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범죄문학의 역사를 다룬 책에서 본 바에 의하면,
공격본능을 간접적으로나마 해소할 수 있는 이들은 실제로 범죄물을 즐긴다고 했던거 같다.
그래서 나 스스로 범죄물 뿐만 아니라, 싸이코가 등장하는 영화나 책들을 즐겨 읽는건가하면서 당연시했었고. 오죽하면 아직도 인상적으로 기억하고 있는 영화가 <<성스러운 피>>일까.
또한 질병의 한 은유로 천재들의 일부가 가졌던 정신질환들도 창조의 부산물이거니 하며 약간 경외시하기도 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이제는 <<뷰티풀 마인드>> <<아메리칸 싸이코>><<레퀴엠>>등의 영화를 그저 재미로만 볼 수 없게 된 것이다.
그저 그렇게 즐기는 질병(?)으로 여겼던 정신병이 내 주변부로 들어왔기 때문에.

20년만에 초등학교 친구가 전화를 걸어왔다. 오랜만에 얼굴 한번 보자고.
그렇게 썩 친하지는 않았지만
초등학교 시절 달리기만 하면 꼴등을 두고 다투던 급우였기에 반가워하며 만났다.
전화로 전해진 그 친구의 목소리가 약간 어눌하기도 하고,
뜬금없이 맞선 얘기도 했지만, 세상에는 좀 특이한 친구도 있는 법이니까 넘어갔다.
그런 사소한 것은       만 아니라면 용서할 수 있으니까.

참으로 많이 달라져 있는 친구였다.
키는 그다지 자라지 않았고, 살은 많이 쪘지만,
화장솜씨며, 옷 입는 감각도 제법 있어뵈서 별 이상을 느끼지 못했다.
나에게 안부와, 다른 친구들 안부까지 물으며 파르페 한 컵을 거뜬히 먹어 넘겼다.
그 후 중요한 얘기를 하려고 하니까 당겨 앉으라고 했다.
그리고 이어진 얘길 요약해보면, 자신의 찐~ 살덩이들은 정신병원에서 먹은 약 때문이고,
친구들은 모두 자신에게 인연을 끊자고 했단다.
왜냐면 자신이 중학교 때 미국애인들이 따라 다녔기 때문이었다고.
그러다 전국적인 조직의 우두머리가 또 자신에게 반해 따라다녔는데,
별명이 엄지공주였다고 한다. 그녀가 지나가면 모두들 "형!수!님!"하며 일렬로 서서 절을 해댔대나.
그 후 그 조직 오야붕이 친구 때문에 자존심을 다쳐서 중학교 이후 부터는 복수를 하기 시작했다고.
집으로도 찾아오고, 전국으로 도망을 다니면 다 쫓아오고, 취직을 하면 몇달을 못 버티게 하고,
결혼도 못하게 하고, 심지어는 자신의 어머니까지 미쳐서 돌아가시게 만들었다고 한다.
자신의 신세가 너무 처량해서 그녀의 친구에게 불만을 토로하니까 그 친구 아버지가 '특수부'(?)에 있어서
사정을 알아봐줬는데, 미국이 곧 그녀를 도우려고 하니 조금만 참아봐라고 하더라고.
요즘 미국 사정이 안 좋아서 친구의 전화도 도청을 하니 복수한다고 나서지 말라고 충고까지 하더라는데,
이래도 거짓말을 하는 거냐고 친구는 힘주어서 말했다.

그녀의 이야길 들으며, 황당하기 그지 없었지만, 그대로 일어서서 와 버리기엔 궁금한 것이 많았다.
그녀는 어떻하다가 그런 과대망상증에 휩싸이게 되었을까? 그녀의 가족은 그녀를 도울 수 없는걸까?
정신병원에선 어떤 치료를 받았던 건지? 정신병을 앓고 있음에도 그녀의 일상은 어떻게 굴러가는 것인지?

식당으로 자리를 옮겨 같이 저녁을 먹고, 디저트로 아이스림까지 먹고 가자고 권유하면서,
몇 시간이나 질문을 해댔다.
친구 말의 아귀가 맞지 않는 부분을 짚어내기 위해서 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그녀가 가련하기도 했다.
아직도 그녀에겐 살아가야 할 많은 시간들이 남았는데, 혼자 몸도 건사하지도 못하고 어떻게 살아가야 할 건지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나를 가장 불안하게 하는 것은 또 그녀가 나를 만나려고 떼를 쓰면 어떻해야 할지.
미국과 일본, 러시아까지 나서서 해결 안되는 그녀의 문제를 나보고 해결해달라고 매달리면 어떻해야 할지.

영화나 책 속에서만 겪던 정신병이란 질병을 가진 사람이 내 주위에 존재한다는 사실이 생경스럽기도 하고,
일상의 조그만 불편함으로 의미를 바꿔버린 우정 때문에 마음이 편치않아진 하루였다. 우정이라고 할만한 즐거운 추억하나 공유한 적이 없지만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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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icare 2004-06-17 17: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반인들은 소통이 가능할 거라 생각해서 가까이 가보면 소통이 불가능하고
정신병을 앓는 사람들은 소통의 초입부터 막혀버린 것일까요? 문득 들러 둘러보다가 플레져님의 서재에서 퍼왔던 요리페이퍼에 낯익은 닉이 있어 웃다가 갑니다.타인의 방에서 마주치는 나의 이름은 참 낯설군요.방이름에서 느껴지는 보르헤스,카프카,폴 오스터.핀치러너 조서는 낯설어 뭘까? 갸우뚱하다 갑니다.아,해가 반짝 나왔군요.빛나는 하루 되길.

프레이야 2004-06-17 2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과대망상... 영화 뷰티플마인드를 보았던 기억이 나네요. 그런 사람이 친구로 있다면 느낌이 또 다르겠어요, 정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