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주의란 무엇인가
백낙청 지음 / 창비 / 1990년 1월
절판


Hans Kohn "The Idea of Nationalism" (1944)

민족주의는 그 복합적인 성격을 형성함에 있어 인간의 가장 오래되고 원시적인 감정들을 이용하여 성장해왔다. 그것은 사회적 집단을 형성하는 중요한 요소로서 역사를 통틀어 발견되는 감정들이다. 인간에게는 자기의 출생지나 어린 시절 자라던 곳, 그 주변 지역과 기후, 구름과 골짜기와 강과 수풀의 윤곽을 사랑하는 경향을 타고난다. (중략) 인간은 자기 자신의 언어를 자기가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언어로 특히 좋아하고 그 안에서 마음 편함을 느끼는데 이것은 쉽사리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그는 자기 고장의 관습과 음식을 낯선 지방의 그것보다도 더 좋아하는데, 낯선 음식은 그로서는 알지도 못할뿐더러 소화도 잘 안될 것같이 보이기까지 한다. 여행을 하다가도 자기 의자와 자기 식탁으로 되돌아오면 안도감이 생기고 다시 집에 돌아왔다는 기쁨에 기분이 양양해지며 외국에 머물면서 외국 사람들과 접촉하던 데서 생기는 긴장감을 벗어나게 된다.
(아래에 계속)
-18-20쪽

(위에서 계속)
그러니 인간이 제고장의 특징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그 우월성을 쉽사리 믿어버리는 것은 별로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러한 특징이 자기 같은 문명인들이 편하게 느낄 수 있는 유일한 것처럼 보이는 만큼 그것이 인간에게 적합한 유일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다른 한편 낯설고 또한 낯설기 때문에 위협적인 것으로 보이는 이방인 및 이국 관습과의 접촉은 모든 낯선 것에 대한 불신감을 일으킨다. (중략)
이러한 감정은 항상 있어 왔다. 그러나 그것은 민족주의를 형성하지 않는다. 그것은 예컨대 영토, 언어, 동일한 혈통같이 우리가 민족주의에서도 발견하는 특정의 사실들과 상응하는 것이다. 그러나 민족주의에서는 그러한 감정들이 전적으로 변모되어 새롭고 다른 감정을 띠게 되고 보다 광범한 맥락 속에 넣어진다. 그것은 민족주의를 구성하는 자연스러운 요소들이지만 민족주의는 자연적인 현상도 아니고 '영원한' 혹은 '자연적인' 법칙의 산물도 아니다. 그것은 어느 역사 단계에서 지적, 사회적 요인의 성장의 산물이다.-18-20쪽

애국심의 핵심으로 간주되는 향토에 대한 이러한 사랑은 '자연적인' 현상이 아니라 역사적, 지적 발전의 인위적인 산물이다. 인간이 '자연적'으로 사랑하는 향토란 자기의 고향 마을이나 계곡 혹은 도시이며, 그곳의 모든 세부 사정을 잣힌이 구체적으로 잘 알고 개인적인 추억이 풍부하며 대개의 경우 평생토록 자기의 생활을 영위해온 조그마한 지역인 것이다. 우리가 오늘날 한 민족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사는 영토의 전부는 -이것은 매우 다양한 풍경과 기후를 지닌 경우가 많거니와- 과거에는 보통 사람에게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고 교육이나 여행에 의해서만 알려질 수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교육과 여행은 민족주의 시대 이전에는 극소수에게 한정된 것이었다. 그러한 시대에 살았던 볼떼르는 "조국이라는 것이 커지면 커질수록 그것에 대한 우리의 사랑은 점점 더 작아진다. 왜냐하면 남하고 나눠 가지는 사랑은 약해지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미처 알지도 못할 만큼 수가 많은 가족을 뜨겁게 사랑하기란 불가능한 것이다."라고 말했다.-22쪽

특정 시대에는 한 민족의 가장 본질적인 특성으로 생각되던 것들도 불과 수십년 사이에 변하는 예를 볼 수 있다. 18세기 초 영국인들은 혁명과 변화의 기질이 가장 강한 국민으로 생각되었고 반면 프랑스인들은 가장 견실하고 신경이 무딘 국민으로 보였다. 그때 볼떼르는 "프랑스 사람들은 영국을 통치하는 일은 영국을 에워싸고 있는 바다보다 더 험난하다고 생각하는데, 시실이 정말 그렇다"라고 썼다. 그러나 그로부터 백년 뒤에는 영국인과 프랑스인에 대한 견해가 정반대로 바뀌게 되었다. (중략) 독일 민족에 대한 견해에도 이와 비슷한 변화가 일어났다. 백 년 전의 그들은 대단히 사랑스럽고 비현실적인 민족으로서 형이상학과 음악과 시적인 재능이 있는 반면 근대 산업과 사업에는 적합하지 못하다고 생각되었다. (중략) 민족적 집단의 특성에 관한 관찰자들의 판단은 그때그때의 상황의 정치적 요구와 관찰자들의 정서적 태도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착색되기도 했다. (중략) 한 민족을 형성하는 데는 극도의 다양한 인간들이 개재하며, 한 민족의 수명이 존속되는 동안 극도로 다양한 영향들이 그 민족에 행사되면서 그 민족을 형성하고 변형하는 것이다.-24-26쪽

비록 민족이 생겨난다 하더라도 보다 크고 새로운 민족에 흡수되어 다시 사라질 수도 있다. 민족은 역사의 살아있는 힘의 산물이고 그렇기 때문에 항상 변동하는 것이며 결코 고정되어 있지 않다. 민족은 그 기원이 대단히 최근인 집단이고 따라서 극히 복잡한 집단이다. 그것은 정확한 정의를 내릴 수가 없다. 그것은 역사적 정치적 개념이요, nation이라든가 nationality라는 낱말은 그 의미가 무척 많은 변화를 겪었다. 단지 최근의 역사에 와서야 인간은 민족(nationality)을 자기의 정치적, 문화적 활동 생활의 중심으로 간주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민족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을 절대적인 것, 선험적인 객체, 모든 정치적, 문화적 생활의 원천으로 생각하는 것은 큰 잘못이며, 이러한 잘못이야말로 현대의 온갖 극단적 사태들의 대부분을 낳은 발단인 것이다.-29-30쪽

민족의 전능성 앞에서 인류는 하나의 요원한 관념이요 고동치는 붉은 피가 결여된 창백한 이론이나 시인의 꿈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사실이 그렇기도 하다. 그러나 역사상의 어떤 시점에서는 프랑스민족이라거나 독일민족이라는 것도 요원한 관념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었다. 역사의 온갖 힘들이 장기간의 거대한 투쟁과 격동을 통해 이들 관념에 생명을 부여한 것이다. (중략) 이제 민족주의는 정치적으로나 정서적으로나 새로운 상황을 감당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한때 그것은 개인의 자유와 행복을 증진시켰다. 그런데 이제는 그것들을 침해하며, 더 이상 정당화시킬 수 없는 것으로 보이는 자신의 존재를 지속시키는 일을 개인의 자유나 행복에 앞세우고 있다.-42-43쪽

사납고 그칠 줄 모르는 종교전쟁들이 인간의 행복과 문명을 파괴할지도 모르는 위협으로 되었을 때, 1680년경에 시작하여 18세기를 휩쓴 합리주의의 물결이 종교의 비정치화를 가져왔다. 이 과정에서 종교는 그 진정한 존엄성을 잃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위대한 정신적 힘의 하나로 남아 인간의 영혼을 위로해주고 드높여주었다. 그러나 종교는 여러 세기 동안 종교의 '자연스러운' 일부였던 강제적 측면을 잃었다. 국가 즉 정치적 권위와의 연결이 단절되었고 종교는 개인 양심의 은밀하고 자발적인 세계로 들어앉았다. 종교의 탈정치화 과정은 속도가 느렸다. 로저 윌리엄즈가 1644년에 "양심의 문제로 인한 박해의 피비린내나는 교리-진리와 평화가 만나서 벌인 토론"을 발간한 지 2세기가 지난 뒤에야, 그가 주장하던 대의가 널리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그와 비슷한 민족의 탈정치화도 가능한 일이다. 민족 역시 정치적 조직과의 연대를 잃고, 친밀하고도 감동적인 감정으로 남아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러한 날이 도래한다면 그때에는, 여기서 고찰하고 있는 의미에서의 민족주의의 시대는 사라진 뒤일 것이다.-45쪽

E.H.Carr "Nationalism and After" (1945) 각주인용

19세기의 크로아티아 지방의 지주는 자기의 馬를 크로아티아 나라의 일원으로 생각할지언정 자기 영지의 소작농에 대해 그렇게 여기지는 않았다고 말해지고 있다. 19세기 중엽 및 그 이후에 있어서조차도 폴란드의 신사계급과 폴란드어를 사용하는 하층 농민들은 상호간 엄청난 거리를 두고 격리되어 있었으며 그랬기 때문에 하층농민들은 대개가 자신들이 폴란드 민족의 일부분이라고는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49쪽

민간인들은 사실상으로 전쟁의 어느 한쪽의 당사자도 아니었다. 18세기에는 수많은 전쟁이 있었다. 그러나 불어를 공용어로 사용하고 있던, 유럽 주요 각국의 교양있는 계급들 상호간에는 우호적인 상호교제가 자유롭게 이루어지고 있었으며, 이러한 측면에서 본다면 이 시기는 근대 역사에 있어서 가장 '국제주의적'인 시대였다고 하겠다. 주권자들은 서로 전쟁을 벌이고 있는 와중에서도 그 민간인들은 이곳저곳을 통과해서 다닐 수 있었고 또 상호간에 자유롭게 상거래를 하고 사업을 할 수 있었다. 이같은 규범과 관습을 파생시킨 국제관계에 관한 그 당시의 관념이 오늘날 통용되고 있는 개념과 전적으로 그 성질을 달리하는 것이었음은 자명한 일이다.-51쪽

Ernest Gellner "Nationalism" (1964)

통치자가 같은 '민족'이어야 한다는 요구는 자연스러운 것이라거나 그에 거역할 때 즉각 불만과 반발을 낳는 그런 것이 아니다. (중략) 인생이란 어렵고 진지한 과업이다. 굶주림과 불안정으로부터의 보호는 쉽사리 성취되지 않는다. 그 성취를 위해서는 효과적인 통치가 중요한 요인이다. 통치자들의 모국어가 무엇인가라는 질문보다 더 어리석고 더 경박한 고려사항이 있을 수 있을까? 거의 없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런 이해하기 힘든 경박함에 돌릴 시간도 취향도 거의 없었다. 그들이 과거에 실제로 제기했던 질문은 케두리가 그의 저서 마지막에서 천거하고 있는 질문과 비슷한 것이었다. 즉 "새로운 통치자들이 덜 부패하고 탐욕스러운가, 또는 좀더 공정하고 자비로운가?"라는 물음이다.
그러나 근대 세계에 와서는 무언가 큰 변화가 일어났다. 18세기에서 19세기로 넘어올 무렵의 독일 사상가들의 저술 따위보다 훨씬 엄청난 무엇이 일어난 결과, 부패나 자비에 관한 물음은 비교적 경박하게 느껴지고 한때 경박한 것이었던 통치자의 언어나 문화에 관한 질문이 가장 중요한 것으로 느껴지게 되었다.-135쪽

(전통 사회의 친밀한 구조들의) 이러한 잠식작용은 산업사회나 심지어 그 방향으로 변해가고 있는 사회의 규모, 윧홍성 및 일반적 생태와 조직의 불가피한 결과인 것이다. 인간이 사회구조의 한 구석에 틀어박혀 있음으로써 그에 따르는 관계가 그에게 정체성을 부여해주는 그러한 경우가 아닐 때, 그는 그의 행동과 표현의 양식 전부에 걸쳐 자신의 정체성을 갖고 다니지 않으면 안된다. 다시 말해서 그의 '문화'가 곧 그의 정체로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을 '문화'에 의해 분류하는 것은 물론 '민족'으로 분류하는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에는 인간이 된다는 것을 곧 어떤 민족적 소속을 갖는다는 것과 동일시하는 일이 자연스러워 보이는 것이다.-140쪽

민족주의란 민족들이 깨어나 자기의식을 갖게 되는 과정이 아니다. 그것은 민족이 없는 곳에서 민족을 발명한다. 다만 발명을 하더라도 애초부터 무언가 남들과 다른 특징이 있어야 써먹을 수 있는데, 물론 이러한 특징은 앞서도 말했듯이 순전히 부정적인 성격일 수도 있다. (다시 말해서, 기득권에의 참여 자격을 박탈당하는 특징일 따름이며, 장차 새로운 '민족'을 형성하게 될 그들 실격자들 간에 그 이상의 아무런 적극적 유사성이 없을 수도 있다.)-153쪽

일반적으로 효과적인 민족운동을 위해서는 인텔리겐차와 프롤레타리아트가 모두 필요하다. 민족적 독립이 달성된 이후에는 그들의 운명이 갈라진다. 지식인들에게는 독립이 즉각적이고 거대한 이익을 의미한다. 직업이, 그것도 굉장히 좋은 직업들이 생기는 것이다. '저개발' 인텔리겐차의 수적 열세가 바로 그 최대의 잇점이 된다. 외국의 인재에게 실질적으로 국경이 봉쇄되는 민족적 단위를 창조함으로써 그들은 자신을 위해 더없이 훌륭한 독점물을 만들어낸다. 반대로 프롤레타리아들에게는 독립이 단기적으로 환멸을 가져오게 마련이다. 생활의 어려움이 제거되지 않을뿐더러, 급격한 개발노력 때문에, 그리고 자기 민족의 정부는 때때로 외국 정부보다 더 무자비해도 괜찮다는 사실 때문에 심지어 더욱 살기 힘들어질 확률이 크다.-154쪽

Anthony D Smith "Theories of Nationalism" (1971)

농민층은 외국인에 대한 일종의 유아론적(唯我論的) 증오심을 견지하는데, 극동의 몇몇 나라들에서 그랬듯이 흔히 이러한 증오심은 메시아적 희망에 의해 민족주의 목표에 대한 지지로 승화되기도 한다.-187쪽

많은 민족주의자들이 어문학 연구에 골몰해온 것은 사실이다. 또한 문예부흥 운동 및 언어의 근대화 운동과 일부 민족주의 운동들 사이에 뚜렷한 상호연관이 있기도 하다. 그러나 여기서 주목할 점은 다름 아니라 이런 언어적 활동이 이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민족감정의 신장을 반영한다는 사실이 아니겠는가. 언어의 개혁자들은 그들의 지적 작업을 통해 자신의 민족주의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모국어를 찬미하고 그것이 유이랗ㄴ 민중의 언어가 되도록 떠받드는 것은 언어의 찬미자들이 이미 민족주의적 성향을 띠게 된 이후의 일이요. 그들이 그러한 자기발견을 했기 때문인 것이다. 언어연구는 역사연구와 마찬가지로 흔히 부지중에 그들의 기존하는 민족주의적 확신을 -남에게뿐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도- 정당화하는 수단이 된다. 발칸반도의 나라들과 오토만제국의 사례가 입증하듯이 언어개혁은 그들의 사회를 혁신하고 그것을 -이상화된 과거의 위대한 시기처럼- 자족적이고 문화적으로 독립되게 만들려는 욕망에 가득찬 사람들이 수행하는 것이다. -218-219쪽

Tom Nairn "Break-up of Britain: Crisis and Neo-nationalism" (1977)

어떠한 종류의 민족주의이건 그것이 실제로 이들 내부적 작용 그 자체의 산물인 것은 아니다.(중략) 진정한 기원은 딴 곳에 있다. 그것은 겨레에 있거나 어떤 식의 온전함 또는 정체성을 희구하는 개인의 억압된 정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세계경제의 작동에 있다. 그러나 경제의 발전과정 그 자체에 -단순히 산업화와 도시화의 불가피한 부수물로서-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그 과정의 좀더 특수한 측면들과 연관된 것이다. 이러한 특징들을 분류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이들이 18세기 이래 역사의 '불균등한 발전(uneven development)을 대표한다고 말하는 길이다. 이 불균등성은 하나의 물질적 사실이다. 아니, 이것이야말로 근대사에서 가장 엄연하게 물질적 사실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이렇게 말함으로써 우리는 만족스럽고 거의 역설적인 결론에 도달할 수 있게 된다. 가장 악명높게 주관적이고 관념적인 역사적 현상이 사실은 최근 두 세기 역사의 가장 무자비하고 절망적으로 물질적인 측면의 부산물인 것이다.-228-229쪽

민족주의의 입장은 반드시 민주적인 것으ㅓㄴ 아니나 어김없이 민중주의적이기는 하다. 민중은 그것이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자산이다. 정말로 가난한 '저개발' 지역의 원형적 상황에서는 민족주의야말로 민족주의자들에게 소용이 닿는 유일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비슷한 이유로 해서 민족주의는 극히 웅변적인 형식을 통해 -이제 싸움에 나서도록 부름을 받고 있는 하층민들에게도 충분히 수용 가능한 정서적 문화를 통해- 작용한다. 계몽사상의 합리주의와는 거리가 먼 낭만주의적 문화가 언제나 민족주의의 전파와 나란히 진행된 것은 그 때문이다. 민족주의의 새로운 중산계급 인텔리겐차는 대중을 역사 속으로 초청해야만 했고 초청장은 그들이 알아듣는 언어로 씌어져야만 했던 것이다.-234쪽

민족주의에는 두 종류가 있다는 이야기이다. 그 중 주가 되고 본질적으로 건전한 종류는 우리가 모잠비크, 인도지나 등 후진국에서 발견하고 박수를 보내느 것이며, 파생적이고 타락한 종류는 예컨대 미국의 노동자들, 프랑스의 골디즘, 칠레의 군사정권 등에서 찾아보며 규탄한다는 것이다. (중략) 그러한 구별들은 하나는 건강하고 하나는 병벅인 두 종류의 민족주의가 존재함을 뜻하지 않는다. 중요한 점은, 가장 초보적인 비교분석을 통해서도 볼 수 있듯이 모든 민족주의는 동시에 건강하면서 병적인 것이다. 진보와 퇴보는 둘다 처음부터 그 유전인자 속에 들어 있다. 이는 민족주의에 관한 구조적 사실이다. 그리고 이것은 예외가 없는 사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민족주의가 그 본성에 있어 양면적이라고 하는 말은 민족주의에 관한 수사학적 발언이 아닌 엄밀한 발언인 것이다.-242-243쪽

민족주의라는 거대한 가족을 검정 고양이와 흰 고양이들, 그리고 몇몇 잡종들로 분류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전가족이 예외없이 얼룩이들인 것이다. 온갖 형태의 '비합리성'(편견, 감상주의, 집단적 자기중심주의, 침략성 등등)이 그들 모두를 더럽히고 있다.-244쪽

Masao Maruyama(丸山眞男) "Thought and behavior of modern Japanese politics" (1951)

어둠침침한 사회의 저변에 깔려 살아야 했던 대중서민 -"전인민의 머리속에 국가의 사상을 불언허는"일을 평생의 과제로 삼겠다고 후꾸자와 유기찌가 결심하도록 만들 정도로 '국가관념'과는 무관했던 서민대중- 은 바로 이 '의무'화된 국체교육에 의해서 국가적 충성의 정신을 최소한도록 필요한 산업, 군사기술지식과 결합한, 즉 헐스(Hulse)가 지적한 바 '마술적 실천과 과학적 실천'을 아울러 갖춘 제국신민으로까지 성장했다. 그리고 이같이 해서 능률적으로 창출된 국가의식은 잇따른 대외적 전쟁 승리와 제국주의적 영토팽창으로 날이 갈수록 강화되었다. 자아의 감정적 투사(投射)로서의 일본제국의 팽창이 그대로 자아의 확대로 착각됨으로써 열광적으로 지지를 받았다. 그것과 병행해서 시민적 자유의 협소함과 경제생활의 궁핍함에 연유한 서민대중의 실의(失意)는 수단을 가리지 않는 국가의 대외적 발전 속에서 심리적 보상을 찾았다. - (아래에 계속)-284-285쪽

(위에서 계속) 지배층은 끊임없이 대외적 위기감을 부채질함으로써 -때마침 19세기 초부터의 제국주의 시대는 지배자들의 그런 책동에 아주 안성마춤의 배경이 되어 주었다.인류역사상 드물게 보이는 교활한 국가모략에 의해서 이 구ㄱ민감정의 동원에 성공하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지배자들은 사회적 긴장이나 분열의 낌새만 보여도 그것을 사전에 봉쇄해버렸다. 외국인의 일본연구서가 하나같이 그 첫페이지에 대서특필하기에 이른 이 '일본국민의 정신적 단결'이라는 것은 이같이 해서 만들어진 것이다.-284-285쪽

(사회 밑바닥에 환류한 구(舊)내셔널리즘 감정이) 정치적으로 동원되는 날에는 그것은 그 구조적 원리로 말미암아서 물길을 따라 흐르는 물처럼 과거의 그 반동적인 방향을 그대로 따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최근 히노마루를 국기로 게양하는 문제, 기미가요가 국가로 부활되는 것, 나아가서는 신사참배 따위와 같은 경향, 그중에서도 국민교육에 낡은 상징이 다시 고개를 치켜드는 문제들이 논란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중략) 그것을 경찰예비대의 설치나 해상보안대의 증가라든가, 일본재무장의 문제 따위의 문맥에서 생각해 보면 거기에 있는 정치적 움직임의 싹을 인정한다고 해서 기우라고 웃어넘길 수만도 없다.-291쪽

Majid Khsdduri "Political Trends in the Arab World" (1970)

제1차 세계대전이 초래한 새로운 사태는 아랍 민족주의의 진로에 큰 영향을 주었고 아랍인들의 목표를 재조정하게 만들었다. 오토만제국이 빠리 제안을 실행하지 않았을 때 몇몇 아랍인들만이 혁명적 견해를 품었을지 모르나 거의 대부분은 차이점이 해소되리라는 희망을 계속 갖고 있었다. 전쟁이 터지자 그들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부당한 처우의 개선을 미룰 용의마저 있었다. 그러나 영국이 터키에 반대하여 아랍인들의 요구를 지지함으로써 혁명적 지도자들이 각광을 받게 되었고 이들은 아랍 민족주의에 그들의 발자취를 남기면서 이를 점진적이고 평화적인 운동으로부터 혁명적이고 분리주의적인 운동으로 변형시켰다. (중략)
아랍 지역 특히 비옥한 초생달 지역이 오토만 주권으로부터 분리되어 외국의 보호 아래 놓이게 되었다. 아랍 민족주의는 그때부터 부정적인 성격을 띠기 시작했다. 외세의 영향으로 믿었던 아랍민족의 통일된 독립의 여망이 꺾이고 그들이 지배하기 쉽게 허약하고 조그만 나라를 여러 개 만들었기 때문이다. -306-308쪽

Hans Kohn "The Idea of Nationalism" (1944)

민족주의는 국민주권 사상의 발전, 즉 통치자와 피치자의 지위 및 계급과 신분제도의 철저한 수정이 없이는 상상도 할 수 없다. 우주와 사회의 양상은 그로티우스와 로크가 이해했던 것과 같은 새로운 자연과학과 자연법칙의 도움으로 세속화될 필요가 있었다. 전통적인 경제활동은 왕실이나 궁정의 문명으로부터 민중의 생활, 언어 및 예술로 눈을 돌리게 된 제3계급의 발생으로 붕괴되어야만 했다. 이 새로운 계급은 귀족이나 성직자보다 전통의 구속을 덜 받았다. 이계급은 새로운 것을 열망하는 새로운 세력을 대표했고 언제라도 과거와는 결별할 자세가 되어 있었으며 실생활에서보다도 그들의 견해에서 더욱 전통이란 것을 우습게 여겼다. 이 게급은 한 새로운 계급과 그 이해 관계뿐만 아니라 전체 민중을 대표하노라고 주장하면서 나타났다. 18세기에 제3계급이 위세를 떨치게 되었던 나라들, 예컨대 영국 프랑스 미국에서는 민족주의가 주로 정치적 경제적 변동으로 -그렇다고 거기에 결코 국한되는 일은 없이- 나타났다. (아래에 계속)-17-18쪽

(위에서 계속) 반면 제3계급이 19세기 초에도 여전히 취약한 초기 단계에 있었던 독일과 이태리 및 슬라브 제민족 사이에서는 주로 문화적인 분야에서 민족주의가 표현되었다. 이들 민족의 민족주의의 주요 관심사가 되었던 것은 애초에는 민족국가(nation-state)보다는 민족정신(Volksgeist)과 문학 민속 모국어 및 역사 등을 통한 그 민족정신의 표현이었다. 19세기가 진행되면서 제3계급의 세력이 성장하고 다수 민중이 정치적 문화적으로 각성함으로써 이 문화적 민족주의는 얼마 안가 민족국가의 형성이라는 방향으로 그 소망을 돌리게 되었다.
(아래에 계속)-17-18쪽

(위에서 계속)
민족주의의 성장은 일반 민중을 공통의 정치적 형식으로 통합하는 과정이다. 따라서 민족주의는 현실로서든 또는 하나의 이상으로서든 경계가 뚜렷하고 규모가 큰 영토를 가진 중앙집권적 정부 형태의 존재를 전제로 한다. 그러한 형태는 근대 민족주의의 선구자였던 절대군주들에 의해 창조되었다. 프랑스혁명은 왕들의 중앙집권적 경향을 계승하였는데, 그러나 그와 동시에 그 중앙조직을 새로운 정신으로 채웠고 그때까지는 알려지지 않았던 응집된 권력을 중앙 조직에 부여했다. 민족주의는 근대국가가 출현하기 이전인 16세기에서 18세기 사이엔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민족주의는 그러한 근대 국가의 형태를 받아들이기는 했으나, 새로운 생활감정과 새로운 종교적 정열로 그 형태에 활력을 불어넣어 변모시켰다.-17-18쪽

민족의 형성에 가장 중요한 외적 요소는 공통의 영토, 아니 그보다도 국가(state)이다. 정치적 국경선은 민족을 형성시키는 경향이 있다.-33쪽

비록 이와 같은 객관적 요인 가운데는 민족의 형성에 대단히 중요한 것도 있긴 하지만, 가장 필수적인 요소는 생생하고 적극적인 공동의지이다. 민족은 민족을 형성하려는 결정에 의해 형성된다. 프랑스 민족은 1789년의 의지의 열광적인 표명에 의해 탄생되었다. 프랑스라는 나라, 프랑스왕국의 주민은, 민족의 성립에 필요한 다른 객관적인 여건들이 그러했듯이, 1789년 이전에도 존재했다. 그러나 이 새롭게 각성된 자각과 의지만이 그러한 요소들을 적극적이고 효과적으로 만들었고 거대한 구심력의 원천으로 융합시켰으며 새로운 중요성과 의미들을 부여했다.-33쪽

"민족은 어떤 정치적 실체에 상응하는" 하나의 정신상태이다. 아니면, 적어도 상응하고자 노력하는 정신상태인 것이다. 이 정의는 민족주의와 근대적인 민족의 발생을 반영한다. 근대의 민족은 어떤 정신상태가 일정한 정치적 형태와 융합됨으로써 탄생한 것이다. 마음의 상태, 곧 민족주의의 이념이 그 형태에다 새로운 내용과 의미를 불어넣었고, 형태는 그 이념의 표현과 열망을 조직적으로 나타낼 수 있는 도구를 이념에게 제공했다.-40쪽

주권에는 이중의 중요성이 있다. 한 측면은 국가와 그 시민과의 관계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국가 간의 관계에 관한 것이다. 민족주의라는 감정도 이와 유사하게 이중의 얼굴을 하고 있다. 국내적으로 그것은 민족 내부의 모든 동료 성원과의 생생한 공감으로 이어진다. 국제적으로는 민족의 범위 밖에 있는 동료 인간들에 대한 무관심이나 불신, 증오로 표현된다. (중략) 인류의 한 단편에 지나지 않는 민족은 자기 자신을 전부로 세우려는 경향이 있다. -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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