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귀야행 16
이마 이치코 지음 / 시공사(만화)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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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백귀야행>에 카이 삼촌이 처음 등장한 것이 9권이었나?

가끔 투덜거리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얌전한 성격에, 엄마하고도 할머니하고도 사촌 누나들하고도 심지어는 저쪽 세상의 존재들하고도 별로 부딪히는 일 없이 사이좋게 지내는 평화주의자 리쓰와는 달리, 이 아저씨한테는 처음부터 트러블 메이커의 아우라가 보였다. 리쓰 안에서는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할아버지와 격돌했던 전력도 있고, 리쓰한테 미칠 악영향을 막기 위해서 카이는 내보내는 게 좋다는 말도 누가 했었지. 그게 사토루 삼촌이던가 고우 삼촌이던가... 어쨌든, 시리즈 10권이 넘어가고 슬슬 신선함보다는 익숙함이 주된 감상이 되어가는 이 만화에서 카이 삼촌은 활력을 주는 존재다.

16권에서 부동산 중개사무소의 트러블 해결 담당으로 취직한 카이 삼촌은 타고난 재능을 직업으로 연결시킬 기회를 얻게 되었다. 20년이나 저쪽 세계에 붙들려 있던 학력도 재산도 없는 중년 남자에게 적당한 직업을 찾아주기 위해 작가가 꽤나 고심했을 듯하지만, 일단은 본인도 고용주도 상당히 만족스러워하는 느낌. 업무 처리 방식이 살짝 과격하긴 해도 본인 말로는 죽을 정도로 위험한 일은 없다고 하고, 좀 수상하지만 차도 샀고, 더 수상하지만 여자친구(?)도 생겼고....

문제는 카이 삼촌의 일에 리쓰가 동행할 경우인데, 사촌 누나들이랑 함께 있을 때 여지없이 발휘되던 '이이지마 시너지'는 상대가 카이 삼촌이 되니 자못 폭발적이다. 그걸 잘 됐다며 이용해 먹는 것이 카이 삼촌이고, 싫어하는 기색이 역력한 것이 리쓰인 것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이야기. 이 대조적이면서도 서로 닮은 숙질 콤비의 활약이 궤도에 오르며, 전회와는 다른 새로운 재미를 선사하는 16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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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TV영화 <천하장사 마돈나>에 나온 '초난강'을 보고 아이돌 그룹 SMAP(스마프)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 전에도 "기무라 타쿠야" 정도는 들어 봤었지만, 인터넷 동영상 검색으로 버라이어티쇼 <SMAP×SMAP(스마스마)>를 보고는 좀 충격을 받았다. 이건 단순히 웃기다 재미있다 하는 수준이 아니다. 내년이면 그룹 결성 20년. 중학생 때(막내인 싱고는 소학교 5학년 때) 만나 대중에게 즐거움을 주는 일에 10대, 20대를 다 바쳤다. 노래, 댄스, 드라마, 토크, 개그 뭐든지 다 한다. 당구도 하고 요리도 하고 25km 크로스컨트리에 해발 3800m 후지산 등산에 풀마라톤까지 한다. 피로로 축 늘어져 있다가도 카메라가 향하는 순간 전등에 불이 켜지듯 '팟'하고 최상의 미소가 만들어진다. '프로'라는 표현을 넘어 '달인'의 아우라가 보이는 것 같다.


왼쪽부터 기무라,싱고,츠요시,나카이,고로

거기에 멤버들 각자의 개성이 다 다른 것이 또 즐겁다. 우선 완벽한 남자 기무라 타쿠야(木村拓哉)가 있다. 역대 일본 드라마 시청률 1위부터 5위까지의 주연으로 NG를 내지 않는 것으로도 유명한 배우. <스마스마>에는 무슨 게임이든 종류를 가리지 않고 의욕적으로 덤벼들어 이겨놓고 보는 그의 모습이 자주 나온다. 머리도 운동 신경도 손재주도 좋은 데다 성실하고 겸손한 이미지. 유치원 다니는 애가 있는 아저씨임에도 불구하고 14년째 일본 남자 연예인 인기 순위 1위를 지키고 있다. 다음으로 데뷔 때부터 한결같이 팀을 위해 굳은 일을 마다하지 않았던 열정적인 노력가로, 위기에서 더욱 빛나는 리더십의 소유자 나카이 마사히로(中居正廣)가 있다. 두 사람보다 5살 연하로 팀의 막내인 카토리 싱고(香取愼吾)는 커다란 덩치에 귀여운 얼굴, 발랄한 장난끼를 가진 분위기 메이커지만 때때로 보이는 진지한 표정이 또 상당히 임팩트가 있다. 도회풍의 말끔한 외모와 엉뚱한 몽상벽의 갭이 포인트인 네번째 멤버는 상냥한 남자 이나가키 고로(稻垣吾郞).  마지막으로 한국 마니아 쿠사나기 츠요시(草彅剛)는 튀는 데 없이 조용하지만 다른 멤버들의 화려함에 기죽지 않고 탄탄한 기본기에 자신만의 성실함을 더해 팀의 균형을 잡아주는 사람이다.


뒷 줄 왼쪽부터 츠요시,기무라,싱고,나카이. 앞 줄 모리(96년 탈퇴해 바이크 레이서가 됨),고로

재능 있는 어린 소년들을 찾아 이렇게 완벽한 스타로 만들어낸 것은 <쟈니즈 예능사무소>라는 이름을 가진 시스템이다. 이 회사는 일본 전국에서 10대 초반의 미소년들을 오디션으로 선발하여 노래, 춤, 연기의 레슨을 시킨다. 이렇게 훈련받고 있는 수십 명의  <쟈니즈 주니어>들은 사무소 소속 선배의 백댄스와 선배 주연 드라마의 단역으로 연예계 생활을 시작한다. 이 시기에는 설령 유명해진다 해도 주니어로 대우받을 뿐. 매니저는 없고 촬영장에는 전철로 혼자 가야 한다. 이 <쟈니즈 주니어> 중에 톱에 속해 그룹이 결성되면 비로소 데뷔의 희망이 보인다. 그룹 결성 후 드라마도 하고 버라이어티 쇼도 하고 콘서트도 하면서 2~3년간 지명도를 높여 드디어 대망의 CD 데뷔에 이르면 비로소 한 사람의 연예인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 그러나 출연료와 광고 수입은 주니어 시절부터 먹여주고 길러주고 레슨시켜 준 사무소로 들어간다는 것. 이런 식으로 쟈니즈 사무소에 엄청난 돈을 벌어 주고 있는 "아이돌"로는 91년 데뷔한 SMAP 외에도 TOKIO (94), V6 (95), KinKi Kids (97), ARASHI (99), 타키 앤 츠바사(02), NewS (04), 칸쟈니8 (04), KAT-TUN (06) 등이 있다. 얘들 단합대회는 매년 도쿄돔을 빌려서 한다. 야구도 하고 축구도 하고, 그걸 또 5만명이 넘는 팬들이 들어가서 보고....


뒷줄 왼쪽부터 츠요시,고로,기무라,나카이,모리,싱고. 앞줄은 SMAP의 백댄서였던 KinKi Kids의 도모토 츠요시(堂本剛)와 도모토 코이치(堂本光一)

이 시스템을 보고 있으면 생각나는 것이 있는데, 바로 교토에 남아 있는 전통 연예인 "게이샤(藝者)"이다.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고 있지만 게이샤는 몸을 파는 여성인 유나 (湯女)와는 다르다. 물론 일본 전통 사회에서는 매춘업도 무척 번성해서 도쿄의 요시와라(吉原)나 교토의 시마바라(島原)에는 불야성의 홍등가가 있었고, 오이란(花魁)으로 불리던 최고 등급의 유나가 시대의 스타가 되기도 했지만, 게이샤의 거리는 유곽 거리 시마바라가 아닌 기온(祗園)이었다. 게이샤가 되려는 소녀는 어린 시절부터 오키야(置屋)에 소속되어 의식주를 제공받으며 노래, 악기 연주, 춤 등의 수업을 받는다. 그 후 16세 전후에 시험을 거쳐 마이코(舞子)로 데뷔, 선배 게이코(藝子)를 따라 연회석에 다니며 실무를 배운다. 연회인 오자시키( お座敷 )는 기온 지역에 퍼져 있는 특수한 작은 가게인 오차야(お茶屋)에서 열린다. 단골 손님의 요청을 받아 장소를 제공하고, 요리를 주문하고, 가무를 담당할 게이샤를 섭외하는 것이 오차야의 역할 . 밤마다 오차야에 다니며 3년 정도 견습 생활을 한 마이코는 붉은 옷깃을 흰 색으로 바꾸어 다는 '에리카에'라는 의식을 마치면 비로소 정식 게이샤가 된다. 이제 그녀에게도 상당한 수입이 생기지만, 그것은 생활비와 의상비, 그 동안 쌓인 레슨비 명목으로 소속 오키야로 들어간다.


저 의상과 장식은 18kg정도의 무게가 나간다.

1960년대 기온 최고의 게이샤로 불린 이와사키 미네코가 구술한 <게이샤 A Life>를 읽으며, '예능 사무소=오키야', '그룹 결성=마이코 데뷔', 'CD데뷔=에리카에'라는 공식을 떠올리고 웃었다. 게이샤의 손님들이 하룻밤 수백만원의 술자리에 흔쾌히 돈을 쓰며 그녀들에게 값비싼 선물을 안겼던 것처럼, 그들만큼 부자는 아니지만 사랑의 크기에서만은 결코 뒤지지 않는 아이돌 팬 여자들은 CD를 사고 콘서트 티켓을 사고 잡지와 사진과 팬시 상품을 사기 위해 흔쾌히 지갑을 연다. 21세기 연예계의 명멸하는 조명 뒤에 숨은 이 어마어마한 고루함이라니, 일본이라는 나라는 역시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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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ni 2007-10-18 15: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만 보고 어떤 이야기인가 싶었는데, 꽤 재미있네요. 그리고 꽤 적확한 비교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mizuaki 2007-10-18 18: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냐오 님, 동의해 주셔서 정말 기뻐요. ^^
저 냐오 님이 쓰시는 BL리뷰의 오래된 독자랍니다. 아이돌계가 그쪽으로도 마굴이더군요. 관심 생긴 김에 킨키의 드라마 <인간실격>을 찾아 봤는데, '지금이라 다행이지 10년 전에 봤더라면 나 상당히 위험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ㅋ
 
적대적 공범자들
임지현 지음 / 소나무 / 2005년 1월
품절


국사의 패러다임에 갇혀 있는 한, 동아시아의 역사 논쟁은 권력의 필요에 따라 언제든지 재국민화를 불러내는 주술적 기제로 작동할 것이다. 제국을 정당화하는 기제로서의 일본이나 중국의 국사에 대한 비판은 마땅하지만, 식민주의 혹은 패권주의의 피해자이기 때문에 우리의 국사가 그들의 국사보다 정당하다는 논리는 성립하지 않는다. 동아시아의 역사학을 잇는 국사의 연쇄 구도에서 이들은 가해자/피해자의 관계가 아니라 인식론적 공범 관계인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의 국사를 해체한다고 해서 일본이나 중국의 국사를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며, 그 역도 마찬가지이다. 국사를 향한 방아쇠는 그것이 어디에서 당겨지든, 적대적으로 공존하는 국사의 연쇄 고리를 끊음으로써 어떤 동아시아 국가든 역사의 기억을 전유하려는 시도에 대한 근원적인 비판일 수 있다. 한국의 국사 해체가 후쇼사판 교과서나 고구려의 역사적 주권을 강변하는 중국의 국사에 대한 가장 고도화된 비판이라고 믿는 것도 이 때문이다.
<국사, 민족 국가의 마지막 변명> 中-324-325쪽

과거에 대한 책임을 전범들 개개인에게 추궁하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과거에 대한 책임 있는 기억을 재구성하여 보존하는 일이다. 법정이 과거에 대한 기억을 구성하는 적합한 도구라는 생각에는 아무래도 회의적일 수밖에 없다. 홀로코스트 부정론에 대한 다양한 재판에서 드러났듯이, 사회적 기억을 사법적 판단에 맡기는 행위는 곧 사법적 실증주의에 기억을 종속시키는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 예컨대 그것은 문서로 입증할 수 없는 개개인의 기억을 실증주의의 관점에서 취하함으로써 역사적 기억을 왜곡시킬 가능성이 크다.
<역사는 심판할 수 있는가> 中-46쪽

세습적 희생자 의식은 해방 직후 식민주의의 청산 논리에 이미 배태되어 있다. 식민주의와 결탁한 소수의 친일파를 가해자로 규정하고, 나머지 대다수의 신생 '국민'은 식민주의의 피해자라는 논리가 그것이다. 친일과 반일을 가르는 선은 '우리'와 '그들' 사이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그들 각각의 내부에도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다. '탈식민'의 전제는 그들 친일파의 청산이 아니라, 식민지의 보통 사람들에게 제국 '일본'으로 표상되고 내재화된 가치 체계를 전복하는 데 있다. '그들'에 대한 정치적 청산의 목소리가 높을수록 '우리'안에 내면화된 식민주의를 극복하는 길은 더 멀어지는 역설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중략)
세습적 희생자 의식을 축으로 형성된 집단적 기억은 강력한 민족 국가에 대한 갈망을 낳고, 결국 시민 사회에 대한 국가 권력의 헤게모니를 강화시켜주는 기제였다. 저항적 민족주의의 저항조차 자연스럽게 포섭하는 국가주의 헤게모니의 비밀도 여기에 있다. 이 점에서 세습적 희생자 의식에 근거한 한반도의 전후 역사학은 국가 권력의 공범자였다. 최선의 경우에도 수동적 공범자에 불과했다.
<세습적 희생자 의식> 中-56-57쪽

"솔직히 제 자신도 그런 상황(홀로코스트-인용자주)에 처했을 때, 인간적 존엄성이나 도덕성을 생존의 합리성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 여기게 될지는 자신이 없습니다. 나는 여기서 살아남은 자를 비판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살아남았는가의 여부가 아니라 살아남은 것에 대해서 부끄러움을 느끼는가, 아니면 자랑스럽게 생각하는가의 문제입니다. 부끄러움이 갖는 해방적 역할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것은 도덕성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끄러움이 없는 도덕성만큼 위험한 것도 없습니다. 그것은 마치 자기 사회가 정의롭지 못하다고 느끼는 사람이 많을수록 그 사회가 정의로운 사회인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부끄러움이 없는 도덕성은 자신을 정당화하면서 자기 성찰과 자기 비판의 기회를 박탈합니다. 자, 나는 이렇게 도덕성을 확보했고 이렇게 정의로운 이야기를 했으니 내 영혼을 지켰다는 식의 작은 정의가 지배하게 되는 것이지요. 부끄러움이 갖는 해방적 역할을 마지막으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 때문입니다."
<악의 평범성에서 악의 합리성으로>中 Zygmund Bauman의 말
-101쪽

그 결과 역사적 주체로서의 민중에 대한 민중사의 요란한 강조에도 불구하고, 정작 고구려사의 주인인 고구려인이 설 땅은 사라진다. 역사적 고구려인은 이제 한민족의 역사로 통합된 예맥 계통과 현대 중국의 영토로 흡수 통합된 거란, 말갈, 여진 계통으로 해체되고, 한국사냐 중국사냐에 따라 어느 일방의 계통만이 강조되고 다른 하나는 배제될 따름이다. 과학성과 실증성을 자랑하는 이 근대 역사학의 성과들은, 고구려가 서 있던 그 대륙의 일부를 '간도間島'라 불렀던 평범한 전근대인들의 소박한 역사 인식에 비하면, 그야말로 유치하고 무지몽매하기만 하다. (아래에 계속)-338-339쪽

(위에서 계속)
그것은 정치적 기획으로서의 국사 패러다임에 포박된 근대 역사학이나 민족주의의 이데올로기적 헤게모니에 포섭되어 국민화된 한국과 중국의 현대인들로서는 도달하기 어려운 경지이다. 고구려와 발해가 자리잡았던 그 땅을 청과 조선 사이에 끼인 섬이라는 의미에서의 간도라 부를 수 있었던 인식은 생생한 삶의 체험에서 우러나온 변경에 대한 인식이라는 점에서 각별히 주목된다. 고구려의 역사를 중국과 한국 양국의 국사라는 폭력에서 구출해, 그 시대를 살았던 다양한 고구려인들에게 돌려주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고구려사 구하기> 中-338-339쪽

국가주의와 민족주의를 구별해야 한다는 또 하나의 완강한 국민적 상식은 닫힌 민족주의 대 열린 민족주의, 또는 나쁜 민족주의 대 좋은 민족주의라는 규범적 이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한다. (중략) 식민지 시기에는 일본의 제국주의 지배가 현실이었고 통일된 국민 국가가 이상이었다. 해방 이후에는 분단이 현실이었고 통일된 국민 국가가 이상이었다. 20세기 한반도의 이런 역사적 구도에서는 이상과 현실의 '손쉬운 이분법'이 민족과 민족주의에 대한 규범적 이해를 유도하는 경향이 강했다. 일본의 제국주의와 분단을 고착화하는 남한의 분단 정권이 국가주의=나쁜 민족주의라면, 식민지 지배에 저항하는 저항 민족주의와 분단을 거부하는 민중 민족주의는 좋은 민족주의라는 식이었다.
(아래에 계속)-259-261쪽

(위에서 계속)
그러나 민족과 민족주의에 대한 이런 규범적 이해는 민족주의 또는 국민국가가 갖는 '모듈module적' 성격을 간과하고 있다. 바꿔 말하면, 그것은 자본주의와 국민 국가의 형성에서 한 발 앞섰기 때문에 중심에 위치할 수 있었던 중심부이 국민 국가적 지배 장치들이 주변부 민족주의의 모델이 된다는 것이다. (중략) 개개 국민 국가가 중심-반주변-주변이라는 국가간 체제의 위계 질서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한, 집권한 민족 해방 운동 세력이 국가의 구조적 집중화 이외의 대안을 찾기란 사실상 어려울 것이다. 내 식대로 표현한다면, 민족이 민중을 전유하고 다시 국가가 민족을 전유하는 연쇄 고리가 민족주의와 국자주의를 연계시키기 때문이다. 북한의 강성 대국론에서 잘 나타나듯이 중심의 힘을 선망하는 주변부 민족 해방 운동의 저항은 이미 '지배가 내장된 저항'인 것이다.
<다시, 민족주의는 반역이다> 中-259-26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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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을 어떻게 설득할까? - 원칙을 줄이기


정치/메타-비평 : 2002/01/15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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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을 설득하려고 노력했던 이의 고민이 드러나는 글이다. 김영민이 로티를 좋아하니 당연한 일이기도 하지만, 여기서 내가 흉내내는 행동패턴은 사실 로티의 '아이러니스트' 개념과 비슷하다.

안티조선 우리모두에 이가엘로 올렸던 글. 스무살에 쓴 글 중에서 가장 볼만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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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들 그렇게 잘났니?


안티조선 뿐만이 아니라 많은 운동을 하면서 우리가 가장 듣기 쉬운 소리는 "너희는 다른 사람을 바보로 아느냐?"라는 말일 것이다. 스스로를 변호하고 운동에 대한 혐오감을 유지하는 데 있어서 이보다 더 좋은 논변이 있을 수 없는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권정도와 같은 사람들은 우리모두 사이트 탄생후 거의 2년 동안 이른바 "독자선택론"에 근거하여 수천 개의 비슷한 글을 쓸 수 있는 것이리라.

사실 이 독자선택론이라는 것은 참으로 기가 막힌 논리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신문시장은 신문의 정치적인 논조를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을 반영한다. 따라서 자본의 반영물인 독자수를 가지고 "독자들의 지지를 받는 논조"를 운운하는 것은 어불성성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그것과 상관없이 사람들은 "너희들만 잘났어?"라는 정서적인 요인으로 독자선택론에 공감을 느끼고, 안티조선에 반감을 가진다. 일전에 나는 "계몽주의가 촌스러운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인간의 주체성'이라는 말은 계몽주의보다 더 촌스러운 시대의 것이다."라고 빈정거린 적이 있으나, 그것이 사람들을 설득하는데 큰 도움을 줄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원칙을 말하지 않기


김영민 선생님과 함께하는 [장미와 주판] 독서여행에서 바람직한 신앙과 교회의 역할에 대해 토론을 할 때의 일이다. 어느 참석자가 교인으로써 비교인과 바람직하게 의사소통하는 방법으로 "신을 말하지 않기"라는 언어게임을 해보자고 제안했다. 하느님 아버지로 시작해서 아멘으로 끝나는 언어는 너무나도 빈곤하다. 그리고 빈곤한 언어는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지 못하는 법이다. 교인이 정말로 자신의 정서와 감동을 타인에게 전하고 싶다면, 그러한 언어게임은 오히려 확신에 찬 전도보다 훨씬 효력을 가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단 종교의 문제 뿐만은 아닐 것이다. 사실 한 동질적인 집단의 사람들에 대해서 집단 바깥의 사람들이 반감을 가지게 되는 것은 그 사람들이 "균일화된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기서 종교집단과 같은 획일성과 배타성을 느끼고 멀리 하는 것일 것이다. 사람들이 소위 운동권이라고 불리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안티조선과 같은 언론운동 진영에도 정서적인 반감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사적인 차원에서는 언어 사용에 대한 거리감 때문이 아닐까?

스포츠 이야기, 가벼운 음담패설, 사는 이야기 정도를 즐기는 사람들에게 민주화, 투쟁, 운동, 상징조작, 반미, 언론개혁, 수구기득권 등등의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살벌해 보일 것이다. 이 나라의 상황에서 보자면 거의 종교집단 처럼 보일 듯 하기도 하다. 필자 역시 이러한 현상이 반드시 옳다고 보는 것은 아니다. 한국에서, 바탕색은 자신은 색깔이 없다는 듯 다른 색을 가진 사람들을 문화적으로 억압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 불편한 감정을 느낄 것이라는 것은 사실이고, 우리는 나름대로 거기에 대비해야 할 필요도 있다.

그러나 내 말은 "바보들과의 타협"을 이루어 내라는 뜻이 아니다. 꼴통은 꼴통이고, 바보는 바보다. 일고의 가치도 없는 말은 반쯤 인정해 줄 수 있는 게 아니라 아예 무시를 해버려야 한다. 하지만 그들을 바보로 규정하는 작업이 우리 내부의 언어가 아닌, 보다 일상적인 차원에서 쓰이는 공통의 언어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이다. 나는 안티조선 측의 패널들이 매번 TV 토론에 나가서 [수구기득권]이니 [독재세력]이니 [극우]니 하는 단어들을 사용하는 것이 시청자들에게 위화감을 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개념으로는, 물론 저들을 재단할 수 있다. 그런데 그들이 그것을 알아듣지 못한다면? 우리는 글을 새로 써야 한다. 그것이 부담스러울 정도라면, 우리는 좀 더 꼼꼼히 많은 것을 생각할 필요가 있는 것이리라.


최소한의 원칙을 세우기


개인적으로 고백하면 나는 아무런 원칙도 가지고 있지 않다. 원칙이 있으면 "이게 왜 생겨났을까?"라는 질문을 던지는 사람에게, 그의 절대성을 믿으라고 강요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 것이다. 나는 자신을 "허무주의자"라고 생각하고 있다. 것은 매사에 의미를 못 찾는 다는 뜻은 아니고, 내가 모든 전제를 다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그것들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사실 나는 내가 믿지도 않는 것을 남에게 강요하면서 설득할 수는 없었기에, 조금 다른 방법을 생각해야 했다.

결국에는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모든 원칙을 없앨 수는 없다. 그것은 인간이 사회를 만들고 사는 동물이며, 의사소통을 하는 동물이기 때문이다. 대화는 최소한의 공통지반 없이 이루어 질 수 없다. 우리가 누구와 대화를 한다는 것은, 언어게임에 있어서 상대방과 동의할 수 있는 룰을 이미 깔아놓고 있다는 말과 같다.

따라서 우리가 상대방을 설득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최소한의 원칙 위에서 그를 옭아매는 것일 것이다. "나를 바보로 아느냐!"라는 질문은 무시하자. 거기에 대답하려 들다가는 피로해진다. 필요한 것은, 공통지반을 세우는 것이다.

한국사회가 의사소통이 힘들다면, 사람들이 이 사실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는 데서 나올 것이다. 일부 사람들이 과잉된 원칙으로 남을 재단하고 자신의 옳음을 증명한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최소한의 원칙 자체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다. 오히려 논리와 진실성을 따지는 사람이 조소받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다행히, 한국 사회는 뼛속까지 마키아벨리즘에 물들어 있긴 해도 [확신범]들의 나라는 아니다. 보통의 사람들은 자신이 배워온 것을 실제 생활에 적용시키는 데 인색할 뿐, 자신이 배워온 것이 옳다고 믿고 있다. (!!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의 대화는 이런 양상으로 전개되야 한다.

"당신은 A에 동의하는 가."
"그렇다."
"당신은 B에 동의하는가."
"그렇다."
"그렇다면, A와 B의 기준에 의해, 결론은 C가 된다."
"아니다. 그것은 당신의 기준이다."
"아니다. 이것은 당신과 내가 합의한 기준이고, 그 기준위에 결론이 서 있다."

여기서 상대방은 더 이상의 대화를 거부하는 수도 많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본인 스스로 뭔가를 느끼기는 할 것이다. ( 못 느끼면 꼴통이다. ) 물론 대한민국은 원칙이 남용되는 만큼이나 원칙이 없는 사회라 이 시점에서,

"사고가 논리정연해야 한다는 것은 당신의 기준이다. 나는 논리를 믿지 않는다."

고 나오는 수도 있다. 이 경우에는,

"나도 논리를 별로 신뢰하지 않는데, 우리 인간의 대화는 논리와 합리성, 진실성이라는 지반 위에 서 있다. (좀 현학적으로 보이려면, 진중권이 하듯 "소크라테스 이후로"라는 말을 붙여라.) 그걸 인정하지 않으면 대화할 수 없다."

이것은 정말로 지극히 공통적인 지반이므로 그대로 밀어붙여도 된다. 사태는 이렇게 종료시켜야 한다.


적은 수의 원칙으로 말하기


조심스럽게 말해본다. 효용성 뿐만이 아니라, 많은 원칙은 우리 자신과, 우리들의 언어생활에도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 원칙의 남용은

첫째로, 배척할 것을 많이 만든다. 원칙에 벗어나면 걍 배척하면 되므로.

둘째로, 고민을 줄인다. 원칙에 맞추면 고민할 필요가 없으므로.

셋째로, 정답을 만든다. 원칙은 보통 정답을 만들기 위해 존재하므로.

이것은 우리들 스스로에게도 좋지 않은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고민없이 쉽게 배척할 수 있다면 정답이 눈에 보일 것이다. 그러나 정답은 어디에도 없다. 그것은 우리가 생각의 끈을 놓지 않을 때에야 희미하게 보일 뿐이다. 칼로 무자르듯이 하는 원칙의 적용은 정답과 거리가 멀다.

하나의 실례를 들어본다. 립싱크 가수가 "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그들이 퇴출되어야 한국 가요계가 정화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단정적이다. 사실 나는 아이돌 가수와 립싱크 가수는 다 사라져야 한다는 류의 말이 너무나도 귀에 거슬린다. 보통 인디 가수만을 인정하는 듯 보이는 평론가들의 말도. 이러한 언어게임은 립싱크를 배척하고, 고민을 줄이고, "립싱크를 없애자"라는 정답을 만든다. 그러나 생각의 여지를 주지는 않는다.

그것은 다양성을 옹호하는 말하기 방식이 아니다. 나는 그런 종류의 말을 들을 때마다 약간 신경질적으로, "문제는, 아이돌 가수가 존재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조금 왜곡된 방법으로 시장의 상당부분을 점유한다는 데에 있다."라고 말한다. 이 차이를 이해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자, 이수만은 "립싱크도 하나의 장르다. 인정해 달라"고 주장했다. 립싱크를 그렇게 욕하는 상황에서는 당연한 반론이 될 수 있겠다. 둘이 붙었을 때, 일반 사람들에게 누가 더 편협적으로 보일까? "안된다"는 말과, "하나의 장르다"는 말 중에서.

그렇다면 어떻게 하란 말인가? 라고 반문할 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하면 된다.

첫째, 립싱크가 우선 문제가 되는 까닭은, 그것이 마치 진짜 노래를 부르는 것처럼 사람들을 속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건 진실성의 문제다.

둘째, 최소한 라이브를 시도했을 때 음반에 담겨 있는 목소리와 비슷한 소리가 나와야 우리는 그사람을 "가수"라고 인정해 줄 수 있다. 이것 역시 진실성의 문제다.

셋째, 만일 "아니다. 이것은 하나의 다른 현상이다. 시각문화의 추세다"라고 말한다면, 그 주장을 인정하되 대중에게 혼돈을 줄 우려가 있으므로 그들을 "립싱커" 혹은 "댄서" 혹은 "행위예술가"라고 불러줘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 역시 언어 사용의 진실성에 대한 문제다.

넷째, 만일 라이브 불가능한 립싱크를 이수만처럼 "장르"로 만들어달라고 주장한다면, "블랙커피"나 "허리케인 블루" 등을 포함시킨 립싱크 차트를 따로 만들어서 일반 가요와 구분해야 한다. 이것 역시 진실성에 대한 문제다.

다섯째, 라이브할 수 있는 가수의 립싱크라도 그것보다는 라이브가 바람직한 것이 사실이기 때문에, 자유경쟁을 통해 라이브 비율을 올려야 한다. 그러므로 가수가 라이브로 노래를 부르고 있는지 립싱크를 하고 있는 지를 명확히 표시하여 대중에게 평가를 받게 해야 한다. 이것 역시 가수의 정의에 대한 진실성의 문제다.


말장난 같고, 귀찮은가? 하지만 나는 이게 진짜라고 생각한다. 논증은 누구나 공유할 수 있는 원칙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원칙에 적용해서 사태를 일단락 시킨다면, 그것이 상대편의 편협함과 다를 게 무엇인지 의심스럽다.


우리의 말을 풍성하게


사람에게 신을 말하려면 어느 정도의 인문학적 소양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주가 대안이다! 그밖에 없다! 나는 진실로 그렇게 느낀다! 감정적으로 행복하다! 그를 믿어라!!"라는 말 이외에 할 말이 또 무엇이 있겠는가? 그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생각을 남에게 설득하려는 사람은 "자신의 원칙"을 일단 접고, 사회성원 공통의 원칙에서 출발해 주신의 주장을 논증하는 방법을 익혀야 하지 않을 까 싶다. 그것이 "우리모두"라는 이름을 가진, 안티조선 사이트의 이름이 뜻하는 바가 아닐까?

우리는 이미 공통적인 지반을 가지고 있다. 자유민주주의 사회를 살고 있다는 것. (이것은 자유민주주의의 원리를 공통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우리가 "말"을 한다는 것. (그것은 우리가 진실성과 합리성을 공통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뜻이다.) 여기서 무엇이든 다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사실 나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접하는 대부분의 문제들을 단지 위에 서술한 최소한의 원칙만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우리나라는 민족주의 성향이 지극히 강하고 일반국민들이 보통 거기에 동의를 하기 때문에, 민족주의적 가치를 공통요소로 어느 정도 활용해도 무방할 것이다. (물론 이 경우에도, 내가 그런 원칙을 가지고 있다기보다는, 상대방이 그 원칙에 동의하는 사람이고, 그렇기에 그 원칙을 적용시켜 사태를 판단하는 것이 올바르지 않겠느냐는 식으로 접근하는 것이 좋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족주의를 공통요소로 활용하지 않고도 예를 들어 친일문제나 대북문제를 제대로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새해에는 반민족, 반통일, 민족반역자, 수구기득권, 민주화 등의 귀중한 단어를 최대한 아껴쓰는 안티조선을 보고 싶다. (이 중 일부는 아예 쓰지 말았으면 싶다. ㅡㅡ;;;)

이가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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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아홉 살 아이의 글이라고는 믿기 힘든 秀作. 천천히 음미하며 다시 읽으려고 퍼왔다.

출처는 한윤형 님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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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 무늬
고종석 지음 / 개마고원 / 2002년 10월
평점 :
품절


올 한 해 읽은 책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고종석의 <감염된 언어>이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인이다"를 읽은 밤엔 흥분으로 가슴이 쿵쾅쿵쾅 뛰어 잠이 안 왔다. 이제껏 "국어"에 대해 들은 수많은 말 중에 그의 것만큼 나를 매혹시킨 것은 없었다. 얼마 전 올해 대학생이 된 어린 친구가 '추천 도서'를 물었을 때, 나는 "내가 스무살 때 이글을 읽었더라면 인생이 달라졌을 것 같아."라는 말을 붙여 <감염된 언어>를 소개해 주었다. (실은 <감염된 언어>에 대한 서평을 쓰고 싶은데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반 년전 읽었을 때 바로 써 두지 않은 게 후회된다.)

오늘 읽은 두 권의 책 <바리에떼>와 <자유의 무늬>에는 <감염된 언어>만큼의 감동은 없었다. <바리에떼>에서 제일 마음에 들었던 건 1부에 잠깐 나온 독도 얘기였는데 겁많은 그답게 신변잡기 사이에 눈에 안 띄게 숨겨 놓아 흥분할 정도는 아니었다. 이어지는 술 얘기 여자 얘기는 그냥저냥이었고, 3부의 시인 얘기에 이르러서는  워낙 내 관심 영역을 벗어나서  휙휙 넘길 도리밖에 없었다. 신문과 주간지 컬럼을 모은 <자유의 무늬>는 소재가 평이해서 이해하기 쉬웠지만, 매체의 성격상 글들이 다 짧아 확 빨려들어갈만한 데가 없었다. <토지>가 너무 길어진 대중소설에 불과하고 <태백산맥>이 좌익집단주의고 하는 대목에서 눈이 번쩍 뜨였지만, "이런 소리 하는 사람도 좀 있었으면 좋겠다."가 결론이어서는 피식 웃고 넘어갈 수밖에. 역시 이 아저씬 겁이 많아. 그 외에 기억에 남은 건 장애인 얘기랑 국어선생이라면... 이라는 글이랑(애들의 지적 수준을 대단히 크게 오해하고 있는 실현불가능한 판타지지만) '인터네셔널 가'에 대한 것. <바리에떼>보다는 <자유의 무늬>가 나았다 싶어 이쪽으로 서평을 쓰러 들어왔지만, 별점 세 개를 줘야 하나 네 개를 줘야 하나 한참 망설였다.

그럼에도 결국 네 개 클릭을 결심한 이유는 이  아저씨가 '좋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그는 이쁜 소리를 한다. 그는 자유의 적들을 민감하게 분별해 내는 정치적 안목과 묻혀 있는 아름다운 것들을 골라내는 심미적 안목을 가지고 있으며, 지성과 교양을 추구하면서도 소수자에 대한 사랑을 잊지 않는 사람이다. 때때로 그가 하는 얘기에 동의하지 못할지라도 (예를 들어 책표지에서 저자 약력을 빼는 게 좋다는 생각에 나는 동의 못하겠다. 나는 내가 읽은 책의 저자가 어느 학교에서 무슨 공부를 하고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매우 궁금해 하는 사람이다. 서울에서 나고 자랐고, 성균과대 법대를 나와 서울대에서 언어학 석사, 파리대학에서 언어학 박사를 했고, 한국일보, 시사저널, 한겨레에서 일했다는 고종석의 경력은 고종석을 이해하는 데 퍽 도움이 된다.) 그런 말을 하는 그의 마음은 이해가 간다. 그의 주장에는 일관성이 있다.

무엇보다도 그에게는 그 이쁜 소리들을 이쁘게 하는 재주가 있다. 그의 책은 독자들에게 서비스를 제공한다. 햇살 좋은 오후 예쁜 서양식 테라스에서 달콤한 케이크를 곁들여 낸 차 한 잔 같은 서비스 말이다. 그는 예의 바른 주인이어서 웬만해서는 손님들의 기분을 거스르지 않는다. 지적이고 우아하고 솔직하면서도 마음이 따뜻한 이런 사람과의 수다는 설령 그의 주장이 상식의 틀에서 벗어나지 않는 수준이라 해도 충분히 기쁘고 즐거운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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웽스북스 2007-09-27 1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지금 읽고 있는 책이고, 거의 다 읽었고, 매우 공감되는 서평입니다, 저도 이 아저씨가 참 좋아요 ^^

mizuaki 2007-09-27 2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확실히, 싫어하기 힘든 사람인가 봅니다. 방금 웬디양 님의 서재에 다녀왔는데, 리뷰하신 많은 책 중 제가 읽은 책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 재미있었어요. 다른 취향의 두 사람이 만나는 접점이 되는 사람이 고종석이군요. ㅎㅎ
찾아 주시고 글 남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

웽스북스 2007-09-28 0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mizuaki님, 제가 책도 별로 안읽으면서 불성실하기까지 해서 읽은 책들의 리뷰를 다 남기지는 못하고 있답니다 ^^ mizuaki님 서재를 토대로 제가 파악한 결과 접점이 아주 없지는 않았답니다~ ^^

이잘코군 2009-09-11 2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염된 언어>는 저도 처음 접했을 때 가슴이 쿵쾅쿵쾅 거렸답니다. 지금의 제 한국어관에 기초하고 있는 것도 고종석의 그 글이고요. ^^

mizuaki 2010-01-25 15: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프락사스 님도 그러셨다니 반갑습니다. 좋은 책에는 여러 사람을 바꿔놓는 힘이 있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