리는 소리 등-이 타악기의 소리로 이어지고, 그것이 노래와 춤으로 연결된다. 물론 다른 영화에서도 이런 기법을 사용하지만, 이 영화는 음악과 춤이 등장하는 모든 경우에는 다 이런 매개를 사용하는 의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현실의 장면은 그 빛깔이 약간씩 탈색되어있다가 음악과 춤이 스며나오면서 진한 빛깔로 바뀐다. 이런 형식은 "인간 삶의 초월적 현실"과 "美와 의미의 차원이 지닌 의미"를 간접적-내용이 아니라 형식 자체로-으로 드러내준다. 생존을 지향하는 사건의 불규칙한 연속과 그 고통들 속에서 의미와 아름다움을 읽어내는 눈과 귀가 인간의 실존에서는 단순한 환상이나 비현실적 도피가 아니라 본질적 차원이라는 점을 드러내준다. '아들을 위해 점점 어두워지는 눈으로 돈을 벌기 위해 일하는 고통의 현장', '그 돈을 훔쳐가는 이웃을 살해하는 불가항력적인 상황'...결국에는 '교수형을 당하는 상황', 이런 일련의 상황은 삶에 닥쳐오는 부당함, 무의미, 고통 등의 인간 실존을 그려준다. 이런 상황 속에서 인간은 아름다움과
시간이 없어서 화두만을 기록해두련다. 1. 시선으로서의 인간론, 삶의 무의미와 불규칙 부조리를 미와 아름다움으로 읽어내는 시선으로서의 인간론. 2. 형식의 중요성, 형식이 이미 내용을 결정하는 역전현상. 종교적 실재의 이해와 그 상징 역시 다원론적 성격을 갖는 것은 이런 형식에 성육신한 초월의 차원때문이다. 또한 해체적 글쓰기가 지닌 의미와도 연결된다. 3. 인간 삶에 있어서 미와 아름다움을 읽어내는 상상력의 눈이 지닌 의미와 중요성. 4. 시선으로서의 인간은 바로 삶의 흐름에 온 몸으로 동참하는 인간의 존재의 의미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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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학적 초월의 존재 :
아름다움에 이끌려 고통 중에서도 자신을 내어주는 시선으로서의 인간
태초에 흑암과 공허가 있었다. 그 흑암과 공허가 기대어있는 자리이자, 그 깃든 몸으로 그 고통의 깊이를 함께 느껴 알았고, 또한 그 상처를 어루만지는 안타까운 바람 위로자이었던 하나님. 스스로를 그렇게 있게 했고, 또 그 혼돈을 질서로 불러내 아름답게 하신 음성이자 아름다움을 느껴준 시선이었던 하나님. 그 혼돈 속으로 스며 함께 아파하고 그 흑암과 공허를 넘어서게 하는 힘이었던 하나님.
그 하나님을 닮아 피조물들의 이름을 부르던, 자신을 닮은 또 다른 나에게 하나님이 인간에 그런 것처럼 매혹당한 아담, 인간. 하나님을 닮아 인간은 그렇게 혼란과 모순, 고통과 아픔의 무질서 속에서 아름다움을 읽어 느끼고, 극한 고통을 그대로 다 느끼면서도 자신을 내어주는 가득함을 만끽한다. 다른 동물들이 생존의 논리와 힘의 논리로 균형을 유지하는 것과는 달리 아름다움과 자신을 모두 내어주기 까지 누군가를 사랑하는 의미에 매혹되서 스스로 자신을 내어준다.
이것은 이끌려가는 매혹당함, 붙들림이지만 동시에 죽음의 절대적 고통을 스스로 맞이하는 결단이다. 스스로와 붙들림의 긴장이 인간 안에서 함께 있다. 스스로인 것은 바로 그 모든 고통을 홀로 다 감당해야 하는 절대고독을 알고 있음이다. 그럼에도 붙들린 것이기에 하나님의 창조를 이해하고, 계속되는 창조에 동참하는 절대고독의 아늑한 행동이다. 동물과 물질의 차원에도 생명의 논리는 흘러가고 그것 역시 붙들린 것이지만, 인간의 붙들림이 다른 것은 ; 그 생명의 논리를 따라 자신을 내어주는 과정의 아름다움과 충만한 의미 그리고 그 깊은 나락의 고통을 전존재로 온통 맛보는, 감상하는 시선[의식의 차원]이라는 점이고, 그 과정이 스스로이면서 함께라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