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버지, 건축가 루이스 칸 ; My Architect>>2003.usa.116min
 D :  Nathaniel Kahn
M : Joseph Vitarelli  
1974년 한 기차역 화장실에서 한 행려변자가 변사체로 발견된다. 며칠 후 신문엔 아내와 딸 하나를 둔 파산한 20세기 건축의 흐름에 큰 영향을 낀 루이스 칸의 부고가 실린다. 이 신문을 보고 자신의 존재를 묻는 루이스 칸의 아들 나다니엘 칸의 뿌리찾기가 시작된다.
대외적으로는 건축의 대가였지만, 사생활로 돌아오면 그는 흠이 많은 사람이었다. 흉터가 있는 못생긴 얼굴에 자그마한 키, 가정에 충실하지 못했으며, 심지어는 한 동네에 세 가정을 따로 꾸렸는데, 그의 장례식에서 그 가족들이 첫 대면을 할 정도였다. 그에게는 숨겨진 아들 나다니엘 칸 외에도 앤팅 과의 사이에서 난 또다른 딸 알렉스가 있었다. 아름답지 못한 흉물스런 거대한 건물들만 사방에 늘어놓고, 거기에 세계로 돌아다니지만 돈도 못 버는 유대인 사촌이었음이 그의 사후에 밝혀진다.
그러나 건축가로서의 삶으로 돌아오면 상업성의 실패로 수많은 빚을 지기도 했고, 미완성으로 끝난 건축물이 많았음에도 그가 왜 장인이며 대가인지를 쉽게 알 수 있을 정도로 아들은 객관적으로 공과 사의 두 면을 촘촘히 들여다본다.
'건축이라는 것은 시간이 말해준다'라는 루이스 칸의 말을 가장 잘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캘리포니아 남부의 '숄크 생물학 연구소'였다. 카메라를 방치한 채로 공들여 시간이 흐르면 그 시간에 따라 달라지는 건물의 영적인 느낌이 너무나 멋졌다. Gorgeous!! 바다와 하늘을 향해 열려 있는 콘크리트 비움의 미당에 빛이 수놓는 영상은 건물과 자연의 완벽한 화음이었다.
그리고 콘크리트를 이용해 건물의 흠을 드러내 오히려 예술로 만들었던 루이스 칸의 고대의 이미지를 활용한 첫 프로젝트는 스코틀랜드 콘크리트 목욕탕, 리처드 빌딩, 예일아트 갤러리, 텍사스의 켐벨 미술관, 엑스터 도서관, 콘서트 유람선, 인도의회와 의사당 건물에 이르기 까지 그의 삶이었던 건물들의 궤적을 훓어 내려 간다.

필라델피아 재건 프로젝트를 같이 시작했던 에드워드 베킨은 그의 작업을 하나같이 밋밋하고 잔인하고 비극적이라고 악평을 한다. 또한 그의 아이디어는 너무 공상적이라고 덧붙인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현대에 이른 지금 도시 밖으로 차도를 빼버리고 도시 안에선 걷게 하려는 것이나 계단을 원통형으로 만든 것들은 놀랍고 환상적이며, 유용한 아이디어로 여겨진다.
그러나 정작 그의 지인들은 그가 필라델피아 재건의 프로젝트에서 해고된 것은 그가 유대인이라고 밝히진 않았지만 유대인의 피를 필라델피에 수혈하는 것을 보수층이 거부했기 때문이라고 하기도.

아버지가와 자신이 만든 동화책에 있던 미친 보트가 실제로 바다에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았을 때는 무척 놀라웠다. 교향곡 보트라고 알려진 그 강철 보트가 바다에 떠 있는 것도 장관이었지만, 단지 콘서트 용으로 그 배를 수주한 선주도 놀랍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 선주 리처드가 유일하게 6살의 나다니엘을 알고 있었음에 더욱 놀라웠다. 이 영화를 만드는 중에 한 번도 자신의 존재를 아는 사람이 없었는데, 그의 부재가 존재로 떠 오르는 순간이었다.
어머니 해리엇 패터슨이 나다니엘의 존재를 위로해주기 위해 항상 읇조렸던 말은 자신들에게 돌아오기 위해 여권의 주소를 지웠던 참이라고 한 것이엇는데, 그 신빙성 없음에 지쳐가던 나다니엘에겐 참으로 감격스러운 순간이었던 것 같다.

미국내에서도 희비가 엇갈리는 가운데 루이스 칸에 대한 진정한 평가는 방글라데시 다카의 국회의사당 세어-이-방글라 나르르에서 만날 수 있었다. 아버지를 추억하며 건물을 한 5분간 훓어 봤을 때 오히려 화를 내는 사람이 있었다. 5분간 본 것으로 함부로 말하지마라면서. '그는 정치적은 아니었지만 우리에게 민주주의를 줬어. 우리가 가난하지만 희망을 줬어 가족을 위하지 못한 것은 위대한 사람이었기 때문이야.'라며 의상당 건물과 루이스 칸에 대해 얘기하며 눈물과 확신을 드러낸다. 지금껏의 인터뷰 중 루이스 칸에 대한 가장 깊은 이해자인 듯 했다. 모순과 신비로 가득 찼던 아버지의 성과와 실패 그리고 자신의 아픔과의 긴 화해는 놀랍게도 방글라데시의 기념비적인 작품의 아름다움 앞에서 고요하게 이루졌다. 한 평의 감동스런 이야기가 자연스레 연출된 다큐 멘터리였다. (그런데 이 후에 『루이스 칸의 건축철학』을 읽으면서 추가로 짐작하게 된 것인데, 그 책이 1980년대에 나왔고, 이 다큐가 제작된 시점을 짐작해 볼 때 이 감동의 장면은 연출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이 영화를 보고 가슴에 남은 것은 칸의 미스터리한 일면과 난잡한 사생활이 아니었다. '사용하는 재료를 존중해야 해, 넘친다고 아무렇게나 사용하면 안돼. 벽돌을 찬미해야 해' 칸이 자주 하던 말처럼 용적과 빛, 그리고 건물의 공간에 대한 모호함이 살아난 거대하면서도 정감있는 그의 건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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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버지와 아들 ; Father to Son ; Isalta pojalle>>2004.Finland.58min.
D : Visa Koiso-Kanttila
E : Outi Parkkila
M : Outi Parkkila

감독은 현재 자신의 아들과 사소하지만 커다란 문제를 가지고 있다. 아이와 잘 놀아주고, 감싸주고, 사랑해주려는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게 심각하게 자신을 거부하는 때가 있기 때문이다. 이에 감독은 이 문제가 비단 아들과의 문제가 아니고, 자신의 아버지와 할아버와의 관계 까지 소급해서 원인을 찾아야 함을 깨닫는다. 그래서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각각 찾아가 얘기를 듣는다.
할아버지는 아버지를 사랑했지만, 그 당시에는 사업에 바빠서 아들과 놀아줄 시간이 없었다. 이에 아버지는 풍족한 용돈과 기타의 지원 아래 똑똑하고 자립심 강한 사람으로 성장하여 더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감독과 아버지는 몇 년 동안 서로를 찾지 않을 정도의 불화가 이었는데, 이는 아버지의 성장과정에도 원인이 있다고 감독은 여기고 그 연관관계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뭐든지 완벽한 아버지에게 감독은 소심하고, 예민하고, 연약한 아들에게 실망해 언제나 강압적으로 대처했었다. 심지어는 폭력을 행사했던 때도 있었지만 아들의 지적에도 불구하고 정작 아버지는 그 사실을 기억하지 못한다. 반항기 시즌에 아버지에게 대들었다가 쫓겨 나서 집을 나왔는데, 아버지는 또 그것을 아들의 독립이었다고 우기고 있으니 말이다.
그렇게 깊은 골을 서로에게 두어온 부자는 다큐 제작을 계기로 대화의 문을 열지만, 서로가 여전히 이해하고 있지 못함을 발견한다. 그리고 아들의 편지가 전달된 후 감동적인 화해보다는 오히려 갈등과 원망이 증폭되는 재미난 장면이 속속 펼쳐진다. 아들이 아버지를 언급하는 나레이션에서 수상쩍게  격앙된 톤으로 울먹이며 말하는지 알려주는 부분이다.,
아들은 거리에서 나쁜 짓을 하며, 얻어맞으며 살아갔던 동안 방패가 되어 주지 못한 아버지의 강직함과 사랑의 인색한 표현에 비명을 지르고, 아버지는 아이를 낳은 아버지가 되었지만, 여전히 성장하지 못한 우는 소리 잘 하는 아들을 다시 발견하고 실망한다.
거기에서 다시 막막함을 느낀 아들이 절규하며 울어버리자 어버지는 아들을 안아주고, 아들은 부둥켜 안으며 아버지의 체온을 느낀다. 그렇게 영화는 해피엔드처럼 끝을 맺지만, 정작 나는 아무런 해결도 못 본 것처럼 느꼈다.
카프카와 아버지의 관계처럼, 할아버지와 아버지와 나의 관계처럼, 세대를 건너고 많은 시간을 지나와도 아버지와 아들의 문제는 숙명처럼 지금도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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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향, 하리마노 ; Harimano>>2004. japan, Belguie.53min
D : Aya Tanaka
M : Duke Qusarco
헌법 제9조를 없애려 하면서 전쟁을 준비해 온 일본과 자라나는 다음 세대에 대한 충정어린 걱정으로 공산주의자가 된 아버지를 들여다 보는 딸의 이야기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 산골마을에서 태어난 아버지는 군국주의 논리에 저항에 도쿄로 왔지만, 사실 아버지가 도쿄에서 직장을 구한 가장 것은 장남승계제도 때문에 자연히 이루어진 결과였다. 그런식으로 순응해서 세상을 살아가려 하지만 전쟁이 아버지를 각성시키고, 그는 일교죠 도쿄지사회에 들어간다.
나라를 바꾸기 위해, 교육을 위해, 아이들을 위해 연일 집회에 나가고 데모에 참가하고 세상을 바꾸려 하지만, 군국주의에 찬성하지 않는 교사를 일시해고하는 정부의 조처에 교직을 빼앗겼다. 그러나 그 후 힘겨운 노력으로 지금은 초등학교 교사를 하고 있지만 이제 늙어버린 아버지는 회한만 가득하다.
옛날처럼 이라크에 군인을 보내지 않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쳐 싸울 생각도 없어졌다고, 지겨워졌다고 말하는 아버지. 일교조도 그렇고 옛날처럼 에너지도 없고, 한 때 어린 딸이 이상적으로 보았던 아버지의 저항적 에너지도 다 사그러졌다고 말하는 아버지는, 노년에 취미 하나 없이 정체되어 있는 자신을 비하지만, 딸 아야는 쉰 여덟에도 여전히 신념을 간직하고 있는 아버지 다나카 야스오에 대한 일관된 애정으로 이 다큐멘터리를 채우고 있다.
그러나 하리마노와 아버지의 궤적에 있어서 그 연관성이 매우 희박하여 공감대 형성에 장애가 일어나는 느낌도 무시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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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 않는 선율 ; Stroke ; Am seidenen Faden>>2004. Germany.111min
D :  Katarina Peters
40세에 첫눈에 빠지는 사랑과 인생 최고의 행복을 경험하고 있던 카타리나와 8살 연하의 33세 첼리스트 보리스 두 사람의 투병기이자 성장기이다. 어느날 보리tm가 뉴욕 여행중에 뇌졸중으로 쓰러지고, 외국에서 병원비로 빚을 지고, 보리스는 식물인간 상태로 독일에 돌아가게 된다. 보리스에 대한 안타까움, 모든 회의와 죄의식으로 돌파구를 찾던 카타리나는 보리스의 회복을 핑계로 카메라를 들고 그들의 일기를 찍는다. 그 중 그녀의 초현실적인 꿈의 이미지를 영화처럼 살려내고, 자신의 좌절과 고통, 상처와 죽음을 분석한다.
보리스 또한 회복하기 위해 희망과 사랑을 주문처럼 외우고 또 노력한다. 그러나 자신을 구원해주고 성공으로 이끌었던 음악이 위기의 순간에 역으로 절망과 포기를 안겨준다. 오랜 병상에서 서서히 지켜가는 보리스와, 마찬가지로 지쳐감에 따라 죄의식을 느끼고 또 이것은 스트레스로 보리스에게 영향을 미친다. 그런 때 두 사람 옆에는 가족이 있고, 친구들이 있다.
아버지의 잔소리에 다시 첼로를 잡고, 컴퓨터에 길들고 하는 와중에 두 사람은 어느날 한 순간의 기적을 바라지 않고, 일상에서의 안정과 조그만 발전을 꿈꾸며 두 사람의 영화를 완성한다. 물론 이 영화제작을 담보로 얻은 빚도 해결하고 말이다.
그가 병상에서 일어서서 병실을 두발로 걸어나가는 것보다 더 큰 하이라이트는 보리스가 G음계로 시작해서 첼로를 켤 수 있다는 사실에 감동을 받는 부분이었다.  보리스의 눈에 흐르는 기쁨의 눈물처럼 나도 눈물로 감동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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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블린으로 가는 길 ; The Making of 'Rocky Road to Dublin'>>2004. Ireland.97min
D : Paul Duane, Peter Lennon 
1968년 검열과 억압 그리고 종교적 권력자들의 횡포로 얼룩진 아일랜드 사회를 고발하고 있는데, 애국적 이데올로기에 세뇌 당한채로 스스로 비하적인 삶을 사는 순응적인 사람들을 담고 있다. 펍에 앉아서 "Rocky To the Dublin"을 열창하며 이 비굴한 사회의 이면을 알리기 위해 노력하는 젊은이들도 나오지만, 그들 또한 철저히 그 사회에 이미 녹아 버린 후 였다.
이 다큐에 등장했던 카톨릭 성직자는 도덕적 청결함의 표상으로 기꺼이 촬영에 임했는데, 근래에 동성애를 비롯한 주교의 이중적인 삶의 횡포가 드러났음을 <<더블린으로 가는 길>>을 회상하면서 감독은 짚고 넘어간다.
영화를 제작하고 제일 찻날만큼은 상영이 가능했던 것은 검열 에피소드에 기인하고 있다. 감독 자시도 허가에 대하 비관적이었는데, 검열관은 섹스 장면이 없기 때문에 절차상 허가할 수 밖에 없다는 판정을 내렸던 것이다. 그러나 그 후 25년간 아일랜드에서는 이 영화가 상영금지 되고, 감독은 외국으로 눈을 돌린다.
깐느 영화에서 시사회 끝나고 갑자기 깐느 전면 중지가 선언되는 비운에 영화 상영을 하지 못하게 되고, 당시 소르본 대학의 데모 현장에서 영화학도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혁명이 끝나면 뭘 할 거냐교'. 학생들은 부르주아와 성직자들에게 되갚아 줄거라고 딱맞는 대답을 하고, 덕분에 소르본 대학 지하실에서 최초로 상영을 하기도 했었다.
현재 아일랜드에서 영화상영금지 조치는 철회되었지만, 종교가 사람들의 정치와 경제, 삶에 영향을 미치는 구도는 여전하다. 물론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다. 단지 물론 종교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권력이며, 오만이고 욕심인 것도 당연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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