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주의란 무엇인가
백낙청 지음 / 창비 / 1990년 1월
절판


Hans Kohn "The Idea of Nationalism" (1944)

민족주의는 그 복합적인 성격을 형성함에 있어 인간의 가장 오래되고 원시적인 감정들을 이용하여 성장해왔다. 그것은 사회적 집단을 형성하는 중요한 요소로서 역사를 통틀어 발견되는 감정들이다. 인간에게는 자기의 출생지나 어린 시절 자라던 곳, 그 주변 지역과 기후, 구름과 골짜기와 강과 수풀의 윤곽을 사랑하는 경향을 타고난다. (중략) 인간은 자기 자신의 언어를 자기가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언어로 특히 좋아하고 그 안에서 마음 편함을 느끼는데 이것은 쉽사리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그는 자기 고장의 관습과 음식을 낯선 지방의 그것보다도 더 좋아하는데, 낯선 음식은 그로서는 알지도 못할뿐더러 소화도 잘 안될 것같이 보이기까지 한다. 여행을 하다가도 자기 의자와 자기 식탁으로 되돌아오면 안도감이 생기고 다시 집에 돌아왔다는 기쁨에 기분이 양양해지며 외국에 머물면서 외국 사람들과 접촉하던 데서 생기는 긴장감을 벗어나게 된다.
(아래에 계속)
-18-20쪽

(위에서 계속)
그러니 인간이 제고장의 특징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그 우월성을 쉽사리 믿어버리는 것은 별로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러한 특징이 자기 같은 문명인들이 편하게 느낄 수 있는 유일한 것처럼 보이는 만큼 그것이 인간에게 적합한 유일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다른 한편 낯설고 또한 낯설기 때문에 위협적인 것으로 보이는 이방인 및 이국 관습과의 접촉은 모든 낯선 것에 대한 불신감을 일으킨다. (중략)
이러한 감정은 항상 있어 왔다. 그러나 그것은 민족주의를 형성하지 않는다. 그것은 예컨대 영토, 언어, 동일한 혈통같이 우리가 민족주의에서도 발견하는 특정의 사실들과 상응하는 것이다. 그러나 민족주의에서는 그러한 감정들이 전적으로 변모되어 새롭고 다른 감정을 띠게 되고 보다 광범한 맥락 속에 넣어진다. 그것은 민족주의를 구성하는 자연스러운 요소들이지만 민족주의는 자연적인 현상도 아니고 '영원한' 혹은 '자연적인' 법칙의 산물도 아니다. 그것은 어느 역사 단계에서 지적, 사회적 요인의 성장의 산물이다.-18-20쪽

애국심의 핵심으로 간주되는 향토에 대한 이러한 사랑은 '자연적인' 현상이 아니라 역사적, 지적 발전의 인위적인 산물이다. 인간이 '자연적'으로 사랑하는 향토란 자기의 고향 마을이나 계곡 혹은 도시이며, 그곳의 모든 세부 사정을 잣힌이 구체적으로 잘 알고 개인적인 추억이 풍부하며 대개의 경우 평생토록 자기의 생활을 영위해온 조그마한 지역인 것이다. 우리가 오늘날 한 민족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사는 영토의 전부는 -이것은 매우 다양한 풍경과 기후를 지닌 경우가 많거니와- 과거에는 보통 사람에게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고 교육이나 여행에 의해서만 알려질 수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교육과 여행은 민족주의 시대 이전에는 극소수에게 한정된 것이었다. 그러한 시대에 살았던 볼떼르는 "조국이라는 것이 커지면 커질수록 그것에 대한 우리의 사랑은 점점 더 작아진다. 왜냐하면 남하고 나눠 가지는 사랑은 약해지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미처 알지도 못할 만큼 수가 많은 가족을 뜨겁게 사랑하기란 불가능한 것이다."라고 말했다.-22쪽

특정 시대에는 한 민족의 가장 본질적인 특성으로 생각되던 것들도 불과 수십년 사이에 변하는 예를 볼 수 있다. 18세기 초 영국인들은 혁명과 변화의 기질이 가장 강한 국민으로 생각되었고 반면 프랑스인들은 가장 견실하고 신경이 무딘 국민으로 보였다. 그때 볼떼르는 "프랑스 사람들은 영국을 통치하는 일은 영국을 에워싸고 있는 바다보다 더 험난하다고 생각하는데, 시실이 정말 그렇다"라고 썼다. 그러나 그로부터 백년 뒤에는 영국인과 프랑스인에 대한 견해가 정반대로 바뀌게 되었다. (중략) 독일 민족에 대한 견해에도 이와 비슷한 변화가 일어났다. 백 년 전의 그들은 대단히 사랑스럽고 비현실적인 민족으로서 형이상학과 음악과 시적인 재능이 있는 반면 근대 산업과 사업에는 적합하지 못하다고 생각되었다. (중략) 민족적 집단의 특성에 관한 관찰자들의 판단은 그때그때의 상황의 정치적 요구와 관찰자들의 정서적 태도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착색되기도 했다. (중략) 한 민족을 형성하는 데는 극도의 다양한 인간들이 개재하며, 한 민족의 수명이 존속되는 동안 극도로 다양한 영향들이 그 민족에 행사되면서 그 민족을 형성하고 변형하는 것이다.-24-26쪽

비록 민족이 생겨난다 하더라도 보다 크고 새로운 민족에 흡수되어 다시 사라질 수도 있다. 민족은 역사의 살아있는 힘의 산물이고 그렇기 때문에 항상 변동하는 것이며 결코 고정되어 있지 않다. 민족은 그 기원이 대단히 최근인 집단이고 따라서 극히 복잡한 집단이다. 그것은 정확한 정의를 내릴 수가 없다. 그것은 역사적 정치적 개념이요, nation이라든가 nationality라는 낱말은 그 의미가 무척 많은 변화를 겪었다. 단지 최근의 역사에 와서야 인간은 민족(nationality)을 자기의 정치적, 문화적 활동 생활의 중심으로 간주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민족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을 절대적인 것, 선험적인 객체, 모든 정치적, 문화적 생활의 원천으로 생각하는 것은 큰 잘못이며, 이러한 잘못이야말로 현대의 온갖 극단적 사태들의 대부분을 낳은 발단인 것이다.-29-30쪽

민족의 전능성 앞에서 인류는 하나의 요원한 관념이요 고동치는 붉은 피가 결여된 창백한 이론이나 시인의 꿈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사실이 그렇기도 하다. 그러나 역사상의 어떤 시점에서는 프랑스민족이라거나 독일민족이라는 것도 요원한 관념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었다. 역사의 온갖 힘들이 장기간의 거대한 투쟁과 격동을 통해 이들 관념에 생명을 부여한 것이다. (중략) 이제 민족주의는 정치적으로나 정서적으로나 새로운 상황을 감당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한때 그것은 개인의 자유와 행복을 증진시켰다. 그런데 이제는 그것들을 침해하며, 더 이상 정당화시킬 수 없는 것으로 보이는 자신의 존재를 지속시키는 일을 개인의 자유나 행복에 앞세우고 있다.-42-43쪽

사납고 그칠 줄 모르는 종교전쟁들이 인간의 행복과 문명을 파괴할지도 모르는 위협으로 되었을 때, 1680년경에 시작하여 18세기를 휩쓴 합리주의의 물결이 종교의 비정치화를 가져왔다. 이 과정에서 종교는 그 진정한 존엄성을 잃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위대한 정신적 힘의 하나로 남아 인간의 영혼을 위로해주고 드높여주었다. 그러나 종교는 여러 세기 동안 종교의 '자연스러운' 일부였던 강제적 측면을 잃었다. 국가 즉 정치적 권위와의 연결이 단절되었고 종교는 개인 양심의 은밀하고 자발적인 세계로 들어앉았다. 종교의 탈정치화 과정은 속도가 느렸다. 로저 윌리엄즈가 1644년에 "양심의 문제로 인한 박해의 피비린내나는 교리-진리와 평화가 만나서 벌인 토론"을 발간한 지 2세기가 지난 뒤에야, 그가 주장하던 대의가 널리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그와 비슷한 민족의 탈정치화도 가능한 일이다. 민족 역시 정치적 조직과의 연대를 잃고, 친밀하고도 감동적인 감정으로 남아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러한 날이 도래한다면 그때에는, 여기서 고찰하고 있는 의미에서의 민족주의의 시대는 사라진 뒤일 것이다.-45쪽

E.H.Carr "Nationalism and After" (1945) 각주인용

19세기의 크로아티아 지방의 지주는 자기의 馬를 크로아티아 나라의 일원으로 생각할지언정 자기 영지의 소작농에 대해 그렇게 여기지는 않았다고 말해지고 있다. 19세기 중엽 및 그 이후에 있어서조차도 폴란드의 신사계급과 폴란드어를 사용하는 하층 농민들은 상호간 엄청난 거리를 두고 격리되어 있었으며 그랬기 때문에 하층농민들은 대개가 자신들이 폴란드 민족의 일부분이라고는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49쪽

민간인들은 사실상으로 전쟁의 어느 한쪽의 당사자도 아니었다. 18세기에는 수많은 전쟁이 있었다. 그러나 불어를 공용어로 사용하고 있던, 유럽 주요 각국의 교양있는 계급들 상호간에는 우호적인 상호교제가 자유롭게 이루어지고 있었으며, 이러한 측면에서 본다면 이 시기는 근대 역사에 있어서 가장 '국제주의적'인 시대였다고 하겠다. 주권자들은 서로 전쟁을 벌이고 있는 와중에서도 그 민간인들은 이곳저곳을 통과해서 다닐 수 있었고 또 상호간에 자유롭게 상거래를 하고 사업을 할 수 있었다. 이같은 규범과 관습을 파생시킨 국제관계에 관한 그 당시의 관념이 오늘날 통용되고 있는 개념과 전적으로 그 성질을 달리하는 것이었음은 자명한 일이다.-51쪽

Ernest Gellner "Nationalism" (1964)

통치자가 같은 '민족'이어야 한다는 요구는 자연스러운 것이라거나 그에 거역할 때 즉각 불만과 반발을 낳는 그런 것이 아니다. (중략) 인생이란 어렵고 진지한 과업이다. 굶주림과 불안정으로부터의 보호는 쉽사리 성취되지 않는다. 그 성취를 위해서는 효과적인 통치가 중요한 요인이다. 통치자들의 모국어가 무엇인가라는 질문보다 더 어리석고 더 경박한 고려사항이 있을 수 있을까? 거의 없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런 이해하기 힘든 경박함에 돌릴 시간도 취향도 거의 없었다. 그들이 과거에 실제로 제기했던 질문은 케두리가 그의 저서 마지막에서 천거하고 있는 질문과 비슷한 것이었다. 즉 "새로운 통치자들이 덜 부패하고 탐욕스러운가, 또는 좀더 공정하고 자비로운가?"라는 물음이다.
그러나 근대 세계에 와서는 무언가 큰 변화가 일어났다. 18세기에서 19세기로 넘어올 무렵의 독일 사상가들의 저술 따위보다 훨씬 엄청난 무엇이 일어난 결과, 부패나 자비에 관한 물음은 비교적 경박하게 느껴지고 한때 경박한 것이었던 통치자의 언어나 문화에 관한 질문이 가장 중요한 것으로 느껴지게 되었다.-135쪽

(전통 사회의 친밀한 구조들의) 이러한 잠식작용은 산업사회나 심지어 그 방향으로 변해가고 있는 사회의 규모, 윧홍성 및 일반적 생태와 조직의 불가피한 결과인 것이다. 인간이 사회구조의 한 구석에 틀어박혀 있음으로써 그에 따르는 관계가 그에게 정체성을 부여해주는 그러한 경우가 아닐 때, 그는 그의 행동과 표현의 양식 전부에 걸쳐 자신의 정체성을 갖고 다니지 않으면 안된다. 다시 말해서 그의 '문화'가 곧 그의 정체로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을 '문화'에 의해 분류하는 것은 물론 '민족'으로 분류하는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에는 인간이 된다는 것을 곧 어떤 민족적 소속을 갖는다는 것과 동일시하는 일이 자연스러워 보이는 것이다.-140쪽

민족주의란 민족들이 깨어나 자기의식을 갖게 되는 과정이 아니다. 그것은 민족이 없는 곳에서 민족을 발명한다. 다만 발명을 하더라도 애초부터 무언가 남들과 다른 특징이 있어야 써먹을 수 있는데, 물론 이러한 특징은 앞서도 말했듯이 순전히 부정적인 성격일 수도 있다. (다시 말해서, 기득권에의 참여 자격을 박탈당하는 특징일 따름이며, 장차 새로운 '민족'을 형성하게 될 그들 실격자들 간에 그 이상의 아무런 적극적 유사성이 없을 수도 있다.)-153쪽

일반적으로 효과적인 민족운동을 위해서는 인텔리겐차와 프롤레타리아트가 모두 필요하다. 민족적 독립이 달성된 이후에는 그들의 운명이 갈라진다. 지식인들에게는 독립이 즉각적이고 거대한 이익을 의미한다. 직업이, 그것도 굉장히 좋은 직업들이 생기는 것이다. '저개발' 인텔리겐차의 수적 열세가 바로 그 최대의 잇점이 된다. 외국의 인재에게 실질적으로 국경이 봉쇄되는 민족적 단위를 창조함으로써 그들은 자신을 위해 더없이 훌륭한 독점물을 만들어낸다. 반대로 프롤레타리아들에게는 독립이 단기적으로 환멸을 가져오게 마련이다. 생활의 어려움이 제거되지 않을뿐더러, 급격한 개발노력 때문에, 그리고 자기 민족의 정부는 때때로 외국 정부보다 더 무자비해도 괜찮다는 사실 때문에 심지어 더욱 살기 힘들어질 확률이 크다.-154쪽

Anthony D Smith "Theories of Nationalism" (1971)

농민층은 외국인에 대한 일종의 유아론적(唯我論的) 증오심을 견지하는데, 극동의 몇몇 나라들에서 그랬듯이 흔히 이러한 증오심은 메시아적 희망에 의해 민족주의 목표에 대한 지지로 승화되기도 한다.-187쪽

많은 민족주의자들이 어문학 연구에 골몰해온 것은 사실이다. 또한 문예부흥 운동 및 언어의 근대화 운동과 일부 민족주의 운동들 사이에 뚜렷한 상호연관이 있기도 하다. 그러나 여기서 주목할 점은 다름 아니라 이런 언어적 활동이 이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민족감정의 신장을 반영한다는 사실이 아니겠는가. 언어의 개혁자들은 그들의 지적 작업을 통해 자신의 민족주의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모국어를 찬미하고 그것이 유이랗ㄴ 민중의 언어가 되도록 떠받드는 것은 언어의 찬미자들이 이미 민족주의적 성향을 띠게 된 이후의 일이요. 그들이 그러한 자기발견을 했기 때문인 것이다. 언어연구는 역사연구와 마찬가지로 흔히 부지중에 그들의 기존하는 민족주의적 확신을 -남에게뿐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도- 정당화하는 수단이 된다. 발칸반도의 나라들과 오토만제국의 사례가 입증하듯이 언어개혁은 그들의 사회를 혁신하고 그것을 -이상화된 과거의 위대한 시기처럼- 자족적이고 문화적으로 독립되게 만들려는 욕망에 가득찬 사람들이 수행하는 것이다. -218-219쪽

Tom Nairn "Break-up of Britain: Crisis and Neo-nationalism" (1977)

어떠한 종류의 민족주의이건 그것이 실제로 이들 내부적 작용 그 자체의 산물인 것은 아니다.(중략) 진정한 기원은 딴 곳에 있다. 그것은 겨레에 있거나 어떤 식의 온전함 또는 정체성을 희구하는 개인의 억압된 정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세계경제의 작동에 있다. 그러나 경제의 발전과정 그 자체에 -단순히 산업화와 도시화의 불가피한 부수물로서-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그 과정의 좀더 특수한 측면들과 연관된 것이다. 이러한 특징들을 분류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이들이 18세기 이래 역사의 '불균등한 발전(uneven development)을 대표한다고 말하는 길이다. 이 불균등성은 하나의 물질적 사실이다. 아니, 이것이야말로 근대사에서 가장 엄연하게 물질적 사실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이렇게 말함으로써 우리는 만족스럽고 거의 역설적인 결론에 도달할 수 있게 된다. 가장 악명높게 주관적이고 관념적인 역사적 현상이 사실은 최근 두 세기 역사의 가장 무자비하고 절망적으로 물질적인 측면의 부산물인 것이다.-228-229쪽

민족주의의 입장은 반드시 민주적인 것으ㅓㄴ 아니나 어김없이 민중주의적이기는 하다. 민중은 그것이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자산이다. 정말로 가난한 '저개발' 지역의 원형적 상황에서는 민족주의야말로 민족주의자들에게 소용이 닿는 유일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비슷한 이유로 해서 민족주의는 극히 웅변적인 형식을 통해 -이제 싸움에 나서도록 부름을 받고 있는 하층민들에게도 충분히 수용 가능한 정서적 문화를 통해- 작용한다. 계몽사상의 합리주의와는 거리가 먼 낭만주의적 문화가 언제나 민족주의의 전파와 나란히 진행된 것은 그 때문이다. 민족주의의 새로운 중산계급 인텔리겐차는 대중을 역사 속으로 초청해야만 했고 초청장은 그들이 알아듣는 언어로 씌어져야만 했던 것이다.-234쪽

민족주의에는 두 종류가 있다는 이야기이다. 그 중 주가 되고 본질적으로 건전한 종류는 우리가 모잠비크, 인도지나 등 후진국에서 발견하고 박수를 보내느 것이며, 파생적이고 타락한 종류는 예컨대 미국의 노동자들, 프랑스의 골디즘, 칠레의 군사정권 등에서 찾아보며 규탄한다는 것이다. (중략) 그러한 구별들은 하나는 건강하고 하나는 병벅인 두 종류의 민족주의가 존재함을 뜻하지 않는다. 중요한 점은, 가장 초보적인 비교분석을 통해서도 볼 수 있듯이 모든 민족주의는 동시에 건강하면서 병적인 것이다. 진보와 퇴보는 둘다 처음부터 그 유전인자 속에 들어 있다. 이는 민족주의에 관한 구조적 사실이다. 그리고 이것은 예외가 없는 사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민족주의가 그 본성에 있어 양면적이라고 하는 말은 민족주의에 관한 수사학적 발언이 아닌 엄밀한 발언인 것이다.-242-243쪽

민족주의라는 거대한 가족을 검정 고양이와 흰 고양이들, 그리고 몇몇 잡종들로 분류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전가족이 예외없이 얼룩이들인 것이다. 온갖 형태의 '비합리성'(편견, 감상주의, 집단적 자기중심주의, 침략성 등등)이 그들 모두를 더럽히고 있다.-244쪽

Masao Maruyama(丸山眞男) "Thought and behavior of modern Japanese politics" (1951)

어둠침침한 사회의 저변에 깔려 살아야 했던 대중서민 -"전인민의 머리속에 국가의 사상을 불언허는"일을 평생의 과제로 삼겠다고 후꾸자와 유기찌가 결심하도록 만들 정도로 '국가관념'과는 무관했던 서민대중- 은 바로 이 '의무'화된 국체교육에 의해서 국가적 충성의 정신을 최소한도록 필요한 산업, 군사기술지식과 결합한, 즉 헐스(Hulse)가 지적한 바 '마술적 실천과 과학적 실천'을 아울러 갖춘 제국신민으로까지 성장했다. 그리고 이같이 해서 능률적으로 창출된 국가의식은 잇따른 대외적 전쟁 승리와 제국주의적 영토팽창으로 날이 갈수록 강화되었다. 자아의 감정적 투사(投射)로서의 일본제국의 팽창이 그대로 자아의 확대로 착각됨으로써 열광적으로 지지를 받았다. 그것과 병행해서 시민적 자유의 협소함과 경제생활의 궁핍함에 연유한 서민대중의 실의(失意)는 수단을 가리지 않는 국가의 대외적 발전 속에서 심리적 보상을 찾았다. - (아래에 계속)-284-285쪽

(위에서 계속) 지배층은 끊임없이 대외적 위기감을 부채질함으로써 -때마침 19세기 초부터의 제국주의 시대는 지배자들의 그런 책동에 아주 안성마춤의 배경이 되어 주었다.인류역사상 드물게 보이는 교활한 국가모략에 의해서 이 구ㄱ민감정의 동원에 성공하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지배자들은 사회적 긴장이나 분열의 낌새만 보여도 그것을 사전에 봉쇄해버렸다. 외국인의 일본연구서가 하나같이 그 첫페이지에 대서특필하기에 이른 이 '일본국민의 정신적 단결'이라는 것은 이같이 해서 만들어진 것이다.-284-285쪽

(사회 밑바닥에 환류한 구(舊)내셔널리즘 감정이) 정치적으로 동원되는 날에는 그것은 그 구조적 원리로 말미암아서 물길을 따라 흐르는 물처럼 과거의 그 반동적인 방향을 그대로 따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최근 히노마루를 국기로 게양하는 문제, 기미가요가 국가로 부활되는 것, 나아가서는 신사참배 따위와 같은 경향, 그중에서도 국민교육에 낡은 상징이 다시 고개를 치켜드는 문제들이 논란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중략) 그것을 경찰예비대의 설치나 해상보안대의 증가라든가, 일본재무장의 문제 따위의 문맥에서 생각해 보면 거기에 있는 정치적 움직임의 싹을 인정한다고 해서 기우라고 웃어넘길 수만도 없다.-291쪽

Majid Khsdduri "Political Trends in the Arab World" (1970)

제1차 세계대전이 초래한 새로운 사태는 아랍 민족주의의 진로에 큰 영향을 주었고 아랍인들의 목표를 재조정하게 만들었다. 오토만제국이 빠리 제안을 실행하지 않았을 때 몇몇 아랍인들만이 혁명적 견해를 품었을지 모르나 거의 대부분은 차이점이 해소되리라는 희망을 계속 갖고 있었다. 전쟁이 터지자 그들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부당한 처우의 개선을 미룰 용의마저 있었다. 그러나 영국이 터키에 반대하여 아랍인들의 요구를 지지함으로써 혁명적 지도자들이 각광을 받게 되었고 이들은 아랍 민족주의에 그들의 발자취를 남기면서 이를 점진적이고 평화적인 운동으로부터 혁명적이고 분리주의적인 운동으로 변형시켰다. (중략)
아랍 지역 특히 비옥한 초생달 지역이 오토만 주권으로부터 분리되어 외국의 보호 아래 놓이게 되었다. 아랍 민족주의는 그때부터 부정적인 성격을 띠기 시작했다. 외세의 영향으로 믿었던 아랍민족의 통일된 독립의 여망이 꺾이고 그들이 지배하기 쉽게 허약하고 조그만 나라를 여러 개 만들었기 때문이다. -306-308쪽

Hans Kohn "The Idea of Nationalism" (1944)

민족주의는 국민주권 사상의 발전, 즉 통치자와 피치자의 지위 및 계급과 신분제도의 철저한 수정이 없이는 상상도 할 수 없다. 우주와 사회의 양상은 그로티우스와 로크가 이해했던 것과 같은 새로운 자연과학과 자연법칙의 도움으로 세속화될 필요가 있었다. 전통적인 경제활동은 왕실이나 궁정의 문명으로부터 민중의 생활, 언어 및 예술로 눈을 돌리게 된 제3계급의 발생으로 붕괴되어야만 했다. 이 새로운 계급은 귀족이나 성직자보다 전통의 구속을 덜 받았다. 이계급은 새로운 것을 열망하는 새로운 세력을 대표했고 언제라도 과거와는 결별할 자세가 되어 있었으며 실생활에서보다도 그들의 견해에서 더욱 전통이란 것을 우습게 여겼다. 이 게급은 한 새로운 계급과 그 이해 관계뿐만 아니라 전체 민중을 대표하노라고 주장하면서 나타났다. 18세기에 제3계급이 위세를 떨치게 되었던 나라들, 예컨대 영국 프랑스 미국에서는 민족주의가 주로 정치적 경제적 변동으로 -그렇다고 거기에 결코 국한되는 일은 없이- 나타났다. (아래에 계속)-17-18쪽

(위에서 계속) 반면 제3계급이 19세기 초에도 여전히 취약한 초기 단계에 있었던 독일과 이태리 및 슬라브 제민족 사이에서는 주로 문화적인 분야에서 민족주의가 표현되었다. 이들 민족의 민족주의의 주요 관심사가 되었던 것은 애초에는 민족국가(nation-state)보다는 민족정신(Volksgeist)과 문학 민속 모국어 및 역사 등을 통한 그 민족정신의 표현이었다. 19세기가 진행되면서 제3계급의 세력이 성장하고 다수 민중이 정치적 문화적으로 각성함으로써 이 문화적 민족주의는 얼마 안가 민족국가의 형성이라는 방향으로 그 소망을 돌리게 되었다.
(아래에 계속)-17-18쪽

(위에서 계속)
민족주의의 성장은 일반 민중을 공통의 정치적 형식으로 통합하는 과정이다. 따라서 민족주의는 현실로서든 또는 하나의 이상으로서든 경계가 뚜렷하고 규모가 큰 영토를 가진 중앙집권적 정부 형태의 존재를 전제로 한다. 그러한 형태는 근대 민족주의의 선구자였던 절대군주들에 의해 창조되었다. 프랑스혁명은 왕들의 중앙집권적 경향을 계승하였는데, 그러나 그와 동시에 그 중앙조직을 새로운 정신으로 채웠고 그때까지는 알려지지 않았던 응집된 권력을 중앙 조직에 부여했다. 민족주의는 근대국가가 출현하기 이전인 16세기에서 18세기 사이엔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민족주의는 그러한 근대 국가의 형태를 받아들이기는 했으나, 새로운 생활감정과 새로운 종교적 정열로 그 형태에 활력을 불어넣어 변모시켰다.-17-18쪽

민족의 형성에 가장 중요한 외적 요소는 공통의 영토, 아니 그보다도 국가(state)이다. 정치적 국경선은 민족을 형성시키는 경향이 있다.-33쪽

비록 이와 같은 객관적 요인 가운데는 민족의 형성에 대단히 중요한 것도 있긴 하지만, 가장 필수적인 요소는 생생하고 적극적인 공동의지이다. 민족은 민족을 형성하려는 결정에 의해 형성된다. 프랑스 민족은 1789년의 의지의 열광적인 표명에 의해 탄생되었다. 프랑스라는 나라, 프랑스왕국의 주민은, 민족의 성립에 필요한 다른 객관적인 여건들이 그러했듯이, 1789년 이전에도 존재했다. 그러나 이 새롭게 각성된 자각과 의지만이 그러한 요소들을 적극적이고 효과적으로 만들었고 거대한 구심력의 원천으로 융합시켰으며 새로운 중요성과 의미들을 부여했다.-33쪽

"민족은 어떤 정치적 실체에 상응하는" 하나의 정신상태이다. 아니면, 적어도 상응하고자 노력하는 정신상태인 것이다. 이 정의는 민족주의와 근대적인 민족의 발생을 반영한다. 근대의 민족은 어떤 정신상태가 일정한 정치적 형태와 융합됨으로써 탄생한 것이다. 마음의 상태, 곧 민족주의의 이념이 그 형태에다 새로운 내용과 의미를 불어넣었고, 형태는 그 이념의 표현과 열망을 조직적으로 나타낼 수 있는 도구를 이념에게 제공했다.-40쪽

주권에는 이중의 중요성이 있다. 한 측면은 국가와 그 시민과의 관계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국가 간의 관계에 관한 것이다. 민족주의라는 감정도 이와 유사하게 이중의 얼굴을 하고 있다. 국내적으로 그것은 민족 내부의 모든 동료 성원과의 생생한 공감으로 이어진다. 국제적으로는 민족의 범위 밖에 있는 동료 인간들에 대한 무관심이나 불신, 증오로 표현된다. (중략) 인류의 한 단편에 지나지 않는 민족은 자기 자신을 전부로 세우려는 경향이 있다. -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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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공수업 넷에, 학부 수업 하나(중급 한문). 청강하는 과목이 둘(민족주의의 역사, 희랍 비극). 거기다 새벽에 듣는 영어 회화 강좌까지 신청했다.

너무 욕심을 부렸나 싶은 3월이지만 마음은 가볍게~ 힘 닿는 데까지 많이 읽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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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소설의 심층적 이해
박기석 지음 / 집문당 / 2008년 8월
18,000원 → 18,000원(0%할인) / 마일리지 0원(0% 적립)
*지금 주문하면 "12월 10일 출고" 예상(출고후 1~2일 이내 수령)
2009년 03월 29일에 저장

발표를 위해 막 집어온 책들 중 하나. 박기석 "박지원 문학 연구", 김명호 "박지원 문학 연구", 김영동 "박지원 소설 연구", 김지용 "박지원의 문학과 사상", 이가원 "연암소설연구", 차용주 외 "연암 연구" 를 비롯해 각종 논문들이 책상 위에 가득하다. D-day는 4월 6일. 스트레스가 팍팍 쌓인다.
이야기와 담론- 영화와 소설의 서사구조
시모어 채트먼 지음, 한용환 옮김 / 푸른사상 / 2003년 9월
13,000원 → 11,700원(10%할인) / 마일리지 650원(5% 적립)
2009년 03월 29일에 저장
절판
중간에 그만두기가 뭐해서 어찌어찌 끝까지 읽음. 앞부분은 그림도 좋고 썩 괜찮은 인상이었는데, 작품 예시가 나오기 시작하면서 머릿속이 뒤죽박죽이 되어버렸다. 3월 27일에 끝냄.
괴이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소연 옮김 / 북스피어 / 2008년 8월
10,000원 → 9,000원(10%할인) / 마일리지 5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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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03월 29일에 저장

사실은 이런 데 외도하고 있을 시간이 없다. 그렇지만, 도서관에서 본 순간미야베 미유키 소설이 예약도 안 된 채로 떡하니 서가에 나와 있다니 이게 웬 떡이냐? 싶어서 안 집어올 수가 없었다. 야금야금 아껴가며 읽어서 3월 26일에 끝냄. 반납하기가 아쉬워 미적거리고 있다.
채만식 탁류- 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소 고전총서 동양 문학 5
우한용 지음 / 서울대학교출판부 / 1997년 12월
20,000원 → 20,000원(0%할인) / 마일리지 1,000원(5% 적립)
2009년 03월 29일에 저장
품절
난 채만식이랑 코드가 맞나보다. 인물하고 관계 맺기가 편하달까, 그 거리감이 정말 딱이다. 적당적당히 불쌍하고 적당적당히 사랑스럽고.... 그래, 인생이 다 그런 거지 뭐 별 거 있을까 싶다. 3월 셋째 주에 끝낸 것 같은데 정확히 몇일인지는 모르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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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 지식 - 후기비판적 철학을 위하여, 대우학술총서 519
마이클 폴라니 지음, 표재명 외 옮김 / 아카넷 / 2001년 7월
품절


우리를 유쾌하게 하는 아름다움과 우리를 황홀하게 하는 심오함을 인정하지 않은 태 우리가 그러한 이론을 받아들이는 이유를 정확히 설명할 수는 없다.-40쪽

따라서 행위나 앎의 기예, 즉 가치 평가와 의미의 이해는 전체를 구성하는 개별자들의 부차적 인지로 우리 개인을 확장시키는 행위의 또다른 측면으로 보인다. 개인적 앎의 이러한 기본적 행위의 내재적 구조는 우리가 보편적 의도로 그것을 형태짓거나 인지하는 데 반드시 참여하게 한다. 이것은 지성행위의 원형이다.
개인적 지식을 단순히 주관적인 것으로부터 구제해내는 것은 완전한 구조에 대한 관여의 행위이다. 지적 관여는 선한 양심에 따라 내가 참이라 여기는 것의 항거할 수 없는 요구에 복종해서 나온, 책임이 따르는 결정이다. 그것은 내가 책임질 수 없으면서, 따라서 내 소명을 결정하는 개인적 상황 안에서 의무를 완수하려고 노력하는 희망의 행위이다. 이런 희망과 의무는 개인적 지식의 보편적 의도로 표현된다.-110쪽

경험의 관찰자나 조작자로서 우리는 경험의 지도를 받으며, 그것을 그 자체로 경험하지 못한 채 경험을 통과한다. 사물을 관찰하고 조작하게 되는 개념적 구조틀이 우리 자신과 사물 사이의 차폐막으로 현재하고 있기 때문에 사물에 대한 시각과 소리, 냄새와 촉감은 우리를 사물과 떨어져 있게 하는 이러한 차폐막을 통해 지속적으로 증발한다. 숙고는 그 차폐막을 해체해 경험을 통한 우리의 활동을 정지시키며 우리를 경험 속으로 직접 밀어 넣는다. 우리는 사물을 다루는 행위를 멈추고 그 속에 깊이 빠지게 된다. 숙고는 배후의 의도나 배후의 의미를 갖지 않는다. 숙고 내에서 우리는 사물 다루기를 멈추며 경험 그 자체를 위해 사물의 내적 성질에 몰입한다. 그리고 숙고에 몰입할 때 우리는 숙고의 대상들에서 비개인적 삶을 취한다. 한편이러한 대상 자체는 그것에 새로운 생생한, 그러나 아직은 꿈과 같은 실재를 제공하는 미래의 섬광에 의해 가득 채워진다. 그것은 무시간적이고, 정해진 공간적 자리도 없기 때문에 꿈과 같다. 그것은 객관적 실체가 아니다. (아래에 계속)-302쪽

(위에서 계속) 왜냐하면 만져질 수 있는 사물에 의해 미래의 확신을 예견하는 지적 지각의 초점이 아니라, 다만 사물이 눈에 현재하는 다양한 형태의 색깔있는 조각틀에 속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강력한 숙고의 비개인성은 숙고하는 것에 대한 그 사람의 완전한 참여에 있지, 관념적인 객관적 관찰의 경우가 그러하듯이 그것과 완전히 떨어져 있는 데에 있지 않다. 숙고의 비개인성이 자기 포기self-abandonment이기 때문에, 그것은 숙고자의 환상적 활동을 언급하는가, 또는 그의 인격의 침잠을 언급하는가에 따라 이기적이거나 이타적이라고 할 수 있다.-302쪽

우리는 유의미하다고 주장되는 익숙하지 않은 체계가 제시될 때 충격을 받는다. 대중이 그 의미를 발견하기 위해 새로운 구조틀을 받아들이도록 압력받게 될 때 그들의 당황은 분개로 바뀐다. 그들은 자신의 우수성의 기준을 경멸한 것에 대해 경멸하고, 화를 낼 만한 것처럼 보이는 것을 존경하도록 하는 데에 분노하게 된다.-308쪽

일반적으로 진리와 지적 가치에 대한 사랑은 이런 가치를 육성하는 사회에 대한 사랑으로 다시 나타날 것이며, 지적 기준에 대한 복종은 그 기준에 봉사하기 위해 문화적 의무를 수용하는 사회에 대한 참여를 함축하는 것으로 나타날 것이다.-313쪽

모든 기술은, 학습자가 신뢰하는 다른 사람에 의해 기술이 실행되는 방식을 지적으로 모방함으로써 학습된다. 언어를 아는 것도 암묵적 판단과 상술할 수 없는 솜씨의 실행을 통해 수행된 기술이다. 어린이가 자신의 성인 지도자로부터 말을 배우는 방식은 어린 포유동물과 어린 새가 자신들을 돌보아주고 보호하고 인도하는 나이 많은 동물들에 대해 보이는 모방적 반응과 유사하다. 말의 암묵적 공동작용인은 권위 있는 사람으로부터 그를 믿고 있는 제자로 진행되는 비분절된 의사소통을 통해 전달된다. 그리고 의사소통을 전달하는 말의 힘은 이러한 모방적 전이의 효율성에 의존한다.-318쪽

우리는 다시 한번 신념을 모든 지식의 원천으로서 인정해야만 한다. 암묵적 동의와 지적 정열, 하나의 관용어와 하나의 문화적 유산을 공유하기, 같은 생각을 가진 공동체에의 가입, 이런 것은 사물에 대한 우리의 주재권을 위해 의존하고 있는 사물의 본성에 대한 우리의 입장을 형태지어주는 추진력이다. 지성은 -비판적이거나 창조적인 지성일지라도- 그런 신용의 구조틀 밖에서는 작용할 수 없다.-407쪽

이해는 그 자체의 기준들에 의거해서 만족을 찾는 중심의 작용agency에 속해 있다. 왜냐하면 이해하는 중심의 지적 만족을 인정하지 않고서는, 이해는 정의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해의 의식적 작용의 상술 불가능성은 고정된 신경학적 메커니즘에 의거해서 이해를 설명할 수 없다는 사실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한 작용에 포함된 지적 관여는 성광과 실패를 구분할 수 없는 물리-화학적 평형상태의 측면에서의 이해에 대한 모든 표현을 배제한다. 이해와 이해에 수반하는 신체과정은 지적 옳음의 측면에 의해서만 결정될 수 있는 일종의 평형상태를 말한다. -604-605쪽

우리가 알고 있는 한, 인간 안에 구현된 우주의 작은 단편들은 가시계 안에 있는 사고와 책임감의 중심들을 뿐이다. 그렇다면 인간정신의 출현은 지금까지 세계의 깨어남에서 최종적 단계였다. 그리고 이전에 지나간 모든 것, 즉 삶과 믿음의 위험을 감행했던 무수한 중심의 노력은 경쟁적 노선을 따라, 이 시점까지 우리가 획득한 목표를 모두 추구해왔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 중심 모두는 우리와 유사하다. 왜냐하면 이 모든 중심은 -즉 우리 자신의 실존에 이르럿고, 그리고 그 중 많은 것이 소멸된 다른 노선들을 산출하고 훨씬 더 많은 다른 존재에 이르렀던- 궁극적 해방을 향한 동일한 노력에 종사한 것으로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모든 중심에 생각할 수 없는 완성을 향해 스스로 진행하는, 단명하고 제한된 모험의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이들 중심을 산출했던 우주적 영역을 그려볼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또한 기독교인이 신을 경배할 때 위치하고 있는 방식이라고 나는 믿는다.
(끝)-6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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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zuaki 2009-03-03 08: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용은 어렵지 번역은 엉망이지... 고생고생해서 읽었다. 중간부터는 각주는 다 건너뛰고, 모르는 건 포기하면서, 대학원 연구실에 나온 첫날부터 엎드려 잘 수는 없다는 생각으로 기계적으로 책장만 넘긴 부분도 많다. ㅋㅋ
<과학 혁명의 구조>에 영향을 준 과학철학서이지만, 교육과 관련해서도 시사하는 바가 있다. 인간이 어떻게 지식을 받아들이고 세계를 '이해'하는가와 관련해서, 인상적인 구절들을 정리해 둔다.
 
한국문학통사 3 (제4판) -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기문학 제1기
조동일 지음 / 지식산업사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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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1582-1632)은 유성룡의 아들이며 전란이 일어났을 때 11세였다. 아버지는 임금을 따라야 해서, 가족을 이끌고 피란하는 일은 백부가 맡았다. 함께 가다가 다 죽으면 멸문을 당한다고 해서 다른 사람에게 맡겨졌다가, 매형과 누나를 만나 그 일행이 되었다. 피란길이 경기도, 강원도, 평안도, 황해도로 이어지면서 겪었던 일을 만년에 회고한 <임진록>을 국문으로 썼다. 아버지 유성룡은 <징비록>을 한문으로 지어 나라를 근심했는데, 아들 유진은 피란민의 무리 가운데서 어린 나이로 겪은 바를 국문으로 기록하면서 세태를 있는 그대로 전했다.
통치체제가 무너진 것 못지않게 심각한 사태가 신뢰의 상실이라고 했다. 왜적을 만나면 몸을 숨겨 살아날 수 있으나, 인심이 극도로 야박해져서 속이고 해치고 고통은 모면할 길이 없었다. 가족이 있는 곳을 알고 찾아가려 했는데, 자기 혼자 피란하고자 왜적이 들이닥쳤다고 헛소문을 내는 사람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양반에 대한 반감이 극도에 이르러 신분을 숨겨야 할 형편인데, 피란민을 죽여 왜적일 친 것을 공로로 삼은 양반도 있었다.-19-20쪽

병자호란 때에 있었던 일을 중요한 임무를 맡은 사람들이 기록한 저작이 여럿 있다. (중략)
인조의 세 아들 소현세자, 봉림대군, 인평대군이 볼모가 되어 사태가 심각했다. 수행한 관원 가운데 누가 세자의 행적을 기록한 <심양일기>를 남겼으나 비통한 사연을 겉으로 드러낼 수 없었다. 청나라가 은혜를 베푼 것처럼 말하면서 분통터질 일을 담담하게 기술해야 했다. (중략)
정6품직의 관원 석지형(1610-?)이 남긴 <남한해위록>에는 하층의 불신이 심각하게 나타나 있다. 군사들이 적을 상대로 해서는 용맹스럽게 싸우다가도 조정 관원들을 보면 주저앉고 싶어한다고 했다. 난리가 끝나면 10년 동안 부역과 세금을 면제해주겠다고 해도 위급해서 하는 말이니 믿지 못하겠다더라고 했다.
종9품의 말직에 종사하던 남업(1592-1671)의 <병자일기>에서는 반란을 증언했다. 군사들이 들고 일어나, 고담준론만 일삼는 문사들이 적병을 막도록 하라고 하면서 임금을 만나자고 들이닥쳤다. 승지가 칼을 뽑자, 비웃으며 "이런 인재를 적진에 보내면 모든 일이 잘 되겠다."고 하더라고 했다.-26-28쪽

김충선(金忠善 1571-1642)은 임진왜란에 종군한 왜장이었는데 귀화해서 공을 세우고 사대부의 신분을 얻었다. 만년에 은퇴해서 생애를 회고하는 가사 <모하당술회(慕夏堂述懷)>를 지었다. 문명국인 조선을 동경해 정착하게 된 경위와 그 뒤의 활동을 자랑스럽게 술회하고 유가의 도의를 자손대대로 지키겠다고 했다.-39쪽

병자호란을 다룬 가사 <병자난리가>가 1711년(속종37)에 필사된 것으로 보이는 <해동유요>에 실려 있다. 작자는 알 수 없으나 작품 내용을 보면 병자호란을 직접 겪었으리라고 생각되고 강화도 사람인 듯하다. 난리가 닥치기까지의 경과, 피란하면서 겪은 참상, 패전의 책임 추궁, 인조의 항복과 그 뒤의 사태에 대한 탄식으로 작품을 이으면서, 국정을 담당한 관원들을 줄곧 비판했다. (중략)
개인의 고생과 나라의 시련을 함께 인식하고, 임금과 자기가 다르지 않다고 했다. 피란지에서조차 반성을 하지 않고 향락을 일삼는 무책임한 관원들은 "죄상 곧 헤어내면 다 버힐 놈이로다"하며 분개했다. "어와 가소롭다. 의주부윤 가소롭다"로 시작되는 대목에서는 임경업마저 일을 그르쳤다고 나무랐다.-42-43쪽

유몽인(1559-1623)은 일찍 벼슬길에 올라 임진왜란을 겪는 동안에 명나라 관원을 상대하는 외교적인 임무를 맡고 난 후에는 여러 차례 어사가 되어 민정을 살폈다. 광해군 시절에는 북인정권에 가담했다가 인목대비 유폐에 찬성하지 않아 배척되자 은거하는 길을 택했다. 위에서 내리는 명령에 따라 백성의 물자를 긁어 올리는 것은 선비로서 차마 못할 짓이니 자기는 시골에 가서 문장 공부를 하면서 옛사람을 상대로 하고 후세에 남길 업적을 쌓겠다고 했다.
그러고 있을 때 대제학에 추천되자, 굶주린 아이들이 코푼 덩어리를 떡인 줄 알고 다투는 것과 같은 짓은 하지 않겠다고 했다. 대제학이라면 한문학의 규범을 자랑하는 문장으로 나라를 빛내는 자리이기에 문신이라면 누구나 동경할 만한데 그런 반응을 보인 것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문장 수련이 권신들을 위해 들러리 노릇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음을 다짐한 반응이었다.
(아리에 계속)-51-52쪽

(위에서 계속)
사림으로 자처하며 강호의 즐거움을 찾지 않는 데 만족하지 않았다. 현실인식 때문에 괴로워하고 글마다 새로운 표현을 하고자 했다. 기발한 상상력을 갖춘 우언을 써서 도가적인 기풍을 보여주고 방외인의 취향을 갖추었다. 어사 노릇을 할 때 얻어들은 이야기를 살려 <어우야담>을 엮은 데에도 반발이 드러난다.

滿城花柳擁春遊
玉手停盃唱柏舟
壯士忽持長劍走
醉中當斫老奸頭

성 가득한 꽃과 버들 봄 빛 에워 하늘거리고
옥수로 잔을 멈추고서 백주 노래를 부르는구나
장사가 홀연히 장검을 잡고서 달려가서는
취한 김에 마땅히 늙은 간신의 목을 찍었으면

권력을 잡고 부귀를 누리는 자들에 대한 반감을 이런 시를 지어 나타냈다. "화류"는 꽃과 버들 자체이기도 하고 기생이기도 하다. 호화로움의 극치를 자랑하면서 벌이는 놀이는 국권 농락 행위이기도 하다. 자기도 벼슬한 사람이었는데 권신들의 목을 장검으로 찍는 준엄한 심판을 하고자 했으니 시련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어느 당파하고만 불화한 것은 아니다. 인조반정 직후 서인정권이 광해군을 위해 충성을 한다는 이유를 내세워 처형하고 말았다.-51-52쪽

권필(1569-1612)은 일찍부터 대단한 재능을 보였으나 과거를 통해 진출하지 못하고 야인으로 일생을 보내는 동안에 험난한 세태와 철저히 부딪치고 시인으로서의 사명을 깊이 자각했다. 우언 짓기를 좋아해 <주사장인전>에서는 술집 주인 노릇을 하는 인물이 이름나나 유학자를 나무라게 하고, <곽삭전>이라는 가전에서는 게를 의인화해서 은거하는 선비의 자세를 그렸다. <주생전>을 지어 소설 개척에 기여하기도 했다.
자기 문학의 본령으로 삼은 한시를 혁신해서 자기 뜻을 펴는 데는 더욱 힘썼다. (중략) <술회>라는 데서는 자기 생애를 되돌아보면서 둥근 것과 모난 것이 원래 맞지 않아 세상과는 서로 어긋나게 마련이라고 했다. (중략)
(아래에 계속)
-56-58쪽

(위에서 계속)
독자적인 시 세계를 더 잘 보여주는 작품을 든다면 <충주석(忠州石)>이 있다. (중략) 그 작품보다 구상이나 표현이 월등하다. 세도가의 횡포는 자연을 파손하고 백성들을 수고롭게 할 뿐만 아니라, 신도비에다 새겨놓은 허위에 찬 문구로 후대 사람들까지 속이려고 하는 데 이른다고 야유하며 비판했다.
중간에다 신도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말을 간추려 놓아, 칭송하고 꾸미는 문학이 얼마나 허망한지 보여주었다. 정통 한문학이 그런 짓이나 일삼으면서 위세를 자랑하니 그대로 둘 수 없었다. 돌도 입이 있으면 할 것 같은 말을 자기가 맡아 하층민의 반발까지 대변하고자 했다. 풍자시가 빌미가 되어 귀양 가다가 죽은 것이 예상된 결말이라고 할 수 있다. 권필은 시를 위해 순절한 시인이다.-56-58쪽

중국소설 <설인귀동정>은 고구려 침략 길에 나섰던 당나라 장수를 주인공으로 삼아 전개한 도술적인 군담이고 아들, 손자 대까지 다룬 속편은 전혀 허구적인 작품이다. <설인귀전>이라는 그 번역본이 나와 인기를 끌었고, 속편까지 번역되었다. 번역과정에서 원작과는 상당한 거리가 생겼으며 이본에 따라서 내용이 달라졌다. 도술로 전투를 하는 방식이라든가 여장군이 남장을 하고 활약을 한다는 설정 같은 것들이 흥미를 끌어 상당한 인기를 누렸다.-120쪽

아주 파격적인 주장을 거리낌 없이 내놓기 위해서는 만필(漫筆)을 쓰는 것이 유리했다. 만필이란 대단치 않은 소리를 가볍게 늘어놓는 글이어서 평가할 만한 의의가 없다고 하는 점을 이용해 격식을 차린 글에서라면 허용될 수 없는 이단적인 발언을 하는 데 이용했다. 그런 전통이 만담으로, 다시 만화로 이어졌다. 명칭에 '만'자가 들어가 있는 세 가지 표현형태가 시대에 따라 교체되면서 이면의 문학활동을 자유롭게 하는 구실을 했다.
장유는 한 시대 문학의 규범을 마련했으면서, <계곡만필>이라는 것을 따로 저술했다. 성리학의 횡포를 나무라면서 양명학을 내세우는 용기를 가지고 문학이 그것대로의 자율성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해, 만필을 거점으로 삼는 반역의 본보기를 보여주었다. 김만중의 경우에도 <서포집>과 <서포만필>이 서로 달랐다. <서포만필>에서는 만필에 허용되는 자유를 적극 활용해, 관념의 허위를 넘어서는 새로운 사고의 방향을 제시하고, 국문문학을 옹호하는 주자을 펴기도 했다. 홍만종의 <순오지> 또한 만필이어서, 도가사상 취향을 짙게 나타내고, 국문문학에 대한 이해를 구체화할 수 있었다.-133-134쪽

공식적인 가치 서열에 따라 정해진 등급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판소리광대는 위항시인이나 전문가객에 비해서 저급한 위치에 있었다. 위항시인이 가장 높고, 전문가객이 그 다음이며, 판소리광대를 최하위로 하는 지체 구분이 분명했다. 중인, 서리, 천인의 위계가 확실할 뿐만 아니라 한시, 시조, 판소리에도 존귀하고 미천한 등급이 있었다. (중략)
그러나 수용층의 확대로 생기는 인기의 순위는 그것과는 반대였다. 위항시인의 한시 독자층은 작자층과 거의 일치하는 정도에 그쳤다. 전문가객은 공연, 창작, 자료 집성 등으로 시조에 관한 활동을 다양하게 벌여 수용자를 넓혀나갔다. 판소리광대는 천민에서 국왕에까지 이르는 넓은 범위의 수용층과 관련을 가지고 다양한 관심사와 주장을 한 자리에 놓고 논란을 벌였다.
존귀하고 미천한 것의 구분은 중세의 가치관이었다. 수용층이 늘어나 인기가 확대되는 것은 근대로 나아가는 변화였다.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기의 특징인 그 둘의 공존과 대립이 근대가 승리하는 방향으로 귀결되게 마련이었다.-195-196쪽

일본의 경우에는 소설을 출한할 때 작가 이름을 표지에다 내놓아 판매 부수를 늘리려고 했다. 중국에서 소설을 쓴 사람들은 기이한 가명을 써서 관심을 끌면서 실제의 행적은 감추었다. 일본소설은 출판인소설이고 중국소설은 작가소설이라면 한국소설은 독자소설이었다. 소설의 독자가 일본에서는 남성이고, 중국에서는 남성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하고, 한국에서는 여성이었다. 한국소설은 여서을 위한 독자소설인 것이 중국이나 일본의 경우와 달랐다.
(인용자주-진짜 그런지 의심스러움. 앞으로 확인해 보겠음)-197쪽

홍대용과 박지원은 유력한 가문에서 태어났으면서 과거를 보는 데 소용되는 공부를 하지 않았고 나중에 천거를 받아 말단 직위에 나아가 지방수령을 했을 따름이다. (중략) 홍대용은 35세때 숙부를 따라, 박지원은 43세 때에 삼종형을 따라 사신 수행원의 자격으로 청나라에 가서 견문을 넓혔다. 그곳 학자들과 문답하면서 스스로 생각한 바가 사실로 입증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 경과를 기록한 홍대용의 <담헌연기>와 박지원의 <열하일기>는 사상에서나 문학에서나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그 점은 서양 전래의 새로운 문물과 제대로 접촉하지도 못하고서 천주교를 받아들였다는 죄목으로 박해를 받기 일쑤였던 남인계 학자들의 불운과 좋은 대조를 이루었다. (중략) 박지원의 문체가 규범을 어지럽힌다고 정조가 간섭하고 바로잡으려 한 파동이 정치적인 박해를 몰고 오지는 않은 것도 노론이 누리고 있던 기득권 덕분이다.
(아래에 계속)
-209-210쪽

(위에서 계속)
노론에 속하는 조건은 탄압을 피하고 어느 정도의 언론자유를 누리면서 새로운 노선을 개척하는 데 유리하게 작용했다. 사상의 근본까지 재검토하는 작업은 노론 쪽에서만 할 수 있었다. 남인은 말을 조금 바뿌는 것도 두렵게 여길 때 노론 선각자들은 이기철학에 관한 논란이 새삼스럽게 심각해져서 혁신이 불가피하게 된 상황을 내부에서 경험하고 새로운 대안을 내놓는 작업을 과감하게 했다.-209-210쪽

유득공(1748-1807)은 관심의 폭을 넓히고 시의 소재를 확대했다. 잃어버린 역사를 되찾는 것이 무엇보다도 긴요한 과제라고 생각해서 <발해고>를 집필했다. (중략) <이십일도회고시>에서 역사의식 전환 작업을 더욱 진척시켰다. 단군조선에서 고려까지의 역대 왕조의 도읍 스물 한 곳을 찾아 43수의 시를 지으면서 감문, 우산, 탐라까지 들었다. 역사를 승리자 위주로 서술해온 잘못을 시정하고, 잊혀져 가는 곁가지까지 두루 찾아내 평가해야 한다고 했다. 우리 역사를 단일체가 아닌 다원체로 이해하는 것이 새로운 과제로 등장한 지금의 시기에 적극 평가해야 할 전례를 남겼다.-220쪽

김삿갓 또는 김립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김병연(1801-1863)은 희작시로 일생을 보낸 사람이다. (중략) 박해가 심하고 심사가 뒤틀리는 일이 누적되면 상대방을 욕보이는 재치를 발휘했다. 서당 훈장은 동정 받아야 할 사람이다. 서당 훈장의 딱한 사정을 제대로 된 시 여려 편에서 다루었다. 그런데 얼마나 아니꼬운 일이 있었던지, 다음과 같이 읊은 육담풍월도 있다.

書堂乃早知
房中皆尊物
生徒諸未十
先生來不謁-281-282쪽

바다에서 폭풍을 만나 배가 표류하면 미지의 나라에 이를 수 있었다. 이지항이라는 군관이 그런 경험을 한 기록을 남겼다. 1756년(영조32)에 부산에서 영해로 가다가 폭풍을 만나 멀리 北海道까지 밀려갔다. 거기서 아이누인의 구조를 받는 놀라운 경험을 하고 일본 여러 곳을 거쳐 다음해에 돌아온 경위를 <표주록>을 써서 알렸다.
제주도 선비 장한철(1744-?)은 1770년(영조46)에 과거 길에 올랐다가 배가 남쪽으로 표류해서 流球까지 갔다. 그 내력을 다룬 <표해록>은 더욱 복잡한 모험담의 연속이다. 목숨을 겨우 건지자 왜구의 내습을 받았으며, 안남(安南) 상인들에게 구출되어 제주도 근처까지 이르렀을 때, 과거에 안남 세자가 제주도에서 피살되었던 일 때문에 죽을 곤욕을 치러야만 했다. 그런 사건을 박진감 있게 다루면서 제주도 남쪽의 대해가 국제간의 교역과 쟁패가 벌어지는 안마당이라는 사실을 발견하는 충격을 전했다.-438쪽

국문본과 뒤섞이지 않고 문집이나 야담집에 수록되어 있는 한문소설은 단편이다. 국문장편 소설과 한문단편이 여러모로 대조되는 특성을 지니면서 소설 발전에서 각기 그 나름대로 소중한 기여를 했다. 소설의 문체와 수법을 발전시키는 작업은 국문장편이 맡아서 하고, 현실인식의 주제를 가다듬는 데서는 한문단편이 앞서 나갔다.-496-497쪽

영웅소설이 상층의 문학이어서 보수적인 사고형태를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몰락한 사대부가 지위 회복을 염원하는 의식을 표현한 작품이라고 하는 것도 설득력이 부족하다. 계급의식이 아직 명확하지 않은 단계의 시민이 작품의 창작, 전달, 수용을 주도하면서 지배이념을 받아들여 통속화하고 흥밋거리로 만들었다고 하는 편이 더욱 타당하다. 몰락한 사대부도 작가로 참여했을 수 있으나, 자기 나름대로의 주장을 펴려고 하지 않고 유형화된 전개와 표현을 그대로 따르는 직업의식을 보여주었다. 직업작가 노릇을 하면서 시민화한 사대부가 독자적인 발언을 포기하고 시민의 귀족화에 기여했다고 할 수 있다.-511쪽

<부장양문록>이라는 것은 5책의 장편으로 발전했다. 상층소설의 사실성과 진지성을 갖추어, 여성 중심의 사고가 한때의 공상에 그치지 않고 설득력을 가지게 했다. 여장군으로 활약하던 주인공이 아흔 살의 고령이 되고, 남성적 삶의 상징인 칼을 장남에게 전해주었다. "장부의 마음으로 몸이 여자 되어 천만 한"을 풀고자 한 일생을 회고하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여성 주인공의 영웅소설은 대부분 여성의 작품이라고 생각되지만 분명한 증거는 없다. 그런데 <방한림전>은 "민한림 부인 방씨작"이라고 작품 속에 기록되어 있다. 방관주라고 하는 여성 주인공이 남장을 하고 벼슬길에 올라 방한림이 되고, 장수의 임무를 맡고 전장에 나가 싸웠다고 하는 사건을 다룬 작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전개하고서, 다른 여성을 아내로 맞이했다고 하는 특이한 내용을 갖추었다. 아내가 된 여성은 방한림이 여성인 줄 알고서, 둘이 함께 여성 해방을 이룩하기로 했다고 했다.-523쪽

사당패는 안성 청룡사 같은 절간 근처를 집결지로 삼고, 꼭두각시놀음 마지막 대목에서 절을 짓고 불교에 귀의하라고 하는 장면을 연출하는 것을 보면, 사원에서 밀려난 잡승에서 유래한 것 같다.
조선후기에 사당패가 아주 많아졌다. 놀이를 하는 것으로는 살 수 없어, 도적의 무리에 들어가기도 하고, 걸식이나 매음까지 햏ㅆ다. 사당이라고 부른 여자들은 물론, 남사당이라고 일컬어진 남자들까지도 남색을 팔았다. 어려운 형편에서 천대와 모멸을 견디면서 자기네들끼리 집단을 이루어 기량을 연마하고, 사방으로 돌아다니면서 아주 다채로운 놀이를 벌여 민속예술의 발전을 위해서 커다란 기여를 했다.
사당패 또는 남사당패의 놀이 종목에는 우선 노래와 춤이 들어가고, 풍물이라는 농악, 버나라는 대접돌리기, 살판이라는 땅재주, 어름이라는 줄타기, 덧뵈기라는 탈춤, 덜미라는 꼭두각시놀음, 그리고 발탈이 포함되었다. 구경꾼을 모을 만한 종목은 두루 구비했다고 할 수 있으며, 다른 집단의 놀이를 가져온 것도 적지 않다.-60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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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zuaki 2009-03-01 14: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3권 읽으면서 비로소 저자의 무서움을 깨달았다. 이 사람, 여기 적어 놓은 작품들 전부 읽은 거야?!!
특히 조선 후기 대장편 소설들을 언급하면서 흥미로운 내용이라느니 하고 평하는 걸 보고 기절할 뻔했다. 나도 남들한테 무슨 책 재미있다고 했다가 "그게 어디가 재밌어요?"라는 소리 들어봤지만 이 사람에 비하면 발끝에도 미치지 못한다. 도대체 그게 어디가 재밌냐고... ㅠㅠ
 
한국문학통사 2 (제4판) - 중세 후기문학
조동일 지음 / 지식산업사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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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색의 전은 <동문선>에 일곱 편이나 수록되어 있다. 이미 든 <정씨가전>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개인의 생애를 다룬 내용이다. <초계정현숙전>은 벼슬길에 올라 지방관장을 역임한 인물의 전이다. (중략) 나머지 다섯 편은 그리 대단치 않은 인물의 특이한 일생을 깊은 인상이 남게 다룬 공통점이 있어 연작이라고 할 수 있다. 제목을 <송씨전>, <오동전>, <박씨전>, <최씨전>, <백씨전>이라 했다. (중략)
자기는 닦은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해 크게 영달했으나, 그 다섯 사람은 모두 불운했다. 재능이 모자라고 글이 뒤떨어진 탓이 아니고, 성격이 세상에서 요구하는 바와 맞지 않거나 뜻하지 않게 일이 뒤틀렸을 따름이다. 일찍 죽거나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 공통적인 결말이다. 애통하게 여긴다는 말을 여기저기에 늘어놓았다. "아, 슬프구나"하는 소리를 자주 했다.
일사전을 지어 당시의 문풍을 비판하고자 했다고 할 수 있다. (중략) 격식을 잘 갖추어 과거에서 인정을 받는 시문을 지어서 영달을 하고 세상의 인정도 받는 것이 사실은 자랑스러울 바 없고 문학을 하는 참다운 자세와는 거리가 멀다는 생각을 나타냈다고 할 수 있다.-114-115쪽

가전의 출현은 함께 나타난 또 하나의 교술문학인 경기체가와 함께 살필 필요가 있다. 경기체가와 가전은 둘 다 사물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특별한 표현 방법을 갖추어 나타낸 전에 없던 비실용적인 문학가랠이다. 경기체가가 서정적 교술이고, 가전은 서사적 교술이다. 둘 다 특별한 표현을 갖추면서 실용적인 용도는 없어 사물에 대한 관심의 세계관적 의의를 강조했다. 시는 서정시만이었던 중세전기를 끝내고, 경기체가의 출현으로 교술시와 서정시가 공존하는 중세후기로 들어설 때 산문의 영역에서는 가전이 나타났다.-120-121쪽

고려전기의 상층문화의 위엄이 고려후기에는 크게 흔들렸다. 제사보다는 잔치하고 노는 데 더 많은 관심을 가져, 아악은 돌보지 않고 당악과 속악을 즐겨 받아들이고 자주 공연했다. 변화의 이유는 국정 담당자의 성격이 달라진 데서 찾을 수 있다. 고려 전기의 문벌귀족은 유교 이념을 구현해 상층문화를 규범화하려고 노력했으나, 무신란과 몽고침공을 겪은 고려후기에는 사정이 달라졌다. 국정을 장악한 권문세족이라는 무리는 견문이 모자라고 의식 수준이 낮아 지배이념을 가다듬는 임무의 사명을 저버리고 향락에 탐닉했으며 국왕이 그 주동자 노릇을 했다. -128쪽

최해(1287-1340)는 안축이 보여준 것과 같은 과정을 거쳐 득의에 찬 진출을 하다가 좌절했다. 원나라 과거에 급제해 벼슬하다가 곧 귀국하고, 고려의 관직도 오래 지니지 못하고 물러나 불우하게 지냈다. 중략) 스스로 패배자가 되는 길을 택해 지위 하락을 자초하고, 비참하게 된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는 문학을 했다. 어째서 그랬던지 당대 사람들이 말하고, 자기 스스로 해명했다.
이곡이 쓴 묘지명에는 "재주가 기이하고 뜻이 높아 시대에 용납되지 않았다"고 했다. 이재현이 지은 시에서는 "흐트러진 마음씨로 조롱과 해학을 일삼고, 너그럽고 넉넉한 태도로 미친 짓을 한다"고 했다. 후대의 공식적인 평가를 집약한 <고려사> 열전에서는 "문안드리기를 좋아하지 않고, 방탕한 자세로 말을 함부로 했다"고 하고, "재주를 믿고 무슨 일에든지 오만하게 굴었다"고 했다. 자기 스스로 술회한 말에서도, 남의 나쁜 점을 말하는 버릇을 고치지 못해서 배척당하고 말았다고 했다.-212쪽

신숙주(1417-1475)는 사육신이 된 사람들과 가까운 관계였으나, 세조 정권 수립에 공을 세워 최고의 지위와 명예를 누리면서 절개를 굽혔다고 나무라는 말을 잠재울 만한 활동을 했다. 외교 및 국방 문제 전문가의 식견을 갖추고, 중국과 일본을 왕래했다. 일본과 유구의 사정을 소개한 <해동제국기>가 큰 업적이다. 바다 동쪽에 여러 섬이 별들처럼 분포되어 있다고 하고, 그런 곳은 풍속이 우리와 다른 줄 알아야 한다고 했다. 칼 쓰고 배 타는 데 익숙한 왜인들을 배척하려고 하지 말고 잘 지내야 한다고 했다.
그 책 서두에서 "교린(交隣)을 하면서 맞아가고 찾아가는 관계를 가질 때에는 특이한 '속'(俗)을 이해해 그 '정'(情)을 안 다음에야 그 '예'(禮)를 다해야 하며, 그 예를 다한 다음에라야 그 '심'(心)을 다할 수 있다"고 했다.(중략)
신숙주는 들어앉아 있으면서 명분이나 찾지 않고 나라의 긴요한 일을 맡아 나선 사람이었다. 외교와 국방의 임무를 맡아 수고하면서 시를 지었다. (중략) 국경에서 겪는 시련과 긴장을 의지로 감당하면서 크게 보고 깊이 생각해야 했다. 선비가 할 일이 어디 있고, 문학의 임무는 무엇인지 다시 묻게 한다.-364-365쪽

권제(1387-1445)는 <동국세년가>에서 이승휴의 <제왕운기>가 보여주던 자주 노선을 계승하고자 했다. 1432년(세종14)에 이루어진 <세종실록지리지>평양조에서는 단군으로부터 고구려 건국에 이르기까지의 신이한 역사를 한 맥락으로 연결시킨 <단군고기>를 길게 인용했다. 권제의 아들인 권람(1416-1465)은 할아버지 권근의 시를 주석한 <응제시주>에서, 도가의 비기류까지 동원해 압록강 이북 요동지방까지에서 전개된 상고사를 되찾고자 했다.-465-466쪽

소설은 설화와 구별되는 서사문학이다. 신화, 전설, 민담은 문학이 시작될 때부터 있었지만, 소설은 자아와 세계의 대결이 심각하게 되었을 때 출현했다. 자아와 세계가 신화에서처럼 동질적이지 않고, 전설이나 민담에서처럼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상호우위를 가지고 대결하는 것이 소설의 특징이다. 이것은 우리 소설에서 추출되어 세계 전역의 소설에서 널리 타당성을 가지는 일반론이다. 세계 여러 곳에 소설의 선행형태나 유사형태는 다양하게 존재했다. 중국에 志怪나 傳奇가, 일본에 物語가 있었듯이, 우리에게도 傳奇가 있었던 것이 당연한 일이다. 그것들은 모두 문학적 수식을 갖추어 작품으로 평가될 수 있게 정착시킨 설화이다. 자아와 세계의 대결을 상호우위에 입각해서 진행되는 긴박한 전개와 심각한 주제는 갖추지 않았다. 전기는 전기라고 하면 그만이고, 전기소설이라는 용어는 필요하지 않다.
중국에서는 明淸小設에서, 일본에서는 江戶시대의 戱作에서 소설이 소설다운 모습을 드러낸 것이, 조선후기에 소설시대가 시작된 우리문학사의 전개와 같다. 온 세계 다른 어느 곳에서도 소설은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기문학으로 출현하고 성장했다.-487-488쪽

고려후기의 임금은 당악정재와 함께 향악정재를 즐겼으며, 그 가운데 충렬왕을 위해 특별히 지었다는 <쌍화점>처럼 음란한 것들이 있었다. 임금이나 그 주위의 인물들이 스스로 나서서 춤을 추며 광대처럼 놀기까지 했다. 조선 시대에 와서는 정재를 대폭 정리해 음란한 내용은 제거하고, 임금뿐만 아니라 지체 높은 사람이면 누구든지 자기는 움직이지 않고 보고 듣기만 하도록 했다. 임금이 마음 놓고 구경하면서 무료함을 달래려고 하면 소학지희를 하는 광대나 불러들여야 할 형편이었다.
천하디 천한 광대가 하는 허튼 수작을 임금이 듣고 웃는 것은 체모에 어긋난다. 그러나 임금이라고 항상 근엄한 자세를 유지하려고 하지 않고, 파격적인 심심풀이를 원했다. 광대가 하는 허튼 수작을 들으면서, 극과 극은 통하는 것을 경험하고 싶어했다. 그래도 도리를 갖추어야 했기에 임금이 소학지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민정을 파악하고 나라를 다스리는 데 도움이 되는 말을 듣기 위해서였다고 그 내역을 기록한 문헌마다 설명을 달았다.-502-50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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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zuaki 2009-02-26 2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벌귀족'과 '권문세족'과 '신진사대부'의 실체와 차별성에 대해 의심이 가기 시작한다. 앞의 둘은 일단 명칭부터가 부정적이잖아? 특히 '권문세족'에 대해서는 욕밖에 없고 말이지. 책에 나와 있는 주요 신진 사대부의 행적을 봐도 친원파였던 건 마찬가지이니, 친유교반불교라는 걸 빼면 차별성이 있는 것 같지 않다. 피튀기는 싸움에서 승리해서 조선을 세운 그악스러운 애들이 패배시킨 적들을 '권문세족'이라고 욕하면서 자기 집단에 정체성을 부여한 건 아닌지 하는 생각.
고려와 조선의 교체기를 보며 드는 다른 생각은 '제국의 변방'에 속한 사람들의 역사는 역시나 제국의 흥망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 고려 후기에 민족의식이 성장했다는 건, 제국의 약화로 인해 변방에 살던 고려인들의 영토확장 욕망이 노골화되었던 것의 다른 표현일지도 모른다. 같은 욕망이 명 제국의 몰락기인 조선 후기와 청 제국의 몰락기인 19세기말, 20세기 초에도 나타났었다는 것이 그 방증. 이제 다음은 아메리카 제국의 몰락기인가?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