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를로 뽕띠와 애매성의 철학
김형효 지음 / 철학과현실사 / 1996년 8월
평점 :
절판


메를로 뽕띠는 훗설의 현상학에 존재하는 중요한 두 흐름인 '선험적, 본질적 현상학'과 '생활세계의 현상학' 가운데 후자에 중심을 두고 강조한 실존주의적 경향의 현상학자이다. 즉, 구체적 실존과 사실의 모든 경험을 괄호 속에 묶어두고 관념의 본질을 의식 현상 속에서 찾으려는 것보다 의식이 실존의 체험적 세계에 근거하여 하나로 뒤엉켜 있다는 점에 강조점을 둔다는 것이다.

뽕띠가 이렇게 생활세계를 강조하는 것은 의식이 언제나 대상들에 대해 지향하고 있는 능동적인 면 뿐만 아니라 이런 의식의 집중이 없이 자동적이고 수동적으로 체험을 받아들이는 신체의 작용이 자체적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점을 중요시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게 주어지는 세계는 의식에 의해 구성되는 세계라기 보다는 신체주관이 중심이 되어 체험되는 것이고, 인간의 의식이 언제나 신체를 전제로 존재하기 때문에 결국 신체주관이 의식작용의 근거로 작용한다고 판단한 결과이다.

이런 관점은 훗설의 '환원'(reduktion)에 대해 다른 해석을 준다. 훗설은 명증한 진리를 확보하기 위해 의식의 순수한 모습을 규명하려는 의도로 선험적 환원을 말한다. 하지만 뽕띠는 오히려 이 환원은 그 완전한 규명이 불가능하다는 것과 인간의 의식이 신체적 주관에 근거지워져 있음을 알려주는 것이라고 본다. 그래서 그는 의식과 신체의 관계를 무화시키는 훗설의 환원을 멈춰야 하고, 현상학은 인간의식의 근거가 되는 생활세계와 그것과 관계 맺는 의식의 "살아진", "체험된" 관계를 해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인간이 어떤 이념이나 과학의 교설 또는 종교적 교리 이전에 생활세계와 어떤 모습으로 관계 맺고 있는가하는 그런 원초적 인간생활의 적나라한 현상을 밝히려는 의도를 중심과제로 삼는다."1)

이런 뽕띠의 현상학이 설명하는 몸, 지각, 그리고 세계의 구조는 대략 다음과 같다. 세계 내적인 존재인 의식은 육화된(embodied) 상태로 인해 세계에 의해 구성되면서 동시에 세계를 향해 지향되어 있음으로 인해 세계를 선택해 구성한다. 그런데 이런 두 방향의 움직임이 신체를 통해서만 실존하기 때문에 결국 이런 구조는 '근원적으로 몸을 통해 세계는 인간을 구조화하고, 몸을 통해서 인간은 세계를 구조화한다'고 바꾸어 말할 수 있다. 이런 신체의 인식작용을 신체주관의 '신체적 지각'(bodily perception)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런 "육화된 의식의 현상은 정확히 주관과 객관으로 이분되기 이전에 존재하는 '사이에 있는(in-between) 영역'이다."2)

이런 육화의 철학은 과학, 예술, 언어 그리고 역사 등의 다양한 주제에 대한 전면적인 재해석을 요구한다. 그 가운데 철학에 대해서는 먼저 근대 철학사를 꿰뚫어 온 정신의 절대화를 비판한다. 즉, 정신이 절대화된으로써 정신 내적인 세계와 이성에 의해 이론적으로 구성된 세계를 우리가 살아가는 바깥의 실제 세계보다 더 참운 세계로 보게 되는 문제를 낳는다는 것이다. 사실 뽕띠의 철학에 의하면 순수의식이나 순수한 세계와 같은 것은 존재할 수 없기에 기존의 관념론, 경험론, 합리론 그리고 실재론 등의 철학은 무너지게 된다.

다음으로 기존의 철학은 근본적으로 이원(二元)의 대립들 즉, 관념론과 실재론, 즉자와 대자, 주관주의와 객관주의, 기계론과 목적론 등의 대립을 낳는다는 문제를 비판한다. 그리고 그는 이 문제를 신체주관 현상학 즉, 육화된 의식의 개념으로 주관주의와 객관주의를 극복하면서 과학적 경험론과 형이상학적 관념론의 양뿔 사이을 빠져 나오려 한다. 의식과 세계의 극단적 양극화를 이 둘이 풀리지 않는 매듭으로 묶여있는, 주관과 객관이 이분되기 이전에 그 사이의 영역에 근거로 존재하는 '육화된 의식'을 제시함으로 가능케 하다.

그리고 과학에 대해서는 '과학이 사물들을 조작하고 그들에게서 생명성을 사상(捨象)시켜 버린다'3)고 비판한다. 과학이 이런 문제를 낳는 것은 스스로 보편적이라고 판단하는 과학의 모든 보편성이 사실 직접적으로 경험된 세계에 대한 단순한 추론 내지는 설명이기에 이차적 질서임에도 이것을 시간에 독립적인 절대불변의 진리로 잘못 보는 것에서 기원한다.

이런 문제에 대해서 현상학은 과학의 양심으로 작용하여 이른바 객관적 범주라고 보는 것들로부터 눈을 돌려 원래의 체험을 상기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과학의 의미를 새롭게 해준다. 즉, 과학이 과거와 미래이 시간적 한계의 제약 안에서 그리고 생활세계에서 우리의 지향적 활동의 산물일 뿐임을 알려주고 과학적 이성의 시간성은 그 안에 존재하는 상호주관성을 드러내 준다는 것이다. 이 때 상호주관성은 신체주관이 '지각됨과 지각함'으로 경험하는 것처럼 과학적 이성 역시 타자로부터 그 진리를 위임받는 동시에 타자를 위해서 진리를 재창조한다는 것이다. "형이상학적이든 과학적이든 간에 이성은 독자적으로 사유하는 생각 또는 자율적으로 사유하는 자아라는 형식으로 혼자 존재할 수 없다"4)는 것이다.

 [미주] 
1) 김영효, "메를로-뽕띠와 애매성의 철학" (서울: 철학과 현실사, 1996), p. 17.
2) 리차드 커니, "현대 유럽철학의 흐름", 임현규, 곽영아, 임찬순 역(서울: 도서출판 한울, 1992), p. 91.
3) 메를로 뽕띠, "눈과 마음", 앞의 책, p. 93에서 재인용.
4) 앞의 책, p. 95.

[참고도서]
박정호, 양운덕, 이봉재, 조광제, "현대 철학의 흐름" (서울: 도서출판 동녘, 1996)
김영효, "메를로-뽕띠의 애매성의 철학" (서울: 철학과 현실사, 1996)
리차드 커니, "현대 유럽철학의 흐름", 임현규, 곽영아, 임찬순 역(서울: 도서출판 한울, 199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