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니스 파시즘
노혜경.진중권 외 지음 / 개마고원 / 2001년 7월
평점 :
절판


이 책은 단 한 편의 서평만이 올려져 있는, 나와 사람들의 무관심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읽게 되었다. 그러나 성폭력이 일부 몰지각한 남성들만의 문제일뿐 나와는 무관하다는 고상한 남성들과 뒤에서 무책임한 비난에만 머문채 공범이라는 것조차 모르는 여성들의 방조와 깊이 연관되어 있을 것이라는 혐의와 마주쳤다. 그리고 책을 덮을 때 쯤 버거운 짐 앞에서 서성이는 나의 발걸음과 마주치고 말았다.

이 책은 한국 사회에서 계속되는 성폭력과 그것을 말했을 때 벌어지는 집단적이고 잔인한 보복의 양상, 이를 방관하는 침묵들과 그 배후에 음흉하게 도사리고 있는 남성우월주의의 통치 전략에 대해 날카롭게 분석하여 그 파시즘적 성향의 실체를 까밝힌다. 구조적 맥락에서 성폭력은 남성중심사회의 통치전략이자 남성중심의 가치관으로 날을 세운 치욕의 칼날로 여성을 순응과 복종 그리고 안락 안에만 묶어두는 계급폭력이며, 약자에 대한 언어적, 실제적 폭력을 통해 분배의 왜곡이나 중간층의 불만을 해소시켜 그 구조적 문제성을 무마시키는 전술이라는 점을, 게다가 이런 지배는 '힘에 근거한 위계적 구조를 고착시킴으로써 파시즘적 사회로가는 기름진 토양'을 만든다는 점을 폭로한다. 이런 억압의 구조는 급기야 진보 상업주의, 문화 특권주의라는 문학적 타락과 문화권력의 양상에 까지, 그리고 정숙한 여자와 창녀, 섹시한 여자와 아줌마 등의 가치대립적 구조를 통해 여성의 이미지마져 독점하고 관리한다.

그리고 심리적 차원에서는 군사문화를 통해 남성들 안에 구조화된 왜곡된 남성 이미지, 미숙한 자아정체성으로 인한 불안과 수치심을 수평적 폭력으로 해소하려는 병리적 심리구조 등으로 분석해낸다. '여성에 대한 남성의 폭력과 보복 속에는 여자를 지배하지 않고는 자기 확인이 안되는, 그래서 오히려 자신의 왜소함을 웅변하고야 마는 남성들의 일그러진 자아'가 발끈하여 고추서있다는 것이다. 더욱 심각한 것은 여성 자신들 조차 이런 썩어문드러진 구조의 악취를 맑은 공기나 아름다운 향기로 호흡하고 있고, 심지어 적극적 가해자의 자리에 앉아 그 남성적 폭력에 동참하고 있다는 점이다.

저자들의 이런 다양한 접근은 성폭력의 원인과 양상 그리고 그 심리구조에 대해 다차원적인 분석을 제공하여 그 안팍의 구조와 역학관계를 입체적이고 심층적으로 보여준다. 이런 시선들은 객관적이고 냉정한 분석뿐만 아니라 성폭력의 상처와 그 고통의 숨결이 담긴 고백조의 음성, 그리고 원시적 파괴본능을 드러낸 성폭력의 현장에서 느낀 당혹감과 분노, 그 모멸감까지 생생하게 울려오는 다양한 음색을 취하고 있다. 그로 인해 입체적인 지형도와 지층구조 위에 덧입혀진, 선혈이 낭자한 적홍빛 얼룩들과 쓰라린 눈물, 그리고 불안하고 왜소한 자아를 감추려는 폭력적이고 기만적인 자위행위의 그 거친 숨소리와 역겨운 정액의 악취까지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일상의 도처에 무성한 성폭력의 가시넝쿨들이 저 음험한 무의식의 늪 깊은 곳에서부터 뻗어나온 파시즘이란 거목과 어떻게 뒤엉켜있지, 그리고 여성이란 대지를 짓밟고 서서 그 피를 빨아먹고 자라난 우리의 자화상과 우리의 고상하고 세련된 삶이 그렇게 억압하고 기생하여 얻은 비계들이며 스스로조차 기만하여 자해하는 어리석은 비계(秘計)임을 폭로한다. 그 뿌리 깊은 곳에 뒤엉킨 욕망의 지형을 살펴 전하는 음성은 애써 되삼키는 울먹임과 고통의 심음소리와 뒤섞여 그 고통을 생생하게 전하여 독자에게서 내용을 평가하기만 하는 객관적 거리를 앗아간다. 독자에게 그 성폭력 현실 속에서 자신들이 서있는 지리적 위치와 폭력과 억압의 구조 속에서 맡고 있는 역할을 느끼게 해준다.

결국 남성지배구조의 노예에 불과한 가해자나 직접적인 피해자로 살아갈 것인지, 아니면 길없는 길을 걸어들어가는 해방의 개척자로 성장해갈 것이지, 이 중에 하나만을 선택해야할 갈림길 앞에 함께 서도록 만든다. 지금 나는 나와 관련이 없다는 그런 이기적이고 자기기만적인 착각에서 벗어나 나의 왜소한 거시기에 비춰진 자아가 얼마만큼 성숙해있는지를 확인해야 한다는 절박한 현실과 마주하여 그 버거운 무게 앞에서 서성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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