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예
오노 후유미 지음, 추지나 옮김 / 북홀릭(bookholic) / 2014년 2월
평점 :
절판


단숨에 읽고 찬찬히 다시 한 번 읽었다. 시간을 거슬러 가면서 과거의 사실들을 하나씩 밝혀 가는 전개가 흥미진진했다. 엄청 재미있었고, 별로 무섭지는 않다고 생각했는데, 천천히 반추하면서 이미지를 떠올려 보면 오싹한 데가 있다. 더러움의 전염을 뜻하는 촉예(触濊)는 '링'이나 '주온'의 밑바탕에 있는 사고방식이라고 하는데, 내가 무척 좋아하는 소설인 미쓰다 신조의 '괴담의 집'하고도 연관시켜볼 수 있을 것 같다. 

미사오에게 살해당한 아이들에게 당사자인 미사오에 대한 복수 의도가 없던 것은 말할 필요도 없고, 다른 사람들에게 재앙을 내리려는 의도 또한 가졌다고 생각할 수 없다. 오히려 아이들의 불행한 죽음은 부정한 것 - ‘더러움(케가레穢れ)’이며, 타카노 토시에는 그 더러움에 닿았다고 생각해야 실정에 맞는다.
일본에는 예로부터 ‘촉예触穢’라는 사고방식이 있다. 더러움에 접촉하면 전염된다는 사고방식이다. 더러움-케가레란 꺼릴 만한 대상을 뜻한다. ‘츠미케가레罪穢れ’라는 말에도 나타나듯이 더러움은 죄와 밀접한 관계를 지녔다.
- P226

죄는 ‘더러움’을 낳고, 더러움을 없애기 위해 제사를 치를 필요가 있었다. 또한, 죄와는 별개로 죽음과 출산 등 강렬한 생리적 사태를 더러움으로 보고 죄로 생겨난 더러움과 마찬가지로 없애야 할 존재로 다루어 왔다. 특히 죽음에 의한 더러움은 ‘사예死穢’라고 해서 중시했다. (중략)
본디 더러움은 어디까지나 사람의 외면에 들러붙는 존재다. 일정 기간이 지나면 소멸하고, 목욕재계 같은 의식으로 떨어뜨릴 수가 있다. 또 한 가지, 더러움과 죄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더러움’은 전염된다. 그 때문에 더러움은 격리해야 하며, 접촉을 꺼린다. 특히 사예는 죽은 이의 가족과 혈연 친족을 오염시킨다고 여겼다. 그 때문에 빈소를 만들어, 그동안 세상과 격리해 함께 더러움을 정화하기 위한 의식을 치르게 했다.
- P227

죽음은 모종의 더러움을 낳는지도 모른다. 특히 큰 억울함을 남기고 원한을 동반한 죽음은 더러움이 된다. 하지만 본디 무제한으로 남는 것이 아니고, 무제한으로 감염하는 것도 아니다. 더러움에 닿은 우리도 주술적으로 방어한다. 죽은 이를 공양하고 땅을 정화한다. 하지만 너무 강한 탓에 그러고 나서도 남는 무엇이 있다면? (중략) 시간의 흐름과 주술적인 정화 의식으로도 채 정화되지 못한 ‘더러움’의 잔여물. 그것은 찌꺼기에 지나지 않으므로 아파트 모든 집에 나타나지는 않는다. 설령 어떤 계기로 나타났다 하더라도 또 어떤 계기로 사라지기도 한다. (중략) 그 이상한 존재가 건전하지 않은 뭔가에 접촉했을 때에는 불행한 결말을 부르곤 한다.
- P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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