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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의 바보
이사카 고타로 지음, 윤덕주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6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사람은 자기의 처지에 따라 같은 책도 다르게 읽게 된다. 내게 이 작품은 진지하게도, 맘 편하게도, 그렇다고 그냥 넘기고 말수도 없는 그런 작품이었다.
언젠가 바닷가에 놀러 갔다 집에 왔을 때가 생각이 났다. 그 날 해살이 내리 쬐고 텔레비전에서는 야구 중계를 했었다. 아버지는 야구 보시고 엄마는 짐 정리하시고 동생과 나는 바닷가에서 주어온 돌멩이와 조개껍질 씻는다고 마당에서 난리를 피우던 중이었다. 그때 북에서 누군가 왔다고 사이렌 울리고 그랬었다. 우린 라면 사와야 하나, 어디로 피난가야 하나 그랬었다. 그러면서 피난 갈 때 빨리 못 오면 넌 버리고 간다고 엄마는 내게 말씀하셨고 나는 버리고 가던지, 나는 암튼 피난 안 갈 테니까 그랬었다. 이 책을 읽으며 그 생각이 났다. 그때는 그냥 일종의 헤프닝처럼 끝났지만 이 책과 같은 상황이 닥친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여러 사람들이 등장한다. 종말이 다가오지 않아도 상처 하나쯤 안고 사는 사람들이 종말이 온다고 상처를 하나 더 안고 살고 있다. 아니 어쩌면 종말의 예고가 없었다면 더 상처가 심했을지도 모르고, 더 잘 살았을지도 모르지만 반반인 확률은 잊고 종말을 기다리며 사람들이 살고 있다. 종말을 기다리는 사람도 있고 종말 이전에 생을 끝내려는 사람도 있다. 종말이 와서 다행이라는 사람도 있고 종말이 다가오는데도 아직도 반신반의하는 사람도 있다.
사람들은 생이 끝나는 그 순간까지 하루하루를 살아야 할 의무가 있다. 나이가 들면 산다는 건 선택이 아닌 의무라는 걸 깨닫게 된다. 내 목숨이 온전히 자신만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알면서도 사람들은 그 하루가 버거워 그만 끝내고 싶어질 때가 있다. 하지만 알까? 그 사람들은 끝내고 싶을 때 끝낼 수 있는 힘이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세상엔 그마저도 선택의 여지가 없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언젠가 죽음을 생각한 적이 있었다. 죽고 싶었다는 얘기가 아니다. 죽음 그 자체를. 왜냐하면 시간이 흘러 혹 내가 죽고 싶어질 때, 죽었으면 하는 마음이 생겼을 때 이미 때는 늦어 죽을 수 있는 선택마저 사라질 테니까. 그때를 생각해서 선택할 수 있을 때 한번 생각했었다. 그리고 나는 끝까지 살아남기를 선택했다. 이유는 미래가 계속 아래로 떨어진다는 건 알고 있고 죽거나 살거나 별 차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니 죽으면 나는 편해질지 몰라도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죽을 때까지 마음 아파할 테니까. 그러느니 살 수 있을 때까지 살아, 버티는 것도 내게 주어진 의무일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나에바의 말에 공감한다. 내일 죽는다 해도, 아니 그보다 더한 얘길 들어도 삶의 방식은 바꾸지 않는 게 낫다. 그런 이유로 바꿀 삶의 방식이라면 제대로 선택한 길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종말이 올 때까지 하루하루를 살고 있다. 종말이 아니라도 우린 우리가 언제, 어떻게 우리 삶의 시간이 멈출지 모르며 사는 사람들이다. 그것이 지구 종말은 아닐지라도 한 인간의 종말이고 그에게는 세계의 종말보다 더한 종말이 될 것이다. 그 시간을 알고 사는 사람이든, 모르고 사는 사람이든 언젠가 반드시 끝날 그날을 위해 사는 것은 아니다. 그저 하루가 있어 하루를 살며 일 년이 있어 일 년을 사는 것이다. 가족이 있어 살고, 사랑이 있어 살듯이.
지금 내가 가장 존경하는 사람은 노인 분들이다. 나이가 어떻게 들고, 어떻게 산 분 들이 아닌 그저 오래 사신 분들, 단지 오래 살 수 있다는 일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나이가 들수록 그분들이 존경스럽다. 삶의 굽이굽이 굴곡을 지나도 묵묵히 참고 살아오신 분들. 폼 내지 않고 멋 부리지 않고 그저 산다는 것만으로 삶을 살아온 그분들. 따지지 않고 종말이 오지 않더라도 난 그분들처럼 한 세상 그렇게 살 수만 있다면 족하다. 내게 만약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나는 오늘처럼 살 것이다.
아직까지 끝까지 살아남으라던 어느 아버지가 죽어가면서 외친 외침 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죽을 때까지 포기하지 말고 그저 살아남을 수 있기를 바란다. 그것만으로도 감사하며 욕심 부리지 않을 수 있기를 바란다. 이 책이, 작가가 전하고자 한 메시지가 이런 것은 아니었을까. 그래도 살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