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예의 길 - 사회주의 계획경제의 진실 자유주의 시리즈 71
프리드리히 A. 하이에크 지음, 김이석 옮김 / 자유기업원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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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경제 서적을 기대하고 읽었는데, 정치적 팜플렛에 가까운 책이어서 예상과 달랐다. 그렇지만 자유의 위기에 대해 저자가 느끼는 절박한 위기감과 개인의 존엄성과 자유를 지키려는 정직하고 헌신적인 태도가 감동을 준다. 여러 가지 면에서 나의 인생 책인 칼 포퍼의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을 연상시키는 책이었다. 

사회문제에 대한 전문연구자가 정치서적을 쓸 때 첫 번째 의무는 정치서적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말하는 것이다. 이 책은 정치서적이다. 사회철학 에세이라는 우아하고 야심적인 제목을 붙여 이 점을 감출 생각은 전혀 없다. 어떤 제목을 붙이든 이 책에서 말하려는 것이, 특정한 궁극적 가치들로부터 도출되었다는 핵심적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나는 이 책에서 첫 번째 의무보다 경시할 수 없는 두 번째 의무도 잘 수행했기를 바란다. 그 두 번째 의무란 바로 전체 주장이 기초하는 궁극적 가치들이 무엇인지 의심의 여지없이 명확하게 밝히는 것이다. 여기에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점은 비록 이 책이 정치서적이지만, 이 책에 서술된 신념은 나의 개인적 이해관계 때문에 결정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나는 이 점을 그 누구보다도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 P25

내가 사회주의에 동조하지 않는 까닭은, 내가 성장하면서 접해 본 친숙한 이론들이 아니어서가 아니다. 사실 그 견해란 젊은 시절 내가 가지고 있었던 것이자 경제학 연구를 나의 직업으로 만들었던 것이기도 하다.
- P25

요즈음 정치적 견해를 드러낸 서적이 출판되면, 저술의 경제적 동기를 찾는 것이 유행처럼 되었다. 이 책을 쓰는 나의 경우는, 개인적 이득의 획득이라는 측면에서는 이 책을 출판하지 ‘않을’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이유를 가진 아주 별난 사례가 될 것이다. 이 책의 출판은 분명 친하게 지내던 많은 사람들의 기분을 상하게 할 것이다. 이 책을 쓰느라 나는 더 잘할 수 있는 다른 일들을 제쳐 두어야 했고, 이 책보다 장기적으로 더 중요하다고 여기는 일들도 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이런 정치서적을 출판하고 나면, 사람들은 내가 정말 소중히 여기는 나의 엄격한 학문적 연구성과들에 대해서조차 분명히 편견을 가지고 읽을 것이다.
- P26

그럼에도 이 책이 저술을 피하지 말아야 할 의무로 여긴 주된 까닭은, 일반대중들은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고 있지만, 미래의 경제정책에 관련된 문제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특이하고도 심각한 현상 때문이다. 대다수 경제학자들이 최근 수년 동안 전쟁기구에 소속되어 거기에서 부여받은 공식 직책 때문에 이 문제에 대해 침묵하고 있는 데 반해, 결과적으로 딴 속뜻이 있는 아마추어와 가짜 만병통치약을 파는 돌팔이들이 이 문제에 대한 논의를 주도하고 있고, 이에 따른 위험수위가 너무 높아져 여론에 경고음을 울리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는 (나처럼 전쟁기구에 속하지 않아서) 아직도 글을 쓸 여유가 있는 사람이라면 (공개적으로 표현할 수 없는 입장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불러일으킬 걱정들을 모른 체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상황이 이렇지 않았더라면, 나는 기꺼이 국가정책에 대해 논의하는 일을 나보다 권위 있고 적격인 사람들에게 양보하였을 것이다.
- P26

자유주의는 경쟁이 유익하게 작동하려면, 세심하게 배려된 법적 틀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 그리고 과거 혹은 현재의 법 규칙들이 중대한 결함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으며 오히려 강조한다. 그리고 자유주의는 또한 만약 경쟁이 유효해지도록 하는 조건들을 창출하는 것이 불가능한 경우라면, 다른 방법에 의존해 경제활동의 길잡이로 삼아야 한다는 사실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경제적 자유주의는 개별적 노력을 조정하는 방법으로 경쟁보다 더 열등한 방법들이 경쟁을 대체하는 것에 반대한다. 그리고 자유주의는 경쟁이 대개의 경우 알려진 방법 중 가장 효율적이라는 이유뿐만 아니라 더 크게는 권력의 강제적이고도 자의적인 간섭 없이도 우리의 행위들이 서로 조정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에 경쟁을 옹호한다. 사실, 경쟁을 선호하는 핵심적 주장의 하나는 ‘의식적인 사회적 통제’가 필요하지 않다는 점이며, 특정한 직업이 그 직업과 연관된 불리한 점과 위험요소들을 상쇄하고도 남을 만큼 전망이 있는지 개인이 스스로 결정할 기회를 각자에게 부여한다는 점이다.
- P76

경쟁이 최대한 효율적으로 작동할 수 있는 조건을 창출하는 일, 경쟁이 유효하게 서비스를 제공할 수 없을 때에만 비로소 경쟁을 대체하는 일, 그리고 아담 스미스의 말을 인용하자면, "거대 사회에 가장 유익하지만 어떤 개인이나 소수의 개인들이 그 비용을 보상할 수 있을 만큼 이윤이 나지 않는 성질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일, 이 일들은 확실히 국가가 해야 할 광범위한 분야들이다. 국가가 아무런 일도 하지 않으면서도 합리적으로 방어될 수 있는 체제는 없을 것이다. 효과적 경쟁 체제는 그 어떤 다른 것만큼이나 현명하게 제정되고 지속적으로 조정되는 법적 틀을 필요로 한다.
- P79

개인주의자들은 개인이 정해진 한계 안에서는 다른 사람의 가치나 선호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가치와 선호에 따라 행동할 수 있어야 한다고, 즉 이 영역들 안에서는 개인의 목적체계가 최고의 선이며, 다른 그 누구의 그 어떤 지시에도 종속되지 않는다고 결론짓는다. 개인주의 입장의 본질은 바로 개인을 자기 자신의 목적에 대한 최종적 재판관으로 인식하는 것, 즉 가능한 한 자신의 견해가 자신의 행동을 지배해야 한다는 믿음이다.
- P105

민주주의는 본질적으로 수단이다. 즉 민주주의는 내적 평화와 개인의 자유를 보호하기 위한 실용적 도구(a utilitarian device)이다. 민주주의 그 자체가 결코 오류에 빠지지 않거나 확실한 것은 아니다.
- P117

경쟁 하에서는 가난하게 출발한 어떤 사람이 큰 부에 이르게 될 가능성은 유산을 가지고 있는 사람보다 훨씬 더 낮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경쟁시스템에서는 가난하게 출발한 사람도 큰 부를 쌓는 것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큰 부가 자신에게만 달려 있을 뿐 권력자의 선처에 달려 있지 않다. 경쟁시스템은 아무도 누군가가 큰 부를 이루려는 시도를 금지할 수 없는 유일한 시스템이다. 영국의 미숙련노동자가 모든 진정한 의미에서 형편없느 임금을 받지만, 자신의 삶의 틀을 형성하는 데 있어 독일의 무수한 소규모 기업가, 혹은 더 좋은 보수를 받는 엔지니어, 혹은 러시아의 매니저보다 더 많은 자유를 누리고 있다.
- P161

아이들이 훌륭한 프롤레타리아로 성장하는 것을 보장하기 위해 이들을 가장 어린 나이에서부터 정치조직 안에 끌어들이는 것을 시작한 사람들은 파시스트가 아니라 바로 사회주의자였다. 회원들이 다른 견해에 전염되지 않도록 당의 클럽 안에 스포츠와 게임, 축구와 하이킹을 조직화할 것을 처음으로 고안해낸 사람들 역시 파시스트가 아니라 바로 사회주의자였다. 당원은 서로 환영하는 방식과 연설하는 형식이 독특해 다른 이들과 달라야 한다고 처음으로 역설했던 이들도 사회주의자였다. ‘세포조직’의 양성과 사적인 삶의 영속적 감독을 위한 장치를 통해 전체주의 정당의 본보기를 창조한 이들도 바로 사회주의자였다. 나치스의 바릴라와 히틀러 청년당, 도폴라보르, 기쁨의 힘 단원, 정치제복과 정당의 군대식 편제와 같은 것은 모두 과거 사회주의의 조직을 모방한 데 불과하다.
- P174

자유는 오직 가격을 지불하고 얻을 수 있다. 우리는 우리의 자유를 보존하기 위해 심한 물질적 희생도 감수할 각오를 해야 한다.
- P196

사람들이 긍정적 과제보다는 적에 대한 혐오, 부자들에 대한 질시와 같은 부정적 강령일 때 합의에 이르기 쉽다는 것은 거의 인간의 본성에 가깝다. ‘우리’와 ‘그들’ 사이의 대립, 집단 외부인에 대한 공동투쟁은 공동행동 집단을 견고하게 묶는 신조에 언제나 들어 있는 필수적 내용이다. 결과적으로, 이런 부정적 강령은 항상 정책을 지지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거대한 대중의 무조건적 충성을 추구하는 사람에 의해 채택된다. 그들의 관점으로 볼 때, 이런 부정적 강령은 대부분 어떤 긍정적 강령보다 그들에게 더 많은 재량을 주는 커다란 장점이 있다. ‘유태인’ 혹은 ‘툴락’과 같은 내부의 적이든 아니면 외부의 적이든, 이 적은 전체주의 지도자의 무기목록 속에 들어 있는 없어서는 안 될 필수품이다.
- P202

일단 개인이 사회 혹은 국가라고 불리는 개인보다 더 높은 차원의 실체의 목적에 봉사하는 수단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나면, 우리를 전율케 하는 전체주의체제의 특징들 대부분은 필연적으로 나오게 된다. 집단주의 관점에서 보면, 반대자에 대한 가차없는 억압, 개인적 삶과 행복에 대한 완전한 무시는 이런 기본적 전제의 본질적이고 피할 수 없는 결과들이다.
- P214

지금 별로 존중받지 못하고 별로 실천되지 못하는 미덕, 즉 독립식, 자조(自助), 기꺼이 위험을 감수하는 태도, 다수에 대항하여 자기의 소신을 지키는 각오, 기꺼이 자신의 이웃과 자발적으로 협력하려는 태도, 이 모든 것들은 본질적으로 개인주의 사회의 작동에 원천이 되는 미덕이다. 집단주의는 그 자리에 대신 집어넣을 것이 아무것도 없으며, 이 미덕들을 모두 파괴하였다면 개인으로 하여금 그저 복종하고 집단적 결정을 실행하도록 개인들에게 강제하는 것은 옳다는 생각 이외에는 아무것도 채울 수 ㅇ벗는 공백이 남겨질 것이다.
- P285

인간의 어리석음으로 만들어졌던, 우리의 길을 막았던 장애물들을 제거하고, 개인들을 ‘지도’하고 ‘명령’하기 위한 또 다른 기구를 고안하기보다는 개인의 창의적 에너지를 분출하도록 놓아두는 것이 더 중요해졌다.
- P316

만약 자유로운 사람들의 세상을 창출하려는 첫 번째 시도에서 실패했다면, 우리는 다시 시도해야 한다. 실로 개인의 자유를 위한 정책이 유일한 진보적 정책이라는 핵심적 원리는 19세기에 진리였듯이 현재에도 여전히 진리이다.
- P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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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화의 서사학 - 40가지 테마로 읽는 이솝 우화
김태환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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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질서를 인간의 세계에서 실현하는 것에 관심을 가졌던 많은 사람들과  달리, 고대 희랍인들의 관심사는 인간의 입장에서, 세계를 지혜롭게 인식하는 것이었던 듯하다. 일견 단순해 보이는 이솝 우화의 세계에도 이러한 노력들이 들어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책. 문장이 깔끔하고 알기 쉬워서, 가벼운 마음으로 편하게 읽을 수 있다.

이솝 우화는 표면적으로는 그저 짧고 단순해 보이지만 이러한 역설적 구조 덕택에 인간 존재와 삶의 복합성을 포착하게 해주는 풍부한 모델이 된다. 여기에 이솝 우화의 커다란 매력이 있다. 나는 해석을 통해 우화의 단순한 외관 뒤에 숨어 있는 복합성을 최대한 펼쳐 보일 것이다. 그것은 복합적인 것들을 단순화하고 축소시키는 모든 폭력적 논리에 대한 저항의 시도이기도 하다. - P7

타인의 말을 믿게 되는 원인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우리는 특히 자신의 소망 충족과 관련된 말에 혹하는 경우가 많다. 즉 우리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타인이 해줄 때, 그 말은 특별히 신빙성 있는 것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 P90

궁극적 행복에 대한 기대가 불러일으키는 파생적 행복으로서의 기쁨이란 원금이 낳는 이자와 비슷한 것이다. 즐거움이라는 원금을 아직 쓰지 않았기에 발생하는 이자가 기쁨인 것이다. 그런데 그 원금이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면? 그동안 받은 이자는 고스란히 부채가 되고, 이 부채는 그만큼의 부정적 감정으로 갚지 않으면 안 된다. 바로 이러한 감정경제학적 통찰이 기쁨과 슬픔의 상호 연관성을 지적하는 어부의 종사에 담겨 있다. - P119

첫째, 사람들은 무지가 자기 바깥의 외적 조건에 의한 것이어서 이 조건만 제거된다면 즉각 무지의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기대할 때 쉽게 호기심을 느낀다. (중략) 반면 사람들은 자신의 무지를 인식하더라도 이를 극복하기 위해 스스로 오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면 별다른 호기심을 품지 않을 수 있다. - P161

둘째, 사람들은 무지가 해소되어 지로 전환되면 그 부분이 자기가 알고 있는 다른 지식의 퍼즐 조각과 결합하여 의미 있는 전체 상이 만들어질 것이라고 기대할 때, 즉 어떤 사건이나 인물, 혹은 어떤 대상에 대한 무지가 완전한 무지가 아니라 부분적인 무지와 부분적인 지로 이우어져 있을 때, 강한 호기심을 느낀다. (중략) 셋째, 사람들은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이나 지식의 체계와 모순되는 사태나 현상에 직면했을 때 호기심을 느낀다. - P162

행위가 자기목적이 될 때, 행위가 곧 성취를 의미할 때, 그러한 행위를 놀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일을 놀이로 만드는 비결이 있을까? (중략) 많은 자기계발서들은 일을 작게 쪼개라고 조언한다. 그것은 곧 목표를 작게 쪼개라는 뜻이기도 하다. 이로써 행위와 성취의 교환은 작은 행위와 작은 성취의 교환들로 세분된다. (중략) 세분화를 극한까지 밀고 나갈 수만 있다면 일을 놀이로 만드는 것도 가능하다. 그렇게 되면 일이 이루어지는 모든 순간순간이 곧 성취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 P170

이솝 우화의 세계는 속임수와 배신과 악덕이 만연해 있는 세계다. 악한의 계략은 도처에서 삶을 위협하고 있다. 그런데 악한은 언제나 선의를 가장하고 주인공에게 접근한다. 악덕은 숨겨져 있다. 악덕이 표면화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야기의 긴장이 발생한다. 그리고 이 긴장이 해소되는 것은, 주인공의 혜안을 통해서든, 주인공이 실제 피해를 입고 속아 넘어간 것을 뒤늦게 깨달아서든, 악덕이 악덕으로서 폭로될 때다. 악한의 정체가 드러날 때, 악덕을 가리고 있던 베일이 벗겨질 때 이야기는 종결된다. - P203

이솝 우화의 목표는 세계의 진상에 대한 인식이고, 그것은 미화되지 않은 날것 그대로의 현실, 즉 이기심과 탐욕, 어리석음, 약육강식의 논리로 얼룩진 현실을 직시하는 데서 온다. 반면 동화적 플롯은 그러한 부정적 현실에 대한 인식으로 만족하지 못한다. 악덕이 판치는 현실은 불완전하고 불균형한 것이며 그런 까닭에 긴장을 촉발한다. 악한의 부당한 행위로 발생한 긴장 상태는 악한과 그의 악덕에 대한 응징을 통해 비로소 해소된다.
- P204

동화에서 세계는 기본적으로 당위와 존재가 일치하는 이상적 상태에 있다. 그것은 다만 일시적으로 교란될 수 있을 뿐이다. 이상적 질서의 일시적 교란이 긴장을 낳고 이러한 긴장은 이상적 질서가 복원될 때 비로소 해소된다. 이솝 우화에서 최종적 진실로 제시되는 것이 동화에서는 극복되고 부정되어야 할 비정상 상태, 영구적 진리와는 거리가 먼 잠정적 상태로 나타난다. 늑대와 새끼 염소에 관한 이솝 우화와 그림 동화는 우화적 모델과 동화적 모델 사이의 대립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 P204

우화적 이야기의 목표는 참된 가치 체계를 획득하는 것이다. 동화 모델의 종착 지점은 납치된 공주와 같이 확정된 가치 대상을 회복하는 것이지만, 우화 모델에서는 무엇이 진정한 가치 대상인지를 규정하는 가치 체계가 주인공이 궁극적으로 획득해야 할 가치 대상의 자리를 차지한다. - P216

‘눈먼 예언자’라는 역설적 형상은 가상과 존재, 감각적이고 현상적인 차원에서의 인식과 근본적 진실에 대한 인식 사이의 균열을 상징한다. 세계는 감각적 지각의 주체에게 가상을 드러낼 뿐이다. 가상에 사로잡히지 않은 자, 그것을 넘어설 수 있는 자만이 존재를 직관할 수 있다. 테이레시아스는 눈이 멀었음에도 불구하고 진실을 아는 것이 아니라 눈이 멀었기 때문에 진실을 아는 것이다. - P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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랩 걸 - 나무, 과학 그리고 사랑 사이언스 걸스
호프 자렌 지음, 김희정 옮김 / 알마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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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의 재능이 넘치는 젊은이가 박사가 되고 교수가 되고 자신에게 걸맞는 부와 사회적 지위를 차지하기까지의 고생담. 저자에게 그런 이야기를 무척 흥미진진하면서도 안타까우면서도 재미있게 표현할 만한 문학적 재능도 있는 덕분에, 몰입해서 즐겁게 읽었다. 

전면에 나서서 독자의 통속적인 흥미를 자극하는 것은 저자의 인생 이야기이지만, 그 뒤에서 깊이와 재미를 더해 주면서, 이 책을 품위 있는 읽을 거리로 만들어 주는 것은 나무의 인생? 수생(樹生)? 이야기였다.역시 학자는 전공 이야기를 할 때가 제일 빛이 난다. 

과학은 나에게 모든 것이 처음 추측하는 것보다 복잡하다는 것, 그리고 무엇을 발견하는 데서 행복을 느끼는 것이야말로 아름다운 인생을 위한 레시피라는 것을 가르쳐줬다. 과학은 또 한때 벌어졌거나 존재했지만 이제 존재하지 않는 것을 주의 깊게 적어두는 것이야말로 망각에 대한 유일한 방어라는 것도 가르쳐줬다. - P49

병원에서 일하면서 배운 것은 이 세상에 두 종류의 사람만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아픈 사람과 아프지 않은 사람. 아프지 않은 사람은 입을 다물고 도와야 한다. - P69

지구상의 모든 생물은 종족 보존을 위해 다섯 가지를 성취해야 한다. 성장하고, 번식하고, 재생하고, 자원을 비축하고, 자기방어를 하는 것. - P112

이상적인 현장 교육 실습은 약 일주일 정도의 기간 동안 날마다 새로운 토양을 연구 관찰한 다음 100마일 정도를 차로 이동해 다른 장소로 옮기는 프로그램이다. 5일 동안 500마일 정도를 이동해 다니고 나면 학생들이 지역에 따라 얼마나 다양한 토양이 존재하는지를 알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경험할 수 있다. 또한 토양 작업에 꼭 필요한 깊은 생각을 하면서도 동시에 약간 정신줄을 놓을 줄 아는 사고방식에도 노출이 된다. 현장실습이 끝날 즈음이면 학생들은 그 일과 사랑에 빠지거나 완전히 식상해져서, 전공과목을 선택하는 데 참고로 삼을 수 있다. - P159

국립과학재단은 순고생물학자들과 매년 30-40개 건을 계약한다. 각 계약의 평균 연구 기금은 16만5천달러다. (중략) 사실 16만5천달라도 막대한 돈이기는 하다. 적어도 나에게는. 하지만 그 돈을 가지고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다행히도 대학에서 내 월급을 1년 대부분의 기간 동안 지급한다. (수업이 없는 기간 동안, 즉 여름 내내 월급을 받는 교수는 흔치 않다.) 하지만 빌의 월급을 확보하는 일은 내게 달렸다.(중략) 과학 분야의 교수에게 무엇이 가장 걱정인지 물어보라. 길게 걸리지도 않을 것이다. 그녀는 당신을 빤히 바로보면서 한마디로 답할 것이다. "돈이오." - P178

30억 년 동안 진행된 진화 과정에서 출현한 생물 중 단 한 종의 생물만이 이 모든 과정을 뒤집어 지구를 훨씬 덜 푸른 곳으로 만들 능력을 지녔다. 도시화는 식물들이 억 년 전에 고생 끝에 푸르게 만들었던 곳에서 식물의 흔적을 없애고 땅을 다시 딱딱하고 황폐한 곳으로 되돌리고 있다. - P255

우리 모두 일하며 평생을 보내지만 끝까지 하는 일에 정말로 통달하지도, 끝내지도 못한다는 사실은 좀 비극적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 대신 우리의 목표는 세차게 흐르는 강물로 그가 던진 돌을 내가 딛고 서서 몸을 굽혀 바닥에서 또 하나의 돌을 집어서 좀더 멀리 던지고, 그 돌이 징검다리가 되어 신의 섭리에 의해 나와 인연이 있는 누군가가 내딛을 다음 발자국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 P272

눈 속에 사는 식물들에게 겨울은 여행이다. 식물은 우리처럼 공간을 이동하면서 여행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식물은 장소를 이동하지 않는다. 대신 그들은 사건을 하나하나 경험하고 견뎌내면서 시간을 통한 여행을 한다. 그런 의미에서 겨울은 특히 긴 여행이다. 나무들은 오지를 긴 시간 여행하는 여행자에게 주어지는 조언과 똑같은 조언을 따른다. 짐을 단단히 싸라는 조언말이다. 지구상에 사는 대부분의 살아 있는 것에게 꼼짝 않고 한 자리에 서서 아무것도 입지 않은 채 영하의 날씨 속에서 3개월을 견디라고 하는 것은 사형 선고나 다름이 없다. 하지만 많은 종의 나무가 이런 일을 몇 억 년 이상 해내면서도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 - P274

빌에게 그가 혼자가 아니라고, 그리고 절대 앞으로도 혼자가 아닐 것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이 세상에는 그의 친구가 있다고, 그 친구들은 절대 빛이 바래거나 녹아 없어지지 않을, 피보다 더 진한 무엇인가로 그와 튼튼하게 묶여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빌이 알게 해주고 싶었다. 내가 숨을 쉬는 한 그가 배고프거나 춥거나 엄마 없는 아이처럼 살지는 않게 될 것이라는 점을 알게 해주고 싶었다. 두 손이 다 있지 않아도, 주거지가 불명확해도, 폐가 깨끗하지 않아도, 사회적 예절이 부족해도, 사람들이 좋아하고 없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명랑한 성격이 아니더라도 상관없다고. 우리의 미래가 어떻게 전개된다 하더라도 내 첫 임무는 세상에 구덩이 하나를 파고 빌이 들어가서 괴팍한 자기 모습 그대로 안전하게 살 자리를 마련해주는 것이 될 것이다. - P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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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예
오노 후유미 지음, 추지나 옮김 / 북홀릭(bookholic)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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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숨에 읽고 찬찬히 다시 한 번 읽었다. 시간을 거슬러 가면서 과거의 사실들을 하나씩 밝혀 가는 전개가 흥미진진했다. 엄청 재미있었고, 별로 무섭지는 않다고 생각했는데, 천천히 반추하면서 이미지를 떠올려 보면 오싹한 데가 있다. 더러움의 전염을 뜻하는 촉예(触濊)는 '링'이나 '주온'의 밑바탕에 있는 사고방식이라고 하는데, 내가 무척 좋아하는 소설인 미쓰다 신조의 '괴담의 집'하고도 연관시켜볼 수 있을 것 같다. 

미사오에게 살해당한 아이들에게 당사자인 미사오에 대한 복수 의도가 없던 것은 말할 필요도 없고, 다른 사람들에게 재앙을 내리려는 의도 또한 가졌다고 생각할 수 없다. 오히려 아이들의 불행한 죽음은 부정한 것 - ‘더러움(케가레穢れ)’이며, 타카노 토시에는 그 더러움에 닿았다고 생각해야 실정에 맞는다.
일본에는 예로부터 ‘촉예触穢’라는 사고방식이 있다. 더러움에 접촉하면 전염된다는 사고방식이다. 더러움-케가레란 꺼릴 만한 대상을 뜻한다. ‘츠미케가레罪穢れ’라는 말에도 나타나듯이 더러움은 죄와 밀접한 관계를 지녔다.
- P226

죄는 ‘더러움’을 낳고, 더러움을 없애기 위해 제사를 치를 필요가 있었다. 또한, 죄와는 별개로 죽음과 출산 등 강렬한 생리적 사태를 더러움으로 보고 죄로 생겨난 더러움과 마찬가지로 없애야 할 존재로 다루어 왔다. 특히 죽음에 의한 더러움은 ‘사예死穢’라고 해서 중시했다. (중략)
본디 더러움은 어디까지나 사람의 외면에 들러붙는 존재다. 일정 기간이 지나면 소멸하고, 목욕재계 같은 의식으로 떨어뜨릴 수가 있다. 또 한 가지, 더러움과 죄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더러움’은 전염된다. 그 때문에 더러움은 격리해야 하며, 접촉을 꺼린다. 특히 사예는 죽은 이의 가족과 혈연 친족을 오염시킨다고 여겼다. 그 때문에 빈소를 만들어, 그동안 세상과 격리해 함께 더러움을 정화하기 위한 의식을 치르게 했다.
- P227

죽음은 모종의 더러움을 낳는지도 모른다. 특히 큰 억울함을 남기고 원한을 동반한 죽음은 더러움이 된다. 하지만 본디 무제한으로 남는 것이 아니고, 무제한으로 감염하는 것도 아니다. 더러움에 닿은 우리도 주술적으로 방어한다. 죽은 이를 공양하고 땅을 정화한다. 하지만 너무 강한 탓에 그러고 나서도 남는 무엇이 있다면? (중략) 시간의 흐름과 주술적인 정화 의식으로도 채 정화되지 못한 ‘더러움’의 잔여물. 그것은 찌꺼기에 지나지 않으므로 아파트 모든 집에 나타나지는 않는다. 설령 어떤 계기로 나타났다 하더라도 또 어떤 계기로 사라지기도 한다. (중략) 그 이상한 존재가 건전하지 않은 뭔가에 접촉했을 때에는 불행한 결말을 부르곤 한다.
- P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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텐 드럭스 - 인류의 역사를 바꾼 가장 지적인 약 이야기
토머스 헤이거 지음, 양병찬 옮김 / 동아시아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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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동아리를 하면서 제일 좋은 점은 다양한 분야의 책을 읽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 동아리는 회원들이 돌아가면서 책을 추천하는데, 나 혼자서는 읽을 일이 없을 종류의 책들을 다른 분에게 이끌려서 읽고, 아, 이런 것도 참 재미있네, 라고 느낀 일이 많다. 회원들의 첫 번째 추천 도서를 다 읽고, 두 번째 책을 추천해야 할 순서가 돌아왔을 때, 올해 읽은 책 목록에 과학 분야의 책이 없는 것이 신경 쓰였다. 이번에는 꼭 과학 책을 골라야겠다고 생각하고, 온라인 서점의 과학 코너를 둘러보면서, 인기 있고 평이 좋은 책으로, 토머스 헤이거의 ‘텐 드럭스’를 찾아 왔다.

 

저자인 토머스 헤이거는 오레곤 보건대학에서 미생물학과 면역학으로 석사 학위를 받은 과학자 출신으로, 저술가로 진로를 바꾸어 저널리즘을 다시 공부한 후, 여러 매체에 과학 기사들을 쓰고 다수의 저서를 출판했다. 2019년에 나온 ‘텐 드럭스’는 각종 매체에서 호평을 받고 대중적 인기를 끌었으며 15개 언어로 번역 출간되었다고 한다. 한국어 번역을 맡은 양병찬은 서울대 경영학과를 나와 대기업에 다니다가, 중앙대 약대를 졸업하고 약국을 경영했던 특이한 이력을 가진 번역자인데, 과학적으로 정확하면서도 읽기 편한 훌륭한 번역을 보여준다. 특히 원문의 영어 표현들을 적극적으로 병기해서 독자의 이해를 도운 점을 높이 평가하고 싶다.

 

책의 내용은 약의 개발과 사용에 얽힌 역사적 사건들인데, 약리학 교과서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울 다양하고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을 풍부하게 제공하고 있다. 특히 주역인 과학자들을 포함한 수많은 등장인물을 개성적이고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어서, 영화나 소설을 보듯이 푹 빠져서 읽을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의학과 약학의 역사적 큰 흐름을 적절하게 짚어 주고, 과학적 사실에 대해서 신뢰할 만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는 것은 이 책의 또 다른 미덕이다. 곁에 두고 다시 읽고 싶은 책이고, 많은 사람들에게 걱정 없이 추천할 수 있는 책이다.

 

흥미 있게 읽은 에피소드들이 무척 많았지만, 거대 제약회사들이 의사들과 전문가들을 자기편으로 만들어, 때로는 사실을 왜곡하기까지 하면서 막대한 돈을 벌어들이고 있다는 내용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내 주위에도 콜레스테롤 강하제를 계속 복용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혈중 콜레스테롤 농도와 심장병 발병이 그렇게 밀접하지는 않다는 이야기는 놀라웠다. 콜레스테롤 강하제를 꼭 먹어야 하는 것처럼 분위기를 만든 것은 사람들이 수십 년 동안 계속 약을 먹게 함으로써 막대한 이윤을 올리는 제약회사들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6개월마다 계속 추가접종을 해야 한다는 코로나 백신도 의심의 눈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호흡기계 감염증 중에, 코로나19 바이러스 감염증이 특별히 위험하다고 믿어야 할 이유는 있을까? 전 세계 사람들이 오로지 그것만이 살 길이라는 듯이 코로나 백신 접종에 열을 올리고 있는 현재 상황의 뒤에는 거대 자본의 이익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아편의 옹호자 가운데는 의학사에서 가장 이상하고 매혹적인 인물 중 하나로, Philippus Aureolus Teopharstus Bombastus von Hohenheim이라는 인상적인 이름을 가진 스위스의 연금술사 겸 혁명적인 치유사가 있었다. 오늘날 그는 파라켈수스Paracelsus로 더 알려져 있다. 그는 일종의 의학 천재인 동시에 부분적인 반골, 사기꾼, 신비주의자, 정신병자로서, 치료제와 치료도구가 가득 찬 가방을 둘러멘 채 거대한 검(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칼자루의 끝 부분에는 불로장생의 영약Elixir of Life이 들어 있었다고 한다)을 들고 유럽 전역을 떠돌아다닌 전설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마을에 들어설 때마다 주민들을 불러 모아 의술을 팔고 병자를 고치고 이단적인 새 이론을 주장하고, 지역의 치유사들에게서 정보를 수집하고, 그 당시의 정통 의학을 비난했다.
- P32

자금성의 부유한 엘리트 층은 (전국민에게 적용되는) 마약 포고령에서 예외가 된 자들로서, 아편 흡입을 거리낌 없이 계속했다. 이는 마지막 황제의 부인인 위안룽(媛容)의 스토리로 이어졌다. 1906년에 태어나 열여섯 살의 나이에 무심한 젊은 황제 푸이에게 시집간 아리따운 젊은 여성은, 방자하고 공허하고 애정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삶을 영위했다. (중략) 1946년 제국은 먼지가 되었고, 위안룽은 습관과 중국공산당원들 모두에게 수감되었다. 공산당원들은 그녀를 구경거리로 삼았다. 황후를 독방에 가두고, 능멸하고, 아편에 손을 대지 못하게 했다. 병사와 소작농들은 감옥 옆을 줄줄이 통과하며 창살 속을 들여다보며 비웃고 킥킥거리도록 허용되었다. 위안룽은 심각한 금단증상을 겪었고, 토사물과 대변 범적인 누더기 옷을 걸친 채 가상의 시종들을 향해 중얼거리고 흐느끼고 고함을 질렀다. 간수들은 그녀에게 청격함과 영양 보충을 불허하여, 1946년 영양실조와 금단증상으로 사망하도록 방치했다.
- P53

1860년대의 남북전쟁 시기에 모르핀 주사는 전장의 주요 의약품으로 자리 잡아, 부상당한 병사들의 통증을 완화하고 (진지에서 맹위를 떨치는) 이질과 말라리아를 치료했다. 애국적인 시민들은 군대를 위해 아편을 재배했으므로, 북부와 남부의 집 정원에는 아편꽃이 만발했고 생아편은 모르핀으로 가공되어 전선으로 긴급 수송되었다.
- P63

오늘날의 아편제중독자들은 간혹 하층민, 즉 대도시의 마약쟁이나 농촌의 백인 쓰레기로 간주된다. 그러나 1880년대의 모르핀 중독자들(참전용사는 논외로 함)은 대체로 중상류층, 전문가, 사업가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들은 한때 통증을 호소하다가, 의사들에게 모르핀을 자가주사 하도록 교육받았다. 의사 자신도 그런 ‘헌신적인 모르핀 사용자’ 중 하나였다. 1885년의 한 추산에 따르면, 뉴욕시 의사의 최대 3분의 1이 중독자였다. 모르핀은 여러모로 여성용 약물이었다. 여성들은 월경통과 히스테리에서부터 우울증 등 다양한 문제의 해결책으로 모르핀을 권고받았다. (중략) 한 역사가의 지적에 따르면, "1870년대에 미국 남부의 전형적인 중독자는 부유한 여성 백인이었으며, 예외 없이 의학적 사용을 통해 중독되었다."
- P65

이윽고 천연두가 더욱 맹위를 떨치자, 몬태규가 속한 동아리의 귀족 중 상당수가 자신의 자녀를 접종해달라고 부탁하기 시작했다. 그 선봉에 선 사람은 왕세자비였다. 장차 조지2세의 왕비가 될 독일 출신의 카롤리네(Caroline von Ansbach)는 메리와 마찬가지로 매우 지적인 여성이었다. 그녀는 독일의 위대한 사상과 고트프리트 필헬름 라이프니츠를 비록해 당대 최고이 지성들과 편지를 주고 받았다. 볼테르는 카롤리네를 ‘왕비복을 입은 철학자’라고 불렀다. 그러니 그녀와 메리가 죽이 맞은 것은 결코 놀랄 일이 아니었다. 메리의 딸에게 일어난 일을 두 눈으로 지켜본 후, 카롤리네는 슬하의 왕손들을 접종시키는 데 온통 정신이 팔려 있었다. 그녀는 시아버지인 조지1세에게 허락을 해달라고 나청했ㄷ찌만 거절당했다. 명색이 국왕인데, 안전성의 증거도 없는 기술에 왕실의 명운을 걸 수는 없었다. 카롤리네는 다른 실험을 주선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 대상자는 뉴게이트 감옥에서 지원한 죄수들이었다.
- P84

1722년 봄, 카롤리네 왕세자비가 왕으로부터 ‘딸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두 명을 접종해도 좋다’라는 허락을 받았다. 그 허락은 손녀들에게만 적용되었고, 왕위를 물려받을 손자에게 적용되려면 아직도 넘어야 할 산이 많았다. 왕세자의 두 딸이 접종을 받은 후 생존하자 대중은 열광했다. 왕실의 증명은 두 가지 상반되는 결과를 얻었다. 첫째로, 증가하고 있는 영국의 귀족은 자신의 자녀를 위해 접종을 주선했고, 이는 파급효과를 통해 점점 더 많은 의사로 하여금 접종을 수행하도록 했다. 그리하여 더 많은 일반 대중에 혜택을 누리게 되었다. 두 번째 결과는 접종을 거부하는 대중의 저항운동으로, 오늘날 벌어지고 있는 백신 반대 운동의 직계 조상이었다.
- P87

법률(인용자 주: 1914년의 마약방지법)이 시행되기 전, 대부분의 의사들은 약물중독을 의학적 문제로 간주하고, 그것을 치료하는 것이 자신들의 임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모르핀이나 헤로인을 약물중독 환자에게 처방함으로써, 마약의 품질을 관리하고 용량을 낮춤과 동시에 마약에서 서서히 벗어나도록 도와줬다. 그러나 해리슨법은 마약중독을 질병이 아니라 범죄로 간주했으므로 마약을 이용하여 마약중독을 치료한다는 것은 합법적인 ‘전문적 관행’이 아니었다. 따라서 ‘중독자에게 마약을 처방한 의사들은 범죄자’라는 명제는 괴상망측하지만 참이 되었다. 해리슨법이 통과된 지 몇 년 안에, 약 2만 5000명의 의사들이 마약 관련 혐의로 기소되었고, 그중 약 3000명이 유죄를 선고받아 철창신세를 졌다. 늘 그렇듯, 합법적인 용량을 구할 수 없는 중독자들은 거리로 쏟아져나갔다. 그에 따라 해리슨법이 통과된 후 불법약물 시장이 번성했다. 범죄와 약물이 빚어낼 오랜 로맨스의 시작이었다.
- P129

제2차 세계대전에 관한 영화를 한 번이라도 관람한 사람이라면, 의무병이 병사의 상처에 백색 분말을 미친 듯 살포하는 긴장된 장면을 기억할 것이다. 그 가루약이 바로 설파제였다. (중략) 제2차 세계대전 때 상처감염 때문에 죽은 병사의 수는 제1차 세계대전 때에 비할 바 아니었다. 상처감염의 광기와 싸우겠다던 도마크의 꿈이 실현되었던 것이다.
- P160

‘정신질환자를 사회에 재통합시킨다’라는 꿈은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비교적 젊은 환자들 -특히 가정에 복귀할 수 없다고 생각되는 환자들- 의 증가는 교도소 수감자 수 증가로 귀결되었다. 최근 조사에 따르면 오늘날 여성 수감자 중 4분의 3, 남성 수감자 중에는 절반 이상이 정신질환으로 진단받았다고 한다. 미국의 모든 도시의 많은 소도시의 거리에서 정신질환이 있는 노숙자를 볼 수 있다.
- P207

최근 열린 심포지엄에서 한 의사가 말했듯이, "미국인들은 고통을 회피하려 한다." 우리는 언제부턴가 -부분적으로 의약품의 품질 덕분에- 통증에 익숙하지 않게 되어, 이제 그것을 감당하는 것을 꺼리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신체적 통증에 국한되지 않는다. 경미한 불안증에서부터 경미한 우울증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모든 종류의 심리적 불편감Psychic discomfort에 대한 저향력이 떨어졌다. 미국인의 어떤 종류의 불편함에 직면하든 의사에게 약을 달라고 조르고, 의사들은 대수롭지 않게 약을 처방해준다.
- P280

아편중독자의 존재에 있어서 아편유사제는 음식이나 물만큼이나 기본적인 요소이며 생화학적인 팩트다. 중독자의 몸은 아편유사제에 화학적으로 의존한다. 왜냐하면 아편유사제는 인체의 화학을 실제로 바꿔, 주기적으로 시동을 걸어주지 않으면 제대로 작동할 수 없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혈중 약물 농도가 임계치 밑으로 내려가면 약물에 대한 굶주림이 생겨 중독자를 불안과 초조에 빠트린다. 이때 약물을 공급해 주지 않으면 불안과 초조가 악화되어 사망을 초해라 수도 있다. 엄밀히 말해서 그것은 병사가 아니라 아사라고 할 수 있다. 다음과 같은 점을 명심하기 바란다. "아편유사제를 거부당한 중독자들은 단지 불편한 게 아니라, 아편유사제에 굶주리고 잇는 것이다."
- P281

제약사들이 ‘더욱 광범위한 환자들에게 돌아가는 미미한 혜택’을 강조하는 연구를 지원하자, 심장병 전문의와 심장병 재단도 이에 가세했다. 콜레스테롤의 역할과 콜레스테롤 관리가 심장병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오랜 회의론은 제약사가 지원하는 연구, 제약사가 뒷받침하는 컨퍼런스, 제약사의 감언이설에 넘어간 의학 전문가들의 열광 앞에 눈녹듯 사라졌다. (중략) 간단히 말해서, 오늘날의 대형 제작사들은 ‘짭짤한 이윤을 약속하는 치료법’에 대한 증거를 들이대는 데 일가견이 있고, 부정적 증거를 깔아뭉개는 데 능란하며, 의사와 대중들에게 제품을 선전하는 데 탁월한 솜씨를 발휘한다. 어떤 비평가들은 제약사들을 가리켜 "자신들의 배를 채우기 위해 우리의 건강을 파멸시키는 주모자들"이라고 하는데, 이것을 ‘빅파마 음모론Big Pharma conspiracy theory‘이라고 한다.
- P297

당신이 지금껏 몰랐던 질병 -엄청나게 위험하지는 않지만 널리 확산되어 있고, 평생 동안 예방약을 복용하면 괜찮은-은 앞으로도 계속 등장할 것이다. 그런 질병들이 갑자기 등장하는 이유는 ‘유달리 위험한 질병’이어서가 아니라 ‘제약사들의 배를 불리는 질병’이기 때문이다.
- P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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