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화의 서사학 - 40가지 테마로 읽는 이솝 우화
김태환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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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질서를 인간의 세계에서 실현하는 것에 관심을 가졌던 많은 사람들과  달리, 고대 희랍인들의 관심사는 인간의 입장에서, 세계를 지혜롭게 인식하는 것이었던 듯하다. 일견 단순해 보이는 이솝 우화의 세계에도 이러한 노력들이 들어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책. 문장이 깔끔하고 알기 쉬워서, 가벼운 마음으로 편하게 읽을 수 있다.

이솝 우화는 표면적으로는 그저 짧고 단순해 보이지만 이러한 역설적 구조 덕택에 인간 존재와 삶의 복합성을 포착하게 해주는 풍부한 모델이 된다. 여기에 이솝 우화의 커다란 매력이 있다. 나는 해석을 통해 우화의 단순한 외관 뒤에 숨어 있는 복합성을 최대한 펼쳐 보일 것이다. 그것은 복합적인 것들을 단순화하고 축소시키는 모든 폭력적 논리에 대한 저항의 시도이기도 하다. - P7

타인의 말을 믿게 되는 원인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우리는 특히 자신의 소망 충족과 관련된 말에 혹하는 경우가 많다. 즉 우리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타인이 해줄 때, 그 말은 특별히 신빙성 있는 것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 P90

궁극적 행복에 대한 기대가 불러일으키는 파생적 행복으로서의 기쁨이란 원금이 낳는 이자와 비슷한 것이다. 즐거움이라는 원금을 아직 쓰지 않았기에 발생하는 이자가 기쁨인 것이다. 그런데 그 원금이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면? 그동안 받은 이자는 고스란히 부채가 되고, 이 부채는 그만큼의 부정적 감정으로 갚지 않으면 안 된다. 바로 이러한 감정경제학적 통찰이 기쁨과 슬픔의 상호 연관성을 지적하는 어부의 종사에 담겨 있다. - P119

첫째, 사람들은 무지가 자기 바깥의 외적 조건에 의한 것이어서 이 조건만 제거된다면 즉각 무지의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기대할 때 쉽게 호기심을 느낀다. (중략) 반면 사람들은 자신의 무지를 인식하더라도 이를 극복하기 위해 스스로 오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면 별다른 호기심을 품지 않을 수 있다. - P161

둘째, 사람들은 무지가 해소되어 지로 전환되면 그 부분이 자기가 알고 있는 다른 지식의 퍼즐 조각과 결합하여 의미 있는 전체 상이 만들어질 것이라고 기대할 때, 즉 어떤 사건이나 인물, 혹은 어떤 대상에 대한 무지가 완전한 무지가 아니라 부분적인 무지와 부분적인 지로 이우어져 있을 때, 강한 호기심을 느낀다. (중략) 셋째, 사람들은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이나 지식의 체계와 모순되는 사태나 현상에 직면했을 때 호기심을 느낀다. - P162

행위가 자기목적이 될 때, 행위가 곧 성취를 의미할 때, 그러한 행위를 놀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일을 놀이로 만드는 비결이 있을까? (중략) 많은 자기계발서들은 일을 작게 쪼개라고 조언한다. 그것은 곧 목표를 작게 쪼개라는 뜻이기도 하다. 이로써 행위와 성취의 교환은 작은 행위와 작은 성취의 교환들로 세분된다. (중략) 세분화를 극한까지 밀고 나갈 수만 있다면 일을 놀이로 만드는 것도 가능하다. 그렇게 되면 일이 이루어지는 모든 순간순간이 곧 성취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 P170

이솝 우화의 세계는 속임수와 배신과 악덕이 만연해 있는 세계다. 악한의 계략은 도처에서 삶을 위협하고 있다. 그런데 악한은 언제나 선의를 가장하고 주인공에게 접근한다. 악덕은 숨겨져 있다. 악덕이 표면화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야기의 긴장이 발생한다. 그리고 이 긴장이 해소되는 것은, 주인공의 혜안을 통해서든, 주인공이 실제 피해를 입고 속아 넘어간 것을 뒤늦게 깨달아서든, 악덕이 악덕으로서 폭로될 때다. 악한의 정체가 드러날 때, 악덕을 가리고 있던 베일이 벗겨질 때 이야기는 종결된다. - P203

이솝 우화의 목표는 세계의 진상에 대한 인식이고, 그것은 미화되지 않은 날것 그대로의 현실, 즉 이기심과 탐욕, 어리석음, 약육강식의 논리로 얼룩진 현실을 직시하는 데서 온다. 반면 동화적 플롯은 그러한 부정적 현실에 대한 인식으로 만족하지 못한다. 악덕이 판치는 현실은 불완전하고 불균형한 것이며 그런 까닭에 긴장을 촉발한다. 악한의 부당한 행위로 발생한 긴장 상태는 악한과 그의 악덕에 대한 응징을 통해 비로소 해소된다.
- P204

동화에서 세계는 기본적으로 당위와 존재가 일치하는 이상적 상태에 있다. 그것은 다만 일시적으로 교란될 수 있을 뿐이다. 이상적 질서의 일시적 교란이 긴장을 낳고 이러한 긴장은 이상적 질서가 복원될 때 비로소 해소된다. 이솝 우화에서 최종적 진실로 제시되는 것이 동화에서는 극복되고 부정되어야 할 비정상 상태, 영구적 진리와는 거리가 먼 잠정적 상태로 나타난다. 늑대와 새끼 염소에 관한 이솝 우화와 그림 동화는 우화적 모델과 동화적 모델 사이의 대립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 P204

우화적 이야기의 목표는 참된 가치 체계를 획득하는 것이다. 동화 모델의 종착 지점은 납치된 공주와 같이 확정된 가치 대상을 회복하는 것이지만, 우화 모델에서는 무엇이 진정한 가치 대상인지를 규정하는 가치 체계가 주인공이 궁극적으로 획득해야 할 가치 대상의 자리를 차지한다. - P216

‘눈먼 예언자’라는 역설적 형상은 가상과 존재, 감각적이고 현상적인 차원에서의 인식과 근본적 진실에 대한 인식 사이의 균열을 상징한다. 세계는 감각적 지각의 주체에게 가상을 드러낼 뿐이다. 가상에 사로잡히지 않은 자, 그것을 넘어설 수 있는 자만이 존재를 직관할 수 있다. 테이레시아스는 눈이 멀었음에도 불구하고 진실을 아는 것이 아니라 눈이 멀었기 때문에 진실을 아는 것이다. - P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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