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통사 2 (제4판) - 중세 후기문학
조동일 지음 / 지식산업사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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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색의 전은 <동문선>에 일곱 편이나 수록되어 있다. 이미 든 <정씨가전>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개인의 생애를 다룬 내용이다. <초계정현숙전>은 벼슬길에 올라 지방관장을 역임한 인물의 전이다. (중략) 나머지 다섯 편은 그리 대단치 않은 인물의 특이한 일생을 깊은 인상이 남게 다룬 공통점이 있어 연작이라고 할 수 있다. 제목을 <송씨전>, <오동전>, <박씨전>, <최씨전>, <백씨전>이라 했다. (중략)
자기는 닦은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해 크게 영달했으나, 그 다섯 사람은 모두 불운했다. 재능이 모자라고 글이 뒤떨어진 탓이 아니고, 성격이 세상에서 요구하는 바와 맞지 않거나 뜻하지 않게 일이 뒤틀렸을 따름이다. 일찍 죽거나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 공통적인 결말이다. 애통하게 여긴다는 말을 여기저기에 늘어놓았다. "아, 슬프구나"하는 소리를 자주 했다.
일사전을 지어 당시의 문풍을 비판하고자 했다고 할 수 있다. (중략) 격식을 잘 갖추어 과거에서 인정을 받는 시문을 지어서 영달을 하고 세상의 인정도 받는 것이 사실은 자랑스러울 바 없고 문학을 하는 참다운 자세와는 거리가 멀다는 생각을 나타냈다고 할 수 있다.-114-115쪽

가전의 출현은 함께 나타난 또 하나의 교술문학인 경기체가와 함께 살필 필요가 있다. 경기체가와 가전은 둘 다 사물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특별한 표현 방법을 갖추어 나타낸 전에 없던 비실용적인 문학가랠이다. 경기체가가 서정적 교술이고, 가전은 서사적 교술이다. 둘 다 특별한 표현을 갖추면서 실용적인 용도는 없어 사물에 대한 관심의 세계관적 의의를 강조했다. 시는 서정시만이었던 중세전기를 끝내고, 경기체가의 출현으로 교술시와 서정시가 공존하는 중세후기로 들어설 때 산문의 영역에서는 가전이 나타났다.-120-121쪽

고려전기의 상층문화의 위엄이 고려후기에는 크게 흔들렸다. 제사보다는 잔치하고 노는 데 더 많은 관심을 가져, 아악은 돌보지 않고 당악과 속악을 즐겨 받아들이고 자주 공연했다. 변화의 이유는 국정 담당자의 성격이 달라진 데서 찾을 수 있다. 고려 전기의 문벌귀족은 유교 이념을 구현해 상층문화를 규범화하려고 노력했으나, 무신란과 몽고침공을 겪은 고려후기에는 사정이 달라졌다. 국정을 장악한 권문세족이라는 무리는 견문이 모자라고 의식 수준이 낮아 지배이념을 가다듬는 임무의 사명을 저버리고 향락에 탐닉했으며 국왕이 그 주동자 노릇을 했다. -128쪽

최해(1287-1340)는 안축이 보여준 것과 같은 과정을 거쳐 득의에 찬 진출을 하다가 좌절했다. 원나라 과거에 급제해 벼슬하다가 곧 귀국하고, 고려의 관직도 오래 지니지 못하고 물러나 불우하게 지냈다. 중략) 스스로 패배자가 되는 길을 택해 지위 하락을 자초하고, 비참하게 된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는 문학을 했다. 어째서 그랬던지 당대 사람들이 말하고, 자기 스스로 해명했다.
이곡이 쓴 묘지명에는 "재주가 기이하고 뜻이 높아 시대에 용납되지 않았다"고 했다. 이재현이 지은 시에서는 "흐트러진 마음씨로 조롱과 해학을 일삼고, 너그럽고 넉넉한 태도로 미친 짓을 한다"고 했다. 후대의 공식적인 평가를 집약한 <고려사> 열전에서는 "문안드리기를 좋아하지 않고, 방탕한 자세로 말을 함부로 했다"고 하고, "재주를 믿고 무슨 일에든지 오만하게 굴었다"고 했다. 자기 스스로 술회한 말에서도, 남의 나쁜 점을 말하는 버릇을 고치지 못해서 배척당하고 말았다고 했다.-212쪽

신숙주(1417-1475)는 사육신이 된 사람들과 가까운 관계였으나, 세조 정권 수립에 공을 세워 최고의 지위와 명예를 누리면서 절개를 굽혔다고 나무라는 말을 잠재울 만한 활동을 했다. 외교 및 국방 문제 전문가의 식견을 갖추고, 중국과 일본을 왕래했다. 일본과 유구의 사정을 소개한 <해동제국기>가 큰 업적이다. 바다 동쪽에 여러 섬이 별들처럼 분포되어 있다고 하고, 그런 곳은 풍속이 우리와 다른 줄 알아야 한다고 했다. 칼 쓰고 배 타는 데 익숙한 왜인들을 배척하려고 하지 말고 잘 지내야 한다고 했다.
그 책 서두에서 "교린(交隣)을 하면서 맞아가고 찾아가는 관계를 가질 때에는 특이한 '속'(俗)을 이해해 그 '정'(情)을 안 다음에야 그 '예'(禮)를 다해야 하며, 그 예를 다한 다음에라야 그 '심'(心)을 다할 수 있다"고 했다.(중략)
신숙주는 들어앉아 있으면서 명분이나 찾지 않고 나라의 긴요한 일을 맡아 나선 사람이었다. 외교와 국방의 임무를 맡아 수고하면서 시를 지었다. (중략) 국경에서 겪는 시련과 긴장을 의지로 감당하면서 크게 보고 깊이 생각해야 했다. 선비가 할 일이 어디 있고, 문학의 임무는 무엇인지 다시 묻게 한다.-364-365쪽

권제(1387-1445)는 <동국세년가>에서 이승휴의 <제왕운기>가 보여주던 자주 노선을 계승하고자 했다. 1432년(세종14)에 이루어진 <세종실록지리지>평양조에서는 단군으로부터 고구려 건국에 이르기까지의 신이한 역사를 한 맥락으로 연결시킨 <단군고기>를 길게 인용했다. 권제의 아들인 권람(1416-1465)은 할아버지 권근의 시를 주석한 <응제시주>에서, 도가의 비기류까지 동원해 압록강 이북 요동지방까지에서 전개된 상고사를 되찾고자 했다.-465-466쪽

소설은 설화와 구별되는 서사문학이다. 신화, 전설, 민담은 문학이 시작될 때부터 있었지만, 소설은 자아와 세계의 대결이 심각하게 되었을 때 출현했다. 자아와 세계가 신화에서처럼 동질적이지 않고, 전설이나 민담에서처럼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상호우위를 가지고 대결하는 것이 소설의 특징이다. 이것은 우리 소설에서 추출되어 세계 전역의 소설에서 널리 타당성을 가지는 일반론이다. 세계 여러 곳에 소설의 선행형태나 유사형태는 다양하게 존재했다. 중국에 志怪나 傳奇가, 일본에 物語가 있었듯이, 우리에게도 傳奇가 있었던 것이 당연한 일이다. 그것들은 모두 문학적 수식을 갖추어 작품으로 평가될 수 있게 정착시킨 설화이다. 자아와 세계의 대결을 상호우위에 입각해서 진행되는 긴박한 전개와 심각한 주제는 갖추지 않았다. 전기는 전기라고 하면 그만이고, 전기소설이라는 용어는 필요하지 않다.
중국에서는 明淸小設에서, 일본에서는 江戶시대의 戱作에서 소설이 소설다운 모습을 드러낸 것이, 조선후기에 소설시대가 시작된 우리문학사의 전개와 같다. 온 세계 다른 어느 곳에서도 소설은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기문학으로 출현하고 성장했다.-487-488쪽

고려후기의 임금은 당악정재와 함께 향악정재를 즐겼으며, 그 가운데 충렬왕을 위해 특별히 지었다는 <쌍화점>처럼 음란한 것들이 있었다. 임금이나 그 주위의 인물들이 스스로 나서서 춤을 추며 광대처럼 놀기까지 했다. 조선 시대에 와서는 정재를 대폭 정리해 음란한 내용은 제거하고, 임금뿐만 아니라 지체 높은 사람이면 누구든지 자기는 움직이지 않고 보고 듣기만 하도록 했다. 임금이 마음 놓고 구경하면서 무료함을 달래려고 하면 소학지희를 하는 광대나 불러들여야 할 형편이었다.
천하디 천한 광대가 하는 허튼 수작을 임금이 듣고 웃는 것은 체모에 어긋난다. 그러나 임금이라고 항상 근엄한 자세를 유지하려고 하지 않고, 파격적인 심심풀이를 원했다. 광대가 하는 허튼 수작을 들으면서, 극과 극은 통하는 것을 경험하고 싶어했다. 그래도 도리를 갖추어야 했기에 임금이 소학지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민정을 파악하고 나라를 다스리는 데 도움이 되는 말을 듣기 위해서였다고 그 내역을 기록한 문헌마다 설명을 달았다.-502-50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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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zuaki 2009-02-26 2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벌귀족'과 '권문세족'과 '신진사대부'의 실체와 차별성에 대해 의심이 가기 시작한다. 앞의 둘은 일단 명칭부터가 부정적이잖아? 특히 '권문세족'에 대해서는 욕밖에 없고 말이지. 책에 나와 있는 주요 신진 사대부의 행적을 봐도 친원파였던 건 마찬가지이니, 친유교반불교라는 걸 빼면 차별성이 있는 것 같지 않다. 피튀기는 싸움에서 승리해서 조선을 세운 그악스러운 애들이 패배시킨 적들을 '권문세족'이라고 욕하면서 자기 집단에 정체성을 부여한 건 아닌지 하는 생각.
고려와 조선의 교체기를 보며 드는 다른 생각은 '제국의 변방'에 속한 사람들의 역사는 역시나 제국의 흥망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 고려 후기에 민족의식이 성장했다는 건, 제국의 약화로 인해 변방에 살던 고려인들의 영토확장 욕망이 노골화되었던 것의 다른 표현일지도 모른다. 같은 욕망이 명 제국의 몰락기인 조선 후기와 청 제국의 몰락기인 19세기말, 20세기 초에도 나타났었다는 것이 그 방증. 이제 다음은 아메리카 제국의 몰락기인가?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