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자신을 판단하는 것은 보통 남의 눈을 통해서라고 한다.
남의 시선 따위는 개나 주라지 할 수 없을 정도로 적당히 소심한 나에게도 딱 맞는 말이었다,
지금까지는.
양껏 허풍을 떨어 나를 좋게 보거나,
가끔 자기비하에 휩싸여 나를 평소보다 하찮게 보더라도
남의 눈을 보며 평형을 유지하는 일이 썩 괜찮은 일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말이지,
그 이상을 넘어서 불쾌하다 못해 인생에 대한 회의까지 운운할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돌이켜보면 그동안 아주 열심히 살았다고는 못하지만, 그런대로 잘 살아왔다.
착하다 소리 들으려고 적당히 힘도 줘가면서 말이다, 마음속이야 어쨌든.
이미지 관리도 제법 해왔다 싶은데, 뜬금없이 '술집 접대부'가 되어 있었다.
하하하.
저녁에 모처럼 친구들이랑 반가운 술 나눠가며 기분좋게 취해서 집에 들어오는데,
평소 귀찮게 굴어서 전화받고 싶지 않던 동창 녀석이 발신번호로 뜬다.
다섯에 넷은 전화를 씹은 전력이 있어서 술김에 전화를 받았다.
전활 받자 마자 대뜸
"너는 어째 공적인 일로 전화를 하는데도 안 받냐?!!!"라는 야단이 날아온다.
그 녀석이 말하는 그 공적인 일이란 바로 동창회 관련된 것을 말함이다.
전화로는 야박하게 굴지 못하는 내 신조 탓에 '언제 전화했었어?' 라며부드럽게 돌려친다.
그 공적인 일이 뭐냐고 물었더니 동창회 참석 할거냐고 살기등등하게 묻는다.
그거야 문자로 보내면 내가 알아서 참석하지 그것 가지고 야단이냐고 했더니 날아오는 대답이
"시집 안 간 여자 동창은 너 혼자 뿐이잖아"라며 다다다다. 늬앙스가 어째 이상하다.
평소엔 홍일점이오니 자리를 빛내 주시오 비슷한 소리로 들렸겠지만
술김에 들으니 내게 있지도 않았던 페미니스트적인 기질이 마구 샘솟는 듯하다.
그래도 조금 참는다. 택시 안이거던. 공중장소다 공중장소. 공중장소..
짜증나서리 참석 한다고 대답을 했는데, 이 녀석이 전화는 끊지 않고 잔소리성 멘트가 늘어진다.
평소에 왜 전화를 안 받느냐, 문자를 보내면 왜 씹냐,
지금 어디서 누구랑 뭐 하는 중이냐,.. 끝도 없다.
이놈아 내가 뭘 하든 네가 무슨 상관이냐고? 평소에 이런 식이니깐 네 전화 받기 싫다고.
내가 네 애인도 아니고, 여자 친구도 아니고, 단지 동창일 뿐이잖아,
근데 실시간으로 내 근황을 얘기해 줘야될 이유는 또 뭐냐고 속으로 주절대면서
술 한잔하고 집에 들어가는 중이라고 짧게 답했더니,
이 놈 하는 말이 더 가관인 것이다.
동창회 총무놈(자칭 친구) : "어라? 오늘은 일찍 마쳤네"
나 : "뭔 소리야?"
동창회 총무놈(자칭 친구) : "너 술집 나가지 않았냐? 어디 룸이라고"
나 : !?
동창회 총무놈(자칭 친구) : "투잡 한다고 회사 마치고 나간다며?"
나 : "야, 미쳤냐? 내가 언제 술집 나간다 그랬어?!"
버럭 소리를 질렀더니, 택시기사가 돌아본다.
동창회 총무놈(자칭 친구) : "네가 전에 그랬잖아. 그래서 전화 잘 못받는다며?"
이게 무슨 소린가 싶어 기억을 돌려보니,
뭣 좀 배우러 학원을 다니는데, 일일이 뭐 배우는지 갈켜주기 싫어서
회사 마치고 어딜 좀 다닌다 했더니, 그 '어디'가 술집인 'ROOM'으로 바뀐 모양이다.
그 쪽 계통 종사자들에겐 정말 황송스럽게도 이 나이에, 이 외모로 가당키나 한 일이던가 말이다.
도대체 어떻게 그런 공식이 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이 자식, 여자 좀 밝히더니 뭐 눈에는 뭐만 보인 모양이었다.
그래서 나 술집 나가는 줄 알고 술 따르라고 동창회에 나오라고 그러냐면서
윽박지르고 전화를 끊었는데, 그 뒤로 분노와 우울이 교차해서 나를 덤빈다.
평소에 나를 어떻게 봤길래 그런 생각을 다 한것인지 도통 이해도 되지 않고,
그 자식한테 따지고 싶지도 않았다. 오해를 해도 이 정도면 숫제 중상모략이다.
입 가벼운 그 자식은 다른 동창 녀석들에게도 어떻게 주절 거렸을지 눈에 보이는 듯도 했다.
분해서 밤새도록 뒤척 거리다 새벽녘에는 그 자식이 불쌍해졌다.
초등학교 친구는 어른이 된 지금도 만나기만 하면
순진했던 그 시절로 아무 댓가 없이 돌려주는 좋은 촉매제였다.
특히나 그 동창회 총무를 떠올리면 (최근 말고 예전엔)
걔네 집 마당에 가득 핀 맑디 맑은 산수화 열매들이며,
골방에서 들었던 턴테이블 레코드에서 나오던 예쁜 음악들이었는데,
어쩌다가 인간이 그렇게 변했는지.
그렇게도 내가 되기 싫어하던 그런 뻔한 인간 부류가 되었는지 말이다.
이렇게 흥분하는 나도 보면 참 어이없다.
나름대로 나도 잘 살아왔다고 하지만
동창녀석에게 그런 오해나 받을 정도면 나도 별반 다름없는 그런 어른일테니까.
* 진짜 억울하긴 했나보네, 일기장에다 그 놈 욕을 후려갈기면 될 일을
그동안 게을렀던 여기까지 뛰어와서 끄적거리는 걸 보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