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는 내게 항상 어렵다. 내가 사용하는 단어 하나가 시인이 쓰면 시가 되고 내가 쓰면 일상적인 도구가 될 뿐이다. 그 사이의 괴리감을 나는 이해하기 힘들다. 그래서 내겐 시가 어렵다. 황인숙... 이 작가는 시를 참 쉽게 읽히게 쓴다. 그런데 그런 쉽게 읽히는 시가 더 이해하기 어렵다. 공감이 가는 시가 있는 가 하면 도저히 공감이 안 되는 시도 있다. 그런 내 마음의 사이의 공간도 나는 이해하기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시를 읽으려 하는 것은 한 줄의 시 구절이, 한 단어의 시어가 마음의 평화와 안식을 줄 때가 있기 때문이다. <숨쉬는 명함들>이라는 시를 읽으면서 나는 아버지를 생각했다. 언젠가 아버지가 가지고 계신 그 많던 명함을 정리해 드린 일이 생각났다. 아버진 그 명함 하나 하나를 간직하고 그거 하나 하나를 정리하시며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정년 퇴직 후 아버지의 명함 정리가 나는 왜 그리 짜증스러웠을까. 그때 왜 아버지 마음이 어떨지 생각하지 못한 걸까. 이 시를 읽으며 아버지의 쓸쓸함이 생각나 서글펐고 나에게 화가 났다. 첫 시인 <강>을 읽으며 언젠가 같이 한의원을 다니던 아줌마 생각이 났다. 그 아줌마는 늘 말했다. 산이나 강에 혼자 가서 목놓아 실컷 울어 보고 싶다고. 그 아줌마, 지금은 어떤 산, 어느 강을 생각하고 있을까. 지금의 내 심정도 그런데 마주치면 이렇게 외치게 될까. "좀 멀리 떨어져요."하고. 그 산이, 그 강이 모든 외침을 묵묵히 들어주고 있으리라 생각하니 내 죄가 크고 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모든 고통을 흡수하느라 그들은 그리도 혼탁하고 뿌리까지 썩어 가는 것은 아닐까...<거미의 달>과 <거미의 밤>을 읽으며 예전 내가 생각하던 천장에서 살그머니 내려오던 거미를 떠올렸다. 그 거미... 제 어미 잡아먹고 커서 망을 치고 또 다른 누군가를 잡으려 덫을 놓던 거미... 그때 왜 그렇게 그 거미를 미워했을까. 미운 건 나였는데. 이제 거미를 접하며 거미처럼 산다는 건 애착이라는 걸 깨닫는다. 삶에 대한 성실함과 끈질김이라는 것을... 거미가 좋아진다. 나는 거미를 닮고 싶다.미련과 연민과 그리움과 애착... 황인숙의 시에서 나는 이런 것을 발견한다. 누구나 마음 한켠에 늘 있는 어떤 그리움, 버리지 못한 미련과 누군가에게 또는 나에게 향하는 연민, 그리고 삶에 대한 애착... 그런 것이 녹아 있다. 넘치지도 않고 그렇다고 모자라지도 않다. 시는 항상 내 머리에 번개를 때리듯 꽝하게 울려야 제 맛이라고 생각하던 내게 이제 이런 시도 제법 읽을 맛이 있음을 알게 해주었다. 고맙다. 나는 이제 젊지 않아 댄스 음악의 시끄러움보다 잔잔한 발라드가 좋아지고, 구성진 뽕짝에 어깨를 들썩이게 되었다. 그 사이에 이 시들을 놓아 본다. 내 젊은 날과 남은 날들을 이어주는 끈이 되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