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통사 3 (제4판) -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기문학 제1기
조동일 지음 / 지식산업사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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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1582-1632)은 유성룡의 아들이며 전란이 일어났을 때 11세였다. 아버지는 임금을 따라야 해서, 가족을 이끌고 피란하는 일은 백부가 맡았다. 함께 가다가 다 죽으면 멸문을 당한다고 해서 다른 사람에게 맡겨졌다가, 매형과 누나를 만나 그 일행이 되었다. 피란길이 경기도, 강원도, 평안도, 황해도로 이어지면서 겪었던 일을 만년에 회고한 <임진록>을 국문으로 썼다. 아버지 유성룡은 <징비록>을 한문으로 지어 나라를 근심했는데, 아들 유진은 피란민의 무리 가운데서 어린 나이로 겪은 바를 국문으로 기록하면서 세태를 있는 그대로 전했다.
통치체제가 무너진 것 못지않게 심각한 사태가 신뢰의 상실이라고 했다. 왜적을 만나면 몸을 숨겨 살아날 수 있으나, 인심이 극도로 야박해져서 속이고 해치고 고통은 모면할 길이 없었다. 가족이 있는 곳을 알고 찾아가려 했는데, 자기 혼자 피란하고자 왜적이 들이닥쳤다고 헛소문을 내는 사람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양반에 대한 반감이 극도에 이르러 신분을 숨겨야 할 형편인데, 피란민을 죽여 왜적일 친 것을 공로로 삼은 양반도 있었다.-19-20쪽

병자호란 때에 있었던 일을 중요한 임무를 맡은 사람들이 기록한 저작이 여럿 있다. (중략)
인조의 세 아들 소현세자, 봉림대군, 인평대군이 볼모가 되어 사태가 심각했다. 수행한 관원 가운데 누가 세자의 행적을 기록한 <심양일기>를 남겼으나 비통한 사연을 겉으로 드러낼 수 없었다. 청나라가 은혜를 베푼 것처럼 말하면서 분통터질 일을 담담하게 기술해야 했다. (중략)
정6품직의 관원 석지형(1610-?)이 남긴 <남한해위록>에는 하층의 불신이 심각하게 나타나 있다. 군사들이 적을 상대로 해서는 용맹스럽게 싸우다가도 조정 관원들을 보면 주저앉고 싶어한다고 했다. 난리가 끝나면 10년 동안 부역과 세금을 면제해주겠다고 해도 위급해서 하는 말이니 믿지 못하겠다더라고 했다.
종9품의 말직에 종사하던 남업(1592-1671)의 <병자일기>에서는 반란을 증언했다. 군사들이 들고 일어나, 고담준론만 일삼는 문사들이 적병을 막도록 하라고 하면서 임금을 만나자고 들이닥쳤다. 승지가 칼을 뽑자, 비웃으며 "이런 인재를 적진에 보내면 모든 일이 잘 되겠다."고 하더라고 했다.-26-28쪽

김충선(金忠善 1571-1642)은 임진왜란에 종군한 왜장이었는데 귀화해서 공을 세우고 사대부의 신분을 얻었다. 만년에 은퇴해서 생애를 회고하는 가사 <모하당술회(慕夏堂述懷)>를 지었다. 문명국인 조선을 동경해 정착하게 된 경위와 그 뒤의 활동을 자랑스럽게 술회하고 유가의 도의를 자손대대로 지키겠다고 했다.-39쪽

병자호란을 다룬 가사 <병자난리가>가 1711년(속종37)에 필사된 것으로 보이는 <해동유요>에 실려 있다. 작자는 알 수 없으나 작품 내용을 보면 병자호란을 직접 겪었으리라고 생각되고 강화도 사람인 듯하다. 난리가 닥치기까지의 경과, 피란하면서 겪은 참상, 패전의 책임 추궁, 인조의 항복과 그 뒤의 사태에 대한 탄식으로 작품을 이으면서, 국정을 담당한 관원들을 줄곧 비판했다. (중략)
개인의 고생과 나라의 시련을 함께 인식하고, 임금과 자기가 다르지 않다고 했다. 피란지에서조차 반성을 하지 않고 향락을 일삼는 무책임한 관원들은 "죄상 곧 헤어내면 다 버힐 놈이로다"하며 분개했다. "어와 가소롭다. 의주부윤 가소롭다"로 시작되는 대목에서는 임경업마저 일을 그르쳤다고 나무랐다.-42-43쪽

유몽인(1559-1623)은 일찍 벼슬길에 올라 임진왜란을 겪는 동안에 명나라 관원을 상대하는 외교적인 임무를 맡고 난 후에는 여러 차례 어사가 되어 민정을 살폈다. 광해군 시절에는 북인정권에 가담했다가 인목대비 유폐에 찬성하지 않아 배척되자 은거하는 길을 택했다. 위에서 내리는 명령에 따라 백성의 물자를 긁어 올리는 것은 선비로서 차마 못할 짓이니 자기는 시골에 가서 문장 공부를 하면서 옛사람을 상대로 하고 후세에 남길 업적을 쌓겠다고 했다.
그러고 있을 때 대제학에 추천되자, 굶주린 아이들이 코푼 덩어리를 떡인 줄 알고 다투는 것과 같은 짓은 하지 않겠다고 했다. 대제학이라면 한문학의 규범을 자랑하는 문장으로 나라를 빛내는 자리이기에 문신이라면 누구나 동경할 만한데 그런 반응을 보인 것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문장 수련이 권신들을 위해 들러리 노릇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음을 다짐한 반응이었다.
(아리에 계속)-51-52쪽

(위에서 계속)
사림으로 자처하며 강호의 즐거움을 찾지 않는 데 만족하지 않았다. 현실인식 때문에 괴로워하고 글마다 새로운 표현을 하고자 했다. 기발한 상상력을 갖춘 우언을 써서 도가적인 기풍을 보여주고 방외인의 취향을 갖추었다. 어사 노릇을 할 때 얻어들은 이야기를 살려 <어우야담>을 엮은 데에도 반발이 드러난다.

滿城花柳擁春遊
玉手停盃唱柏舟
壯士忽持長劍走
醉中當斫老奸頭

성 가득한 꽃과 버들 봄 빛 에워 하늘거리고
옥수로 잔을 멈추고서 백주 노래를 부르는구나
장사가 홀연히 장검을 잡고서 달려가서는
취한 김에 마땅히 늙은 간신의 목을 찍었으면

권력을 잡고 부귀를 누리는 자들에 대한 반감을 이런 시를 지어 나타냈다. "화류"는 꽃과 버들 자체이기도 하고 기생이기도 하다. 호화로움의 극치를 자랑하면서 벌이는 놀이는 국권 농락 행위이기도 하다. 자기도 벼슬한 사람이었는데 권신들의 목을 장검으로 찍는 준엄한 심판을 하고자 했으니 시련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어느 당파하고만 불화한 것은 아니다. 인조반정 직후 서인정권이 광해군을 위해 충성을 한다는 이유를 내세워 처형하고 말았다.-51-52쪽

권필(1569-1612)은 일찍부터 대단한 재능을 보였으나 과거를 통해 진출하지 못하고 야인으로 일생을 보내는 동안에 험난한 세태와 철저히 부딪치고 시인으로서의 사명을 깊이 자각했다. 우언 짓기를 좋아해 <주사장인전>에서는 술집 주인 노릇을 하는 인물이 이름나나 유학자를 나무라게 하고, <곽삭전>이라는 가전에서는 게를 의인화해서 은거하는 선비의 자세를 그렸다. <주생전>을 지어 소설 개척에 기여하기도 했다.
자기 문학의 본령으로 삼은 한시를 혁신해서 자기 뜻을 펴는 데는 더욱 힘썼다. (중략) <술회>라는 데서는 자기 생애를 되돌아보면서 둥근 것과 모난 것이 원래 맞지 않아 세상과는 서로 어긋나게 마련이라고 했다. (중략)
(아래에 계속)
-56-58쪽

(위에서 계속)
독자적인 시 세계를 더 잘 보여주는 작품을 든다면 <충주석(忠州石)>이 있다. (중략) 그 작품보다 구상이나 표현이 월등하다. 세도가의 횡포는 자연을 파손하고 백성들을 수고롭게 할 뿐만 아니라, 신도비에다 새겨놓은 허위에 찬 문구로 후대 사람들까지 속이려고 하는 데 이른다고 야유하며 비판했다.
중간에다 신도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말을 간추려 놓아, 칭송하고 꾸미는 문학이 얼마나 허망한지 보여주었다. 정통 한문학이 그런 짓이나 일삼으면서 위세를 자랑하니 그대로 둘 수 없었다. 돌도 입이 있으면 할 것 같은 말을 자기가 맡아 하층민의 반발까지 대변하고자 했다. 풍자시가 빌미가 되어 귀양 가다가 죽은 것이 예상된 결말이라고 할 수 있다. 권필은 시를 위해 순절한 시인이다.-56-58쪽

중국소설 <설인귀동정>은 고구려 침략 길에 나섰던 당나라 장수를 주인공으로 삼아 전개한 도술적인 군담이고 아들, 손자 대까지 다룬 속편은 전혀 허구적인 작품이다. <설인귀전>이라는 그 번역본이 나와 인기를 끌었고, 속편까지 번역되었다. 번역과정에서 원작과는 상당한 거리가 생겼으며 이본에 따라서 내용이 달라졌다. 도술로 전투를 하는 방식이라든가 여장군이 남장을 하고 활약을 한다는 설정 같은 것들이 흥미를 끌어 상당한 인기를 누렸다.-120쪽

아주 파격적인 주장을 거리낌 없이 내놓기 위해서는 만필(漫筆)을 쓰는 것이 유리했다. 만필이란 대단치 않은 소리를 가볍게 늘어놓는 글이어서 평가할 만한 의의가 없다고 하는 점을 이용해 격식을 차린 글에서라면 허용될 수 없는 이단적인 발언을 하는 데 이용했다. 그런 전통이 만담으로, 다시 만화로 이어졌다. 명칭에 '만'자가 들어가 있는 세 가지 표현형태가 시대에 따라 교체되면서 이면의 문학활동을 자유롭게 하는 구실을 했다.
장유는 한 시대 문학의 규범을 마련했으면서, <계곡만필>이라는 것을 따로 저술했다. 성리학의 횡포를 나무라면서 양명학을 내세우는 용기를 가지고 문학이 그것대로의 자율성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해, 만필을 거점으로 삼는 반역의 본보기를 보여주었다. 김만중의 경우에도 <서포집>과 <서포만필>이 서로 달랐다. <서포만필>에서는 만필에 허용되는 자유를 적극 활용해, 관념의 허위를 넘어서는 새로운 사고의 방향을 제시하고, 국문문학을 옹호하는 주자을 펴기도 했다. 홍만종의 <순오지> 또한 만필이어서, 도가사상 취향을 짙게 나타내고, 국문문학에 대한 이해를 구체화할 수 있었다.-133-134쪽

공식적인 가치 서열에 따라 정해진 등급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판소리광대는 위항시인이나 전문가객에 비해서 저급한 위치에 있었다. 위항시인이 가장 높고, 전문가객이 그 다음이며, 판소리광대를 최하위로 하는 지체 구분이 분명했다. 중인, 서리, 천인의 위계가 확실할 뿐만 아니라 한시, 시조, 판소리에도 존귀하고 미천한 등급이 있었다. (중략)
그러나 수용층의 확대로 생기는 인기의 순위는 그것과는 반대였다. 위항시인의 한시 독자층은 작자층과 거의 일치하는 정도에 그쳤다. 전문가객은 공연, 창작, 자료 집성 등으로 시조에 관한 활동을 다양하게 벌여 수용자를 넓혀나갔다. 판소리광대는 천민에서 국왕에까지 이르는 넓은 범위의 수용층과 관련을 가지고 다양한 관심사와 주장을 한 자리에 놓고 논란을 벌였다.
존귀하고 미천한 것의 구분은 중세의 가치관이었다. 수용층이 늘어나 인기가 확대되는 것은 근대로 나아가는 변화였다.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기의 특징인 그 둘의 공존과 대립이 근대가 승리하는 방향으로 귀결되게 마련이었다.-195-196쪽

일본의 경우에는 소설을 출한할 때 작가 이름을 표지에다 내놓아 판매 부수를 늘리려고 했다. 중국에서 소설을 쓴 사람들은 기이한 가명을 써서 관심을 끌면서 실제의 행적은 감추었다. 일본소설은 출판인소설이고 중국소설은 작가소설이라면 한국소설은 독자소설이었다. 소설의 독자가 일본에서는 남성이고, 중국에서는 남성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하고, 한국에서는 여성이었다. 한국소설은 여서을 위한 독자소설인 것이 중국이나 일본의 경우와 달랐다.
(인용자주-진짜 그런지 의심스러움. 앞으로 확인해 보겠음)-197쪽

홍대용과 박지원은 유력한 가문에서 태어났으면서 과거를 보는 데 소용되는 공부를 하지 않았고 나중에 천거를 받아 말단 직위에 나아가 지방수령을 했을 따름이다. (중략) 홍대용은 35세때 숙부를 따라, 박지원은 43세 때에 삼종형을 따라 사신 수행원의 자격으로 청나라에 가서 견문을 넓혔다. 그곳 학자들과 문답하면서 스스로 생각한 바가 사실로 입증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 경과를 기록한 홍대용의 <담헌연기>와 박지원의 <열하일기>는 사상에서나 문학에서나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그 점은 서양 전래의 새로운 문물과 제대로 접촉하지도 못하고서 천주교를 받아들였다는 죄목으로 박해를 받기 일쑤였던 남인계 학자들의 불운과 좋은 대조를 이루었다. (중략) 박지원의 문체가 규범을 어지럽힌다고 정조가 간섭하고 바로잡으려 한 파동이 정치적인 박해를 몰고 오지는 않은 것도 노론이 누리고 있던 기득권 덕분이다.
(아래에 계속)
-209-210쪽

(위에서 계속)
노론에 속하는 조건은 탄압을 피하고 어느 정도의 언론자유를 누리면서 새로운 노선을 개척하는 데 유리하게 작용했다. 사상의 근본까지 재검토하는 작업은 노론 쪽에서만 할 수 있었다. 남인은 말을 조금 바뿌는 것도 두렵게 여길 때 노론 선각자들은 이기철학에 관한 논란이 새삼스럽게 심각해져서 혁신이 불가피하게 된 상황을 내부에서 경험하고 새로운 대안을 내놓는 작업을 과감하게 했다.-209-210쪽

유득공(1748-1807)은 관심의 폭을 넓히고 시의 소재를 확대했다. 잃어버린 역사를 되찾는 것이 무엇보다도 긴요한 과제라고 생각해서 <발해고>를 집필했다. (중략) <이십일도회고시>에서 역사의식 전환 작업을 더욱 진척시켰다. 단군조선에서 고려까지의 역대 왕조의 도읍 스물 한 곳을 찾아 43수의 시를 지으면서 감문, 우산, 탐라까지 들었다. 역사를 승리자 위주로 서술해온 잘못을 시정하고, 잊혀져 가는 곁가지까지 두루 찾아내 평가해야 한다고 했다. 우리 역사를 단일체가 아닌 다원체로 이해하는 것이 새로운 과제로 등장한 지금의 시기에 적극 평가해야 할 전례를 남겼다.-220쪽

김삿갓 또는 김립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김병연(1801-1863)은 희작시로 일생을 보낸 사람이다. (중략) 박해가 심하고 심사가 뒤틀리는 일이 누적되면 상대방을 욕보이는 재치를 발휘했다. 서당 훈장은 동정 받아야 할 사람이다. 서당 훈장의 딱한 사정을 제대로 된 시 여려 편에서 다루었다. 그런데 얼마나 아니꼬운 일이 있었던지, 다음과 같이 읊은 육담풍월도 있다.

書堂乃早知
房中皆尊物
生徒諸未十
先生來不謁-281-282쪽

바다에서 폭풍을 만나 배가 표류하면 미지의 나라에 이를 수 있었다. 이지항이라는 군관이 그런 경험을 한 기록을 남겼다. 1756년(영조32)에 부산에서 영해로 가다가 폭풍을 만나 멀리 北海道까지 밀려갔다. 거기서 아이누인의 구조를 받는 놀라운 경험을 하고 일본 여러 곳을 거쳐 다음해에 돌아온 경위를 <표주록>을 써서 알렸다.
제주도 선비 장한철(1744-?)은 1770년(영조46)에 과거 길에 올랐다가 배가 남쪽으로 표류해서 流球까지 갔다. 그 내력을 다룬 <표해록>은 더욱 복잡한 모험담의 연속이다. 목숨을 겨우 건지자 왜구의 내습을 받았으며, 안남(安南) 상인들에게 구출되어 제주도 근처까지 이르렀을 때, 과거에 안남 세자가 제주도에서 피살되었던 일 때문에 죽을 곤욕을 치러야만 했다. 그런 사건을 박진감 있게 다루면서 제주도 남쪽의 대해가 국제간의 교역과 쟁패가 벌어지는 안마당이라는 사실을 발견하는 충격을 전했다.-438쪽

국문본과 뒤섞이지 않고 문집이나 야담집에 수록되어 있는 한문소설은 단편이다. 국문장편 소설과 한문단편이 여러모로 대조되는 특성을 지니면서 소설 발전에서 각기 그 나름대로 소중한 기여를 했다. 소설의 문체와 수법을 발전시키는 작업은 국문장편이 맡아서 하고, 현실인식의 주제를 가다듬는 데서는 한문단편이 앞서 나갔다.-496-497쪽

영웅소설이 상층의 문학이어서 보수적인 사고형태를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몰락한 사대부가 지위 회복을 염원하는 의식을 표현한 작품이라고 하는 것도 설득력이 부족하다. 계급의식이 아직 명확하지 않은 단계의 시민이 작품의 창작, 전달, 수용을 주도하면서 지배이념을 받아들여 통속화하고 흥밋거리로 만들었다고 하는 편이 더욱 타당하다. 몰락한 사대부도 작가로 참여했을 수 있으나, 자기 나름대로의 주장을 펴려고 하지 않고 유형화된 전개와 표현을 그대로 따르는 직업의식을 보여주었다. 직업작가 노릇을 하면서 시민화한 사대부가 독자적인 발언을 포기하고 시민의 귀족화에 기여했다고 할 수 있다.-511쪽

<부장양문록>이라는 것은 5책의 장편으로 발전했다. 상층소설의 사실성과 진지성을 갖추어, 여성 중심의 사고가 한때의 공상에 그치지 않고 설득력을 가지게 했다. 여장군으로 활약하던 주인공이 아흔 살의 고령이 되고, 남성적 삶의 상징인 칼을 장남에게 전해주었다. "장부의 마음으로 몸이 여자 되어 천만 한"을 풀고자 한 일생을 회고하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여성 주인공의 영웅소설은 대부분 여성의 작품이라고 생각되지만 분명한 증거는 없다. 그런데 <방한림전>은 "민한림 부인 방씨작"이라고 작품 속에 기록되어 있다. 방관주라고 하는 여성 주인공이 남장을 하고 벼슬길에 올라 방한림이 되고, 장수의 임무를 맡고 전장에 나가 싸웠다고 하는 사건을 다룬 작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전개하고서, 다른 여성을 아내로 맞이했다고 하는 특이한 내용을 갖추었다. 아내가 된 여성은 방한림이 여성인 줄 알고서, 둘이 함께 여성 해방을 이룩하기로 했다고 했다.-523쪽

사당패는 안성 청룡사 같은 절간 근처를 집결지로 삼고, 꼭두각시놀음 마지막 대목에서 절을 짓고 불교에 귀의하라고 하는 장면을 연출하는 것을 보면, 사원에서 밀려난 잡승에서 유래한 것 같다.
조선후기에 사당패가 아주 많아졌다. 놀이를 하는 것으로는 살 수 없어, 도적의 무리에 들어가기도 하고, 걸식이나 매음까지 햏ㅆ다. 사당이라고 부른 여자들은 물론, 남사당이라고 일컬어진 남자들까지도 남색을 팔았다. 어려운 형편에서 천대와 모멸을 견디면서 자기네들끼리 집단을 이루어 기량을 연마하고, 사방으로 돌아다니면서 아주 다채로운 놀이를 벌여 민속예술의 발전을 위해서 커다란 기여를 했다.
사당패 또는 남사당패의 놀이 종목에는 우선 노래와 춤이 들어가고, 풍물이라는 농악, 버나라는 대접돌리기, 살판이라는 땅재주, 어름이라는 줄타기, 덧뵈기라는 탈춤, 덜미라는 꼭두각시놀음, 그리고 발탈이 포함되었다. 구경꾼을 모을 만한 종목은 두루 구비했다고 할 수 있으며, 다른 집단의 놀이를 가져온 것도 적지 않다.-60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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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zuaki 2009-03-01 14: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3권 읽으면서 비로소 저자의 무서움을 깨달았다. 이 사람, 여기 적어 놓은 작품들 전부 읽은 거야?!!
특히 조선 후기 대장편 소설들을 언급하면서 흥미로운 내용이라느니 하고 평하는 걸 보고 기절할 뻔했다. 나도 남들한테 무슨 책 재미있다고 했다가 "그게 어디가 재밌어요?"라는 소리 들어봤지만 이 사람에 비하면 발끝에도 미치지 못한다. 도대체 그게 어디가 재밌냐고...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