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 지식 - 후기비판적 철학을 위하여, 대우학술총서 519
마이클 폴라니 지음, 표재명 외 옮김 / 아카넷 / 2001년 7월
품절


우리를 유쾌하게 하는 아름다움과 우리를 황홀하게 하는 심오함을 인정하지 않은 태 우리가 그러한 이론을 받아들이는 이유를 정확히 설명할 수는 없다.-40쪽

따라서 행위나 앎의 기예, 즉 가치 평가와 의미의 이해는 전체를 구성하는 개별자들의 부차적 인지로 우리 개인을 확장시키는 행위의 또다른 측면으로 보인다. 개인적 앎의 이러한 기본적 행위의 내재적 구조는 우리가 보편적 의도로 그것을 형태짓거나 인지하는 데 반드시 참여하게 한다. 이것은 지성행위의 원형이다.
개인적 지식을 단순히 주관적인 것으로부터 구제해내는 것은 완전한 구조에 대한 관여의 행위이다. 지적 관여는 선한 양심에 따라 내가 참이라 여기는 것의 항거할 수 없는 요구에 복종해서 나온, 책임이 따르는 결정이다. 그것은 내가 책임질 수 없으면서, 따라서 내 소명을 결정하는 개인적 상황 안에서 의무를 완수하려고 노력하는 희망의 행위이다. 이런 희망과 의무는 개인적 지식의 보편적 의도로 표현된다.-110쪽

경험의 관찰자나 조작자로서 우리는 경험의 지도를 받으며, 그것을 그 자체로 경험하지 못한 채 경험을 통과한다. 사물을 관찰하고 조작하게 되는 개념적 구조틀이 우리 자신과 사물 사이의 차폐막으로 현재하고 있기 때문에 사물에 대한 시각과 소리, 냄새와 촉감은 우리를 사물과 떨어져 있게 하는 이러한 차폐막을 통해 지속적으로 증발한다. 숙고는 그 차폐막을 해체해 경험을 통한 우리의 활동을 정지시키며 우리를 경험 속으로 직접 밀어 넣는다. 우리는 사물을 다루는 행위를 멈추고 그 속에 깊이 빠지게 된다. 숙고는 배후의 의도나 배후의 의미를 갖지 않는다. 숙고 내에서 우리는 사물 다루기를 멈추며 경험 그 자체를 위해 사물의 내적 성질에 몰입한다. 그리고 숙고에 몰입할 때 우리는 숙고의 대상들에서 비개인적 삶을 취한다. 한편이러한 대상 자체는 그것에 새로운 생생한, 그러나 아직은 꿈과 같은 실재를 제공하는 미래의 섬광에 의해 가득 채워진다. 그것은 무시간적이고, 정해진 공간적 자리도 없기 때문에 꿈과 같다. 그것은 객관적 실체가 아니다. (아래에 계속)-302쪽

(위에서 계속) 왜냐하면 만져질 수 있는 사물에 의해 미래의 확신을 예견하는 지적 지각의 초점이 아니라, 다만 사물이 눈에 현재하는 다양한 형태의 색깔있는 조각틀에 속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강력한 숙고의 비개인성은 숙고하는 것에 대한 그 사람의 완전한 참여에 있지, 관념적인 객관적 관찰의 경우가 그러하듯이 그것과 완전히 떨어져 있는 데에 있지 않다. 숙고의 비개인성이 자기 포기self-abandonment이기 때문에, 그것은 숙고자의 환상적 활동을 언급하는가, 또는 그의 인격의 침잠을 언급하는가에 따라 이기적이거나 이타적이라고 할 수 있다.-302쪽

우리는 유의미하다고 주장되는 익숙하지 않은 체계가 제시될 때 충격을 받는다. 대중이 그 의미를 발견하기 위해 새로운 구조틀을 받아들이도록 압력받게 될 때 그들의 당황은 분개로 바뀐다. 그들은 자신의 우수성의 기준을 경멸한 것에 대해 경멸하고, 화를 낼 만한 것처럼 보이는 것을 존경하도록 하는 데에 분노하게 된다.-308쪽

일반적으로 진리와 지적 가치에 대한 사랑은 이런 가치를 육성하는 사회에 대한 사랑으로 다시 나타날 것이며, 지적 기준에 대한 복종은 그 기준에 봉사하기 위해 문화적 의무를 수용하는 사회에 대한 참여를 함축하는 것으로 나타날 것이다.-313쪽

모든 기술은, 학습자가 신뢰하는 다른 사람에 의해 기술이 실행되는 방식을 지적으로 모방함으로써 학습된다. 언어를 아는 것도 암묵적 판단과 상술할 수 없는 솜씨의 실행을 통해 수행된 기술이다. 어린이가 자신의 성인 지도자로부터 말을 배우는 방식은 어린 포유동물과 어린 새가 자신들을 돌보아주고 보호하고 인도하는 나이 많은 동물들에 대해 보이는 모방적 반응과 유사하다. 말의 암묵적 공동작용인은 권위 있는 사람으로부터 그를 믿고 있는 제자로 진행되는 비분절된 의사소통을 통해 전달된다. 그리고 의사소통을 전달하는 말의 힘은 이러한 모방적 전이의 효율성에 의존한다.-318쪽

우리는 다시 한번 신념을 모든 지식의 원천으로서 인정해야만 한다. 암묵적 동의와 지적 정열, 하나의 관용어와 하나의 문화적 유산을 공유하기, 같은 생각을 가진 공동체에의 가입, 이런 것은 사물에 대한 우리의 주재권을 위해 의존하고 있는 사물의 본성에 대한 우리의 입장을 형태지어주는 추진력이다. 지성은 -비판적이거나 창조적인 지성일지라도- 그런 신용의 구조틀 밖에서는 작용할 수 없다.-407쪽

이해는 그 자체의 기준들에 의거해서 만족을 찾는 중심의 작용agency에 속해 있다. 왜냐하면 이해하는 중심의 지적 만족을 인정하지 않고서는, 이해는 정의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해의 의식적 작용의 상술 불가능성은 고정된 신경학적 메커니즘에 의거해서 이해를 설명할 수 없다는 사실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한 작용에 포함된 지적 관여는 성광과 실패를 구분할 수 없는 물리-화학적 평형상태의 측면에서의 이해에 대한 모든 표현을 배제한다. 이해와 이해에 수반하는 신체과정은 지적 옳음의 측면에 의해서만 결정될 수 있는 일종의 평형상태를 말한다. -604-605쪽

우리가 알고 있는 한, 인간 안에 구현된 우주의 작은 단편들은 가시계 안에 있는 사고와 책임감의 중심들을 뿐이다. 그렇다면 인간정신의 출현은 지금까지 세계의 깨어남에서 최종적 단계였다. 그리고 이전에 지나간 모든 것, 즉 삶과 믿음의 위험을 감행했던 무수한 중심의 노력은 경쟁적 노선을 따라, 이 시점까지 우리가 획득한 목표를 모두 추구해왔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 중심 모두는 우리와 유사하다. 왜냐하면 이 모든 중심은 -즉 우리 자신의 실존에 이르럿고, 그리고 그 중 많은 것이 소멸된 다른 노선들을 산출하고 훨씬 더 많은 다른 존재에 이르렀던- 궁극적 해방을 향한 동일한 노력에 종사한 것으로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모든 중심에 생각할 수 없는 완성을 향해 스스로 진행하는, 단명하고 제한된 모험의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이들 중심을 산출했던 우주적 영역을 그려볼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또한 기독교인이 신을 경배할 때 위치하고 있는 방식이라고 나는 믿는다.
(끝)-6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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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zuaki 2009-03-03 08: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용은 어렵지 번역은 엉망이지... 고생고생해서 읽었다. 중간부터는 각주는 다 건너뛰고, 모르는 건 포기하면서, 대학원 연구실에 나온 첫날부터 엎드려 잘 수는 없다는 생각으로 기계적으로 책장만 넘긴 부분도 많다. ㅋㅋ
<과학 혁명의 구조>에 영향을 준 과학철학서이지만, 교육과 관련해서도 시사하는 바가 있다. 인간이 어떻게 지식을 받아들이고 세계를 '이해'하는가와 관련해서, 인상적인 구절들을 정리해 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